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직 글쓰고 책읽는 동안만 행복했다 - 원재훈 시인이 만난 우리시대 작가 21인의 행복론
원재훈 지음 / 예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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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배고픔, 상대적 외로움과 절대적 고독, 절망의 세월을 견디게 해주었던 문학,
문학으로 잉태되었던 그들이 작가로 태어나 글짓는 일로 산다. 작가라는 이름으로..잉태의 씨앗에 상처가 깃들어서일까. 그들은 늘 아파하고 웃는 중에도 눈물 자국이 선명하다. 그리고 내게도 슬픔은 전이된다. 글짓는 이들은 순수 영혼을 넘어 여리디 여리다. 건드리면 주저앉을듯 아린 사람들이다. 나에게 작가란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의 글은 고독으로 충만하다. 오직 글 쓰고 책 읽는 동안만 행복했기에 그들의 글은 내 손에 행복을 쥐어주었다. 그들이 써야했던 이유가 내게는 읽어야할 이유가 되었다.
 


빛은 어둠속에서 더 찬연하다. 빛이라는 한 이름 안에 감춰진 많은 색깔들처럼, 어둠속에서 빛나는 작가들은 저마다의 색깔을 간직하고 있다. 시인 정현종 선생은 석양을 닮은 노란빛깔이다.  파란만장한 빛깔을 모두 누리고 얻어낸 고혹의 빛깔이다. "젊어서는 명상을 할 시간이 없다. 젊음은 호기심, 욕망, 의욕이 팽팽하게 타오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노작가는, 명상보다 움직임을 강조하면서도 명상에 이르는 시간들을 자유롭게 탐닉하는법을 아는 사람이다. 번뇌가 있어야 예쁘다는 한 줄 글이, 회색의 무미건조한 내속에 노란빛을 던진다. 



"감상자는 어쩌면 예술가의 고통을 즐기는 잔혹한 사람들인지 모른다.’ 라고 말하는 당차고 배짱있는 작가 은희경. 걱정과 불안까지도 손에 쥔 펜으로 여보란듯 처리해주는 그녀에게도 작가적 근심과 고독은 약이 되는가보다. 잔혹한 감상자들을 위해 기꺼이 예술가의 고통을 스스로 즐길줄 아는 사람이라고 할까. 그런 그녀의 입에서 글쓰기가 무섭다는 말이 나올때 가슴 한켠이 정곡으로 찔렸다. 웅크린 모습의 그녀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는 작품에 그대로 녹아있게 마련이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를 통해 현실을 받아들이는, 변화하는 그녀의 근황이 드러나는것을 본다. 그녀의 책이 매력있다고 느끼는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르겠다.  


마흔부터의 삶은 다르다. 속으로부터 지나온것들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고, 뭐든지 해낼것 같던 자신감도 덜하다. 그래서인지 작가 김형경이 들려주는 각기 다른 마디의 말들은 하나의 의미로 다가왔다. 작가로서의 삶 이전에 사람으로, 여자로서 내게 동질적 절망을 견디게 한다. ’내 생각들을 믿을 때 나는 고통받고, 내 생각들에 의문을 제기할 때 나는 고통받지 않는다.’ 문득 그녀가 깨달았다는 이말에 나는 고통스럽다. 내 생각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무엇일까? 



