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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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소설은 영화만큼이나 난해한 지루함이 있다. 
   이 작품이 비교적 쉽게 읽힘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마찬가지다. 
어릴 적 유괴당해 팔려가고 이리저리 쫓기며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라일라이면서 이름없는 한 여자.



"나는 그 동안 너무 오래 갇혀 살아온데다가, 자유에 취해 있었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붙잡아두려 하면 달아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p.37)


그녀는 끊임없이 달아날 준비를 하고, 달아난다. 
그녀를 알게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방법으로 그녀를 가둬두려한다. 그녀를 동생처럼 아껴주는 후리야도 자신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보둠어 줄 사람으로 라일라를 필요로했다. 이런 구속으로부터 그녀는 한없이 자유롭고 싶어하지만 언제나 상황에, 사람들에 휘둘린다. 그러나 또 언제나 역류하는 그녀이기도 하다.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진 않아도 자신이 태어난 태초의 자유로움과 평안함으로의 회귀를 멈추지 않는 그녀는,
난해한 지루함속에서도 결코 이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마치 아프리카 초원에서 들려오는 주술사의 노래에 취한 것처럼. 


정형화된 규율에 맞춰 살아가는 방식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순응으로 보자면, 그녀는 정반대의 사람이다. 어떠한 규율로부터도 불복하며 자신만의 성향, 자신의 욕망, 의지를 따르는 사람이다. 매번 쓰러지고 다치고 쫓기지만 언제나 자신을 버리는 적이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강인한 삶의 애착이라기보다는 초연함에 가깝다. 사람의 눈빛을 읽을 줄 아는 것에서 나는 그녀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자신의 역류를 붙드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실낱같은 무언가를 찾으려는, 포기하지 않으려는 불확실성의 탐닉에 나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낀다.    
  

이방인에 대한, 그것도 피부색이 검은 아랍계 여인을 향한 지독하고 모진 편견은 호롯이 라일라의 몫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어떻게 인간에 대한 깊은 배신감에도 불구하고 지속적 관계와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지... 라일라에게 늘 불행만 따라다닌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 각별하고도 순수한 도움을 주려 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그녀에 대해 자발적 호의를 베풀었는데,  "내가 누구에게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신이 증인이 되어줄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을 통해, 나는 분명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받았던 냉대와 구타, 구속 또한 결코 그녀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목소리를 말이다. 


인간은 여행자이며 표류자이다. 한편으로는  어떤면에서 건, 어디에서든 한 군데 씩은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그렇지만 태초부터 무리가운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유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각자의 두려움따윈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쩌면 자신을 너무나 잘 감춰놓고 있기 때문은 아닐런지.  비늘이 떨어져 나길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보다 그 떨어진 비늘 자리에 드러난 속살을 더 두려워한다고 생각되는 때문에 그렇다. 우리의 속살을 감추고 다른 나를 드러내며 살려고 하지만, 라일라는 결코 한 번도 자신을 자신 이상으로 포장하거나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을 감추는 거짓 허영을 본능적으로 따를 때, 누군가는 불복하며 자신을 자신만으로 살았다는 것, 
모진 역경을 이겨낸 승리의 여신으로서의 라일라가 아니라 진정한 인간 내면 구축자로서의 그녀가,
난해한 지루함으로 표류하는 나를 구했다. 건조함이 흥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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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4-15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책으로 읽었더랬어요. 재작년에 중학교 독서회 토론도서였거든요.^^

모름지기 2011-04-29 00:25   좋아요 0 | URL
이렇게 어려운 작품도 중학교 독서 토론도서가 되는군요.
제게는 조금..난해하고 지루한 감이 있었거든요.^^
참 오랫만에 제가 들어왔나봅니다.
날이 참 좋은 요즘이네요. 바람은 불지만...
잘 지내시죠?

