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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기초학문의 화두] 2. 원자와 원자가 만나서
21세기 과학과 환원주의적 연구방법
-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다
- 김재영(과학문화센터 연구원)
20세기 자연과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여러 과학들이 물리학의 연구방법을 모범으로 삼아 연구를 진행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복잡해 보이는 원자핵의 성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자핵을 구성하는 핵자(양성자와 중성자)들의 성질을 명료하게 밝힌 뒤, 이들이 어떻게 모이고 상호작용함으로써 원자핵의 성질들을 야기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물리학의 전형적인 연구방법이다.
지진학/지질학/기상학/해양학/천문학 등 물리/화학적 이론을 눈에 띄는 구체적인 현상들에 적용하는 과학으로 볼 수 있는 영역은 물론이거니와 화학이나 생물학에서도 ‘물리학적 연구방법’은 최대한 추구해야 할 모범인 양 여겨져 왔다. 예를 들어 화학적 분자결합은 개별 원자들의 파동함수들이 어떻게 혼합 오비탈을 이루어 관측되는 성질을 나타내는지를 연구하는 것을 모범으로 삼으며, 핵산 속 염기들의 배열에 의한 것인 듯이 보이는 유전 기제는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결국 게놈 프로젝트와 같은 연구방법을 통해 탐구할 주제로 여겨진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20세기 후반의 여러 과학들은 이런 ‘물리학적 연구방법’, 더 정확히는 ‘환원주의적 연구방법’에 이의를 제기했다. 기본입자를 구성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쿼크와 전자 따위를 잘 기술하는 이론들은 아원자 수준의 미묘한 현상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매우 훌륭하지만, 이 이론들을 예를 들어 생명현상이나 고체나 분자 수준에 적용하려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어리석은 접근이 될 수도 있다. 물리학자 앤더슨은 일찍이 “많아지면 달라진다”(More is different)는 모토를 제시하면서 기본입자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알더라도 분자나 고체에서는 또 다른 새로운 성질과 현상이 나타난다는 자신의 믿음을 피력한 바 있다. 게놈의 구조와 성질을 정확히 알아낸다고 해서 생물학의 모든 문제들이 곧바로(또는 언젠가) 풀리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20세기 후반의 과학은 환원주의적인지 않은 연구방법의 필요성을 강하게 요청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어떤 단백질의 구조를 모두 밝히면 그 단백질의 기능에 대해서도 모두 알게 되리라는 믿음이나, 쿼크에 대해 모두 알게 된다면 원자핵 수준의 복잡한 현상들에 대해서도 모두 알게 되리라는 믿음은 상당히 위협받고 있다. 즉 부분을 안다고 해서 그 부분들이 이루는 전체를 아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사실상 이미 원자핵 물리학에서 화학적 방법을 원용하고, 분자화학에서 생물학적 방법을 원용하는 것은 암묵적이지만 익숙한 접근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지금까지 성공적이었던 환원주의적인 연구방법이 이제는 그 역할을 다 했고 폐기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방법도 여전히 과학연구에서는 중요한 수단이 돼 줄 것이지만, 여태까지는 다소 홀대받았던 비환원주의적 방법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원자와 분자의 세계
- 삼라만상을 만드는 분자의 세계
- 김희준(서울대 교수, 화학)
시카고대학 유학 시절, 물리학과 콜로퀴엄에서 후일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대만 출신 유안 리 교수(Yuan T. Lee)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강연을 시작하면서 “여기 양성자 두 개와 중성자 두 개, 전자 두 개가 있다고 하자. 물리학자는 이들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따지지만, 화학자는 간단하게 헬륨 원자 한 개가 있다고 말한다”고 운을 떼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구성하는 쿼크들과 그 밖의 여러 가지 기본적인 소립자들을 연구하는 것은 물질 세계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면에서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하고 흥미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일단 소립자의 세계를 이해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이들로 구성된 원자들이 어떻게 결합해 우리 주위의 물질 세계를 만들어 가는지를 연구하는 것 또한 흥미로우면서도 실제적인 과제가 된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 삶의 터전인 지구의 조건 하에서는 원자와 분자가 안정된 물질의 단위이고, 우리 자신도 원자, 분자를 단위로 해서 이뤄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화학 반응을 기초로 일어나는 생명 현상에서는 기본입자들이 원자, 분자들을 만들기 위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물리학은 이미 원자 하나 하나를 보고, 포획하고, 이동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원자의 성질을 이해하고 이용해서 반도체, 레이저, MRI 등 인간의 삶을 편하고 풍요롭게 하는 수많은 발견과 발명을 이루어냈다. 또한 20세기 화학은 물질 세계의 다양성을 구현하는 데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자연에 존재하는 90가지 정도의 원소 중에서 20~30가지 원소를 주로 사용해서 만들어진 화합물의 수는 2천 5백만을 넘어섰고, 그 중 많은 화합물이 의약품 및 생활용품으로 현대인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 화합물은 현대인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 맺고 있어 -
그러면 21세기 원자, 분자과학의 주 활동무대는 무엇이 될까? 아니면 일부 사람들이 염려하는 대로 물리학, 화학은 전성기를 다 보내고 황혼을 맞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19세기 말 미국 특허청장이 “이미 발명될 만한 것은 다 발명됐다”고 말하며 특허청의 폐쇄를 제안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칼라 TV, 컴퓨터, 인터넷, 휴대폰은 꿈도 꾸지 못할 때에 말이다. 20세기가 그러했듯이 꿈을 가지고 미래를 설계하고 준비하는 자에게 21세기에는 20세기에 이루어진 원자, 분자과학을 기초로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될 것이다.
