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 - 제3판 개역본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 까치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군주여, 부도덕의 기술을 가져라

  국가는 신의 섭리나 운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며 국민정신과 자연법이 그 원리이고, 군주는 다만 이 국가를 실현하는 현실적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기에 마키아벨리가 군주라고 말한 것은 교황·황제 또는 어느 특정한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앞에서 말한 내용의 국가관념을 이해하고 거기에 따라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영도자를 뜻한다. 그가 군주 한 개인과 국가의 운명을 직결시킴으로써 개인의 역량을 최대시한 것은 당시 개인의 능력·활동의 가치를 중요시한 르네상스 풍조를 따른 것이며, 동시에 국가라고 할 만한 조직사회를 갖지 못한 이탈리아의 당시 사정으로서는 불가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국 이탈리아를 위해 강력한 군주의 덕목을 설파한 정치학의 고전

  1513년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쓴 이후 그의 이름은 정치와 처세에 관한 논의에서 빠짐없이 거론되어왔다. 1532년 <군주론>이 출간되자 그 내용에 대한 도덕론자들의 비난이 본격화되었고 1559년 교황 파울루스 4세에 의해 금서가 되었으며 이러한 결정은 1562년 트렌토 공의회에서 재확인되었다.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는 도덕과 종교가 정치의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나 단순히 정치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마키아벨리의 말을 들어보자.

"만약 군주가 국가를 유지하길 원한다면 그는 종종 악행을 저지르도록 강요된다. 군주는 종종 신앙에 반하여, 자선에 반하여, 인륜에 반하여, 종교에 반하여 행동해야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군주는 잔인하다는 악평쯤은 개의하지 말아야 한다. 선행은 될수록 천천히 자신의 이름으로 베풀고 악행은 가급적 부하의 이름으로 또는 재빨리 저지르는 것이 낫다"

  마키아벨리의 조언은 군주나 정치가가 권력을 획득·유지·확장하기 위한 필요에서 제시된 것이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들임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작은 마키아벨리가 자리잡고 들어낮아서 여러 가지 행위를 할 때마다 속삭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제시한 일견 반도덕적이고 악명 높은 조언들은 당대의 많은 군주나 정치지도자들이 현실정치에서 실행하던 지침들을 좀더 의식적이고 체계적으로 정식화한 것에 불과했다. 권력의 획득·유지·행사를 둘러싼 적나라한 현실을 백일하에 제시한 것에 불과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사악함과 기만성이 드러났다면 이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정치현실이 그러한 원리에 따라 규율되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를 사랑했고 또한 이탈리아가 위대하길 원했다.


  정치를 도덕과 종교로부터 분리한 근대정치학의 선구자

  마키아벨리는 1469년 5월 3일, 르네상스 시대의 문예운동이 그 최고봉에 도달한 느낌을 주기 시작한 때,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마이카벨리의 저작활동과 내용은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하지만 그는 주로 <군주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흔히 약육강식의 폭군지상주의자로 오해되고 있다.

  어느 역사적 사실은 그 사실이 이루어진 시대의 역사적 환경 속에서만 진실되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에 대한 오해는 현시점의 감각이 아니라 그가 살던 시대의 의식에서 살펴볼 때 스스로 해소되며, 참다운 뜻을 알 수 있다. 그 당시의 이탈리아는 정치적·사회적으로 19세기 후반까지의 길고도 파괴적인 분열과 혼란의 출발점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바로 이 혼란기에 처했던 인물이었다.

  15세기 말 이탈리아의 정치상황은 다른 나라와 달리 로마제국 멸망 후부터 지속된 국가분열이 더욱 악화되어 외세의 지배가 강화되고 있었다. 1469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 정복을 감행한 해로, 이탈리아는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분열상태에서 어이없이 굴복당했고, 그 후 계속하여 외침을 받았다. 이탈리아는 지력, 무력 또는 정치적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자체의 분열로 외세침략에 무방비 상태였다.

