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역사 비평적으로 알아내는 예수의 모습


  "저자의 시각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가 그리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극히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특히 한국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예수가 정치와 무관하다고 본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예수가 유대의 혁명을 이끈 정치적 인물일 수 있다는 이 책의 주장이 하나의 훌륭한 자극제가 될 것이다."

_ 오강남(캐나다 리자이나대학 종교학 명예교수)



젤롯

저자
레자 아슬란 지음
출판사
와이즈베리 | 2014-03-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
가격비교글쓴이 평점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가지 고백을 하고 시작한다. 필자는 종교가 없다. 애당초 무(無)교였다. 어느 특정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가 무신론으로 돌아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무신론이다. 그렇기 젤롯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예수의 내용이 그의 말을 통해서 그간의 예수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 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상태여서 비교가 불가능하다. 어떤 시각이 다르고, 어떤 부분에서 이견이 생기는지 모른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예수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종교 서적관련 서가에 엄청나게 있다. 서적 뿐만이 아니라 영화나 소설 등의 문학, 예술, 학문의 영역 전반에 걸쳐 두루 자리매김하며 재해석되고 있다. 최근 영화계에 등장한 <노아>의 영화만 봐도 그렇다. 기독교인들이 보기에 <노아>는 기독교를 무시하는 해석이고, 비기독교인들이 보기에 <노아>는 기독교적인 영화라고 서로 주장한다. 이처럼 예수의 삶에 대한 해석은 뜨거운 논쟁과 반발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여기에 새로운 해석의 책이 하나 또 등장했다. 바로 레자 아슬란의 <젤롯>이 그것이다. 


 책은 신적인 존재로만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하느님의 나라 유대의 독립을 위해 싸운 혁명가 '나사렛 예수'를 다루고 있는 논픽션의 학문영역에 있는 작품이다. 

  저자의 예수에 대한 재해석은 물론 신선한 시각이다. 학문적 영역에서의 논리를 통해 분석을 내놓았고, 흥미를 이끌기에 충분한 문장력도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내에서도 이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다고 한다. 논란의 내용에 대해서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필자의 관심사도 아니며, 딱히 알고 싶지도 않다. 


  "소농과 하급 제사장, 비적, 최근 예루살렘에 들어온 피란민이 이쪽 진영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이 연합해 만들어낸 독특한 혁명적 분파가 바로 '젤롯당'이었다. 이들의 특징이라면 가난과 경건한 신앙과 반귀족 정서를 들 수 있다. 젤론 당원들은 혁명의 초심을 철저하게 지키고자 했다. 그것은 이 거룩한 땅을 깨끗이 하고, 이 땅에 하느님의 통치를 세우는 것이었다."

  젤롯은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 열정적인 신념을 뜻하는데 저자는 이런 의미를 되새기며 예수를 1,2,3부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즉 예수가 신의 아들이자 영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젤롯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유대인의 민중 운동을 이끈 정치가이자 혁명가라는 것이다. 절대자 신이었던 예수의 개념을 우리와 동등한 사람으로 낮추어 버린 것이다! 


  "자신들의 '열심'이라는 이상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서슴지 않고 극단적인 폭력의 힘을 빌리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로마인과 이방인뿐 아니라 로마에 빌붙어 아첨하는 동료 유대인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열심'을 의미하는 '젤롯'이라고 불렀다."

  또한 책은 더 나아가 예수가 설파했던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가르침이 어떻게 오늘날의 종교적인 가르침으로 변화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새로운 해석으로 다가왔지만 예수에 정치적인 색깔을 입혀 큰 논쟁과 파장을 가져온 젤롯, 예수의 삶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신념 속으로 들어가는 책이다. 

