사물들 마카롱 에디션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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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이란 존재로 발아하고 열매 맺는다. 무엇을 소유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청춘의 도시적 감수성이다. 작가는 소설 내내 여러 사물과 그것에 연연하고 좌우되는 인간의 모습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로 인간은 물건을 만들고 소유하는 것으로 존재를 알리게끔 되었다. 


그는 짧은 소설 안에 인물, 사건, 배경을 예민한 통찰력으로 꼼꼼히 분석해놓고 있다. 주인공들의 생각과 행동, 삶의 방식들 한 줄, 한 줄이 역사적 기록과 같다. 독자는 이 소설을 통해 1960년대 프랑스 젊은이들의 욕망과 현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너무나 꽉 짜여 있어 숨 쉬기 힘들다는 점이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작가의 설명으로 '나'라는 독자는 읽으면서 조금 지치기도 했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큼 빈틈이 없는 소설이지만 이 소설에는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인물, 사건, 배경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앞 문단에서 버젓이 세 가지 모두 있다고 해놓고 무슨 이야기냐고 의문을 제기 할 것이다. 인물, 사건, 배경 이 세 가지는 반은 있고 반은 없다. 이 글의 주된 서술 방법이 '설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내 주장에 쉽게 수긍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선 인물에 실체가 없다. 물론 주인공 실비와 제롬이 있다. 이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하며, 취향이 어떤지, 일상은 어떻게 굴러가는지 까지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 시대 모든 젊은이들의 모습과 같다. 실비를 오델리로 바꾸어도, 제롬을 장으로 바꾸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눈치 챘는지 모르겠지만, 실비와 제롬의 생김새도 키도 일상생활을 하는 습관도 작가는 말해주지 않았다. 직업에 대한 고민은 모든 젊은이가 하지만 왼손잡이이며 일 외에 글을 쓸 때는 꼭 만년필로 쓴다는 등의 한 인물 특유의 구체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설명'만' 하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독자가 잠시 상상하려 하면 공간에 대한 그들의 심리에 대한 설명이 주르륵 나열된다. 그들은 이런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사회는 이러한 모습이었고, 그들은 앞으로 이렇게 할 예정이었다. 각 인물들이 했던 행위의 인과관계를 고민하거나 이들의 대화를 보며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은 하기 어렵다. 독자는 작가의 시점에서 혹은 제3자의 시점에서 힘든 그들과 시대상을 나란히 놓고 잃지 않을 수 없다. 


내게는 조르주 페렉이라는 작가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재미있지 않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설명이나 묘사가 가진 힘은 생각보다 크다. 사람에 각기 고유한 매력이 있듯이, 어떤 소설이든 제각기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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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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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생활에 지쳤다면 읽어보라. 노통브를 소설가로 만든 건 후부키일지 모른다. 현자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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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와 가나코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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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를 들이대도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다만, 이것은 이야기. 약자가 강자에게 들이미는 도전장으로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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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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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많아야만 한다