나는 ’글짓는다’ 혹은 ’글쟁이’라는 말을 무척 아낀다. 함부로 굴리기 싫은 아까운 말들이다. 쓰는것보다 짓는것을 좋아하는 소설가 박상우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섬’이나 ’절’로 들어가지 않고도 새벽에 글을 짓고, 밤이면 책을 읽는 그것 또한 그를 좋아하는 다른 이유이다. [내 마음의 옥탑방]이 절이나 섬에서 된 작품이었다면, 독자로서 나에게,그 글은 공염불에 그쳤을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방식은 같아도 생각의 방식은 다른 작가 성석제, 자신의 상처를 삵혀 독자에게 위로를 건넬줄 아는 천상 작가 공지영, 여자 중에서 내 딸이 제일 좋다라고 말하며, 동안처럼 해맑은 마음을 건네줄 아는 사람 김연수, 글의 망령을 붙들고 죽어도 쓰겠다고 말하는 윤후명 작가,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서 그늘의 시인이고자 하는 정호승 시인..모두 내게 읽어야 할 이유를 준 사람들이다. 배고픔은 그들의 산실이었다. 염치없는 나는, 그들의 글로 허기를 채운다. 절대적 고독이 내게 오는것을 막을 이유와 방법은 여전히 모른다. 그들이 아직도 고독안에 자신을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백 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들,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는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詩 [기러기] 중에서 / 메리 올리버 



김연수의 장편소설 첫 페이지에 인용된 이 시가 아니었다면, 내가 흠모하는 작가들을 만났던 지난 수 주간의 흥분을 도무지 가라앉힐 수 없을뻔 했다. 원재훈 시인을 통한 그들과의 만남이 있는 이 책은 이후로도 오랜동안 나의 완충제이자 안식처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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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3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름지기 2011-01-14 02:02   좋아요 0 | URL
진짜 근사한 책이예요.
그런데 그보다 더 근사한 말...남기시네요. 양철나무꾼님,
그들의 고독도 나눈다...아~~ 멋져요.
 
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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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빵맛을 제대로 알고 표현한 작품, 이라고 단정짓는다. 그 빵은, 이를테면, 무능해 보이는 아버지와 나의 찬란했던 알바 일대기와 어려운 경제상황,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등을 시시콜콜하게 버무린 그렇고 그런 빵이 아니다. 아주 기발하고 독특한 문장이 도발적이면서도 당돌하다. 냉장고속에 밀어넣은 세계에서 빚어낸 <카스테라>의 맛은 내가 알고 있던,입안에서 살살녹는 카라멜색깔의 부드러운 맛이 아니었다. 쌀가루 설설 넣어 만든 시루떡같은, 배고픔을 연속시키는 맛이다.  

 

작가의 단편들은, 동물들로 현상을 흡입하고, 그들로 이해한다. 그리고 대변한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에서, 웬종일 너구리 오락에 빠져 살았던 손팀장의 너구리화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조직에 순응하며 밥벌이에 평생을 바쳤지만 밀고 올라오는 새로운 신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쇠락하는, 직장 말년의 우리다.    

 

"결국 모든 인간은 상습범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상습적이란 단어에서 연민을 느낀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읽지 않았다면 좀처럼 갖다 붙일 수 없는 생경함이다. 거대한 몸집으로 달려와 사람들을 토해내는 전철, 그리고 그 안의, 혹은 그 자체였던 아버지. 전철 안으로 밀어넣었던 나의 무수한 욕심들이 떠오른다. 더이상은 안돼. 아뇨 더 할 수 있어요. 이제 그만. 지쳐가는 인류의 고민이 엿보인다. 아버지도, 나도 인류다. 울컥하게 만든다.   

변비의 철학적 개념을 이해하는데는 상당한 고통이 따른다. 먹으면 응당 싸야하는 생물학적 기본 이념에도 어긋날 뿐더러 그 자체가 고통인데 여기서 뭘 더 고민해야하는가, 싶다. <야쿠르트 아줌마>는 인류의 오랜 고민을 과연 해결할 수 있는가. 아무도 모른다. 경험자는 말하지 않고 나는 경험하지 못했다. 순환되지 못하는 인류 본질의 문제를 떠올려본다. <왜 지구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 대한 해답을 야쿠르트 아줌마는 알고 있을 것같다.  

<아, 하세요 펠리컨>이라고 말할 때, 순순히 입을 벌리는 펠리컨을 만나게 된다면, 인류의 문제는 조금 더 빨리 해결될지도 모르겠다. 도무지 모르겠는거 투성이고, 물음만 가득하게 하는 책이다. 킬킬 웃어도 보고, 꺼이 나오는 울음을 참게도 만드는 이 책은 대략적으로 난감하다, 하겠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거북이가 된 느낌이랄까.    

