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의 유골 캐드펠 시리즈 1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 / 북하우스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추리소설의 불모지라는 한국에서 브라운 신부보다도 덜 유명한 캐드팰 수사를 주인공으로 한 캐드펠 시리즈의 첫째 권. [성녀의 유골]은, 위니프레드 성녀의 유골을 수도원에 모셔오기 위한 일련의 과정에서 음모와 살인사건을 다룬다. 파란만장한 청, 장년기를 보내고 노년기에 수도원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캐드팰 수사는 소설에 등장하는 여타의 수사들과 (당연히) 다르다. 전쟁터를 누볐고 여러 여성들과 사랑의 추억을 갖고 있기에, 그는 ‘속세를 너무 많이 아는’ 수도사다. 그런 사람은 으레 어릴 때부터 성직자를 지망했거나 십대부터 열렬한 신앙에 빠진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욱 가혹하고 엄격할 법도 하건만, 캐드펠 수사는 인생의 지혜를 고스란히 갖고 있다.

시대적 배경이 중세이니만큼 등장인물들이 모두 참으로 종교적이고 중세적이건만, 캐드팰은 상당히 근대적인 인물로 보인다. 종교적 광신에 대한 냉소도 그렇거니와, 약초를 이용해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지극히 중세적이면서도(만약 그가 평민의 처녀였다면 당장 마녀재판을 받았으리라), 이를 처방하는 방식, 그리고 사고논리는 대단히 합리적이다. 그런 인물이 지극히 중세적인 공간에서 나름대로 튀지 않고 그럭저럭 묻혀 살아가는 방식. 혹자는 ‘처세술’이라 할 수도 있지만, 십자군 전쟁에서 오랫동안 떠돈 그에겐 당연한 삶의 지혜일 것이다.

내가 추리소설을 잘 안 읽게 되는 것은, 대부분의 추리소설이 살인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대단히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을 읽다보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코끝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것같다. (물론 불과 몇 편의 추리소설을 읽었을 뿐인 나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가능성이 크지만,) 살인사건이 폭력적인 것은 단순히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는 차원이라기보다는 피살자가 여성일 경우가 많고, 보통은 살인자보다 약자이며, 동기와 과정 등에서 뭐랄까, 인간 본성의 추악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면이 극단적으로 드러난달까, 하는 점들 때문이다. 성선설 신봉자도 아니고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삐딱할 수밖에 없는 뱀파이어 혼혈족이긴 하지만, 그리고 냉소와 독설을 퍽 즐기는 사람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추리소설이 다루는 사건과 일반적으로 추리소설들에 깔려 있는 정서는 좀 그렇다. 게다가 사건을 해결하는 이는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범인을 가려내는 ‘게임’에 더 골몰하곤 하는 것 같다. (뭐, 이건 다른 한편으론, 내가 추리소설의 맛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는 고백이기도 하다.)

[성녀의 유골]은 이상하게도, 그 질척하고 답답한 피 냄새가 없다. 이 소설 역시 살인사건이 등장하고, 끝간 데 없이 추악한 탐욕과 권력욕이 드러난다. 권력과 음모,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줄을 살 서기 위한 암투, 거짓말과 광신과 허위가 난무한다. 그것도 신을 섬긴다는 수도사들 사이에서. 그러나 ‘탐정’ 혹은 ‘형사’격인 캐드팰 수사에게서는, 사건을 멋지게 해결하여 명성을 떨치겠다는 소영웅주의 대신, 살인사건으로 죽은 이와 남겨진 가족들의 상처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보인다.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젊은 연인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자신의 후배인 젊은 수사를 보며 안쓰러워하는 시선도. 비록 인생풍파를 겪어온 이답게 꽤나 냉소적일지라도 그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느낄 줄 알며, 추악하고 역겹다 하더라도 그런 권모술수에 빠져있는 자신의 동료들을 향해 독설과 냉소 속에서도 연민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그는 이제껏 보아온 다른 추리소설의 주인공들과 꽤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마무리를 짓는다. 비록 그것이 진실을 그대로 하늘 아래에 드러내는 것이 아닌, 엄밀히 말해 또다른 거짓말을 하는 방식일지라도, 나는 섣불리 캐드펠 수사를 비난하지 못하겠다.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그 당황은 공모자의 동의와 끄덕거림, 그리고 캐드펠 수사에 대한 신뢰로 바뀌었다. 현명하다고 할 순 없으나, 100% 동의할 순 없으나 충분히 그의 판단과 방식을 존중하고 싶은 것이다.

타이밍이 절묘하게도 막 책을 다 읽은 며칠 후,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온 친구의 덕택에 어쩌면 나머지 캐드펠 시리즈를 조금 더 싸게 구입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안 되더라도 한권씩 한권씩 차례로 사볼 예정이지만. 다음권도 꽤 기대가 된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BBC에서 제작해서 방영한 바 있는, 역시나 오마이스타인 데렉 자코비 영감이 캐드펠 수사로 등장하는 TV 미니 시리즈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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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6-14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바리님, 축하드려요!!! 또 상타셨네요!

노바리 2004-06-16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근데 어째 이주의 리뷰 당선 소식은 언제나 마태우스님께서 알려주시는군요. 마태우스님 리플 읽고나서야 알고 허겁지겁 확인했답니다. ^^;; 아무튼 공돈이 생긴 기분이라 참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