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인사 (밤하늘 에디션)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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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매트릭스는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세계를 의미하며, 이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네오에게 두 가지 형태의 알약을 건넨다. 파란 알약은 비록 허구로 이루어진 세계이지만 그러한 현실에 안주하며 살 수 있는 약이고, 빨간 알약은 참혹하고 고통스럽지만 거짓을 꿰뚫고 불편한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약이다. 네오는 단 한번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순간에 빨간 알약을 삼키고 진실을 택한다. 김영하 작가의 <작별 인사>를 읽으며, 나는 매트릭스의 빨간 알약을 떠올렸다.




"자기가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 그게 성장이라고 하던데?" (p. 83)


<작별인사>는 많은 이들이 기다려 온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김영하 작가의 9년만의 신작 장편소설이라는 점에서 많은 화제를 모았다. <작별인사>는 한 소년이 갑자기 마주치게 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인간성의 경계와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꿈꾸는 불멸의 삶에 대해 깨달아 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나'는 어디까지 '나'일까? (p. 201)“라는 철이의 질문과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선이와 달마의 철학적 논쟁들은 독자들에게도 잔잔한 울림과 감동을 선사한다.


<작별 인사>는 작가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SF 소설이라는 것도 큰 화제가 되었다. 과학기술이 가진 잠재력을 기반으로 특정 세계관과 시스템을 구성하고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다루는 것이 SF (Science Fiction)의 장르적 속성이라고 한다면 <작별 인사>는 ‘기술’이나 ‘세계’ 그 자체 보다는 그에 반응하는 ‘인간’에 주목하는 SF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이성과 기술이 구현해내는 세계에 대한 냉철한 분석 보다는 그러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다채로운 감정과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작별 인사>를 읽으며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마치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으면서도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소설 속 안드로이드 로봇처럼 말이다.


우리는 흔히 SF 가 그리는 미래는 현시대와는 동떨어진 어쩌면 향후에 도달할지 모를 미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SF가 그리는 미래의 어느 시점은 그 아득한 시간의 간극이 걷어내고 보면 또 다른 우리들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언젠가 우리는 현재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한 누군가와, 또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누군가와 공존하면서 전혀 다른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작별 인사>의 선이와 철이의 모습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고, 김영하 작가가 그려 낸 미래의 어느 시점은 그 아득한 시간의 간극이 걷히면 또 다른 우리의 모습으로 남는다. 세월의 흔적을 걷어내고 바라보면 저마다가 직면한 세상에 맞서 살아가는 똑같은 인간만이 남는 것이다. 환경이 달라지더라도 누군가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나가는 삶의 원형은 현재의 삶이나 미래의 삶이나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개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니 너무나 짧은 이 찰나의 생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하고, 우주의 원리를 더 깊이 깨우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p. 108)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러한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 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 서로의 고유한 존재방식,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든다. 하지만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 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 삶이란 저마다 쌓아둔 사연들로 섬들이 나누는 대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온기를 나눌 수 있으니 말이다.


"오즈의 마법사의 허수아비가 인간들은 참으로 번거롭겠다고 불평했던 바로 그것들이 나한테는 귀한 선물이었다." (p. 276)


또한, 인간은 상실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불완전함이야말로 각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채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인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매듭이 되는 것 아닐까? 신뢰와 사랑, 자발적 책임이 동반된 관계를 구축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은 불완전한 현실을 일정 부분 해소시켜주는 심연의 해독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만들어주고, 삶을 살아가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는 것은 일견 불필요하거나 비효율적인 행위처럼 보이는 사랑, 우정, 신뢰와 같은 가치들이다. 서로를 향해 뻗는 온기 어린 손짓이 결국 메마른 삶에 활기가 되어 내일을 밝히는 희망이 된다.


코로나19는 그동안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연하게 펼쳐지는 것인 줄만 알았던 평범한 일상이 정말 이토록 소중한 것이었음을 우리가 절절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많은 이들이 정신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힘든 나날들을 보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견디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일상이 회복되지 못하면서 대면 모임이 최소화되고, 비대면 만남과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증가한 것은 코로나가 만든 새로운 풍경이다. 코로나는 우리 삶의 많은 부분들을 바꾸어 놓았지만 삶의 근본적 속성까지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하지만 즐거움과 기쁨이 되고, 살아가는 동력이 되는 생의 순간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상실과 결핍, 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 우리네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그 부분 다시 읽어줄래?”