 

좋은 글이란게 뭔지는 구체적으로 모르겠다. 고전이 주는 획일적 고단함, 명작이 주는, 또 획일적 익숙함, 소설에 담겨진 획일적 감동과 서사들에 느꼈던 좋은 글들, 오늘의 <카스테라>와는 분명 종류가 다른 좋음이었다는 걸 알게된다. 상투적이지 않고 상습적이지 않은 박민규 작가. 도대체 박민규란 작가, 뭘 먹고 사는 사람일까? 기성문단에 독설도 서슴치 않는 젊은 작가의 얼굴은 궁금하지 않다. 뭘 먹고 사는 사람일까?, 가 궁금하다. 냉장고에서 꺼낸 카스테라때문인가보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가 있냔말이지. 상습적인것과 유사한 익숙한 것에 반하는 이런 글이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혈관을 누비고 다니며, 피 온도를 1도나 높일 수 있는지 의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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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다. 어느 것 하나도 선명하게 남아있지는 않다. 문득씩 떠올려지는 것이 없는게 아니라, 정확히는 아버지와 나란했던 기억의 부재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그랬고, 왔냐. 그러셨다. 기억의 부재라고해서 아버지가 동거하지 않았음도 아니다. 가슴에 뜨거운 피가 박동칠 때마다 아버지란 이름이 뜬금없이 파득거린다. 그래서 뜨겁고, 적당히 따뜻하다. 아버지를 먹고 살았나보다. 숨을 훔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사진속에서 늘 빠져있던 아버지는 사진 밖에서 늘 나를, 우리 가족을 보고계셨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희망의 시작을 얘기하다가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켜켜히 깊어가는 것을 감출 수 없다. 살아계셨을 때 잘하지. 잘 하고 싶었다. 후회나 말지. 그러고 싶다. 천리밖에서도 뻗어있던 아버지의 그늘이 오늘 더욱 그립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에 가졌던 그리움이 눈발 속에서도 여전하다. 보고싶습니다. 그러냐. 네.. 

                                                   

      

한, 일 년여를 누워계시다 가셨다. 지금의 시간으로 환원하자면 무척 짧지만, 그때는 버겁게 지쳐가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특히 나같은 불효자가 감당하기엔 더욱 그랬다. 빌어먹을. 아버지가 싫어하는 욕지기가, 아버지를 기억할 때면 나온다. 나를 향해 나온다. 남겨질 모든 가족을 위해, 아버지를 대신한 아버지로 살았던 스뭇 다섯의 용준은 어땠을까. 사진관처럼 어찌 못할 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말도 안되는 바보라고. 너 만 하겠냐. 알고 있습니다. 다시 아버지의 누운 모습이라도, 바라느냐. 아뇨. 빌어먹을. 이것도 솔직이라고.  

 

                                         

   

 

 

 

 

  

 

<빈집>에서의 아버지는 노름으로 쫓기느라, <내 젊은 날의 숲>에서의 아버지는 뇌물 수수 혐의로 감옥에서 계시느라 딸들에게 존재감마저 흐릿하다. 흡사 그 네들의 영웅이 일그러져가고 있다. 노름이 아니었던들, 감옥이 아니었던들 마찬가지였을 아버지. 그러나 그런 아버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말하는 사람도 있겠고. 영웅이 지쳐간다. 애당초 영웅 흉내를 내느라 피곤하셨을 인생들. 영웅 행세하느라 고생하셨소. 아니 다행이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뜬금없다. 아..예. 딸을 위해 나무 밑둥에 돈 될만한 걸 감춰두셨던, 미안하다. 웃음 섞어 던지는 것 밖에 할 줄 모르셨던 그 네들의 아버지였더라도 영웅의 망토는 펄럭인다. 