  이러한 복잡다단한 환경에 처한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의 흥미를 끈 것은 조국 이탈리아의 운명이었다. 그는 조국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정치적 해결뿐이라 결론짓고 그의 독창적인 정치사상을 꾸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치를 윤리·도덕과 분리시켜, 객관적·과학적인 기초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의 통치기술이라 규정했다.

  그는 피렌체의 공리 또는 외교사절로서 국가간의 무자비한 비윤리적 투쟁을 목격하며 이 비극에서 조국 이탈리아를 구출할 수 있는 길을 바로 이 <군주론>에서 밝혀놓았다. 그의 <리비우스론>과 함께 근대적 의미의 정치학을 창설한 이정표와 같은 책이다.


  이성·신중심적 패러다임으로부터 권력·인간중심적 패러다임으로

  우리가 오늘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국가는 사실 근대의 산물이다. 국가는 사회의 악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과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질서로 발전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국가론>은 사실 최초의 국가론이다. 마키아벨리는 국가를 세울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땅, 이상으로부터 현실, 이성으로부터 권력으로의 방향전환을 의미한다. 삶과 현실을 바라보는 개념의 체계를 패러다임이라고 한다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고대와 중세의 이성중심적 또는 신중심적 패러다임으로부터 권력중심적 또는 인간중심적 패러다임으로 바뀌는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가 인간의 손으로 빚어져야 할 예술작품과 같은 것이라면, 국가를 건설하고 구축하는 데는 일종의 정치적 기술과 예술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그것은 바로 현실의 논리를 올바로 읽어내는 기술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삶과 있어야 할 삶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당위적으로 있어야 할 것만을 바라보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시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실존을 보존하기보다는 오히려 파괴할 것이다."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는 원리가 권력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군주론은 권력을 획득하고 보존하고 확대하는 방법과 기술을 다룬다는 점에서 권력론이다.

  마키아벨리는 글의 앞부분에서 다양한 형태의 군주국을 설명하면서 군주가 되는 과정에 있어 가장 큰 두 갈래로 자신의 '능력'으로 군주가 되는 경우와 '행운(운, 타인의 호의)'에 의해 군주가 되는 경우를 제시한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군주에게는 부도덕한 태도와 기술이 필요하다.

  12장부터는 군주가 갖추어야 할 '능력'과 관련된 내용들이 나온다. 군주가 갖추어야 할 인격적 측면까지 다양한 측면을 살핀다. 여기에서 마키아벨리의 중요한 세계관이 잘 드러나는 듯하다. 군주는 필요에 따라서, 즉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식적으로 긍정되는 도덕적·종교적 윤리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신의도 저버려야 하며, 잔인해야 하며, 베풀기에 인색해야 한다.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무한히 확장하는 욕구의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의 무한성과 충족수단의 유한성으로부터 결국 공격적인 경쟁과 분배투쟁을 수반하는 사회적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부정적 인간관으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을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자. 먼저, 군주가 한없이 선할 수만은 없으며, 때로는 부도덕한 정치기술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역사 속에서 수많은 평화조약과 협정이 신의 없는 군주들에 의해서 파기되고 무효화 되어왔다는 엄연한 현실 속에서, 그리고 악한 자들만이 존재하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군주가 선을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미움을 초래할 수도 있으며, 국가를 파멸의 길로 몰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국가를 건설하고, 법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악하고 또 그들은 기회가 주어지면 항상 악한 본성을 나타낼 것이라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분명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군주는 필요하다면 부도덕하게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약속을 맺은 이유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약속을 지킬 필요도 없다. 여기서 마키아벨리의 인간본성론과 현실주의적 정치사상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주는 부도덕적인 태도를 가질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군주가 부정적인 모습을 보일 때에 분명 제한을 두었다. 그는 자신의 곳간에 있는 것에는 인색하더라도 전리품이나 다른 이의 재물을 가지고는 관후하게 베풀어야 한다고 하며, 잔인함에 있어서도 광범위한 학살이 아니라 군주를 두려워할 수 있을 만큼의 잔인함을 이야기한다. 그는 너무나 철저하게 군주가 되는 것과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운명이란 강물을 조절할 순 없지만, 그 피해는 능히 조절할 수 있다.