“어디? ‘현실하고 다른 일을 상상해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세요?’ 이 부분?” (p. 289)


우리는 동시대를 같이 호흡하면서도 온전히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과거의 한때에 머무르고, 또 누군가는 과거의 기억을 넘어 미래를 응시한다. 동시대를 같이 호흡하면서도 온전히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과거의 한때에 머무르고, 또 누군가는 과거의 기억을 넘어 미래를 향하는 것은 인간은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 (Kronos)' 보다 주관적이고 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 (Kairos)'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우리를 구성하는 것인 동시에 미래를 꿈꾸고 호흡하게 하는 두번째 심장이다. 우리는 상실과 결핍, 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어떤 것들, 예를 들어 윤리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다 저버린 채 냉혹하고 무정한 존재로 살아가게 될 때, 비록 내 몸속에 붉은 피가 흐르고, 두개골 안에 뇌수가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인간일 수 있는 것일까?" (p. 69)


인간은 유일하게 이야기를 만드는 종으로서, 이야기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서로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 인간다움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존재다. 소설을 읽으며 타인의 존재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진실을 탐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던 진실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 그 누구도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인양을 거부하는 진실, 존재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김영하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세상의 흐름에 떠밀리지 말고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아닐까? 우리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편견과 집착에 사로잡혀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거나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로에 대한 관심과 공감, 진심이 담긴 위로가 진실을 가능하게 하고, 아주 미약한 부분이나마 세상을 진보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 아닐까? 김영하 작가의 <작별 인사>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또 우리의 과거와 현재, 또 미래의 삶에 대해서 곱씹어 볼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소설이다. 이번 20만 부 스페셜 에디션은 마치 과거와 현재, 미래는 연결되어 있다는 듯 변하지 않고 우리 곁을 지키는 밤하늘의 별들을 표현한 아름다운 표지가 소설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더이상 묻지 않아도 되는 삶. 자아라는 것이 사라진 삶. 그것이 지금 맞이하려는 죽음과 무엇이 다를까?" (p.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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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 2022-10-01 07: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영하 작가님의 소설을 다 가지고 계시네요. 하나로 모아 놓으니 참 아름답네요. 저 위에 사진은 매트릭스 영화의 장면인가요? 저도 영화는 봤는데 잘 기억이 안 나네요.오래 된 화장실 괴담이 연상되서 뭔가 무섭고도 재밌네요. 김영하님 소설을 많이 읽어보진 못 했는데 잘 읽히고 재밌었어요. 늘 생각 할 꺼리를 던져 주시고. <작별 인사>는 꼭 읽어봐야 겠어요.

잭와일드 2022-10-01 08:17   좋아요 2 | URL
네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자신의 선택으로 각성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작별 인사>에서 철이가 우연히 마주친 어떤 사건을 겪으며 자신의 존재와 삶에 대해 깨달아가는 것을 보면서 저 장면이 떠오르더군요. SF라고 해서 처음에는 놀랍고 살짝 걱정도 되었지만, 읽고 나서는 오히려 SF가 아니고서는 이 주제를 구현해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독을 추천 드립니다.

yamoo 2022-10-01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때 김영하 작가 소설만 읽던 때가 있었는데....지금은 한국소설을 안 읽어서 잊혀진 작품들이 됐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몇 권은 소장하고 있습니다만...조만간 한국작가들 작품은 전부 처부할 예정입니다.

잭와일드 2022-10-02 01:25   좋아요 1 | URL
아네 그렇군요. 뭔가 계기가 되는 일이 있으셨나 보네요.

mini74 2022-10-07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읽으며 A.I 스필버그 영화가 떠올랐는데
이 글 읽으니 매트릭스와도 통하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당선도 축하드려요 *^^*

잭와일드 2022-10-09 11:2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mini74님 편안한 연휴 되시길 빕니다^^

서니데이 2022-10-07 22: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잭와일드 2022-10-09 11:2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즐거운 연휴 되시길 빕니다^^

이하라 2022-10-07 22: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잭와일드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연휴 되세요.^

잭와일드 2022-10-09 11:26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행복한 연휴 되시길 빕니다^^
 
