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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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의 늑대는 무사하니?


이 책은 언젠가 고전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 <타임즈 리터러리 서플러먼트>

인간 자신에 대한 시각을 재평가하게 만드는 역사적 철학서로 기록될 것이다. - 철학자 존 그레이


  동물의 본성을 간직한 채 인간세계로 흘러들어온 늑대 브레닌. 괴짜 철학자로써 세상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마음을 가진 마크 롤랜즈. 그들의 11년간의 동거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진다. 바늘과 실처럼, 혹은 왼발과 오른발의 발맞춤처럼 그들은 11년을 함께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실존하는 인간 그 자체와 불편한 진실인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풀어낸다. 늑대에 관한 이야기이자, 철학자가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이야기. 인간과 동물의 조화를 통해 대중철학서로써의 위치를 자리매김한다.

 


  독신 철학자, 늑대의 본성에 빠지다. 

  애착, 공감, 사랑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며 영장류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모든 사회적 포유류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 『철학자와 늑대』98쪽.


  대학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보다 나이가 어린 27살의 철없는 철학 교수. 늑대 브레닌을 만나기 전의 그의 모습이다. 매일 술 마시며, 화려한 솔로로써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던 철학자. 무엇인가 회의감을 느낄 때, “96% 새끼 늑대 판매!”라는 문구를 발견한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구경간 철학자 마크 롤랜즈는 이성을 잃음과 동시에 무거운 발걸음이 되어 돌아온다. 늑대 한 마리를 대동한채 집으로 돌아온다.

  이 선택이 철없던 괴짜 철학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렸다. 그의 인생관을 바꿈과 동시에 세계관을 흔들어놓은 선택이었다. 브레닌을 혼자두면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습성 때문에 롤랜즈는 브레닌을 항상 데리고 다녀야 했다. 바늘과 실처럼, 혹은 왼발과 오른발처럼. 줄도 묶지 않고, 브레닌을 앞서가게 하지도 않고 뒤처지게 하지도 않고, 나란히 걸었다. 그렇게 브레닌은 철학자의 반려동물로써, 아니 가족과 같은 형제로써의 모습을 갖춰간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때 말한 것처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신 통제해 줄 누군가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 『철학자와 늑대』 59쪽.



  인간의 위선을 바라보는 늑대

  만약 우리가 인간을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인간은 스스로 악의 가능성을 조작하는 동물일 것이다. 


  대표적인 인간의 위선은 무엇일까? 인간 목적은 흔히 ‘행복 추구’라고 말한다. 우리는 많은 언론매체와 도서들을 통해서 행복해지는 ‘방법’은 알 고 있다. 하지만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Yes'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까? 이러한 현상을 마크 롤랜즈는 감각에 의존하여 만족스런 감정 상태를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게 인간이라는 데 착안하여, 인간을 ‘행복중독자’라고 지칭한다. “요컨대 인류의 가장 명확하고 단순한 특징은 감정을 숭배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감정 상태에 따라 행복의 유무를 결정하기 때문에 감정이 사라지면 ‘행복하지 않다’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어떤 감정을 좇고 있지 않은가? 늑대는 감정을 좇기보다는 토끼를 쫓으며 우리에게 냉소를 날린다.

  브레닌은 토끼를 쫓는 일을 즐겨한다. 토기의 움직임을 따라 15분까지 숨죽인 채 기다리는 모습. 몸을 경직시켜 다음 순간을 위해 참고 견디는 일. 그것은 분명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동물이 먹이 앞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것은 본능을 역행하는 일이므로. 그렇다고 브레닌은 그런 기다림을 통해서도 토끼를 잘 잡는 늑대도 아니다. 하지만 사냥이 실패로 끝나도 브레닌은 행복해한다. 사냥에 성공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사냥을 하는 과정이 행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마크 롤랜즈는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즐거움과 불편함이 하나 될 때 비로소 행복이 완성된다는 철학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안의 늑대를 깨워라 

  늑대와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쉽게 떠오르는 대답이 있다. 바로 ‘동물’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동물의 특징을 늑대와 사람 둘 다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동물의 특징은 무엇인가. 바로 ‘본능’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늑대를 판타지 속에 구겨 넣었던 우리들, 늑대를 야만과 절대 악의 상징(남자는 늑대?)속에 가두었던 우리도 한때는 늑대였다고 말한다. 야만도 사악함도 아닌 본능을 가진 그 자체로서의 늑대 말이다.