  

  책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것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지금이야 말로 비판적인 시각이 필요한 때이다. 무엇이 옳은 것이며, 무엇이 옳지 않은 점인지 차분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저자의 주장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비판 받지 않을 뿐더러, 현실세계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차분하게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저자가 보여주는 예수의 세계를 보자. 그것을 내 속에 받아들일지, 외부에 놔둘지는 독자의 몫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뽀짜툰 1 - 고양이 체온을 닮은 고양이 만화 뽀짜툰 1
채유리 지음 / 북폴리오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애완동물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다


 다원화 사회가 되면서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 등의 변화가 대표적이다. 과거엔 절대가치로 여겨졌던 것들이 베를린장벽 무너지듯 무너지고 있고, 이미 무너져 버린 것들도 많다. 그 중 하나가 애완동물이다. 

  오늘 이야기 할 것은 바로 이 애완동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과거 애완동물, 대표적으로 강아지의 경우 집안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대가족이 함께 사는 공간에 강아지까지 들어올 공간도 없었을 뿐더러, 강아지의 임무는 '집을 지키는 것'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강아지를 바라보는 인식은 크게 달라져 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핵가족도 모자라 홀로사는 집이 많이지는 사회적 상황에서 '집을 지키는' 강아지가 이제는 '마음을 지키는' 강아지로 역할이 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집을 지키는' 임무는 세콤이나 경비실 등의 보안업체들에게 이전되고, '집을 지키던' 강아지는 주인의 품을 지킨다. 주인이 외롭지 않도록. 덕분에 집안으로 들어와서 살게 된 행운까지 누리게 되었다.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떠오른다. 여기에 강아지와 쌍벽을 이루는 동물이 있다. 바로 고양이다. 애완동물의 쌍두마차라 불리는 강아지와 고양이. 고양이 역시 강아지와 마찬가지로 주인의 품을 지키는 동물이 되어버렸다. 

  일단 밝히고 시작하자면, 필자도 고양이를 몹시 좋아한다. 집사라 불리던 적도 있었고, 고양이 사진으로 SNS와 인터넷 활동을 하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고양이가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어보면, 좋은데 무슨 이유가 있겠냐며 반문할 정도다. 좋은데 이유가 필요한가. 



  그렇게 좋아하는 고양이를 다루는 웹툰이 등장했다. 그것도 고양이를 다룬 생활웹툰이다. 고양이를 기르며 일어난 에피소드를 만화로 그린 것인데 어찌나 반갑던지. 더군다나 고양이를 키워본 경험이 있는 필자로써는 더욱 반가웠다. 에피소드의 공감과 새로운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도 있었다. 

  4마리의 고양이와의 에피소드를 그린 만화 뽀짜툰. 고양이들의 이름이 뽀또, 짜구, 쪼꼬, 포비여서 뽀짜툰이 탄생했다고 한다. (원래대로라면 뽀짜쪼포 정도여야 겠지만, 왜 뽀짜툰인지는 웹툰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읽어보시길) 웹툰의 단행본이다 보니, 성격은 만화책과 같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글자로만 이루어진 텍스트가 아니라서 쉽게 볼 수 있고, 이미지화 되어 있어서 책장이 금방 금방 넘어간다는 것이다. 결국 단숨에 읽어버렸다. 흐뭇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결론을 말하자면 고양이를 기르며 에피소드를 소개한 단순한 생활웹툰일 것이라는 처음의 생각이 깨졌다. 그것도 무참하게. 저자의 애완동물을 생각하는 생각 때문이다. 애완동물을 기르는 가정이 늘어가는 것은 맞지만, 사실 그에 따른 사고도 많이 증가했다. 동물학대가 그것이다. 어쩌다 생긴지 모르겠지만, 인간 우월주의에 꽉 찬 인간들이 있다. 인간이 최고이고 동물은 하등이라는 생각. 결국 그들은 동물학대라는 일을 저지른다. 다시 말하자면, 애완동물을 기르지만 애완동물에 대한 책임이 없는 분들도 많다는 것이 아쉽다. 동물을 사랑해서 기르는 것 아닌가? 그래서 자신의 품을 기꺼이 내주는 것 아니었나?  동물학대 사건들을 생각하니 또 화가 난다. 부글부글.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 돌아오면, 작가는 애완동물을 기르는 주인의 전형적인 모범을 보여준다. 입양을 보낸 고양이 걱정을 하며, 애완동물을 하등의 계급으로 보지 않는 모습.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었다. 

