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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의 거짓말 : 성서 편 명화의 거짓말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북폴리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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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의 다시 보기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종교화를 즐기고 싶은 사람, 혹은 종교화를 통해 성서와 역사와 화가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이교도가 보는 성서에는 '괴상한' 부분이 잔뜩 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은 기묘한 이야기를 과연 화가는 이런 식으로 궁리해서 표현했던 것이구나, 하는 걸 알아차리면 갑자기 그 그림은 매력이 더 커질 것입니다.

_ <저자 후기> 중.


  <명화의 거짓말> 그 두 번째 이야기다. 첫 번째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였다. 두 번째 이야기는 제목처럼 성서를 다룬다. 『구약성서』의 '천지 창조', '아담과 이브', '카인과 아벨' 등을, 『신약성서』의 '수태고지', '세례자 요한', '예수의 십자가 처형', 최후의 만찬' 등을 다룬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다룬 명화를 소개하면서 성서에 대한 주요 에피소드와 명화에 대한 해설을 친절하게 진행한다. 

  이 책의 최고 장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비종교인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종교와 친숙하지도 않고, 그림과 친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책에 대한 내용을 재미있게 습득했다. 전공 서적이라는 느낌보다는 교양 서적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온다.(더군다나 작가인 나카노 교코도 비종교인이다. 그래서 비종교인이 읽기에 쉽게 서술했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신약성서』의 이야기를 다룬 명화들 보다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명화들이 더 흥미로웠다. 아! 설명하고 가자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나누는 기준은 옛것(舊)과 신(新)의 구분이 아니다. 그리스도(구세주) 예수가 내세운 새로운 구원의 계약을 '신약'이라고 부르면서 그보다 앞선 계약에 '구약'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즉 『구약성서』는 예수의 출현을 예언한 오래된 계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성서'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가 공통으로 읽는 성서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신약'의 이야기보다 '구약'의 이야기가 더 익숙하다. 

  

  <저자 후기>에서도 밝히고 있듯, 작가는 성서에 '괴상한' 부분이 잔뜩 있다고 믿고 있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종교화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독자의 영역을 밝히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종교인이 보기엔 작가의 말이 터무니 없이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저자 후기>에 나오는 마지막 말을 들어보자.

  '종교화도 신화화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문화로서 즐기면 된다'라고 하면 기독교도들은 불쾌할지도 모르지만, 부디 너그러이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이나리 신사를 매일 참배하는 우리 동포(일본사람들)에 대해 이교도인 외국인이 '여우 따위에 손을 모으다니'하고 코웃음을 쳤다지만 우리는 누구 한 사람 크게 화내지 않습니다. 여우를 모시는 데 이른 민중의 마음을 알고 싶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비웃는 상대를 이론으로 굴복시켜 여우 신앙을 전도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8백만의 신을 지닌 일본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터라, 유대교, 카톨릭, 개신교를 신봉하는 분들로서는 화가 날 부분이 많을지도 모르지만, 부디 너그러이 여겨주시길 바랍니다.

  사실 마지막 부분을 듣고 놀랐다. 작가의 말을 정리하자면, '종교화를 이렇게 설명했던 것은 하나의 문화로서 즐길 거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에 대한 비판은 거절한다.'라고 들린다. 8백만의 신을 지닌 일본인이 종교화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충분하다라고 하면서. 작가의 이런 한 발 물러섬은, 책을 읽어온(혹은 책의 내용을 믿은) 사람들에 대한 믿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작가는 종교화에 대한 기존의 해석과 다르게 다른 해석을 제시했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 역시 지면을 할애하면서 풀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비판은 거절한다니. 그럼 작가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남긴채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가만히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책의 가치는 무엇일까?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결론은 익숙한 것의 다시 보기였다. 작가는 이러한 여러 해석을 통해서 기존의 것이 틀렸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권위와 편견을 버려라. 그리고 즐기듯 다시 보라. 이러한 가르침이 책의 가치가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학문은 투쟁의 역사가 아니다. 서구 사회처럼 스승의 입장을 비판하며 논쟁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스승의 말을 따르는 학계의 분위기다. 공자와 맹자가 후대에 비판받기까지 시간을 보면, 서구 사람들은 놀랄지도 모른다. 이러한 분위기가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즉, 귄위자의 말이라면 맹신하는 분위기가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비판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사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의 첫 단계, 첫 연습으로 종교화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이 책은 읽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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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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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비평적으로 알아내는 예수의 모습