마스터 - 전 세계 아웃도어 시장을 석권한 텐트 장인 라제건의 특별한 경영 스토리
유승준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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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계의 살아있는 전설, 아웃도어 산업의 마스터로 통하는 라제건 회장이 글로벌 아웃도어 1위 브랜드를 일구어내기까지 그만의 특별한 경영철학부터 인간적인 모습까지 모두 담아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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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 전 세계 아웃도어 시장을 석권한 텐트 장인 라제건의 특별한 경영 스토리
유승준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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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계의 살아있는 전설, 아웃도어 산업의 마스터로 통하는 라제건 회장이 글로벌 아웃도어 1위 브랜드를 일구어내기까지 그만의 특별한 경영철학부터 인간적인 모습까지 모두 담아낸 책! 

 

"우리는 그를 텐트의 제왕이라 부른다." -<outside>-

 

" 지난 20년 이상의 기간 동안 라제건의 영향을 받지 않은 텐트는 없다!" - 마이클 글래빈 (텐트 디자이너) -

 

" 라제건은 거의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커튼 뒤에서 우리 업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다." - 데이비트 마이단스 (텐트 디자이너) -

 


캠핑과 아웃도어 브랜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생각해봤음직한 질문이 있다. 바로 '아알루미늄DAC과 헬리녹스HELINOX는 세계 아웃도어 시장에서 어떻게 인지도 1위 브랜드가 되었을까?'에 대한 것이다. 캠핑과 아웃도어 라이프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헬리녹스HELINOX라는 브랜드는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는 익숙한 브랜드일 것이다. 하지만 아웃도어 업계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높은 헬리녹스가 국내 브랜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생각외로 별로 없다.

 

 

전 세계적으로 캠퍼들 사이에서는 필수품이 된 헬리녹스 의자, 출시되자마자 품귀 현상이 일 정도로 유명한 그 헬리녹스는 바로 텐트계의 전설, 텐트계의 마스터로 불리는 동아알루미늄DAC의 라제건 회장이 직접 일구어낸 브랜드다. 동아알루미늄은 노스페이스, 콜맨, MSR, 빅아그네스 등 세계적인 아웃도어 브랜드 텐트에 텐트 폴을 납품하는 국내 중소기업으로, 전 세계 고급 텐트 폴 시장 점유율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국내 유일무이의 히든 챔피언이다. 동아알루미늄의 라제건 회장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미국 은행에서 근무하다 탄탄대로를 뒤로 하고 국내로 돌아와 창업 아이템으로 ‘알루미늄 튜브’를 선택했다.

 


당시의 텐트는 주로 스틸 소재의 무거운 폴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에 가볍지만, 강성 면에서도 뒤지지 않는 탁월한 폴을 개발하는 것이 동아알루미늄의 우선 목표였다. 동아알루미늄은 3년간의 개발 끝에 DA17이라는 획기적인 알루미늄 폴을 만들어 시장의 주목을 받았고, 이어 1998년 개발한 모델 ‘패더라이트(FEATHERLITE)’를 출시했다. 동아알루미늄은 패더라이트 출시 2년 만에 텐트 폴 시장 세계 1위 자리에 올랐다. 헬리녹스 또한 라제건 회장이 2011년에 런칭한 국내 아웃도어 브랜드다. 헬리녹스는 동아알루미늄의 폴을 적용한 850그램의 초경량 캠핑 의자 ‘체어원’을 출시해 단숨에 세계적인 브랜드로 입지를 다졌다. 2013년 분사 후 라제건 회장의 아들 라영환 대표가 회사를 이어받아 3년 만에 매출 200억 원을 넘어섰고, 현재는 동아알루미늄과 비슷한 수준의 매출 규모를 가진 회사로 성장했다.

