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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 곡물 자본, 한국 밥상을 점령하다
월간 말 2004년 09월 16일
이정환 기자 blue@digitalmal.com
당신이 평균적인 식사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난 한해 동안 83.2kg의 쌀을 먹었을 것이다. 쌀 한 가마니가 80kg이니까 1년에 한 가마니 조금 넘게 먹는 셈이다. 밥 한공기를 1백25g으로 잡으면 모두 665.6공기, 하루 평균 1.8공기 정도다. 하루에 두 공기를 채 못먹는다는 이야기다. 이 통계는 밥으로 먹는 쌀 뿐만 아니라 쌀 가공식품 등 전체 쌀 소비를 모두 포함한 것으로 당신이 실제로 먹는 밥의 양은 좀더 줄어들 수 있다. 1인당 쌀 소비량은 1990년 1백20kg에서 2003년 83.2kg으로 해마다 급감하는 추세다.
당신은 또 지난 한 해 동안 8.1kg의 소고기와 17.3kg의 돼지고기, 7.9kg의 닭고기를 먹었을 것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육류 소비량은 1백59만5천 톤에 이른다. 1인당 33.3kg이다. 흔히 식당에서 먹는 삼겹살 1인분 2백g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한 사람이 1년에 평균 1백66인분 정도 육류를 먹는다는 이야기다. 1인당 육류 소비량은 쌀 소비량과 반대로 1990년 24.7kg에서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올해 6월 말 기준 우리나라에서 사육되고 있는 소는 모두 2백14만 마리, 돼지는 9백2만 마리, 닭은 1억2천2백74만 마리에 이른다.
쌀 빼면 곡물 자급비율 2.7%
문제는 이 소와 돼지와 닭들이 먹는 사료다. 200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사료 소비량은 2천3만 톤. 배합사료가 1천5백80만 톤을 차지하는데 이 가운데 1천1백75만 톤이 수입 배합사료다. 우리나라 배합사료의 자급비율은 24.7%에 지나지 않는다. 사료로 쓰이는 곡물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료 곡물은 8백78만 톤으로 우리나라 전체 곡물 소비량의 41%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 국산은 19만 톤밖에 안된다.
특히 6백65만 톤에 이르는 옥수수의 경우는 99.9%가 수입 옥수수다. 우리가 먹는 소와 돼지와 닭, 대부분이 수입 옥수수를 먹고 자란다는 이야기다. 이밖에 기타 사료 곡물의 자급비율도 15.7%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우리나라의 사료 곡물 수입은 1980년 2백1만 톤에서 2002년 8백60만 톤으로 네배 이상 늘어났다.
사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곡물 자급비율은 심각할 정도로 낮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곡물 소비량은 2천98만톤. 이 가운데 우리는 1천5백44만 톤을 수입했다. 자급비율은 26.9%로, 2002년 30.4%에서 크게 줄어들었다. 30개 OECD 국가 가운데 최저 수준이다. 특히 511만 톤에 이르는 쌀을 빼면 자급비율은 2.7%로 줄어든다. 참담한 상황이다. 품목별로 보면 옥수수가 8백55만 톤, 콩이 1백45만 톤, 밀이 38만 톤에 이른다. 금액으로는 각각 10억 달러, 4억 달러, 6억 달러 규모다.
인천항, 세계 최대의 곡물 수입 항구
이처럼 폭증하는 수입 물량 덕분에 인천항은 이미 세계 최대의 곡물 수입 항구가 됐다. 2001년 기준으로 인천항의 곡물 수입 물량은 9백78만 톤. 유럽 곡물 수입의 관문인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9백59만 톤)이나 로테르담(8백49만 톤)보다 큰 규모다. 우리나라 곡물 수입은 세계 곡물 무역량의 약 4.8% 규모에 이른다. 일본(10.1%)에 이어 세계 2위 규모다.