  애완동물의 수요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하지만 애완동물을 기르기 전에 충분한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단순하게 키워보고 맘에 들면 좋고, 아니면 말지뭐, 이런 식은 안될 것 같다. 고양이 관련 서적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글자의 텍스트가 어렵다면 <뽀짜툰>을 적극 추천한다. 제~~발 애완동물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모의 자격 - 내가 제대로 키우고 있는 건가
최효찬.이미미 지음 / 와이즈베리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교육피로 사회' 대한민국에서 부모의 역할이란?


  대한민국은 '교육피로 사회'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학부모와 학생들은 너도나도 서로 비교하고 비교당하며 '만성 교육 피로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학교와 학부모, 학생이 모두 행복한 교육은 '서로 비교하지 않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쉽지 않습니다.

_ <부모의 자격> 책 머리 中

  '교육피로 사회'란 단어를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우리가 '교육피로 사회'에 살고 있고, 교육피로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점은 과거보다 오늘날이 교육피로가 더 심각하다는 점이다. 1990년 우리나라의 대학진학률은 33.2%에 불과했다.(한국교육개발원 자료) 그렇지만 오늘날 대학진학률은 어떠한가? 2008년 대학진학률이 83.8%라는 엄청난 수치를 찍었고, 사회적 반성의 움직임 때문인지 2010년엔 79.0%까지 소폭 하락했다. 그래도 79%라는 엄청난 수치를 아직도 기록중이다. 그렇다고 높은 대학진학률이 단점만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면 안된다. 장점도 충분히 많다.

  특이한 대한민국의 문화로까지 자리잡게 한 이 교육열은 어디서, 어떻게 오게 된 것일까?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흔히들 말한다. 21세기는 정보화시대라고. 천연자원이 턱없이 부족한 우리나라, 더군다가 저출산의 영향으로 인구의 증가도 적다. 또한 세계적으로 보면 한반도가 차지하는 땅의 비율도 적은데, 거기다 분단국가라서 그것마저 반절로 나뉘어 있다. 자원, 인구, 토지. 어느 것 하나 세계적 수준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나라 사람이 성공할 방법의 선택지는 몇가지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정보화시대에 걸맞는 인재를 배출하는 것. 즉 고학력을 통해 육체적인 노동을 하기 보다는 정신적 노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사람들은 명문대에 가려고 올인하는 것이고,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아이들을 길러내야 하는 부모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한국 교육의 본질은 어머니들의 압력"이라며 "한국 PISA 순위는 세계 최고지만 그 이면엔 아이들이 미래에 대해 꿈꿀 시간이 없다는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문제점 파악하기

  대기업이나 전문직에 종사하기 위해 1차적으로 해야할 것은 명문대 진학이다. 아, 물론 필수조건은 아니지만 명문대 진학이 확률이 높을 뿐이다. 명문대 진학을 위해서는 예전에는 대학수학능력평가, 이른바 '수능'에서 고득점만 받으면 가능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예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최근 대학입시의 경향을 봐서는 정시(즉, 수능 점수)보다는 수시(학교 내신)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고등학교에서의 성적 역시 중요해졌다는 이야기다. 고등학교에서 성적이 좋으려면 중학교부터 열심히 준비를 해야 한다. 중학교 이전 과정인 초등학교는 어떠하겠는가. 불보듯 뻔한 이야기다. 그래서 조기유학의 열풍을 타고 초등학교를 외국에서 보내고 오는 아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말보다 영어를 먼저 배우는 나라. 이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과정을 알았으니 결과도 궁금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열성적으로, 12년의 교육과정을 배운 아이들 모두가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을까? 당연히 대답은 'No'다. 우리나라에서 명문대쪽에 속하는 5개 대학의 신입생 정원은 2만명이 조금 안된다. 반면 수험생은 60만정도이다. 12년동안 공부에 올인 했어도 탈락자는 나온다. 모두가 행복할 수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나오는 문제는 무엇일까? 명문대 입학에 실패했을때 차선책이 없다는 것이다. 예술이나 체육에 특기가 있어서 진로를 바꿀 수 있으면 좋으련만 12년동안 국,영,수 위주의 공부를 하다보니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없고, 대학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체육시간마저 줄여버린 학교 교육과정 때문에 취미로 즐길 수 있는 스포츠가 없다. 결국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재수'를 선택하고 '삼수'를 선택한다. 