  이 부분을 주제로 다룬 것이 영화 <늑대소년>이다. 송중기가 연기하는 늑대 인간 철수는 늑대 본성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인간도 날 때부터 감정을 좇아다니지는 않는다. 감정에 노예가 된 것은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바로 세상에 길들여져 가려져 있는 우리의 참 모습을, 삶의 참 모습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늑대와 같은 본성을 깨우라고 주문한다. 우리 안에는 모두 늑대와 같은 본성을 갖고 있다는 말로써 설득하면서. 즉, 우리 내면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늑대 찾기 모험을 떠나라는 이야기다. 내 안의 멸종 위기에 처해있는 늑대를 찾아 보호하러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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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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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게 힘이다. vs 르는게 약이다.


  익숙한 두 가지의 말이 있다. 아는게 힘이다. 그리고 모르는게 약이다. 서로는 상충되는 말이다. 상황에 따라서 두 가지의 말을 적절하게 골라서 쓴다. 자신이 개입된 상황, 즉 주체라면 아는게 힘일 것이고 3자의 입장, 객체의 입장이라면 모르는게 약일것이다.(물론 아는것이 힘일 때도 있다.) 하지만 소설속에 꾸며진 배경무대는 주체라고 하기도, 객체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환경이다. 


  『허수아비 춤』의 배경무대는 '정치민주화'를 이룩해낸 80년대를 지나 90년대를 그린다. 당시 우리나라 90년대의 자화상일 것이다. 당시 기업들의 방만한 경영과 그들의 이기주의를 작가는 이 책에서 여과없이 보여준다. 그들이 행했던, 어쩌면 지금도 행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범죄들. 작가는 이 책을 통해서 '경제민주화'에 한발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리라.


  잠시 작가의 말을 떠올려보자.


  정치에만 '민주화'가 필요한 것인가? 아니다. 경제에도 '민주화'가 필요하다. '경제민주화'? '정치민주화'에 비해 낯선 말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말뜻은 어렵지 않다. 이 땅의 모든 기업들이 한 점 부끄러움 없이 투명경영을 하고, 그에 따른 세금을 양심적으로 내고, 그리하여 소비자로서 줄기차게 기업들을 키워 온 우리 모두에게 그 혜택이 고루 퍼지고, 또한 튼튼한 복지사회가 구축되어 우리나라가 사람이 진정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경제 민주화'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세금 내라는 것 다 내고는 사업 못해 먹는다.' 수십 년에 걸쳐서 이런 말을 예사로 할 정도로 거의 모든 기업들은 투명경영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대기업들의 비자금 사건은 나날이 커지면서 사회적 불신이 자꾸만 깊어지고 있다. 왜 그런 행태들이 고쳐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그런 행위들이 바로잡힐 수 있을까. 그런 잘못들이 반복되는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제 우리는 그런 물음들 앞에 정면으로 서야 할 때가 되었고, 그 응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이르렀다. 그것이 바로 '경제 민주화'를 이루어내는 길이다.


  # 아는 것이 힘이다.


  이 소설에서는 대기업의 비자금 조성의 관한 일이 여과없이 자세히 나타난다. 어떤 식으로 고위 공무원을 매수하며, 어떤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하는지. 그리고 법정에서 일어나는 그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서 리얼리티 상황이라는 느낌이 충분하다. 그렇기에 이런 비도덕적인 행위들이 어떤 식으로 자행되는지 알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알고 있다면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는 충분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경제적 논리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마음. 그것을 조금이나마 키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을 견딜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기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모르는게 약이다.


