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여동생
고체 스밀레프스키 지음, 문희경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유대인의 삶과 죽음, 그 너머

  1938년 비엔나. 나치가 쳐들어오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주치의와 주치의의 가족, 가정부와 처제, 기르던 강아지까지 데리고 런던으로 망명 하지만 그가 가장 아낀 여동생 아돌피나를 비롯한 그의 누이들은 비엔나에 남겨둔다. 

  결국 프로이트 가(家)의 네 자매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고, 가스실에서 죽음을 앞둔 아돌피나는 자신을 학대한 어머니에 대한 애증, 오빠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 옛 연인으로부터 받은 상처 등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회고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이름은 심리학자로 세간에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하물며 그런 사람의 여동생이라니? 여동생도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일까? 심리학자 프로이트와 여동생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뭘까?

  전구에 불이 반짝하고 들어오듯, 책 제목을 접한 순간 머리속에 반짝하고 들어온 생각들이다. 질문들에 대한 궁금증이 책을 열어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책의 표지 또한 강렬하다. 표지의 그림은 <키스>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Death and Lfe>라는 작품이다.


<출처 : 위키커먼스 via 구글아트프로젝트>


  책의 표지 분위기로 보아하니, 죽음과 삶에 대한 주제인가? 라는 생각이 스쳤다.비교적 최근에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덕분에 삶과 죽음에 대한 흥미도가 높았던 시점었던 탓인지 책에 대한 흥미도는 더 높아졌던 것이 사실이다. 소설이라는 장르적 특성상 <죽음이란 무엇인가>보다 조금 더 쉽고 재미있게 죽음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마음으로 책을 폈다. 

  책에 대한 내용은 앞서 말했듯, 1900년대 초반, 유대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시기적으로 1900년대는 세계대전이 1차와 2차에 걸쳐 2번이나 있었던 때이다. 전쟁도 무서운데, 거기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가히 끔직할 정도다. 그런 시기의 유대인의 삶을 소설은 말해준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 시기, 질투...유대인의 공포감과 절망감이 느껴졌다. 삶이란 이런 것인가...개인의 역량 따위는 무시되는 세상...그게 1900년대 초반에서 중반을 달리던 유대인의 삶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의 21세기가 예전보다는 많이 개선되었겠지만, 그래도 불합리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모래를 씹은 것 같은 찝찝함이 남아버렸다. 

  내 삶의 시작에 고통이 있었다. 감춰진 상처에서 소리 없이 피가 흐르는 것처럼. 한 방울 한 방울씩. 그리고 이제와 오래 전 그 푸념을 다시 듣자 생애 처음 생긴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그 상처에서, 그리고 이후에 생긴 모든 상처에서 한꺼번에 피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_ <프로이트의 여동생> 160쪽.

  사실 책을 중반까지 읽어나갈 때까지, 오래 걸렸음을 인정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 그것도 유대인도 아니고 한국인이 그 당시 유대인의 마음을 어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국내에서 인종차별을 당해본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유대인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보니 책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책을 읽는 목적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내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얻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 때문에 한 호흡에 읽어내려가지 못했다. 

  "카프카는 이런 말을 했죠.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고. 책을 읽고 우리 안의 무언가가 꺠지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굳이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_ <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 2> 中

  

  책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유대인의 삶에서,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를 찾아야 했다. 유대인의 삶에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지혜를 찾기 시작했다. 책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책의 주인공인 프로이트의 여동생 아돌피나. 지그문트 프로이트 오빠로부터 이쁨을 받는 여동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프로이트의 무관심과 무책임함이 아돌피나를 죽음으로 몰고갔다.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되고, 독일과 가까웠던 비엔나에서 도망가야 하는 상황에서, 비엔나는 괜찮을 것이라는 안일함이 가족들을 몰살시킨 셈이 되었다. 주치의와 주치의의 가족, 강아지까지 데리고 런던으로 갈 때 가족들을 조금 더 생각했더라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그문트와 아돌피나의 입장. 오빠 덕분에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아돌피나. 지그문트가 조금 더 세상일에 관심을 가졌더라면...학문에 치우친 나머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는 눈이 어두웠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아돌피나의 마지막 말은 가슴에 파묻힌다. 

  "지그문트, 당신을 잊을 거야. 오빠에 관한 일을 다 잊을 거야. 까마득한 어린 시절에 아직 많은 사물에 이름이 없던 시절에 오빠가 내게 날카로운 물건을 내밀며 칼이라고 말해준 날부터 모조리 잊어버릴 거야. 

  내 삶이 시작된 순간에 사랑과 고통이 있었던 기억을 지울 거야. 생애 최초의 고통을 잊을 거야. 감춰진 상처에서 소리 없이 피가 뚝뚝 떨어지던 걸 잊을 거야.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고통과 최초의 말을 잊을 거야. 엄마가 했던 말. 널 낳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내가 태어난 사실도 잊을 거야. "

_ <프로이트의 여동생> 289 쪽 中

  잊겠다. 내가 태어난 사실도. 나를 죽음의 구렁에서 꺼내주지 못한 오빠도. 모든 것을. 아돌피나의 절망감이 느껴진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이것이 유대인의 삶이었고,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의 결말이라니. 인종차별. 그동안 유대인 학살, 노예제도 등의 인종차별에 대해 무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일에 대해서 공감 능력도 떨어질 뿐더러, 가까이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탓이다. 

  책을 다 읽어내려간 뒤, 차별에 대한 무서움을 느끼게 된 것이 사실이다.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인종차별의 문제는 없겠지만 여전히 대두되는 차별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학교폭력과 관련된 왕따 문제 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차별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유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박힌 것이다. 

  책을 덮고 다시 앞장으로 돌아왔을 때, 표지가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죽음의 사신 앞에 모여있는 사람들. 똘똘 뭉쳐서 죽음의 사신에 대응하려는 모습. 이것이 해결책일지 모르겠다. 권력을 가진 사람 앞에서, 죽음의 사신을 한 사람들 앞에서 피해자의 입장과 대응. 그것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방법일지 모르겠다. 서로를 보듬어주고, 같이 한다는 느낌의 공동체. 그것이 권력 앞에 선 약자들의 생존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치의 권력 앞에 프로이트는 가족들을 내팽개치면 안되는 것이었고, 오늘날 사회에서 권력 앞에 개개인에 맞서기 보다는 뭉쳐야 한다. 

  <프로이트의 여동생>이 나에게 던진 물음은 그것이다. 아돌피나 자신은 죽음의 사신으로 표현되는 권력 앞에서 공동체의 붕괴로 인해 뭉치지 못하고, 결국 살아남지 못했다.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너는 권력이 죽음의 사신으로 변해 너에게 칼을 들이민다면 과연 잘 헤쳐나갈 수 있겠는가? 1900년대 아돌피나 자신이 했던 과오를 너는 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에 잔잔한 호수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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