 


본 서 『 마스터 』 는 텐트계의 살아있는 전설, 아웃도어 산업의 마스터로 통하는 라제건 회장이 글로벌 아웃도어 시장의 인지도 1위 브랜드를 일구어내기까지 그만의 특별한 경영철학부터 인간적인 모습까지 모두 담아낸 책이다. 텐트 마스터의 조금 다른 생각이 불러온 업계의 지각 변동, 삭막한 공장을 하나의 예술품으로 탈바꿈시킨 라제건의 특별한 경영 철학이 책에 잘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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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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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은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을 남겼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이는 일견 행복으로 충만해 보이는 삶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려움과 고통, 삶에 대한 비의(悲意)’가 내포되어 있다는 삶의 내밀한 속성을 잘 포착해낸 체험적 진리다. 제임스 설터도 "나뭇잎을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 보면 잎맥이 보이는데, 다른 건 다 버리고 그 잎맥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이는 저마다의 방향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잎맥처럼 삶은 다면적이고 정답을 찾기 힘든 것이지만, 삶에 대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멀리서 숲을 조망하기 보다는 숲 안으로 깊숙히 침잠하여 나뭇잎의 형태와 주위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그 미세한 변화들에 주목해야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들의 삶은 미스터리였다. 숲과 비슷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되고 묘사될 수 있었지만, 가까이 갈수록 흩어져 빛과 그림자로 조각났고, 그 빽빽함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는 형태가 없었고, 경이로울 정도의 디테일만이 어디나 가득했다.” - <가벼운 나날> p. 51 -

 

이를 반영하듯 <가벼운 나날 (light years)>에서 설터는 네드라와 비리의 결혼생활을 통해 삶의 내밀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성공한 건축가인 남편과 아름다운 아내, 사랑스런 두 딸, 전원주택에서 파티를 즐기는 여유로운 삶. 멀리서 보면 너무나 단란하고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다. 하지만 설터는 화려한 삶 그 이면에 감춰진 공허함과 미세한 균열들을 들추어 낸다. 이를 통해 자아실현, 사랑, 결혼, 육아 등 인생에 있어 중요하게 다뤄지는, 누구나 동경하고 행복의 기준이자 지향점이라고 여기는 사건들이 사실은 빛과 그림자라는 조각난 형태로 존재하며, 이 마저도 명멸하는 빛처럼 너무나도 짧게 삶의 한 순간을 조명하고 일순간에 흩어져버린다는 걸 지적한다. 소설의 서문에 등장하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삶이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이 다른 삶이다는 문구는 삶은 (light)’의 스펙트럼처럼 다면적인 것이고, 일견 밝고 따뜻해보이지만 감추어진 실상은 너무나 가볍고(light)’ 허무한 것이라는 설터의 철학을 대변하고 있다.

 

어둠속에서 짧게 명멸하는 빛처럼 삶은 빛과 그림자, 그리고 감춰진 어둠이 점철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은 설터의 소설들을 관통하는 주제다. <고독한 얼굴>에서 설터는 이를 구현하기 위해 고산 등반이라는 소재를 택한다. 소설의 제목 <고독한 얼굴 (Solo faces)>에는 그의 다른 소설 <가벼운 나날> 처럼, 또한 서창렬 번역가가 언급한 것처럼 다면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는 홀로 우뚝 솟아 있는 고봉 자체를 뜻하기도 하고, 주인공인 랜드처럼 혼자서 하는 등반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소설의 한국어 제목처럼 고봉을 홀로 등정하는 과정에서 대면하게 되는, 인간이라면 숙명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고독한 얼굴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한국어 제목과 선택된 표지의 그림을 보면 출판사와 편집자는 세번째 의미로 해석한게 아닐까 싶은데, 소설을 읽으며 물론 '언어의 마술사', '완벽한 스타일리스트' 답게 중의적인 의미를 의도했겠지만, 작가도 인간의 고독한 내면에 주목하여 소설의 스토리를 구상하고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고독한 얼굴>의 버넌 랜드는 대학과 군대 모두 적응에 실패하고 교회 지붕을 수리하면서 특별한 꿈이나 목표 없이 적당히 현실에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 외롭고 물직적으로 피폐한 삶 속에서도 빛과 온기만을 쫓지 않는 삶의 태도를 견지하던 랜드는 우연히 과거에 함께 산을 오르던 친구 캐벗을 만나며 잊고 지낸 등반에의 열정을 떠올리며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랜드는 샤모니로 향해 동료들과 드뤼를 포한한 여러 등반에 성공하고, 홀로 암벽 등반을 시도하던 중 드뤼에서 조난자들을 구하게 되면서 등반가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해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해. 나머지는 그들의 상상에 맡기고라는 그의 말처럼 산을 향한 순수한 열망으로 등반이라는 행위 자체에 몰입하던 랜드는 명성이 가진 유혹 앞에 나약해지는 인간의 모습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설터는 한 등반가의 성공과 좌절에 관한 이야기로 인간의 순수한 욕망과 이중적 본성, 숙명적인 고독과 삶의 의미를 되짚는다.