  "저자의 시각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가 그리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극히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특히 한국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예수가 정치와 무관하다고 본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예수가 유대의 혁명을 이끈 정치적 인물일 수 있다는 이 책의 주장이 하나의 훌륭한 자극제가 될 것이다."

_ 오강남(캐나다 리자이나대학 종교학 명예교수)



젤롯

저자
레자 아슬란 지음
출판사
와이즈베리 | 2014-03-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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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가지 고백을 하고 시작한다. 필자는 종교가 없다. 애당초 무(無)교였다. 어느 특정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가 무신론으로 돌아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무신론이다. 그렇기 젤롯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예수의 내용이 그의 말을 통해서 그간의 예수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 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상태여서 비교가 불가능하다. 어떤 시각이 다르고, 어떤 부분에서 이견이 생기는지 모른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예수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종교 서적관련 서가에 엄청나게 있다. 서적 뿐만이 아니라 영화나 소설 등의 문학, 예술, 학문의 영역 전반에 걸쳐 두루 자리매김하며 재해석되고 있다. 최근 영화계에 등장한 <노아>의 영화만 봐도 그렇다. 기독교인들이 보기에 <노아>는 기독교를 무시하는 해석이고, 비기독교인들이 보기에 <노아>는 기독교적인 영화라고 서로 주장한다. 이처럼 예수의 삶에 대한 해석은 뜨거운 논쟁과 반발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여기에 새로운 해석의 책이 하나 또 등장했다. 바로 레자 아슬란의 <젤롯>이 그것이다. 


 책은 신적인 존재로만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하느님의 나라 유대의 독립을 위해 싸운 혁명가 '나사렛 예수'를 다루고 있는 논픽션의 학문영역에 있는 작품이다. 

  저자의 예수에 대한 재해석은 물론 신선한 시각이다. 학문적 영역에서의 논리를 통해 분석을 내놓았고, 흥미를 이끌기에 충분한 문장력도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내에서도 이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다고 한다. 논란의 내용에 대해서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필자의 관심사도 아니며, 딱히 알고 싶지도 않다. 


  "소농과 하급 제사장, 비적, 최근 예루살렘에 들어온 피란민이 이쪽 진영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이 연합해 만들어낸 독특한 혁명적 분파가 바로 '젤롯당'이었다. 이들의 특징이라면 가난과 경건한 신앙과 반귀족 정서를 들 수 있다. 젤론 당원들은 혁명의 초심을 철저하게 지키고자 했다. 그것은 이 거룩한 땅을 깨끗이 하고, 이 땅에 하느님의 통치를 세우는 것이었다."

  젤롯은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 열정적인 신념을 뜻하는데 저자는 이런 의미를 되새기며 예수를 1,2,3부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즉 예수가 신의 아들이자 영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젤롯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유대인의 민중 운동을 이끈 정치가이자 혁명가라는 것이다. 절대자 신이었던 예수의 개념을 우리와 동등한 사람으로 낮추어 버린 것이다! 


  "자신들의 '열심'이라는 이상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서슴지 않고 극단적인 폭력의 힘을 빌리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로마인과 이방인뿐 아니라 로마에 빌붙어 아첨하는 동료 유대인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열심'을 의미하는 '젤롯'이라고 불렀다."

  또한 책은 더 나아가 예수가 설파했던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가르침이 어떻게 오늘날의 종교적인 가르침으로 변화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새로운 해석으로 다가왔지만 예수에 정치적인 색깔을 입혀 큰 논쟁과 파장을 가져온 젤롯, 예수의 삶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신념 속으로 들어가는 책이다. 