물론 일본과 우리나라는 상황이 또 다르다. 일본은 일찌감치 식량 주권 개념을 앞세워 해외 생산 기지 건설에 주력해 왔다. 일본의 곡물 수입은 2002년 기준 2624만 톤에 이르지만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일본 기업들이 해외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물량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전적으로 다국적 곡물 자본에 수입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고 해마다 곡물 가격이 급등락을 거듭할 때마다 골머리를 앓는다.
2001년 기준 세계 인구는 61억3천4백14만 명. 곡물 생산량은 세계적으로 20억1천8백76만 톤으로 1인당 3백29kg 수준이다. 특히 선진국의 곡물 생산량이 돋보인다. 미국과 캐나다, 프랑스의 경우 1인당 곡물 생산량이 각각 1천2백91kg과 1천1백97kg, 1천1백66kg에 이른다. G7 국가로 넓혀보면 1인당 생산량은 8백16kg으로 세계 평균의 2.5배에 이른다. 11.5%의 인구가 전체 곡물의 28.4%를 생산해 세계적으로 잉여 곡물을 공급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1인당 곡물 생산량은 1백17kg에 지나지 않는다. 자급비율은 오히려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한 사람이 한해 소비하는 곡물을 3백50kg 정도로 잡는다면 우리나라는 전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 곡물 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세계적으로 1인당 곡물 생산량은 3백29kg, 우리나라는 여기에도 한참 못 미친다.
7월 1일 미국 농업부가 발표한 세계 곡물 수급 동향에 따르면 올해 곡물 생산량은 지난해보다 5.7% 늘어난 19억4천1백98만 톤이 될 전망이다. 생산이 크게 늘어나기는 했지만 문제는 소비량이다. 소비량은 지난해보다 1.4% 늘어난 19억6천4백3만 톤으로 여전히 공급이 소비를 못 따라가는 상황이다. 곡물 재고는 3억1천8백38만 톤으로 재고비율은 16.2%까지 떨어졌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권고한 식량위기 방지를 위한 권고 수준 16%가 위협 받는 수준이다. 이같은 위기는 1984년 이래 처음이다.
카길과 ADM, 점유율 75% 육박
세계적으로 곡물 시장은 미국의 카길과 ADM(아처 다니엘스 미들랜드), 두 회사가 장악하고 있다. 이들의 시장점유율은 75%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밖에 역시 미국의 콘 아그라와 프랑스의 루이 드레퓌스와 아르헨티나의 분게 등 이른바 5대 곡물 메이저의 시장점유율은 90%에 육박한다. 옥수수의 경우 상위 3개 회사의 시장점유율이 81%가 넘고 콩도 역시 상위 3개 회사의 점유율이 65%에 이른다. 밀은 상위 4개 회사의 점유율이 61% 수준이다.
특히 세계 최대의 곡물 자본인 카길은 우리나라 곡물 시장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회사는 비공개 개인 기업이라 구체적인 실상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지난해 11월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브스』가 조사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카길의 지난해 매출액은 5백99억 달러, 세계를 통틀어 비공개 기업 가운데 최대 규모다. 우리 돈으로 치면 72조 원,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43조 원)보다 훨씬 큰 규모다.
1865년 윌리엄과 새뮤얼 카길 형제가 설립한 이 회사의 경영권은 1백50여 년 동안 혼인으로 엮인 카길과 맥밀란 두 가문에 상속돼 왔다. 이 두 가문의 지분 비율은 아직도 55%를 넘어선다.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5백대 부호’ 순위에서 이 회사의 최대 주주, 제임스 카길과 마가렛 카길의 재산은 각각 15억 달러로 공동 1백40위를 기록했다.