 

인생은 시련 아닌가요? 우리는 끊임없이 시험당하고 있어요. 이런 시험의 단적인 모습 또는 극적인 순간을 선택하는 건 내게는 드문 일이 아닐 거예요.” 

- Paris Review 인터뷰 중 -

 

사실 다양한 얼굴을 하고 찾아오는 삶의 시험 앞에 놓인 인간을 그려내기 위해 고산 등반만큼 적합한 소재도 없을 것이다. 등반은 기본적으로 역경과 고난의 과정이고, 인간의 힘으로 좌우할 수없는 압도적인 운명과 환경, 시련에 맞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와 도전, 몰입과 집착, 성취와 실패, 한계와 허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등반에 대한 철학, 등반 기술과 도구의 적용과 등반 방식, 등반 성공으로 얻는 명성과 유혹과 반대로 느껴지는 공허함과 마주하는 순간 등에서 수많은 인간군상을 빚어내고 인간의 속성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14좌를 최초로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는 등반가로서의 업적과 명성만큼이나 독특한 등반원칙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바로 스폰서와 안내인 (셰르파) 없이, 최소한의 장비만을 가지고 홀로 산에 오르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모든 걸 준비하고, 안전을 책임져 줄 안내인까지 대동한다면 진정한 산을 만날 수 없다는 그만의 이유 때문이었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싶고 느끼고 싶기 때문에 이 원칙을 고수한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자신이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은 영하 40도의 추위나 시속 80km의 강풍, 심장을 터뜨리는 희박한 산소가 아닌 바로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저건 정말 멋진 선이야." 그가 마지막으로 눈을 들어 말했다.

"저게 바로 우리를 정상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 그렇잖아?"

"혹은 그 이상까지."

- <고독한 얼굴> p. 91 -

 

설터는 등반을 향한 순수한 열망을 가지고 등반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그가 고집했던 등반 방식처럼 자유분방하지만 외롭고 고독한 히피로서의 삶을 살았던 등반가 게리 헤밍의 삶을 투영하여 이 소설을 집필했다. 등정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삶에 견줄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한계에의 도전과 성취라는 테마는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에 대입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극복할 수 없는 신분의 한계 속에서 사랑이라는 감정 마저도 자본이 가진 물성으로서 회복하고자 했던 한 인물의 실패담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의 전반에 걸쳐 ‘up’이라는 단어는 총 202번이나 등장하여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자 했던 주인공 개츠비와 작가의 열망을 대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고산 등반이라는 행위는 인간이 가진 수많은 욕망들과 그 욕망들이 소비되고 성취되는 과정, 혹은 실현되지 못하고 좌절하는 과정들을 대변하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소설에서 당신은 산을 사랑하는군요.”라는 질문에 산이 아닙니다. 산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삶을 사랑합니다. (p. 195)라는 랜드의 대답은 이 같은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우리네 삶과 마찬가지로 등반 과정은 시련의 연속이다. 인생이라는 산을 등반하기 위해서 우리는 저 아득히 멀리 존재하는 정상을 바라보며 걷기 보다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다음 내디딜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가 삶을 오롯이 통제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등반과정에도 예측 불가능한 돌발상황이 수시로 발생하고 등반가는 생존을 위해 순간적으로 상황을 인지하고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 시간을 두고 판단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고, 판단이 옳았는지, 또 다른 대안은 없었는지에 대해서 끊임없는 의구심이 치솟는다. 안전한 지상에서는 사소한 사건이나 큰 의미 없는 행동들도 산에서는 생명을 위협하는 돌이킬 수 없는 위험으로 돌아온다. 이 모든 결정에 따른 결과는 등반가 자신이 감내하고 짊어져야 한다. 때로는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산은 인간의 작은 움직임이나 품고 있는 일말의 희망도 허락하지 않기도 한다. 인간은 상황이 변하고 산이 등반을 허락하길 숨죽여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삶을 완전히 통제하여 온전히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아니 행복을 논하기 전에 우리의 삶 속에서 완벽히 통제가 가능한 영역이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완벽히 통제하고 선택하지 못한다. 다만 이미 발생하여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에 대해 대처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삶의 시련은 고통과 고난을 수반하지만 때로는 고난이 우리가 삶을 대하는 자세를 가다듬고, 내면 성찰과 위기를 극복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우리는 저마다 삶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와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와 신념들이 결국 우리가 삶을 대하는 자세가 되고, 행복에 대한 가치를 만드는 것일 것이다. <가벼운 나날>에서 설터는 완전한 삶이란 없고, 인간은 그 조각만을 소유할 뿐 아무것도 온전히 가질 수 없는 존재임을 설파한다. <고독한 얼굴>의 랜드 또한 인간을 압도하는 대자연 앞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p. 174)