  

  책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것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지금이야 말로 비판적인 시각이 필요한 때이다. 무엇이 옳은 것이며, 무엇이 옳지 않은 점인지 차분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저자의 주장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비판 받지 않을 뿐더러, 현실세계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차분하게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저자가 보여주는 예수의 세계를 보자. 그것을 내 속에 받아들일지, 외부에 놔둘지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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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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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지금 피로한가?


  이 책의 핵심적인 태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회를 지배해온 부정성의 패러다임(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타자에 대한 거부 등, 한병철은 이를 면역학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이 적어도 20세기 말부터 긍정성의 패러다임(능력, 성과, 자기 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등)으로 전환되었거나 전환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_ <피로사회> 76쪽.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_ <피로사회> 6쪽.

  '피로'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의 단어들이 연상적으로 생각난다. 명(明) 보다는 암(暗)인 느낌들이 그것이다. '피로'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정신이나 몸이 지치고 힘든 상태'. 어떤가? 당신도 지금 피로의 정의에 속한 사람인가?

  현대인들은 점점 더 피로해진다. 피로감이 상승하면서 행복감은 느끼는 사람도 적어지고 있다. 과거보다 오히려 행복지수가 떨어지는 것이 그 증거이다. 사회가 분화되고 세분화되면서 점점 요구조건들이 많아졌다. 2000년대 초반만해도, 대학을 평범하게 다니고, 졸업을 해도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2013년 현재는 대학을 평범하게 졸업해서는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가 되어버렸다. 고득점의 영어성적은 기본이고, 각종 대외활동, 공모전을 통한 수상경력, 동아리 활동, 높은 학점, 봉사활동 등 요구조건이 엄청나다. 취업을 하면 피로하지 않을까? 대답은 'No!'다. 일명, 워커홀릭(workaholic)'이란 단어를 봐도 그렇다. 일중독이나 업무중독이라는 말로, 여가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가정에도 소홀한 직장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단어들을 들으면 생각나는 것은? '피로하다'일 것이다.

  알랭 에랭베르(Alain Ehrenberg)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 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_ <피로사회> 18쪽.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책에서 현대인의 피로의 원인에 대해서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긍정성의 과잉'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긍정성의 과잉이 어떻게 피로를 일으키는 것일까? 우선 저자는 피로를 경색성 질병이라고 파악한다. 경색성 질병은 우울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 같은 신경증적 질병을 말한다. 이러한 경색성 질병들은 면역학적인 공격과 방어를 최우선으로 하는 전염성 질병과는 다르게 면역학적 처방으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경색성 질병, 혹은 신경증적 질병들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비면역학적 질병이다. '부정성의 변증법'을 따르는 면역학적 예방법은 비면역학적 질병에는 소용이 없다. 과잉으로 인한 소진, 피로, 질식이라는 비면역학적인 시스템에서 저항력을 강화시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면역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경성 질병들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닌 '긍정성의 변증법'을 따라야 한다고 저자는 제시한다.


    입시 지옥에서의 해방을 약속한 최초의 교육부 장관이 내세운 구호가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20개에 가까운 교과목의 무게에 신음하던 학생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들렸을 이 구호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며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주체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 아니었을까?

_ <피로사회> 89쪽.

  이 책이 무엇보다 흥미를 끌고,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 이유는 현대사회를 너무 잘 진단했다는 것에 있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의 패러다임으로 푸코의 규율사회가 맹목적인 의식이었다. 정신병자, 감옥, 공장으로 이루어진 판옵티콘에서 푸코의 규율사회는 금지, 규율, 강제, 타자에 대한 거부 등 부정성의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긍정성의 패러다임의 성과사회로 변화했다.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성과사회에서는 능력, 자기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긍정성의 과잉이라는 성과사회의 질병을 면역학의 패러다임으로 치료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로 변모했다. _ <피로사회> 16쪽.