순오기 2011-04-29 01:25   좋아요 0 | URL
아~독서회는 학생들 모임이 아니고 학부모 모임이니까요.
광주는 초.중.고 학부모독서회를 학교마다 조직하고 활발히 활동하거든요.
2000년부터 시작됐으니 벌써 10살이 넘었어요.^^

모름지기 2011-04-29 01:34   좋아요 0 | URL
아아...어쩐지
중학생이 읽기엔 조금 거시기하다 싶었죠..ㅋㅋ
꽤 오래 독서회활동이 유지되는군요. 저두 가끔은
여럿이 모이는 독서토론회같은데 참여할까도 생각하곤하는데 곧바로 포기하죠.
발표시키고 숙제 내줄까봐...ㅋㅋㅋ
학교다닐때 선생님 눈, 유독 피하는 아이었거든요.하하하

2011-04-15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29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29 0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29 0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 - 말과 글을 단련하고 숫자, 언어, 미디어의 거짓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기술
노르망 바야르종 지음, 강주헌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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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나 지면을 통해 그날의 사건 사고를 비롯해서 다양한 정보들을 접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어쩌면 습관적인 일과처럼 되어버렸다. 다변화되었다고는 하나 시시각각으로 쏟아지는 정보나 일방성으로 인해 우리는 곧잘 판단을 유보하기에 이른다. 그 전달되는 정보란 것도 대단히 한정적이며 대부분은 현상을 보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도 많다. 지극히 감성에 호소하는 듯한 멘트들에 별다른 저항감없이 수긍하게 된다. 때로는 근거와 통계, 인용 자료들을 내비치지만 그것들에 대한 객관성을 입증할 만한 우리의 노력은 아쉽게도 미진하다. 아니,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려는 노력조차도 너무 쉽게 포기한다. 그러는 사이, 뉴스는 가십거리처럼 자극적인 것들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광고와의 구분조차 쉽지 않게 되었다. 

보도매체의 주관이 어디냐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편파적인 기삿거리와 그 폐해는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기껏해야 자신이 선호하는 경향의 매체를 이용해 보도를 접하는 것이, 현대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처럼 보여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계속해서 한정적이고도 대안없는 선택에 안주해야 하는가. 민주주의가 걸어 온 자취에서 보았듯,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수동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없다. 오히려 그런 것들(다양한 정보나 기사, 사상, 양식)이 허구성을 내세워 공격하더라도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 밖에 없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련 정보의 거짓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기술을 단련할 필요가 있으며 생각의 전환을 필요로한다.


한.미 FTA의 협정문에서 수많은 오류가 발견되었다는 보도를 연일 듣고 있다. 걱정을 넘어서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으면 충분히 감지되었을 오류들이 대부분이다. 그중 대부분은 ’단어’선택에서 비롯된 오류들이다. 품목의 이름이나 숫자등 글자로는 사소할 수 있지만 그 초래될 결과는 상당히 큰 것들이다. 이 사건(?)은 대단히 유감스럽긴 하지만 일반인들의 검증이 쉽지 않은 비근한 예의 단면이다. 그렇다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는 정보들에 대해서는 다를까? 결코 아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이와 유사하거나 이보다 더 지독한 거짓 정보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  


화려하고 유명한 모델을 내세운 광고 상품을 구입하고 후회해 본 적이 있다.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한다는 문구가 붙은 책을 아무 저항없이 읽었다가 뭔가 당한 기분이 든 적도 있다.  마치 그 식품을 먹으면 비타민이 전부 보충되는 것처럼, 늘씬한 몸매의 비결이 그 식품 하나에 농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 적도 있고, 어떤 화장품을 쓰면 피부가 좋아지다 못해 얼굴까지 바뀔것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언어도단이다. 불쾌함으로 끝날 일이 아닌데 그렇게 하고 만다. 그런가하면 환경 단체와 개발을 주장하는 단체, 노조와 사주의 전혀 상반된 주장에 대해서도 충분한 정보와 비판적 자세로 함께 고민하기를 꺼린다. 고민을 대신해주는 미디어들은, 오늘 환경보호 다큐를 방송했다가 내일은 발전을 통해 번영하는 한국의 미래를 보여준다. 오늘의 기사도 수긍하고 내일의 정보도 받아들인다. 비판없는 수용은 적정선에서 여전히 유보되고 겉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하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첫째로는 우리 뇌를 세척해야 하고, 둘째로는 모든 세뇌 체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 노엄 촘스키