  성악설적 인간관과 더불어 <군주론>에서 엿볼 수 있는 마키아벨리의 관점으로 반운명론적 세계관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마키아벨리가 들고 있는 운명의 비유가 매우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운명은 마치 강과 같다. 따라서 예측할 수 없는 경우에 넘칠 수 있고 범람하여 인간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강물을 조절할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한 피해는 최대한 줄일 수 있다. 제방을 쌓고 저수지를 만들어 홍수를 조절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군주는 <군주론>에서 다루고 있는 것처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군주의 덕(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군주에게 요구되는 덕, 비도덕적인 것까지 포함해서)을 갖추고 힘을 기르고 시대와 상황에 적절한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군주가 실제로 행동해야 할 현실에 기반한 정치철학

  마키아벨리에게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국가의 생존이었고, 도덕이 있다면 그것은 국가의 생존을 위한 강력한 힘이었다. 그는 이전의 도덕철학자나 정치철학자들이 이제껏 전적으로 가상의 공화국이나 군주정에 관해서만 논의했을 뿐, 군주가 실제로 활동해야 하는 현실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침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철저히 현실에 기반한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유용한 것을 쓰고자 하기 때문에 이론이나 사변보다는 사물의 실제적인 진실에 관심을 경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 결코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거나 목격된 적이 없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바를 행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를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잃기 십상이다."


  현실주의는 미덕이고 이상주의는 악덕인가?

  마키아벨리가 계속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활동하던 시대로부터 5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에게 읽히고 있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그 속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 것일까.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어떤 의미에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두 가지로 크게 나뉠 수 있다. 앞은 세상사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입장이고, 뒤는 이러저러하게 '되어야 하는' 쪽으로 보는 관점이다. 딱 부러지게 한마디로 말할 때 마키아벨리가 두고두고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바로 그가 철저한 현실주의자라는 데 있다.

  마음이 착하고 남에게 관대하며 언제나 남을 자기보다 앞세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칭송할 만한 미덕이다. 아무도 이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그가 많은 백성과 시민들의 안위를 지켜야 하는 군주나 지도자라면, 그리고 사인으로서의 그러한 미덕이 공인으로서의 행동에 오히려 해가 될 우려가 있을 때, 그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마키아벨리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세상사 돌아가는 방식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도덕론적 군더더기가 전혀 붙어 있지 않다. 자신의 목표가 '국가'를 보존하는 것이라면, 오직 그 길만이 살 길이라는 것이다. 사인의 길을 갈 사람은 세상이 미덕이라 칭하는 대로 따르라. 하지만 공인의 길을 택한 사람에게 그것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닐 뿐 아니라 거꾸로 오히려 '악덕'이 될 수 있다.


  이상 없는 정치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정치, 어느 쪽이 더 나쁜가

  이러한 '통치의 기밀'을 일찍이 간파한 사람들은 정치가들이었다. 아니 모든 정치가가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오직 '뛰어난 정치가'만이 그러했다. 정치적 이상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직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뿐이다.

  이상 없는 정치는 치졸하지만,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정치는 더욱 치졸하다. 뛰어난 지도자라는 명성을 지닌 사람들은 예외 없이 현실주의자였다. 그가 이상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이상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말이다.


  목적이 언제나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상을 가지고 그 이상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힘을 갖고자 하는 현실주의가 반드시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모든 수단이나 방법을 정당화하는 것일까? 정치가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권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가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방법이나 거짓 언동과 같은 부당한 수단을 사용하여 권력을 쟁취하는 것을 우리는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현실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현실을 직시하고 힘을 가져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옳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힘을 가지기 위해 비정상적인 수단이나 비도덕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목적이 항상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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