주인공은 많아야만 할까? 나는 책을 읽으며 서평의 첫 문장을 떠올리곤 하는데, 이 책의 경우 그 문장이 계속해서 바뀌었다. 일단 첫 문장을 떠올리지 못하면 글의 방향이 정해지지 않기 때문에 쓰기가 힘들다. 그래서 다 읽은 날은 7월 7일이었지만, 좀체 서평을 쓸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왜 첫 문장을 쓰기 어려웠을까. 그건 아마 줄거리의 중심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 몰라서였던 것 같다. 앞부분만 읽고 개 킬러 박동해에게만 초점을 맞춘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의 중심 내용은 ‘어린시절의 기억이 빚은 사이코패스의 만행’ 정도가 될 것이다. 중반부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인간과 동물’이라는 범주 안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읽은 사람들은 비로소 ‘오작동하는 정부와 사회의 모순’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카페의 카페모카처럼 소설 속 이야기에는 층이 있다. 층을 짓는데 가장 큰 역할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코 인물이다. 소설의 3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 중 사건과 배경은 변함없지만 인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화양이라는 한정된 배경과 빨간눈이라는 사건 속에서 각 인물의 행동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에는 ‘영화적 서사’라는 말이 끊임없이 따라다닌다. 이 작품 역시 그 말이 무색하지 않게 카메라 앵글이 돌아가는 재난영화 같은 느낌이다. 좀 다른 면이라면 재난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된 주인공이 관심을 받는다면, 『28』에서는 앞부분에 윤주나 재형이 아닌 동해의 활약이 더 눈에 띈다는 점 정도다. 요즘 원톱인 영화가 거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여러 주인공들이 나와 그들의 삶 속에서 겪는 재난의 여러 국면을 보여주는 것도 이러한 서사의 단면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만큼 소설 속에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가 풍성해진 것은 ‘영화적 서사’의 장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6장부터는 더 이상 인물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 삶에 있어 모두 주인공이지만, 무릇 이야기란 모래산 같아서 중심을 하나로 모으지 않으면 막대기가 한쪽으로 무너지게 마련이다. 다루는 인물이 줄어들면서 문제는 점점 핵심으로 접어든다. 그 과정인 박동해와 박남철의 마지막을 서둘러 끝내 좀 허무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작가는 마지막까지 모래산의 균형을 잘 맞추었기에 막대기는 넘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현상이 되어야 한다

정유정은 현상이다. 현상? 그래. 나는 정유정이 ‘현상’이었으면 좋겠다. 아니, 현상이 되야 한다.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은 ‘눈 가리고 아웅’ 하면 다 해결될 것 같다. 이것을 덮으려 저것을 터트리고, 지금 일어난 일을 덮으려 예전 것을 끄집어내고. 그 많은 목소리들 중에 제대로 된 상황인식과 공익을 위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두렵다. 언젠가 동물에게 했듯이 소설 속에서처럼 사람도 마구잡이로 죽이고 생매장 하는 옛날 같은 일이 벌어질까봐. 이미 겪은 일이지만 아직도 겪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실을 꼬집는 이런 책이, 이런 작가가 현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같은 의미로 세계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책이나 영화 등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런 문제가 생기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 이거 어딘가에서 봤던 일이다. 잘 지켜봐야겠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생긴다면 화양이건, 강원도건, 어느 곳이 폐쇄 당하더라도 우린 서로에 의해 살아남을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빅데이터의 두려움에 대해 조지오웰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그 장점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원인보다 ‘앞으로, 어떻게’가 중요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와 『28』은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문제의 원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 하루키의 책에서 등장인물 쓰쿠루와 구로는 시로를 죽인 범인을 애써 찾는 대신 자신이 범인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렇게 자책하고는 이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전염병 이야기라고 하면 당연히 나올 것이라 생각했던 숙주를 찾으려는 움직임이나, 백신을 만들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서 ‘왜 전염병일까?’라는 질문이 하나 더 추가된다. 암도 있고, 심장마비도 있고, 자살도 있는데 왜 하필 천재지변과 유사한 전염병일까?