                    

                                 

   

 5월 어느 사람, 엄니는 말했고 나머지 열 한 달, 아부지는 말이 없었다. 내게는 그랬다. 역시나 집을 들락거리는 아버지였지만 한없이 크기만 하다. 내 몸이 커져가면서 아버지의 어깨는 작아져만 갔지만, 지금의 기억 속 아버지는 여전히 크시다. 엄니 앞에서는 감히 드러낼 수도 없는, 소리 죽여 그리워한다. 기구 풍선을 타고 남산 타워를 날고 싶다. 바람 좋은 날, 아주 높이 날고 싶다. 아버지께 안부만 여쭈고 돌아오면 안되나요 하늘님. 그건 말 안 된다. 압니다 그러니까 부탁하는거잖아요. 그래도 안돼. 박하십니다. 하는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오셔야겠어요. 아시죠 제 꿈으로 들어오는 입구 비밀번호, 안 바꿨어요. 아 참 이사했어요. 천사님께 성능 좋은 네비 하나 부탁하세요. 일찌감치 눕습니다.... 제기랄. 잠이 안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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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입니까 사계절 1318 문고 62
창신강 지음, 전수정 옮김 / 사계절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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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열혈 수탉 분투기>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창신강은 특유의 풍자와 유머는 물론 탁월한 문학성을 인정받은 작가다. 그의 이번 작품 <나는 개입니까> 또한 인간세상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으면서 인간성 회복에 관한 진중한 물음을 던진다. 동물이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는, 특히 늘 사람들속에서 생활하며 우리네 삶을 곁눈질하는 개는 사람의 생각까지 읽고 있지는 않는지 의심이 되기도 하는데 이런 말도 안되는 도발적 상상을 창신강 작가는 ’큰또즈’라는 강아지를 통해 발현한다. 

하수구 맨홀 뚜껑 ’창구’ 는 주인공 강아지가 인간세상으로 입성하는 통로가 된다. 창구를 통하기 이전의 견생을 마감하며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게 하는 이 매개체는 끊임없이 또다른 세상을 찾는 인간의 상상적 통로를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통로를 통한 인간으로의 변신이 인간성까지 완성시키지는 못한다. 돼지갈비를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큰또즈는 겉모습의 변화와는 상관없는, 여전한 강아지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에게 따뜻한 정을 나눠 주던 사람들인데 한순간에 외톨이가 된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이었다
. -174


이로써 큰또즈는 <나는 개입니까>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갖게된다. 이 몹쓸 ’고독’이란 감정을 배움으로써 그는 진정한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인다. 몹쓸이란 표현을 궂이 가져다 붙인 이유는 인간세상에서, 고독의 대부분은 타인이 쳐놓은 울타리 밖을 떠돌때 느끼는 감정에 대한 평소 느낌을 큰또즈가 그대로 받고있기 때문이다. 사유의 공간을 위한 자발적 고독이 아닌 어쩔수 없이 몰린 외톨이의 느낌을 작가가 ’고독’이라고 표현한것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다.  큰또즈에게 벌써 고독을 선사한것은 돼지목에 진주목걸이였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느껴진것은 ’작문 쓰기는 도시를 한 바퀴 뛰는 것보다 훨씬 더 피곤한 일’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냈을 때이다. 이것이야말로 많은 인간들을 비롯해 작가 창신강 자신의 생생한 고민이 아닐까. 


인간세상에 대한 염증을 느끼며 큰또즈는 자신이 떠나온 창구, 그 아래의 생활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되돌아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는 더이상 돼지갈비에 허겁지겁하는 개가 아닌, 속까지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누구나 도망치고 싶을때가 있다. 포기하고 싶을때도 있다. 그러나 큰또즈처럼 개같은 인생일지라도 인간세상에 머물기를 붙드는 이유는 사랑, 희생이란 천만볼트짜리 에너지때문은 아닐까. 분홍지렁이, 류웨가 마지막으로 선물한 바로 그 희생 때문에 소년의 이 무모하고도 힘겨운 생존체험기를 계속하게 될것이다. 분신처럼 남아있는 류웨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소년의 마지막 모습이야말로 자아와 정체성을 찾으려는 인간 본연의 모습, 그대로다.  