 

"내가 등반에 대해 배운 한 가지가 뭔 줄 알아? 단 한 가지 교훈 말이야."

"뭐지?"

"등반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거." "진짜 투쟁은 그 후에 온다는 걸." 

- <고독한 얼굴> p. 256 -

 

등반과정에서 가장 큰 성취이자 환희를 느낀 순간은 언제일까? 많은 이들이 등반과정에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정상에 올라 황홀한 희열을 느끼며 함께 오른 동료들의 환하게 빛나는 얼굴을 확인하고 손을 맞잡던 순간을 언급할 것이다. 하지만 설터는 랜드의 입을 빌어 등반이 주는 단 한 가지 교훈은 등반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고, 진짜 투쟁은 그 후에 온다고 말한다. 이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그때 그곳에서 (There and Then)>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설터는 <그때 그곳에서>에서 사람들은 모두 끝난 뒤의 승리를 기억하지만 그건 행복처럼 막연한 것이며, 절망의 순간이 훨씬 더 생생하고 잊히지 않는다. (p. 186)고 말한다. 또한, 등반은 원시적이어서, 멍청하고 마초에 이기적일 수있는 등반가들도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는데, 자신의 영혼, 말하자면 자신의 품성에 관해서 알게 된다는 것. (p. 187)이라고 말한다. 이는 정상에서의 성취도 중요하지만 보다 의미 있는 것은 정상에 오르는 과정에서 역경과 고난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한 순간이라는 것 아닐까?

 

 

또한, 진짜 투쟁은 그 후에 온다는 것은 성공에 따른 대중의 관심과 명성에 취해 순수한 열망과 초심을 잃는 것, 정상에 도달하지 못한 채 실패와 좌절 속에서 표류하는 것, 이 모두를 경계하면서 일상의 삶으로 복귀하는 과정, 즉 삶의 정상성을 회복하는 과정이 진정한 투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때 그곳에서>에서 설터는 가장 즐거운 경우라도 등반은 도전이며, 도전이 없다면 의미도 없다. (p. 187)고 말한다. 설터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도전 과정에서 고난을 극복한 경험과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상에 다다른 이후 다시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돌아오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 아니었을까? 등반가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열을 올리는 정상까지 올라가는 법에 비해 정상에 도달한 이후 다시 이전의 삶으로 회귀하는 과정은 상대적으로 도외시되기 마련이다. 어쩌면 정상에 다다른 이후 무탈하게 잘 내려오기 위한 지혜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견디는 거예요. 두려워 하지 말고.” - <고독한 얼굴> p. 281 -

 

삶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안정된 상태라고 느끼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미지의 것이 느닷없이 닥친다. 이렇게 질서가 무너진 혼돈 속에서 우리 삶은 현실부정과 절망,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잠식되어 간다. 삶은 질서와 혼돈으로 점철되어 있다. 안정된 질서 속에 갑자기 혼돈이 찾아오기도 하는 반면, 모든 것을 상실한 듯한 절망적 순간에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도 한다. 삶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질서와 혼돈의 경계 위에 있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삶에는 빛과 온기만이 아닌 불안과 균열도 함께 공존한다는 설터의 시각은 그래서 우리에게 진솔한 위안이 된다. 보여주기 위한 표면적인 삶이 아닌 우리의 삶이 가진 실체적 진실이 그렇다고 한다면 빛 뿐만 아니라 너울져 있는 그림자와 어둠도 우리 삶의 조각임을 그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잎맥을 따라 삶의 조각난 진실을 꿰어놓는 설터의 세계에 주목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비록 우리가 원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왜냐하면 우리는 상실과 결핍, 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무의미해요.그가 외쳤다.

왜요?