  대기업의 간부들이 소설속 주인공이다. 그들이 비자금을 조성하고, 그들이 모든 시스템을 가동한다. 위에서 언급햇듯 이러한 과정은 너무나 사실적으로 들어난다. 회사원인데도 불구하고, 연봉10억을 받고 스톡옵션으로 100억 500억을 노린다. 자본주의에서 상대적 박탈감. 물론 소설속 주인공이지만, 비도덕적인 행위로 인해서 이런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다면. 이러한 상대적 박탈감이 찾아온다. 우리나라의 너무 어이없는 현실에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뒷모습을 바라본 필자의 마음은 너무도 쓰렸다. 차라리 안봤으면 좋았을텐데...라는 느낌이 중간중간 들기도 하였다. 때론 모르는게 약이다.


  # 마무리


  결론으로 말하자면, 몰라서 진통제를 처방받는 것보다는, 알아서 힘이 되는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논리앞에서 무너지고 있다. 돈을 위해서라면 비도덕적인 일을 서슴치 않게 한다. 경쟁에서도 마찬가지다. 협동이란 단어는 보기 힘들어진 상황이다. 협동보단 경쟁을 강조하는 이 사회에서, 너무 자신을 위한 개인 이기주의로 내몰지 않나 싶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같이 이 느낌을 공유하고, 같이 경제민주화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사회자체가, 여론자체가 변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 더 발전된 대한민국을 희망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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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살인게임 2.0 밀실살인게임 2
우타노 쇼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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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건은 트릭을 위한 것일 뿐이다.

 

  『밀실살인게임 왕수비차잡기』에 이은 2편이다. 기본적인 구성은 1편과 같다. 추리게임을 좋아하는 5명이 모여서 자신이 고안한 트릭을 제시하고 나머지가 그것을 푼다. 트릭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 아무도 모르는 사람을 살해하기도 하고, 자신의 가족을, 자신의 애인을 살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트릭을 풀어보라며 문제를 제시한다. 인간 목숨은 장난감, 자신의 추리게임을 풀어가는 희열이 더 상위에 있는 사람들. 도덕적 파괴이다.

 

  같은 구성이라서 그런지, 1편에 비해 컬쳐쇼크는 덜 했다. 그런 느낌이다. 인간의 가치를 한없이 떨어뜨렸고, 개인주의에 입각한 주인공들. 어쩌면 뭐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는... 인간사에 있어서 쾌락이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 인간의 본능이 도덕보다 앞선다?

 

  한가지 생각해보자. 인간의 목숨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전인류적인 가치일까? 모든 인류가, 사람이라면, 아니 본능적으로 인간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할까? 섣부르게 대답할 수 없다. 예라고 말하기도, 아니라고 말하기도.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인 쾌락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사회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무한경쟁에 내몰리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발현되는 현상일지도 모르지만, 경쟁으로 인해 '우리'가 아닌 '나'라는 인식이 강해져서 이러한 상황은 더 심각해 지는 것 같아서 아쉽다.

 

  # 마무리

 

  밀실살인게임 3권이 나왔다. 우타노 쇼고의 작품이라 한번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은 있다. 인간은 쾌락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비도덕적 인간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작가는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사람을 장난감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 통용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런 주제를 스토리흐름에 던져놓았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그것을 보았고, 그것을 건졌다. 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도 작가의 생각을 건져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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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금서
김진명 지음 / 새움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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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韓은 어디서 유래하는 것인가?

 

  우리나라의 역사는 고조선이라는 신화에서 비롯해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가 기반이라고 지금껏 배워왔다. 여러 변방의 나라들이 있었고, 통일 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 이렇게 우리의 역사를 배워왔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기원전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미지의 세계였는가? 백두산 호랑이가 뛰어노는 그런 자연상태였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물론 기록이 되지 않은 상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치부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천년의 금서』는 픽션과 팩트를 절묘하게 오고가고 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구분하기가 힘들다. 어찌보면 이 책에 대한 몰입도는 픽션과 팩트의 경계에서 무엇이 픽션이고 무엇이 팩트인지를 구분하기 위해 더 몰입도가 상승했는지도 모른다. 단순한 추리소설이 아니다. 이것이 픽션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애국심이 소설에 대한 감탄사를 나오게 한다.