  학생들은 부모의 등쌀에 숨이 막혀간다. 

  주역에 '직방대'라는 말이 있다. 자연히, 스스로, 본능적으로 아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삶은 기본적으로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면서 누구나 삶을 위한 준비가 저절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따로 익히지 않아도 특별히 불리할 것이 없다고 강조한다. 


  착각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일 큰 욕망은 '높은 연봉'이다. 산업시대를 거쳐 정보화사회로 넘어오면서 고소득의 연봉을 받는 루트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학력'을 통한 전문직종을 갖거나, 명문대에 진학해서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루트 중 하나이다. 문제는 이러한 루트가 대한민국 모두가 알고 있는 공개된 루트라는 점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공부하라고 다그치며 '공부기계'를 만든다. 

  하지만 많은 부모들이 한 가지 착각하는 점이 있다. 바로 '공부기계'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적성을 찾지 못한 채, 공부만을 강요하다보면 결과는 뻔하다. 공부를 통한 성공(명문대 진학)은 바라기 힘들다는 것이다. 명문대가 아니면 어떠한가, 행복한 삶을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명문대를 진학해서 얻는 행복은 합격했을 당시 아닐까?

  부모의 욕심을 버리고,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해줘야 한다. 그런 문화가 자리잡아야 한다.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자신의 아이를 조종하기를 원하면 안된다. 이러한 부분을 여러가지 사례를 들어서 저자는 <부모의 자격> 4장 부모의 욕심을 버려야 아이는 비로소 꿈꾼다, 5장 명문대 아니면 어때요, 행복한 게 최고야를 통해 잘 보여준다. 어떻게 해야 부모로써 자격이 충분한지 사례를 통해 입증하는 것이다. 

    재능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내 아이의 능력이 다른 아이의 능력과 같을 수 없기에 비교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공부 좀 못해도 괜찮아! 성적과 성공은 비례하지 않아!' 이런 말을 잘 하는 부모가 자녀를 더 성공시킨다. 그러나 부모들은 그와 반대로 자녀에게 요구하고 있다.


  무엇이 부모의 역할인가?

  우리 모두가 행복한 교육을 위해서는 딸의 제모와 같은 사소한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부모 노릇은 어쩌면 자녀의 사소한 관심사항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뚝심 있는 부모가 되기를' 주문한다. 그러면서 절제된 사랑, 자녀의 경제적 독립, 욕심 버리기, 단호함, 냉정함, 긍정 마인드의 6가지를 보여준다. 

  절제된 사랑을 통해서 아이의 홀로서기를 돕고, 결핍을 느껴야 성장한다는 사례를 통해서 귀한 자신일수록 부족하게 키우라는 경제적 독립을 이야기한다. 또한 욕심을 버리고 기다리는 부모가 되어야 하며, 단호함을 통해 절제된 부성애 혹은 모성애가 필요하다고 주문한다. '오냐오냐'하는 식의 교육은 안좋다는 것을 보여준다. 냉점함을 통해 더 큰 사랑으로 감싸는 모성, 긍정 마인드를 통해 꿈조차 가난해서는 안된다고 마지막으로 이야기한다. 