촘스키처럼 생각하는법을 연마해야하므로 먼저는 그의 생각 관련 저술을 읽어야 수순이 맞겠지만, 우선은 그의 짤막한 생각을 필두로 이 책에 대한 일반적 해석을 이끌어내기로 한다.  저자는 크게 두 문제를 언급함으로써 이 책을 시작한다. 하나는 ’인식론적인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문제’로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를 피력하고 있다. 개괄이 어찌되었든 우리는 이 책에서, 정보에 이용되는 다양한 도구, 즉 숫자, 언어, 미디어를 직시하는 통찰력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특히 [언어] 챕터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을 접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모든 언어 술수의 대변이 되는 단어 ’족제비 말’의 뜻을 읽으며,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족제비 말들에 현혹되었는지를 알게되니 씁쓸하다. 여기서 그치면 안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인지라 난 곧바로 비판적 태도를 모색한다. 유야무야하고 애매모호한 표현들속에서 명확한 의도를 읽어내야 한다. 장황한 설명속에서 핵심을 간파해야 한다. 주어진 정보에 만족하지 말고 정보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객관적이고 정확한 자료를 얻고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서 가능한 것임은 말 할 나위가 없다.   

토론회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라면, 상대방의 의견은 틀리다면서 명확한 반박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우기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결론없이 끝나는 맥없고 객쩍어하는 토론자들을 들 수 있다.  답답하고 곤혹스럽기는 보거나 듣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98% 부족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이 책에서 말하는 총체적인 결과물이다. 즉 나의 정보 전달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정보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객관적 반증을 통해, 설득력과 이해력을 높이려는 노력이 여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토론자들의 답답한 우격다짐으로부터 혹은, 전반적으로 팽배해진 미디어의 거짓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싶다면 권리를 찾고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출처를 따져가며 비교하고 공부하는 것이 그것들의 구체적 방법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비판적 시각으로만 해결되어지는 건 곤란하다.  


"제시되는 모든 가정을 끈질기게 의심하면서 따져 보려는 욕구와  새로운 생각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욕구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찾아야 한다." (p.317) 


쉬운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 있다. 혹자는 쉬워도 길은 길이지 않느냐고 우기겠지만 암튼 그런 말이 있다. 우리가 만연해진 거짓 정보들을 따라잡으려면 한참을 가야하는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그래도 주저앉아 있는 것보다는 조금씩이라도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비단 나만 살겠다는 짧은 생각에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국민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내게 주어진 권리와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임은 물론, 극히 현실적으로는 상술적 거짓 현혹으로부터 안전해야 할 소비자의 권익을 침해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결코 불필요한 모색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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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윤동주 전집
윤동주 지음, 홍장학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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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존 유고 시집의 오류를 바로잡고 원전을 새로 확정하는 작업에 충실했으며, 
그래서 이미 출간된 다른 유고 시집의 그것과는 상당 부분 다르다. " (머리말 중에서)

내가 전에 읽었던 윤동주의 시들과 분명 크게 다르지 않은데 약간씩 미묘한 느낌의 변화가 감지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별 헤는 밤>에서의 마지막 연이 원전에서 제외되었다. 
이는 제작 일자 표시 다음에 적혀 있다는 이유와 연구, 해석적 분석으로 인해서이다.  
전문과 연결해서,  따로 떼어서  되뇌보니
전문과는 분명 다른 감성과 더불어시간적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 헤는 밤, 육필 초고 첨삭부분)

윤동주의 <서시>는 당연히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이고, 이 시의 제목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실제로 이 詩의 제목은 <무제>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모르고간에 이 시는 여전히 <서시>겠지만...



만돌이

만돌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전봇대 있는 데서
돌재기 다섯 개를 주웠습니다.

전봇대를 겨누고
돌 첫 개를 뿌렸습니다.
- 딱 -
...중략...

다섯 개에 세 개...
그만하면 되었다.
내일 시험.
다서 문제에, 세 문제만 하면-
손꼽아 구구를 하여봐도
허양 육십 점이다.
볼 거 있나 공 차러 가자.