주목할 부분은 이 회사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이다. 대니얼 암스터츠 전 부회장은 198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농업협상에 제출됐던 미국의 ‘예외 없는 관세화’ 방안의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당시 미국 협상팀의 농업 대표를 맡았으며, 지난해부터 이라크 재건사업 농업부문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휘트니 맥밀란 전 사장은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의 심사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어네스트 마이섹 전 사장은 빌 클린턴 정부 시절 대통령 수출자문단으로 활동했다. 그는 지난해 멕시코 칸쿤에서 열렸던 세계무역기구(WTO) 농업협상에도 깊숙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를 두고 인도의 환경운동가 반디나 시바는 “WTO 협상은 카길 협상이라고 불려야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프랭크 심즈 사장은 2001년 미국 농부부 생명과학기술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유전자 조작 식품 재배를 확대 허용하는 법안을 추진했다.
거침없는 인수합병 전략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카길은 1999년 콘티넨털 그레인을 인수합병하면서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확보한다. 당시 카길의 곡물 저장 능력은 4억 부셀(1부셀은 약 35.24 리터)에서 5억5천 만부셀로 늘어나 2위인 ADM을 크게 앞질렀다. 2003년 기준, 카길의 세계 곡물 시장 점유율은 50%를 웃도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도 카길은 2000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사료회사, 애그리브랜드 인터내셔널를 인수하기도 했다. 이어 2001년에는 칠면조 가공회사 로코 엔터프라이즈를 인수했고 2002년에는 녹말과 감미료를 만드는 체레스타를 인수했다. 카길은 곡물 교역뿐만 아니라 옥수수와 밀 제분업을 비롯해 설탕과 면화, 석유의 무역과 운송, 식품 가공, 금융 거래, 철강과 카지노 등 광범위한 사업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미국 미네소타주에 본사를 두고 세계 61개국에 걸쳐 8백 개의 공장과 10만여 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인공위성으로 전세계 작황 점검
이 회사는 제 3세계 국가에 진출해 협동조합과 계약을 맺고 시장을 장악, 농민들을 저임금 계약 노동자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카길이 터무니 없이 낮은 가격을 제시해도 카길 아니면 작물을 팔 데가 없는 농민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이 회사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카길은 인공위성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의 곡물 경작 상황을 점검하고 흉작이라고 판단되면 곧바로 매점매석에 들어간 다음 가격을 끌어올리고 이익을 챙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과정에 미국 CIA까지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도 있다.
한편 카길과 합작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 최대의 농업생명공학기업 몬산토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90%에 육박한다. 몬산토는 콩과 면화 종자 판매에서 미국 1위 기업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콩의 53% 가량이 유전자 조작 과정을 거친 것으로 추정된다. 옥수수나 면화의 경우도 이 비율이 각각 21%와 11%에 이른다.
카길은 지난해 식품 소매업체 크로거와 소고기 납품 계약을 맺고 소매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이른바 “종자에서 슈퍼마켓까지”라는 농식품 체제 지배전략이 현실화되고 있는 분위기다. 카길은 이제 유전자에서 시작해 곡물의 생산, 가공, 사료 생산은 물론이고 육류의 생산과 가공과 유통까지 개입하고 있다. 그 영향력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종자에서 슈퍼마켓까지”
카길뿐만 아니라 ADM이나 다른 주요 곡물 자본의 시장 지배전략도 비슷하다. ADM도 역시 농업생명공학기업 신젠타와 제휴관계를 맺고 있다. 신젠타는 해충에 내성을 갖춘 유전자 조작 옥수수 종자를 생산하고, ADM은 이 종자를 농민들에게 보급한다. ADM은 특히 농민협동조합인 컨트리마크 등을 인수, 미국 동부지역의 옥수수를 싹쓸이하고 있다. 신젠타는 1997년 서울종묘와 농진종묘 등 국내 종자회사들을 잇따라 인수하기도 했다.
콘 아그라도 역시 세계 최대의 종자 기업 듀폰과 제휴관계를 맺고 있다. 콘 아그라가 계약생산 농장에서 사들인 옥수수는 콘 아그라의 대규모 사육농장에 공급되고 여기서 나온 육류는 다시 콘 아그라의 상표를 달고 세계의 슈퍼마켓으로 팔려 나간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수입 육류의 상당 물량도 이런 방식으로 생산된다.