당신의 삶이요그가 말했다.

왜냐하면 그 안에 고통이 없어요.

  이따금씩 약간의 슬픔마저 없는 삶이란 결국 뭘까요

- <가벼운 나날> p. 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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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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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일생이란 무엇일까따지고 보면 우리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인간의 일생을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한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온 매 순간순간의 누적 (accumulation of every single moment)이라 할 수 있다인간의 일생은 생명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지난한 시간과 역사를 거치며 개별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고 결국 그 생명을 다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장 아메리는 본 서 <자유 죽음>에서 "시간을 통해 성숙해간다는 것은 동시에 죽어가는 과정(p. 36)"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도 “인간은 태어나자 마자 이미 죽기에는 충분히 늙어 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인간은 매순간 죽음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다 종국에는 모두 소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이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그러한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우리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 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서로의 고유한 존재방식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든다이와 관련해서 장 아메리는 외젠 민코프스키의 "살았던 시간 (Le tempe vecu)"의 개념을 언급하고 있다. (p. 164) 이는 동일한 시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듯하지만 각자가 개별적인 체험을 하며 살아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세상과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

 

장 아메리는 비참한 것이든 장엄한 것이든 그것은 우리의 세계고, 그 세계는 온전히 우리의 것이라 말한다. (p. 208) 이는 우리 각자는 자신이 스스로 구축한 세계에 속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세계 바깥에 위치한 누군가가 그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외면적으로 관찰 가능한 단편적인 현상만으로 종교나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월권이며, 지나친 요구일 수 있다. 만약 세계의 구축자가 스스로 그 세계를 붕괴시키는 행위를 한다고 할지라도... 본서의 주제인 '자유 죽음'은 오늘날에도 뜨거운 감자다. 이는 생명의 존엄에 대한 사유이며, 주체성을 가지고 인생 논리와 삶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고뇌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 죽음'과 관련된 여론에는 기독교 전통에서 비롯된 금령이 아직까지도 시퍼렇게 살아있고, 사회는 여전히 '자유 죽음'으로부터 멀리 거리를 두고 그 간격을 좀처럼 좁히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자유 죽음'은 모순적인 상황에서 잉태된 것이다. '자유 죽음'을 행하는 자는 인생 논리를 긍정하는 인격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결과적으로 끝내 부정함으로써 인생 논리를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장 아메리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인생 논리라는 사슬을 박차고 나오면서도, 여전히 그 사슬에 묶여 있다." (p. 105) 따라서, '자유 죽음'은 자기 부정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긍정인 동시에 부정이다. 이처럼 '자유 죽음'은 그 존재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모순이기 때문에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장 아메리가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심리학이나 사회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오히려 과학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장 아메리는 '자유 죽음'에세크(echec)’ 상태에 있는 이, 즉 돌이킬 수 없는 총체적 삶의 실패에 직면한 이가 모든 삶의 충동에 저항하며 '에세크'를 돌파하는 유일한 길이자, 자유를 가장 급진적으로 실천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자유 죽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삶의 양보다는 질을 중시한다. 이들은 자신의 생명 보존보다는 '질 높은 삶'을 더 높은 가치로 여긴다. 질 높은 삶에는 질 높은 죽음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이유에서든 존중받아야 할 한 생명을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당장의 고통만으로 쉽게 포기해선 안 된다는 생명윤리 중시자들의 주장도 있다. 죽음이 용인되는 범위가 늘어난다면 결국 사정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누군가의 죽음이 외면 받는 결과가 초래되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생명은 경제논리로 설명할 수 없으며, 국가 차원의 복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유 죽음'에 대한 논의를 이어 나가기 위한 전제조건은 개인의 자기결정권 행사는 사회 시스템을 포함하여 개인이 자신의 삶을 보다 가치 있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한 다양한 선택지가 충분히 보장 받은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어려운 경우에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지막을 맞을 것인가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마지막을 대비해야 하는지, ‘아름다운 마지막이란 어떤 것일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가 25세의 나이에 쓴 첫 소설로 친구의 약혼녀를 사랑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모든 청년들은 베르테르처럼 사랑하기를 원했고모든 처녀들은 로테처럼 사랑받기를 원했다.”는 괴테의 말처럼 소설이 탄생한지 2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소설의 주인공 베르테르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절대적 사랑을 갈망하는 순수한 영혼과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로서또 사회모순을 직시하는 예리한 지성의 소유자로서 청년들의 영원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소설 속에서 베르테르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노란색 조끼와 푸른 연미복을 입고 있다괴테는 세계적인 대문호이자 정치가였지만 빛과 색채를 연구한 과학자이기도 했다그는 자신이 저술한 <색채론>에서 색의 근원을 노랑과 파랑 두가지로 규정하고 있다노랑은 가장 빛에 가까운 색이고 파랑은 가장 어두운 색이기 때문에 이 두가지 색의 조화는 빛과 그림자힘과 나약함포용과 분리를 상징하며 두 가지 색의 공존 자체가 역동적인 의미를 생성하는 근원이라는 의미에서다.