그 이튿날 만돌이는
꼼쩍 못 하고 선생님한테
흰 종이를 바쳤을까요
그렇잖으면 정말
육십 점을 맞았을까요

-1937. 3월 (추정)


천진스런 재치가 재미있다. 
윤동주를 서정시인이라고 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그의 대다수 詩들이 그렇고 나는 그의 그런 서정성에 언제나 흠뻑 취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런 뜻밖의 詩를 만났다고해서 윤동주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아린 서정성이 조금은 맑고 투명할 수 있어서 더욱 좋다. 윤동주란 시인, 참 좋아한다고만 했지 그의 전집을 요즘처럼 찬찬히 음미한 적이 없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만나는 윤동주의 시들은 더욱 ’봄’스럽다. 가을엔 더욱 ’가을’스러웠던 그였다.  봄이기도, 가을이기도 한 그의 서정성은 계절을 끼고 돈다. 마음을 휘돌아 나간다. 품기엔 그의 시들이 너무나 자유를 원하기 때문에 나는 놓아준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별 헤는 밤, 중에서)


그를, 그의 詩를  조금은 헤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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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4-1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2003년도인가 초등 독서회 토론도서였어요~ 윤동주에 흠뻑 취했던 가을이었죠.^^

모름지기 2011-04-29 00:26   좋아요 0 | URL
전 순오기님 지난번에 이 책 구매도서목록에 있는거 보구
그냥 따라서 지른거예요. 물론 땡스누르고..^^
아~~ 너무 좋아요.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 집단을 벗어나, 참된 개인으로 비상하라
박성현 지음 / 들녘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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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에 대한 회의도 적지 않지만, 개인주의에 대한 느낌도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했지만 사회생활을 통해서 보여지는 개인주의적 개인들에 대해서는 반감 정도는 아닐지라도 함께 일하기 껄끄러운 존재들이란 생각을 종종 하곤했다. 공동체 생활에 적응하지 않으려는 이기적 행태로, 자신만을 내세우고 자신 위주로 행동하는 모습들이 그랬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강조하듯 "한국 사람들이 개인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이유"와도 이어지는 것같다.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새마을 운동을 실천하며 공동체적 삶을 몸에 익히고 살았던 때문이다.  남들 하는만큼 하면서 적당히, 눈치껏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은 법을 배우며 자란 우리 세대는 ’개인’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그리고는 ’개인’임을 강조하는 무엇이든, 공동체 분열을 가져오는 공공의 적이라고 여겼다.   

저자는, 주의主義를 담은 이념적 개인을 다시 쓰려는 게 아니다. 개인을, 민주주의나 전체주의의 구성원으로서 일부가 아니라 독립적 존재 가치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유럽, 서구의 전통 사회에서 개인은 늘 ’떼’속의 일부로 정의되어졌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고 있는 ’떼’는 순응하는 개인을 양성하는 정신적 독재자이다. 육체적이진 않지만 그보다 더 치명적인 폭력이 정신을 죽이고 결국엔 자아를 망각한 개인의 껍데기만 남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와 그가 개인주의의 초석으로 삼는 니체는, 개인주의를 다시 쓰고 개인의 정체성을 바로 잡으려는 의도를 가진 듯 하다.  



요즘 대두되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저자는, 일반적으로 공동체 의식이 함양된 민주시민이 가졌던 고무적인 시각과는 거리가 멀다. 공리주의를 제외하고라도 ’정의분배’에 관한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도덕적 관념에 비추인 개인의 양심은 ’머리와 상관없는 양심, 진실과 상관없는 양심’을 양산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나는 최근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하지만 이 저작물의 저자가 주장하기까지 개인의 양심이 도덕적 관념 아래 있다는 것에 아무런 저항감도 갖지 못했다. 그만큼 내가 가진 개인, 개인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이 강했던 때문이다. 