사실 전염병은 소재로서도 좀 낡은 편에 속한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최초의 전염병 이야기는 1995년 영화인 ‘아웃브레이크’다. 숙주는 원숭이. 처음에는 신체접촉에 의해 병이 전염되지만, 나중에는 호흡기로도 전염되는 변종 바이러스가 등장해 경악했었다. 그 이후로 전염병을 소재로 한 여러 영화를 보았지만 이야기의 주된 흐름은 병의 ‘원인’을 찾아 ‘백신’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전염병에서 모두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전염병을 그저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병’으로 규정하고 이후에 병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병에 걸린 사람은 있고 병세의 진행상황은 나타나지만 숙주 얘기는 거의 건너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염병의 원인을 연구해야할 박남철 과장도 백신을 만들기는커녕 자신의 아들 때문에 고민하다 자살로 생을 마무리한다. 백신의 홀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결국, ‘전염병이 무엇인가, 살인자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 전염병은 이제 언제, 어디에서나 나올 수 있고, 힘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살인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어설프지만 이제 답을 내보자. 전염병은 언제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는 우리 내부의 문제와 같다. 산재한 문제들이 너무 많기에 그 원인을 밝히는 것은 이미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대신,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이냐가 중요하다. 문제를 바로 보고, 제대로 해결할 힘만 있다면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문제는 문제될 게 없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수도 없이 생겨나는 세상이다. ‘원인을 찾기보다 결과를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것이 우리에게 새롭게 주어진 과제다.’ 작가는 어쩌면 이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표지를 보자마자 눈을 확 끌었다. 은행나무의 소설들은 디자인으로 책 자체가 팔딱팔딱 살아 숨쉬는 물고기 같다는 인상을 준다. 띠지를 넣어도 넣지 않아도 디자인이 자연스럽다. 뒷표지 문구도 많은 것 같지만, 정리된 세 가지 이야기만 담았다. 내용으로 따지면 오히려 두 가지로 추려질 정도다. 내가 뒷표지에 많은 얘기를 넣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내 눈에는 참 좋아보였다. 책이 전체적으로 좀 무겁지만, 거의 500쪽에 달하는 장편이니 이쯤은 그냥 넘어가도 되지 싶다. 요즘 28을 읽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해주는 말이 있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지만, 가슴을 뚫어 주는 한 방이 있다."(사실 이렇게 정리해서 말해주진 못했다. 다음 번에 그렇게 말해 줘야지 생각은 한다 ㅋ) 결국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그런 시시껄렁한 얘기로 마치게 된다. 으아~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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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기 2015-07-26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Soae 2015-08-11 19:31   좋아요 0 | URL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 D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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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p 밑9-1

“우리 모두는 온갖 것들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 이윽고 에리가 입을 열었다. “하나의 일은 다른 여러 가지 일들과 연결되어 있어. 하나를 정리하려 하면 어쩔 수 없이 다른 것들이 따라와 그렇게 간단하게는 해방될 수 없을지도 몰라. 너든, 나든.”

“물론 간단히 해방될 수 없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얼렁뚱땅 내버려 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기억에 뚜껑을 덮어씌울 수는 있다. 그러나 역사를 숨길 수는 없다. 내 여자 친구가 한 말이야.”

책을 접하고, 처음 한 생각은 ‘제목이 길다’였다. 길어도 너무 길다. 원제인 『色彩を持たない多崎つくると、彼の巡礼の年』을 충실히 번역한 제목이다. 꼭 원제와 제목이 같은 필요가 있을까? 너무 길어서 임팩트도 없을뿐더러, 제목만 읽어도 반은 넘게 내용을 짐작할 수 있어 흥미가 떨어진다. ‘뭐, 다자키 쓰쿠루라는 사람이 순례를 떠나나보네’ 처음 제목만 들은 독자도 그 정도 생각은 할 수 있을 것이다. 『ノルウェイの森』가 처음에 『상실의 시대』란 제목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제목이 낫겠느냐고?(예시는 그저 내 생각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시길) ‘Color’는 어떨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태어난다. 살아가면서 그 색은 빛을 잃기도 하고 더하기도 한다. 그래도 색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모두 자신만이 지닌 고유의 색이 있다’ 이게 책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얘기라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면 ‘르 말 뒤 페이’ 소설 속에서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이라는 다소 길고 어려운 해석의 이 곡은 마치 관현악곡에서 동기가 반복되듯이 주된 소재로 나온다. 실제로 들어보니 무척 우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곡이었다. 시로의 의문에 싸인 죽음과 그녀와 또 여러 사람들이 겪고 있는 내면의 불안과 아픔을 이야기하기에 좋은 소재라고 생각한다. 현재 제목은 울림 없이 사실만을 나열해서, 마치 감흥 없는 시를 읽는 것 같다. 시인 자신은 도취되었지만, 읽는 이는 누구나 알고 있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슬프지만, 확실히 그의 제목에서 보이던 감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436p 밑4 ~ 437p 2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그것이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에리와 헤어질 때 했어야 할, 그러나 그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굉장히 오래 읽었던 것 같다. 하루키 책 중에 이렇게 오래 걸린 책이 있었던가?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워낙 독서 편식이 심해서 책을 많이 못 읽었다.(좋아하는 책은 몇 번씩. 싫으면 몇 장 읽고 던져버린다. 하하하 자랑이라고;;;) 하루키 책 중에 자기 복제라고 일컬어진 몇몇 소설들은 손도 안 댔을 정도. 하지만 일단 읽은 책들(상실의 시대, 어둠의 저편, 1Q84 등)은 대부분 하루나 이틀 만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빨리 읽기가 쉽지 않았다. 100쪽까지 갈 때가 제일 힘들었는데 곰곰이 생각해서 얻은 결론은, 책에 ‘설명이 많아서’이다. 설명이 많은 게 뭐 어떠냐고?