이 책은, 어렵지 않은 스토리와 안정적 수위를 유지하면서도 
재미를 덜어내지 않는 작가의 탁월한 글솜씨 안으로  인간 성찰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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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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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쉴때마다 매운내가 폐로 스며들었다. 정동길을 돌아 나오자 따끔거리는 통증이 피부를 훑고 지나갔다. 런던의 스모그처럼 나의 도시엔 늘 최루가스가 자욱하게, 유령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이런 기억들과 때론 그리 맵지않은 기억들이 뒤엉켜 있던 젊은 시간들은 그냥 그대로 거기 두고 왔다.  



                                                 내.가.가.져.올.께.


신경숙, 그녀가 그것들을 내게로 가져왔을 때 풀러 볼 마음이 며칠이고 나지 않아 그냥 두었다. 그녀의 책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 눈을 따끔거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스멀스멀 묻어나는 듯 했기때문이다. 내 기억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간간히 맡아지는 젊은날의 초상이 선명하게 드러나는게, 어줍잖은 공감으로 다가왔다. 나와 그녀, 그리고 단이와 윤, 명서, 미라가 함께 공유했던 시간들이 되살아나며 꿈틀거린다. 


생각을 좀처럼 따라잡지 못했다. 한꺼번에 밀려드는 많은 생각들과 사상, 갇힌 너머로 넘쳐나는 자유를 걷잡을 수 없었다. 명서의 방황은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미라의 흉터있는 손을 놓지 못하고 있다.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과 양심에 대한 의무감으로 시위대 속을 떠도는 명서는 미라에 대한 의무감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연민, 그를 둘러싸고 있는 단어다. . 갈색노트에 채워진 윤을 향한 기다림은 미라를 잃어버린 그 아픔을 또 다시 겪고싶지 않은 때문이었을까. 머리를 몸으로 말고 있는것처럼 움츠리며 걷던 미라의 모습이 명서의 그것이기도 했다.


언니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을 놓아버린 미라도, 거미를 두려워하는만큼이나 사랑에 대한 거절도 두려워했던 단이도, 미라의 손을 놓치못한 채 다른 곳을 바라보는 명서도, 모두가 지독스럽게 아파하며 견디고 있다. 더이상의 고통은 누군가를 기억하며 덜어내고 있었다. 그것이 단이와 윤이었고, 미라에게서 명서가 그랬고, 남아있는 윤과 명서의 몫이었다.  



젊은날은 오월의 장미처럼 아름답기만 하지도 않다. 벚꽃잎처럼 흐드러지게 찬란하지만도 않다.  별빛처럼 고요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눈쌓인 달밤처럼 서럽지만도 않다. 다 받아들였다. 모두 들이 마셨다. 그리고 그것들을 품었던 젊음이기에 그들은 오늘에 서 있다. 젊은날을 할퀴고 간 상처들은 시간의 이쪽으로 오면서 점차 아물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붙들고 또 다시 새로운 사랑을, 희망을 찾아 길을 나선다.


시간 저쪽에 있던 그들의 이야기가 지금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무저항적이고도 자괴적, 자폐적 성향으로 똘똘 뭉친 주인공들에게서 비롯한다.  네 사람 모두가 한 사람인듯 평면적이다. 시간에 기댄채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도 않았고 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전화벨 소리가 책 밖으로 흘러나올때마다 마음이 무겁게 울리는 것은 우리가 나눠 가졌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공유감, 그로 인한 공감이며 연민이다. 그 뿐이었다. 저항하지 않는 그들때문에, 그들 모두를 향해, 이 소설을 향해 심한 저항감이 일었다. 발목이 붙들린것처럼 신경숙, 그녀의 뇌까림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이상, 내 생각은 나아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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