  부모가 되는 것에 있어서 자격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자격'은 필요해 보인다. 뉴스를 보다보면 '저런 사람도 부모인가?'라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차라리 자격증을 통해서라도 부모가 된 사람들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인지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사회가 급변한다. 어제를 지나왔지만,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은 오늘과 또 다를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자식들을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우미 역할을 하는 것이 부모다. 어떤 도우미가 되느냐는 순전히 부모의 선택이다.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한 척의 배에서, 이 책이 나침반의 역할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SBS에서 방영된 [부모 vs 학부모]의 다큐프로그램 역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홍콩의 유명가수 광미운은 미인대회서 3위를 했다. 그는 인터뷰때 곤란한 질문을 받았다. 

  "학창시절 성적이 좋지 않은데 혹시 머리가 나쁜 거 아닙니까?" 이에 광미운은 재치 있는 대답을 했다.

  "학교 성적이 뛰어난 사람은 졸업 후에 무슨 일을 하죠? 엔지니어, 법률가, 의사, 이런 정도 아닙니까? 하지만 그다지 성적이 뛰어나지 않았던 사람들은 뭘 하죠? 이들을 거느린 회사의 주인이 되지 않았나요?"

  당당함만 있다면 공부를 좀 못해도 누구든 멋지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로이트의 여동생
고체 스밀레프스키 지음, 문희경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유대인의 삶과 죽음, 그 너머

  1938년 비엔나. 나치가 쳐들어오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주치의와 주치의의 가족, 가정부와 처제, 기르던 강아지까지 데리고 런던으로 망명 하지만 그가 가장 아낀 여동생 아돌피나를 비롯한 그의 누이들은 비엔나에 남겨둔다. 

  결국 프로이트 가(家)의 네 자매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고, 가스실에서 죽음을 앞둔 아돌피나는 자신을 학대한 어머니에 대한 애증, 오빠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 옛 연인으로부터 받은 상처 등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회고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이름은 심리학자로 세간에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하물며 그런 사람의 여동생이라니? 여동생도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일까? 심리학자 프로이트와 여동생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뭘까?

  전구에 불이 반짝하고 들어오듯, 책 제목을 접한 순간 머리속에 반짝하고 들어온 생각들이다. 질문들에 대한 궁금증이 책을 열어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책의 표지 또한 강렬하다. 표지의 그림은 <키스>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Death and Lfe>라는 작품이다.


<출처 : 위키커먼스 via 구글아트프로젝트>


  책의 표지 분위기로 보아하니, 죽음과 삶에 대한 주제인가? 라는 생각이 스쳤다.비교적 최근에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덕분에 삶과 죽음에 대한 흥미도가 높았던 시점었던 탓인지 책에 대한 흥미도는 더 높아졌던 것이 사실이다. 소설이라는 장르적 특성상 <죽음이란 무엇인가>보다 조금 더 쉽고 재미있게 죽음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마음으로 책을 폈다. 

  책에 대한 내용은 앞서 말했듯, 1900년대 초반, 유대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시기적으로 1900년대는 세계대전이 1차와 2차에 걸쳐 2번이나 있었던 때이다. 전쟁도 무서운데, 거기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가히 끔직할 정도다. 그런 시기의 유대인의 삶을 소설은 말해준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 시기, 질투...유대인의 공포감과 절망감이 느껴졌다. 삶이란 이런 것인가...개인의 역량 따위는 무시되는 세상...그게 1900년대 초반에서 중반을 달리던 유대인의 삶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의 21세기가 예전보다는 많이 개선되었겠지만, 그래도 불합리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모래를 씹은 것 같은 찝찝함이 남아버렸다. 

  내 삶의 시작에 고통이 있었다. 감춰진 상처에서 소리 없이 피가 흐르는 것처럼. 한 방울 한 방울씩. 그리고 이제와 오래 전 그 푸념을 다시 듣자 생애 처음 생긴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그 상처에서, 그리고 이후에 생긴 모든 상처에서 한꺼번에 피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_ <프로이트의 여동생> 160쪽.