소설을 읽을 때, 설명이 많으면 집중도가 현격히 떨어진다. 대부분의 화자는 설명보다는 생각이나 행동을 한다. 설명은 실제 작가의 분신인 내포작가가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주인공 즉, 화자와 내포작가는 다른 존재다. 내포작가의 말이 커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직접적인 생각이나 행동보다는 관찰하거나 설명하는 문장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전지적작가 시점에서 대개 독자는 주인공의 심정이 되어 책을 읽는다. 설명이나 관찰의 성향을 띤 문장이 나올 경우 독자가 이번에는 내포작가가 되어 소설을 읽어갈까? 그런 식으로 재미있게 읽어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주인공의 심정으로 읽는 나는 ‘아니. 내 심정은 왜 네가 얘기해? 내가 주인공이 맞긴해?’하면서 툴툴거리게 된다. 이 책의 주인공은 다자키 쓰쿠루라기 보다 하루키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인생에 대한 경구와 쓰쿠루의 행동을 ‘설명’하는 작가(마지막장은 정말 거의가 설명이다). 노작가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작품.(너무 멀리 갔나?) 작가는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시로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가 소설에서 사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이 밀실살인을 푸는 미스테리물도 아니거니와 전체 내용에서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보다 ‘왜’ 죽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반부에 구로와 쓰쿠루가 서로 시로를 죽게 했다며 자책하는 부분에서 대패를 찾게끔 되었지만 고개는 끄덕여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시로의 죽음에 대한 마지막 정리는 너무 프로이트스럽지 않나 생각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성적인 억제가 불러온 긴장감이 적지 않은 의미를 띠기 시작했음에 분명하다’-428p 밑2-1

건강한 고등학생들의 그룹에서 서로를 성적인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지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아무래도 성장기이니 피도 더 팔팔하지 않을까) 하지만 앞의 내용에서 ‘시로’는 성적인 욕구가 거의 없었다고 ‘구로’와의 대화에서 보여주고 있다.(376p 2-10) 그런데 ‘성적인 억제가 가져온 긴장감’이라니, 결론이 지나치게 프로이트적이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성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융을 위시한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의 위대함은 머리카락이 검을 때나, 하얗게 변해버린 지금까지, 젊음의 아픔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점에 있다. 예순이 넘도록 젊은 감수성을 대표하는 작가라니. 어떤 의미에서는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근대문학은 정말 종언을 맞이한 것 같다. 시대의 아픔과 사회의 부조리는 찾아볼 수 없지만, 변해가는 세상 앞에선 젊은이들을 위한 얘기가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젊음의 계절 여름이다. 말 못 할 감상과 헛된 망상으로 빛을 잃는 청춘이 없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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