이들은 세계대전 이후 우리나라를 비롯한 후진국 식량 원조를 통해 성장했다. 미국은 이 과정에서 수출 개방을 강요하고 곡물 의존도를 심화시키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었다. 동시에 미국의 곡물 자본은 정부의 재정 지원과 융자 등의 혜택에 힘입어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1972년의 세계적 식량 위기는 이들이 세계 시장을 장악하는 데 절호의 기회였다. 소련에 대대적인 흉작이 들면서 국제 곡물 가격이 폭등했고 이 기회를 노려 미국의 곡물 자본은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자연스럽게 세계적인 구조조정과 함께 막강한 과점체제를 구축했다.
문제는 이처럼 세계 곡물 시장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일부 다국적 곡물 자본에 장악되면서 세계의 식량 위기가 더욱 가중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들의 관심은 철저하게 기업의 이익에 집중돼 있을 뿐 곡물의 안정적인 공급이나 제3세계의 기아와 빈곤 문제 해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세계 곡물 시장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면서도 이들에게 그에 걸맞은 책임 의식을 기대하기 어렵다.
위기의 징후는 수두룩하다. 다만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대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돈만 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과점 시장인데다 마땅한 대체재도 없는 상황이라 공급이 조금만 달려도 가격은 폭등하게 마련이다. 그게 바로 일본이나 스위스, 이스라엘, 네덜란드 등이 곡물 자급비율 회복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고 있는 이유다.
공급 2.4% 줄어들면 가격 3배 폭등
우리나라는 1980년 흉작이 들었을 때 국제 가격으로 1톤에 2백 달러 하던 쌀을 5백50 달러씩 주고 미국에서 사들여 왔다. 이에 앞서 1972년에는 6백61달러씩 주고 쌀을 수입하기도 했다. 일본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일본이 1993년 쌀을 수입했을 때 국제 쌀 가격의 70% 이상 급등했다. 미국 쌀 경작자협회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쌀을 수출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기도 했다. 결국 일본은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에 쌀을 수입해야 했다.
북한도 피해자다. 1998년 북한은 카길에게 밀 2천 톤을 사들이고 그 대가로 아연을 지급하기로 했는데 아연지급이 늦어지자 카길은 화물선을 그대로 돌려서 가버렸다. 1976년 콩고의 기아 사태도 비슷한 경우다. 곡물 대금 결제가 늦어진다는 이유로 콘티넨털은 밀 공급을 즉각 중단했고, 이 나라는 곧 심각한 식량 위기에 부딪혔다. 시장 확장을 가로막으면 경제 보복도 서슴지 않는다. 1988년 나이지리아가 밀 수입을 거부하자 카길은 미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해 나이지리아의 섬유 수출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곡물의 독점은 그 어떤 전쟁 무기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미국의 곡물 회사들에게 소련에 밀과 옥수수, 콩 등을 수출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1979년 30억 달러 규모였던 수출 규모는 1980년 13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소련은 사료 곡물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겼었다. 미국은 1985년 사회주의 개혁을 막는다는 이유로 니카라과에도 곡물 수출을 금지시킨 바 있다. 미국의 곡물 수출 제재는 친미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5년 넘게 이어졌다.
담합에 의한 시세 조종도 빈번하다. 1972년 세계 밀 생산량이 2.4% 줄어들자 국제 시세가 3배나 뛰어올랐다. 창고에는 재고가 쌓여있었지만 이들은 재고를 풀지 않았다. 국제가격이 4.6배나 뛰어올랐던 1973년의 콩 파동도 비슷한 경우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이렇게 곡물 가격이 뛰어오를 때 그 피해를 고스란히 축산 농가들이 떠안게 된다는 사실이다. 국제 옥수수 가격이 오르면 수입 업체는 당연히 수입 옥수수의 가격을 올리고 뒤어어 사료 가격도 가파르게 뛰어오르게 된다. 그러나 축산 농가는 이렇게 비싼 사료를 울며겨자먹기로 사다 먹이면서도 가축 가격을 제대로 올려받지 못한다.