  저자는 성과사회의 새로운 인간형인 성과주체를 노동만 하는 동물로 규정하고 있다. 노동만 하는 동물은 복종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가 된다. 그러나 성과 과잉을 위해 '강제하는 자유 혹은 자유로운 강제'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영혼을 찌들게 하고 있다. 이러한 역설적인 자유로 인해 노동만 하는 동물은 자기 자신을 열심히 착취한다. 다시 말하면 노동만 하는 동물은 착취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성과사회의 심리적인 질병인 우울, 피로, 소진이라는 자폐적인 결과는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질병이 되어버린다. 또한 긍정성의 과잉에 따라 영혼이 경색되거나 탈진되고 나면 피로는 폭력이 된다. 그럴수록 자시 자신을 더욱 자학하는 괴물이 된다.

  현대사회가 우울한 까닭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로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이라는 시스템 위에서 모두가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있다. 경쟁이라는 시스템이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불행한 사람이 존재하는 필연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존을 위한 멀티플레이를 강요한다. 이것도 해야하고, 저것도 해야한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_ <피로사회> 22쪽.

  그렇다면 이 피로를 어떻게 해야할까? 오늘날 우리는 피로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나 피로한 상태여서 심적으로 불안감과 우울을 느낀다. 이런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는 법을 달리해야 한다. 저자 한병철은 "깊은 심심함, 사색, 관조의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회복제를 건넨다. 극단적인 피로와 탈진상태에 놓여 있는 성과주체, 좋은 삶에 대한 관심보다는 생존자체에 대한 관심만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무언가를 하지 않을 힘, 즉 부정의 힘과 분노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이러한 방법으로 '머뭇거리는 능력', '분노하는 법', '깊은 심심함', '돌이켜 생각하기'를 저자는 제시하면서 활동적 삶을 비판하고 치유하는 실천적 지혜를 제시한다. 무한정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분노하고 돌이켜 생각하며 거부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그게 포스트모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피로회복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피로사회'에 살고 있다. 과도한 노동과 과도한 경쟁에 시달리는 성과주체로써 탈진과 고갈의 피로를 선택하며 살아갈 것인지, 깊은 사색을 통한 공동체의 가능성에 영감을 주고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피로를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당신도 지금 피로한가? 라는 질문에 우선은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왜 피로한가?'라는 질문에는 각자가 선택한 삶에 따라서 대답이 달라질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낳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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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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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생에 정답이 어디있어?


  "인생은 몇 번의 강의, 몇 권의 책으로 바뀔 만큼 시시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인생을 두고 이 여덟 가지를 함께 생각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데서나 꽃들이 보인다. 아파트 담장에 여러 꽃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각진 콘크리트더미 새로 보이는 꽃들이 방글방글 웃는다. 무심히 눈길을 던지는데, 조금 흥겨워진다. 땅바닥을 꿈틀꿈틀 기어다니는 호랑이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 둘은 이제 막 삶의 세계로 진입한다. 세상이 뭔지, 그 세상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모른 체 눈앞의 일들을 온몸으로 겪는다. 이 광경의 환희는, 애벌레가 아름다운 나비가 된다는 사실이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고치로 꽁꽁 자신을 싸매 시간을 겪고 나면, 스스로 상상도 못해본 존재로 탈바꿈한다는 것. 가히 혁명적인 일이다.

  어쩌면 이 험난한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우리도 애벌레와 같은 과정을 겪는지 모른다. 사람들 하나하나, 개인마다 저마다의 고치가 다 들어있다는 것을. 그 고치를 잘 뽑아서 시련을 견뎌내면, 아름다운 나비가 된다는 것을. 동일한 고치가 아니라 다 다른 저마다의 고치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 나아가 그렇게 나비가 되면, 자유롭게 훨훨 날아서 신도 나겠지만,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도. 꽃은 나비에게 꿀과 휴식을 선사하고, 나비는 또다른 꽃의 탄생을 책임지듯, 꽃과 나비처럼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것. 그것이 사람의 인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이 힘들다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눈에 밟힌다. 고치의 시절을 지나 나비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면 화려한 나비가 되지 못할까봐 두려워했을까. 여러가지 원인을 두고, 무엇이 더 탁월한 원인인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의미 없다. 인생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고, 이러한 인생의 풍파를 견디고 헤쳐나가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꽃과 나비처럼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의미가 있듯.