"진실은 지식의 쪼가리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저자의 말을 상기할 때, 어느 것도 완벽한 진실일 수는 없다. 민주주의를 변질시키는 게 ’떼의 힘’이 될지, 아니면 ’개인주의’의 그릇된 방종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저자의 글은 명료하면서도 직관적 해석으로 읽는동안 첫키스의 짜릿한 기억처럼 나를 전율케했다. 하지만 키스가 끝난 후의 객쩍음처럼 무언가 말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느낌이 남는다. 존재 가치로서의 ’개인’은 인정하는 반면, 공동체속에서 두드러지는 ’개인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묘한 갈등이 남는다. 당연한 인문적 결론이다.  

인문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것은 수학처럼 확실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만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인문은, 학문적 논지와 생활, 환경등을 망라해 모든 분야로 들어가는 문일 뿐,  어는 길 어느 방향으로 갈지의 선택은 각자에게 주어진다는 명제를 충실히 담당한 저작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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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
다니엘 벤사이드 외 지음, 김상운 외 옮김 / 난장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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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논쟁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이 저작물은 논쟁으로 일관한다. 탁상에서 빚어지는 공론보다 더 무의미하며 소모적이다. 민주주의의 현상태를 가늠하며, 회의적이며 비판적 시각으로 민주주의에 접근한다.  다니엘 벤 사이드는 <영원한 스캔들>에서 "나는 머리로는 민주주의 제도를 좋아하지만 본능적으로는 귀족주의자다. 다시 말해 나는 군중을 업신여기며 두려워한다. 나는 자유, 권리 준수를 진심으로 좋아하지만 민주주의는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일축했고, 아르튀르 랭보는 이런 맥락으로 민주주의를 개발도상국에 떠넘기려는 先민주주의를 꼬집는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무의미의 전형적인 사례가 됐다. 한 마디로 민주주의는 정치, 윤리, 법, 권리, 문명 모든 것을 뜻하지만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다."고 결론 짓는 장 뤽 낭시의 말은, 우리가 혹시 민주주의의 망령에 붙들려 사는건 아닌지 의심하게 만든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맛을 안다고, 민주주의에 흠뻑 취해나 봤어야 그 맛을 알지. 


이 책의 논쟁을 바탕해서 내 방식대로  재구성하자면,
순이는 이제 막 신혼살림을 차렸다. 지하 셋방이나마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이불 한 채, 그리고 약간의 살림살이를 장만했다. 혼자에서 둘이 되고, 뱃속의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그야말로 가족으로 새 인생을 꾸려가게 될 참이다. 그런데 미국에 계신 먼 친척께옵서 근사한 마호가니 옷장을 결혼 선물로 보내셨다. 단칸방에 떡하니 자리잡은 옷장은 겉모습의 근사함과는 달리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옷장은 점점 더 공간을 침범하며 단칸방을 비좁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냉큼 내다 버릴 수도 없다. 좀 더 넓은 집으로 가게되면 분명 그 값어치를 할 거라는 기대를 떨칠 수가 없다. 어느 날 옆집에서 영희가 놀러왔다. 방에 으리으리하게 버티고 있는 옷장을 연신 신기하게 바라보며, 미국에 친척을 둔 순이를 마냥 부러워했다. 잘만하면 영희에게 이 애물단지를 떠넘길 수 있겠다고 순이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국가 건설의 도약을 꿈꾸기 시작한게 불과 몇 십년이다. 
아직 민주주의가 탄탄히 뿌리 내렸다고 단정짓기 어렵고, 민주주의의 지평을 논하기엔 시기 상조임을 절감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렸던 많은 우리 선배들의 영전에, 부끄럽게도 
아직은 민주주의가 정확히 무엇인지 왜 민주주의여야만 하는지를 대답할 수 없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답을 빌자면,
"독재란 민주주의의 철폐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인데
열어서는 안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걱정이 앞선다.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 맡겨진 판도라의 상자를.

내게는 너무 이르고 버거운 책이었다. 두통약을 준비하고 읽어야 할 책이다.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골칫거리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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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4-07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단락에서 저, 깔깔거리며 웃었잖아요~
전...두통에 아주 약해서, 두통약을 준비하고 읽느니 던져버리겠어요~^^

모름지기 2011-04-15 01:40   좋아요 0 | URL
그럴걸 그랬나봐요.
때아닌 오기가 발동해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