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다. 어느 것 하나도 선명하게 남아있지는 않다. 문득씩 떠올려지는 것이 없는게 아니라, 정확히는 아버지와 나란했던 기억의 부재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그랬고, 왔냐. 그러셨다. 기억의 부재라고해서 아버지가 동거하지 않았음도 아니다. 가슴에 뜨거운 피가 박동칠 때마다 아버지란 이름이 뜬금없이 파득거린다. 그래서 뜨겁고, 적당히 따뜻하다. 아버지를 먹고 살았나보다. 숨을 훔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사진속에서 늘 빠져있던 아버지는 사진 밖에서 늘 나를, 우리 가족을 보고계셨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희망의 시작을 얘기하다가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켜켜히 깊어가는 것을 감출 수 없다. 살아계셨을 때 잘하지. 잘 하고 싶었다. 후회나 말지. 그러고 싶다. 천리밖에서도 뻗어있던 아버지의 그늘이 오늘 더욱 그립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에 가졌던 그리움이 눈발 속에서도 여전하다. 보고싶습니다. 그러냐. 네..
한, 일 년여를 누워계시다 가셨다. 지금의 시간으로 환원하자면 무척 짧지만, 그때는 버겁게 지쳐가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특히 나같은 불효자가 감당하기엔 더욱 그랬다. 빌어먹을. 아버지가 싫어하는 욕지기가, 아버지를 기억할 때면 나온다. 나를 향해 나온다. 남겨질 모든 가족을 위해, 아버지를 대신한 아버지로 살았던 스뭇 다섯의 용준은 어땠을까. 사진관처럼 어찌 못할 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말도 안되는 바보라고. 너 만 하겠냐. 알고 있습니다. 다시 아버지의 누운 모습이라도, 바라느냐. 아뇨. 빌어먹을. 이것도 솔직이라고.
<빈집>에서의 아버지는 노름으로 쫓기느라, <내 젊은 날의 숲>에서의 아버지는 뇌물 수수 혐의로 감옥에서 계시느라 딸들에게 존재감마저 흐릿하다. 흡사 그 네들의 영웅이 일그러져가고 있다. 노름이 아니었던들, 감옥이 아니었던들 마찬가지였을 아버지. 그러나 그런 아버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말하는 사람도 있겠고. 영웅이 지쳐간다. 애당초 영웅 흉내를 내느라 피곤하셨을 인생들. 영웅 행세하느라 고생하셨소. 아니 다행이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뜬금없다. 아..예. 딸을 위해 나무 밑둥에 돈 될만한 걸 감춰두셨던, 미안하다. 웃음 섞어 던지는 것 밖에 할 줄 모르셨던 그 네들의 아버지였더라도 영웅의 망토는 펄럭인다.
5월 어느 사람, 엄니는 말했고 나머지 열 한 달, 아부지는 말이 없었다. 내게는 그랬다. 역시나 집을 들락거리는 아버지였지만 한없이 크기만 하다. 내 몸이 커져가면서 아버지의 어깨는 작아져만 갔지만, 지금의 기억 속 아버지는 여전히 크시다. 엄니 앞에서는 감히 드러낼 수도 없는, 소리 죽여 그리워한다. 기구 풍선을 타고 남산 타워를 날고 싶다. 바람 좋은 날, 아주 높이 날고 싶다. 아버지께 안부만 여쭈고 돌아오면 안되나요 하늘님. 그건 말 안 된다. 압니다 그러니까 부탁하는거잖아요. 그래도 안돼. 박하십니다. 하는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오셔야겠어요. 아시죠 제 꿈으로 들어오는 입구 비밀번호, 안 바꿨어요. 아 참 이사했어요. 천사님께 성능 좋은 네비 하나 부탁하세요. 일찌감치 눕습니다.... 제기랄. 잠이 안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