  제가 <책은 도끼다>를 썼던 가장 큰 이유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주변에 좋은 것들은 많은데 좋은 것을 보는 눈이 없었어요. 제가 뭘 창출하겠습니까? 다만 내 주변에 널린 수많은 좋은 텍스트들을 찾아낸 눈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딱 거기까지였죠. 좋은 것은 이렇게 많은데 보는 눈이 없으니, 텍스트를 중심으로 見을 이야기 한 것이 <책은 도끼다>였다면 이번에는 책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매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_ <본문> 124쪽.

  <책은 도끼다>로 온·오프라인 서점계의 인문학 코너를 강타한 광고인 박웅현씨가 <여덟 단어>라는 신간을 통해 돌아왔다. <여덟 단어>에 대한 기대치는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서 선발 등판하는 경기만큼이었다.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좋은 성적을 내서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이 그것이다. 그만큼 <책은 도끼다>에서 저자가 보여주는 울림의 공유가 아직도 지속되고 있었다.

  <여덟 단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 번쯤 마주쳤을 여덟 가지 가치에 대해 저자 자신의 경험과 다양한 사례를 바탕으로 독자와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마련한 책이다. 책을 통해 저자는 인생을 대하는 자세를 조언한다. 물론 정답을 던지진 않는다. 정답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인생은 몇 번의 강의와 책으로 바뀔만큼 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후배들이 저를 믿고 인생 고민을 많이 털어놓습니다. 이 사람이랑 결혼할까요? 하지 말까요? 유학을 갈까요? 회사를 더 다닐까요? 마치 둘 중의 하나가 정답인 것처럼 물어요. 그런데 저는 정답을 말해주지 못합니다. 그런 건 없으니까요. 그 남자랑 결혼하는 게 정답이 될 수도 있고 오답이 될 수도 있어요. 지금 유학을 가는 게 정답이 될 수도 있고 오답이 될 수도 있어요. 모든 선택에는 정답과 오답이 공존합니다. 그러니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지 말고 선택을 해봤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옳게 만드는 겁니다.

_ <본문> 141 쪽.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이 먹어 윗것이 되었을 때 권위를 부리지 않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권위는 우러나와야 하는 거예요. 내가 이야기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인격적으로 감화가 돼서 알아줘야 하는 거예요. 그게 권위입니다. 절대 긴 복도가 권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죠.

_ <본문> 166쪽.


  저자는 <여덟 단어>를 통해서 왜 삶의 기준을 바깥이 아니라 자신에게 두어야 하는지, 고전 작품을 왜 궁금해해야 하는지, 동의하지 않는 권위에 굴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현재의 행복을 유보하지 않고 지금의 순간을 충실히 살아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자신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頓悟漸修(돈오점수)

  돈오점수, 불교용어지요. 돈오(頓悟), 갑작스럽게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점수(漸修), 점차적으로 수행해 가다, 라는 뜻입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말입니다. 돈오돈수, 점오점수, 점오돈수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여덟 번의 시간이 여러분에게 돈오점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소나기가 아니라 가랑비 같은 시간이 되어 천천히 젖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_ <본문> 9쪽.

  자존, 본질, 고전, 견, 현재, 권위, 소통, 인생. 이 여덟가지 키워드로 저자가 제시하는 인문학적 삶의 태도 역시 하나의 조언일 뿐이다. 여덟 단어로 조각되어 있지만 모든 단어는 결국 연결되면서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요약하자면 '묵묵히 자신을 존중하면서(자존), 클래식을 궁금해 하면서(고전), 본질을 추구하고(본질) 불합리한 권위에 도전하고(권위), 현재를 가치 있게 여기고(현재), 깊이 봐 가면서(견), 지혜롭게 소통하면서(소통) 각자의 전인미답의 길을 가자(인생)'라고 이야기 된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새로운 질문이 되어 우리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니 무심코 시청(視聽)하던 것들을 견문(見聞)의 자세로 바라보게 되어버렸다.