  사실 책을 중반까지 읽어나갈 때까지, 오래 걸렸음을 인정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 그것도 유대인도 아니고 한국인이 그 당시 유대인의 마음을 어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국내에서 인종차별을 당해본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유대인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보니 책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책을 읽는 목적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내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얻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 때문에 한 호흡에 읽어내려가지 못했다. 

  "카프카는 이런 말을 했죠.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고. 책을 읽고 우리 안의 무언가가 꺠지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굳이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_ <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 2> 中

  

  책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유대인의 삶에서,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를 찾아야 했다. 유대인의 삶에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지혜를 찾기 시작했다. 책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책의 주인공인 프로이트의 여동생 아돌피나. 지그문트 프로이트 오빠로부터 이쁨을 받는 여동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프로이트의 무관심과 무책임함이 아돌피나를 죽음으로 몰고갔다.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되고, 독일과 가까웠던 비엔나에서 도망가야 하는 상황에서, 비엔나는 괜찮을 것이라는 안일함이 가족들을 몰살시킨 셈이 되었다. 주치의와 주치의의 가족, 강아지까지 데리고 런던으로 갈 때 가족들을 조금 더 생각했더라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그문트와 아돌피나의 입장. 오빠 덕분에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아돌피나. 지그문트가 조금 더 세상일에 관심을 가졌더라면...학문에 치우친 나머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는 눈이 어두웠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아돌피나의 마지막 말은 가슴에 파묻힌다. 

  "지그문트, 당신을 잊을 거야. 오빠에 관한 일을 다 잊을 거야. 까마득한 어린 시절에 아직 많은 사물에 이름이 없던 시절에 오빠가 내게 날카로운 물건을 내밀며 칼이라고 말해준 날부터 모조리 잊어버릴 거야. 

  내 삶이 시작된 순간에 사랑과 고통이 있었던 기억을 지울 거야. 생애 최초의 고통을 잊을 거야. 감춰진 상처에서 소리 없이 피가 뚝뚝 떨어지던 걸 잊을 거야.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고통과 최초의 말을 잊을 거야. 엄마가 했던 말. 널 낳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내가 태어난 사실도 잊을 거야. "

_ <프로이트의 여동생> 289 쪽 中

  잊겠다. 내가 태어난 사실도. 나를 죽음의 구렁에서 꺼내주지 못한 오빠도. 모든 것을. 아돌피나의 절망감이 느껴진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이것이 유대인의 삶이었고,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의 결말이라니. 인종차별. 그동안 유대인 학살, 노예제도 등의 인종차별에 대해 무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일에 대해서 공감 능력도 떨어질 뿐더러, 가까이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탓이다. 

  책을 다 읽어내려간 뒤, 차별에 대한 무서움을 느끼게 된 것이 사실이다.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인종차별의 문제는 없겠지만 여전히 대두되는 차별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학교폭력과 관련된 왕따 문제 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차별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유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박힌 것이다. 

  책을 덮고 다시 앞장으로 돌아왔을 때, 표지가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죽음의 사신 앞에 모여있는 사람들. 똘똘 뭉쳐서 죽음의 사신에 대응하려는 모습. 이것이 해결책일지 모르겠다. 권력을 가진 사람 앞에서, 죽음의 사신을 한 사람들 앞에서 피해자의 입장과 대응. 그것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방법일지 모르겠다. 서로를 보듬어주고, 같이 한다는 느낌의 공동체. 그것이 권력 앞에 선 약자들의 생존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치의 권력 앞에 프로이트는 가족들을 내팽개치면 안되는 것이었고, 오늘날 사회에서 권력 앞에 개개인에 맞서기 보다는 뭉쳐야 한다. 