21세기 원자, 분자과학의 키워드는 ‘나노’와 ‘바이오’다. 컴퓨터의 대중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20세기의 과학, 기술은 마이크로 단위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마이크로미터는 밀리미터의 천 분의 1이다. 세포의 세계도 마이크로의 세계이고, 반도체도 마이크로의 세계이다. 한편 20세기 물리학, 화학의 주 활동무대였던 원자, 분자의 세계는 나노 이하의 세계이다. 나노는 마이크로의 천 분의 1인데, 원자의 지름은 0.1 나노미터 단위이고, 원자가 여러 개 모여 분자를 이루면 나노미터 크기가 된다. 잘 알려진 DNA 이중나선의 지름이 2 나노미터이다. 잘 개발된 이 두 영역, 즉 마이크로 세계와 원자 세계의 중간 영역인 수십 나노 내지 수백 나노미터 단위의 나노 세계는 메조 세계이다. 소프라노와 알토 사이에 메조소프라노가 있듯이 말이다.
잘 알려진 대로 원자 세계는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처럼 거시 세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양자역학의 세계이다. 그런데 메조 세계는 양자역학의 세계와 거시 세계의 중간 성격이 드러나는 아주 재미있는 세계이다. 이 미개척 분야에서 많은 새로운 물리적 현상들이 발견되고, 첨단 기술들이 등장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데 메조 세계를 구축하는 데는, 실리콘 칩을 만드는 데 리소그래피(lithography)를 사용하듯이 원하지 않는 부분을 제거하는 종전의 top-down 방식을 적용할 수 없고, 원자에서 출발해서 거대 구조를 만드는 화학적 ottom-up 방식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자기 조립(self-assembly)’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가 등장한다. 수십 내지 수백 개 정도의 원자로 구성된 분자는 종전의 화학적 방법으로 디자인하고 합성할 수 있다. 그러나 수십 나노미터 단위의 메조 구조를 만드는 데는 어떤 기본적인 구조들이 분자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 조합을 이루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눈송이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에는 이러한 자기 조합을 통해 이루어진 구조들이 많이 존재한다. 자연에서 지혜를 배워야 할 부분이다.
- 생체모방, 과학기술 전반에 새로운 패러다임 제공 -
20세기 중반에 분자생물학이 등장한 이래 생물학은 생명 현상을 서술하는 데서 물리, 화학의 법칙에 입각해 생명 현상을 설명하는 단계로 비약했다. 나아가 21세기의 생명과학은 과학기술 전반에 대해 생체 모방(bio-mimic)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마이크로 단위에서 벽에 부딪친 기억소자 기술은 수십억 년 동안 나노 단위의 DNA에 정보를 기록하고 처리해온 생체를 모방하는 데서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강철보다 강한 거미줄에 숨어있는 단백질 구조나 무한한 태양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화학 에너지로 전환하는 광합성 시스템을 흉내내는 것 모두 생체 모방의 일례에 불과하다. 환경 정화에도 수억 년 간 악조건 하에서 살아남은 박테리아로부터 비방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기대되는 분야는 세포 내에서 생명의 반응들을 촉매하는 수만 가지 효소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의 상관 관계를 밝히고 이로부터 질병의 진단과 치료의 단서를 찾는 프로테오믹스(proteomics)이다.
21세기를 주도할 나노, 바이오 과학 기술의 공통점은 원자들의 집단인 분자를 다룬다는 점이다. 탄소 나노 튜브, 발광유기반도체, DNA칩, 단백질칩 모두 원자로 구성된 분자들이다. 원자, 분자를 다루는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의 유기적인 공조를 통해 21세기에도 기초과학이 인류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을 기대한다.
※ 용어해설
▲ 리소그래피 : 반도체 집적회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회로 패턴을 기록하는 방식. 실리콘 판 표면에 전자 빔으로 미세한 회로 패턴을 새기는 것을 말한다.
▲ top-down 방식 : 원하는 분자 구조를 얻기 위해 쓸모없는 부분을 제거하는 방식.
▲ bottom-up 방식 : 원자를 결합시켜 원하는 분자구조를 만드는 화학적 방식. 기존의 top-down 방식으로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작은 구조, 즉 나노 구조를 만들 때 사용된다.
▲ 자기 조립 : 분자가 자발적으로 모여 거대한 구조를 만든다. 이처럼 인간이 화학적으로 조립하지 않아도 스스로 분자구조를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 생체 모방 : DNA나 효소의 작용처럼 생체가 스스로 분자 구조를 만드는 방식을 모방하는 기술.
▲ 프로테오믹스 : 단백체 연구를 말한다. 유전체 연구는 지노믹스.
▲ 파동함수 : 양자역학에서 물질입자인 전자, 양성자, 중성자 등의 상태를 나타내는 함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