양돈용 배합사료의 가격은 25kg 기준으로 1994년 4747원에서 2002년 7036원으로 무려 48.2%나 뛰어올랐다. 그러나 비육 돼지의 산지 가격은 90kg 기준으로 같은 기간 15만9천원에서 17만8천원으로 11.9% 오르는데 그쳤다. 곡물 가격이 급등락을 거듭할 때마다 그 부담은 모두 축산 농가의 몫으로 돌아갔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의 곡물 소비량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데서 비롯한다. 2001년 통계를 기준으로 중국은 세계 7위의 곡물 수출국(8백99만 톤)이면서 우리나라에 이어 세계 3위의 수입국(9백93만 톤)이다. 소득 향상과 수요 증가에 힘입어 중국의 곡물 수입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중국의 곡물 생산은 4억3천만 톤으로 소비량 4억8천5백만 톤에 크게 못미쳤다. 중국은 앞으로 곡물 수출국에서 곡물 수입국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중국,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중국의 곡물 재고는 2000년 이래 꾸준히 줄어들어 2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12월 기준 중국의 1인당 곡물 재고는 3백50kg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 국가곡물원유정보센터는 콩 수입이 내년 한 해 동안 17% 이상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자칫 세계적인 곡물 파동이 일어날 조짐도 있다.
30년 가까이 곡물 수입 문제를 연구해 온 유상철 대한벌크터미널 사장은 우리나라의 곡물자급 비율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옥수수 가격은 이미 국내 옥수수가 수입 옥수수의 5배에 이른다. 품질을 감안하더라도 도무지 가격 경쟁이 안 되는 상황이다. 유 사장은 “정부가 아예 식량 주권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 사장은 “이제 와서 곡물을 자급할 수는 없겠지만 지나친 의존 비율을 조금씩 개선해 나갈 수는 있다”며 “개선의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식량 주권을 통째로 다국적 곡물 자본에 넘겨주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경고했다. 유 사장은 일본처럼 우리나라도 미국의 곡물 선물 시장에 진출해 직접구매 방식으로 안정적인 곡물 확보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전체 수입 물량의 90% 이상을 직접구매 방식으로 구매하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75% 가량을 아직도 공개입찰 방식으로 구매하고 있다. 담합에 의한 가격 조정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는 셈이다.
윤병선 건국대학교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다국적 곡물 자본의 세계 시장 지배에 따른 식품의 다양성 파괴를 우려한다. 유전자 조작 품종을 비롯해 생산성과 수익성이 가장 높은 품종을 중심으로 세계 곡물 시장이 재편되면서 전통 품종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는 특히 IMF 금융 위기 이후 흥농종묘를 비롯해 종자 회사들이 무더기로 다국적 곡물 자본에 넘어갔다. 고추나 양배추, 무 등 헐값에 팔려나간 국내 토종 유전자원을 훨씬 비싼 가격에 되사서 쓸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식량 주권을 지켜라
박민선 농협대학교 교수는 세계 농식품 체제의 재구조화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제 1세계에서는 토지 이용형 식량 작물을 생산하고 제 3세계는 선진국 시장을 대상으로 한 채소나 과일 같은 노동 집약적 농산물을 생산하는 국제적 공정 분화가 이뤄지고 있다. 이처럼 세계적 수준의 노동 분업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는 한 나라의 농식품 체제를 논의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다.
박 교수는 특히 “곡물 자본과 식품가공 또는 소매 기업의 결합 가능성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아직까지는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지 못해 사료 곡물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식용 곡물 시장은 물론이고 식품가공과 소매 시장까지 파고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다국적 소매 기업의 국내 진출과 이를 통한 농식품 체제의 재구조화를 경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세계적으로 시민운동과 농민운동, 환경운동을 연계하고 다국적 곡물 자본의 시장 장악을 막아낼 필요가 있다.
다국적 곡물 자본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 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식량 주권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문제가 더 커지는 것을 막아야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쌀 시장만은 지켜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