  뿌리가 깊지 못한 나무는 바람에 쉽게 뽑힌다. 사람의 뿌리는 생각이다. 생각이 깊지 못한 사람은 쉽게 흔들리고, 쉽게 무너진다. 그렇다면 생각을 깊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인문학적 마인드로 자신의 철학이라는 탑을 세우는 것이다. '힐링'이라는 키워드 다음에 나온 단어가 '인문'이다. 

  지치고 괴로운 마음을 힐링 했는데, 또 괴롭다. 원인을 제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치고 괴롭지 않으려면 인문학적 삶의 태도면 된다. 그래서 '힐링' 다음이 '인문'이다.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세상의 풍파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인문학적인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인문학적인 자세로, 세상의 풍파를 견디며 고치에서 나비로 나아가자. 그거면 한 세상 잘 살다 갔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들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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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당신을 존경합니다
데일 카네기 지음, 임정재 옮김 / 함께읽는책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평등을 외치던 인간적인 링컨


 세계적인 영웅을 이야기 한다면, 에이브라함 링컨일 것입니다. 링컨의 일대기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많은 책이 나와있는데 카네기가 쓴 <링컨 : 당신을 존경합니다>는 제가 읽은 링컨 관련 어떤 책에도 견줄 수 없을 만큼 핵심을 놓치지 않고 잘 정리해놓은 책입니다.

  이순신 장군처럼 링컨도 자기 삶을 이기적 동기에서 내려놓은 분이에요. 자기 혼자만을 위해서 살지 않고 동시대의 사람, 후대 사람까지 생각하면서 산 사람이에요. 개인의 안락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이타적인 것, 대통령이 되어서 무엇을 할 것 인가까지 생각한 사람이라는 거죠. 우리는 그런 삶을 들여다보면서 '저분의 삶을 통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 내가 새롭게 디자인할 수 있는 것, 새롭게 꿈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영감을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 작가 고도원의 서재 中 


  개인적으로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지만, 미국의 역사에 관해 능통하지 못하다. 미국의 대통령을 순서대로 나열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크나큰 전쟁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마저 미미한 수준이다. 중학교 사회과목에서 세계사 공부할 때 유럽만 좋아하지 말고, 미아메리카도 좋아했으면 오늘 날 이런 결과는 없었으리라. 그래도 귀동냥으로 들은 것들은 잘 기억하는 편이다. 'A. 링컨' 역시 귀동냥으로 들은 것을 기억하는 수준이었다. 링컨하면 떠오르는 것은 게티슨버그 연설과 남북전쟁 정도라니. 부끄럽고 창피하다.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 게티스버그 연설문 中


  <링컨 : 당신을 존경합니다>는 '위대한 정치인'으로서의 링컨을 조명하기 보다는, '가장 인간적인' 대통령으로서의 링컨의 삶에 초점을 두고 있다. 정치적인 업적이나, 그의 공로를 말하는 것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링컨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링컨의 정치적 활동, 남북전쟁, 암살 등을 다루는 사이사이에 그의 우울증과 거듭되는 정치적 좌절, 극도의 가난, 앤 루트리지와의 열애와 이별, 메리 토드와의 비극적인 결혼 등에 관한 링컨의 일대기에 관한 일화들이 소개된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기에 앞서 그 역시, 모두와 같은 인간의 하나이었음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여자와 아이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링컨의 마음을 느끼는 일화들이 많이 소개된다. 

  아이들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며(메리 토드가 상처받을까 이별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변호사로서 가난한 사람들에겐 수임료를 적게 받는 등의 일화를 통해 인간적인 링컨을 알 수 있다. 또한 편지와 전보, 주위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들은 그의 큰 포용력을 감동적으로 전달하기에 손색이 없다.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 불행한 결혼생활 내내 겪었던 괴로움 등은 같은 인간으로서 링컨에게 연민의 마음까지 든다. 그럼에도 링컨의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너그러웠던 그의 모습을 보고있자니, 마음 속에서 존경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링컨의 정치적인 업적을 알고 싶다면, 목적을 충족시키는데 부족한 책일 수 있다. 하지만 링컨의 인간적인 면을 알고 싶다면, 목적을 충족시키는데 충분한 책이다. 기억할 것은 '자신에겐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너그러웠던' 그의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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