  <프로이트의 여동생>이 나에게 던진 물음은 그것이다. 아돌피나 자신은 죽음의 사신으로 표현되는 권력 앞에서 공동체의 붕괴로 인해 뭉치지 못하고, 결국 살아남지 못했다.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너는 권력이 죽음의 사신으로 변해 너에게 칼을 들이민다면 과연 잘 헤쳐나갈 수 있겠는가? 1900년대 아돌피나 자신이 했던 과오를 너는 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에 잔잔한 호수가 일어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금사과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성과 신앙의 구도그 끝나지 않는 대결

 

소설이란 무엇이며 소설을 쓴다는 것은 또한 무엇인가텍스트로부터 될 수 있는 한 멀찍이 거리를 두려 했다그러다 보니 서양의 중세까지 가게 되었다참 멀리까지 간 셈이다” _ 작가 후기 

 

  ‘황금사과라는 단어는 아쉽지만 김경욱의 소설이라는 점을 떠올리기보단그리스신화를 떠올렸다파리스의 황금사과 이야기가 그것이다가장 아름다운 자에게 주라는 황금사과지혜의 여신 아테나세계의 주권을 약속한 헤라인간 중 가장 아름다운 아프로디테세 여신이 이 사과를 두고 다투자 제우스는 파리스에게 그 판단을 맡긴다결과적으로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를 선택했고그 결과 분노한 여신들의 장난으로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신화의 내용 때문이었는지김경욱의 <황금사과역시 그리스 신화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했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패러디. <황금사과>의 내용은 <장미의 이름>에서 끔찍한 연쇄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날카로운 직관과 해박한 지식으로 독자들을 감탄시켰던 월리엄 수사의 젊은 시절이다서양 중세경제사에 대해 박사논문을 쓰고 있는 소설의 화자 는 소르본 대학 도서관 고()문헌 실에서 우연히 바스커빌 출신의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 윌리엄이 14세기 초에 쓴 서책의 채록 편집본을 발견한다이 책에 담긴 내용은 수사가 살인흑사병종교재판 등 잔혹한 사건의 배후를 파헤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윌리엄 수도사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피에르 주교의 죽음과 진실속권과 교권의 다툼진실과 허구진리와 이단원본과 복사본 등에 대한 물음이기도 한 <황금사과>. <장미의 이름>에서도 등장했던 이성과 신앙심의 대립’, ‘경건주의의 속박은 <황금사과>에서도 여전히 되풀이된다과연 무엇이 진실이고무엇이 거짓이란 말인가?

 

  다시 서두에서 이야기했던 파리스의 황금사과 이야기를 떠올려보자당신이 파리스였다면 지혜권력(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모든 사람이 파리스와 같이 아프로디테즉 미()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혹자는 지혜를 선택할 것이고누군가는 권력을 선택할 것이다선택의 가능성이 열린 만큼 선택에 대한 결과 역시 모두 달라진다()를 선택한 결과가 권력(헤라)으로 인한 응징이었다그렇다고 우리는 파리스가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손가락질 하지는 않는다.

  <황금사과>에 나오는 선택의 구도 역시 그리스 신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이성과 신앙심의 선택이 그것이다이성을 선택한 사람들은 신앙심을 선택한 사람들에 의하여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했고신앙심을 선택한 사람들 역시 이성을 선택한 사람들의 계략을 막기 급급했다.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고민하던 작가는 시대를 거슬러 중세까지 내려갔다반대로 필자는 그 소설을 통해 무엇이 정의(定義)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현대로 돌아왔다중세시대 이성과 신앙의 대결은 현대에도 존재한다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는 각자의 판단이다파리스가 그랬던 것처럼그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손가락질 할 수 없었던 것처럼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선택 역시 잘못되었다고 손가락질 할 수 없다다만 자기의 선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옳지 못하다그것이야말로 윌리엄이 보았던 속권과 교권의 싸움중세 암흑기로 되돌아가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황금사과>를 읽어냄으로써 숙제가 생겼다상대의 선택에 대한 관용과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이 그것이다황금사과가 주어진다면후회 없는 선택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