 

살아가면서 이러한 괴테의 생각에 공감하게 되는 순간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베르테르의 열정적 사랑이 금빛 물결이 되어 흘러가다가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여 저 푸른 심연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빛과 어둠기쁨과 슬픔희망과 절망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삶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들 말이다이러한 삶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어둠을 빛으로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힘은 무엇일까나는 베르테르의 고백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베르테르는 "내가 아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으니유일하게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이 마음뿐"이라 말한다로테를 향한 자신의 마음의 열정과 진심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베르테르의 순수함과 진정성은 마지막 순간 자신의 삶의 논리를 유지시키기 위한 결단에서 빚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 아메리의 말처럼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감이었던 것처럼, 죽기로 각오한 당당함은 오히려 삶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 각자는 저마다의 인격과 세계관을 가진 섬이다. 하지만,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우리네 삶이란 저마다 쌓아둔 사연을 가진 섬들간에 나누는 대화와 같다서로가 나누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온기를 나눌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간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씩 퇴보하고 소멸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하지만 인간이 죽음을 예정하고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삶 속에서 인간적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존재와 소멸의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정글과도 같은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절망속이라 해도 함께 있다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아픔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과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인정’ 그리고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다그것은 환경의 제약 속에서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격이 자신의 세계와 삶을 스스로 파괴하는 선택을 할 경우 사회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을 잣대로 그 행위를 평가하고 이해해야 할까? 우리가 한 사람이 담고 있는 개별적 세계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까? 그 사람의 과거의 현재의 모습을 세부 디테일까지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포착해내지만 순간순간의 정적인 단면만을 제공하는 사진보다는 긴 시간 동안 각각 다른 빛과 환경 속에서 일련의 특징감정생각 등 개인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모습을 깊이 있게 담아낼 수 있는 초상화와 같은 방식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그림에는 한 사람을 일정 시간 이상 바라본 만큼의 시간성이 농축되어 있어어딘가 불분명한 선들로 이뤄진 한 사람의 형상이 오랜 시간 그 사람과 만나며 끌어 모은 세부사항들로 합성된 이미지처럼 나타날 수 있다각기 다른 시간과 빛을 거치며 덧입혀진 개인적 삶과 역사가 순간의 단면을 정확히 포착한 사진 보다 더 풍부하고 깊은 맛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장 아메리는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모든 시절은, 그러니까 실제에 있어 인생의 모든 순간은 저마다 나름의 논리를 가지며, 그에 알맞는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 (p. 36)"고 말한다. 그의 주장처럼 우리는 자기 자신을 끝내 부정하고, 결국 인생 논리를 부정하게 되는 스스로가 모순적인 상황을 만들어가면서까지 그러한 선택을 내리게 된 사람의 이야기에 먼저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 어떤 과학적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고, 전적으로 이해 받을 수도 없는 그 삶에 대해 순간적 속사(速寫)'자유 죽음'이라는 결정을 내린 순간의 단면만을 포착해 낸 사진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화가가 되어 오랜 시간이 농축된 그의 삶을, 그의 세계를 되짚어보고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왜 우리를, 그리고 세상을 버렸는지 조리 있게 따지는 일은 그 다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삶에 대한, 또 인간에 대한 예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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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8-23 09: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한 인간의 마지막 선택을 논리로 따지기 보다는 그의 농축된 삶을 마음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우선해야한다는 마무리 글이 마음에 와닿네요.
저도 관심있는 책인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잭와일드 2022-08-23 09:36   좋아요 3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논의는 사회학이나 심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고, 오히려 과학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