 

  주인공인 정서는 이러한 우리 자신을 투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실을 파헤치고 싶은 마음. 과연 고조선 이전에 문명적으로 발달한 韓이라는 나라가 존재했으며, 중국의 초기국가인 주나라가 그것을 경배했다는.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라면서 나는 주인공 정서에게 감정을 이입했을지도 모른다. 진실의 키를 가지고 있는 은원이 갑작스럽게 영웅으로 등장하기는 하지만(논리적으로 너무 급전개되었다.) 그래도 은원의 논리는 정확하다.

 

  처음의 시작은 밀실살인이라는 추리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책이 말하고 싶은 본질은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우리나라 역사를 알고 싶은 주제가 여실히 들어난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동북공정에 대해서 작가는 과감하게 거짓이라고 판명지어준다. 통쾌하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중국의 허무맹랑한 논리를 소설속에서나마 깨뜨리고 있다. 다른 나라사람이 이 책을 보면 어떨지 모르지만, 한국사람이 보기엔 너무나 좋은 구실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책은 비판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지금껏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해 물음표를 던져보라고 충고한다. 고조선이라는 역사에 대해 일본의 잔망스러운 짓으로 인해 신화화되어 거짓이 되어버리고, 삼국시대 이전에 역사는 없다는 중국의 말을 듣지말고. 사실이라고,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과감하게 물음표를 던져보라고 권유한다. 어찌보면 그것이 앎의 길이므로.

 

  한가지 더. 역사를 공부함에 있어서 역사책만 들여다보면 답이 안나온다는 것이다. 역사에 관한 기록을 역사서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그 증거가 들어난 다는 점을 통해서 시야의 확보를 이야기 한다. 나라의 역사를 찾아가는 과정에 해답은 공자가 즐겨읽었다는 시경이다. 어찌보면 한 우물만을 바라보고 파내려가는 오늘날의 행태에 작가는 비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재미있다. 유익하다. 그렇게 결론지을 수 있는 책이다.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소설이 아니라 마음에 꽁기꽁기한 것을 남게 해주는 책이다. 읽어보면 동북공정에 관해 인터넷에 검색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무엇가는 남길 수 있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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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백영옥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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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슬픈 것은 개인에 관계없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연인과 헤어진다면 세계는 그를 위해 멈춰야 한다." 

 - 본문 158쪽.


  제목이 눈길을 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이라니. 일곱시? 아침 일곱시를 말하는 것인가? 쌩뚱맞다. 하지만 호기심을 강하게 생기게 함은 충분하다. 개인적으로 실연의 아픔을 아직 겪고있는 필자의 경우 너무도 가고 싶은 모임이다. 시간이 흐르지만, 마음속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정지해버렸다. 내 마음의 세계는 나를 위해 멈춘듯 하다. 


  한동안 이런 종류의 연애소설을 많이 읽었다. 나름의 위안이었고, 나름의 생존방법이었다. 모든 것을 다 내어줄 만큼의 사랑도, 오랜 시간동안 서로가 쌓아올린 공든탑은 '이별'이라는 단어와 함께 모든게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인어공주에서 공주가 사라지듯. 다만 한가지 다행인 것은 연애소설의 엔딩은 이별로 끝나는게 아니다. 오히려 이별은 클라이막스이고, 새로운 시작이 엔딩이 된다.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생에 있어 하나의 마침표를 찍는 일이라면, 새로운 만남은 ","를 상징한다. And이다. 불교의 교리처럼 새로운 사람과도 같은 연애를 반복할 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으로 되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다시 연애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이 책은 너무 늦게 읽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 더 빨리 나왔으면 좋았을 것을...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별직후, 슬픔의 안개에서 길을 못찾고 허우적 거리고 있을 때 이 책을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필력이 너무 좋아서 읽는 내내 울컥했다. 소설속 사강과 지훈의 이야기들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공감도 많이 되고.


  "세상에 수 많은 다른 언어가 존재하고, 번역이 필요한 수많은 사랑과 이별의 언어가 있듯, 우리는 누군가 나 아닌 타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기약 없는 사랑에 빠지고, 출구 없는 사랑에 넘어지고, 후회하고, 절망하고, 다시 또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인간이란 너무 허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 본문 405쪽.


  많은 마음의 위안이 된 책이다.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예전의 것에 마침표를 찍어야 겠다. 그래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멋진 사랑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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