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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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일생이란 무엇일까따지고 보면 우리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인간의 일생을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한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온 매 순간순간의 누적 (accumulation of every single moment)이라 할 수 있다인간의 일생은 생명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지난한 시간과 역사를 거치며 개별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고 결국 그 생명을 다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장 아메리는 본 서 <자유 죽음>에서 "시간을 통해 성숙해간다는 것은 동시에 죽어가는 과정(p. 36)"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도 “인간은 태어나자 마자 이미 죽기에는 충분히 늙어 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인간은 매순간 죽음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다 종국에는 모두 소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이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그러한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우리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 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서로의 고유한 존재방식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든다이와 관련해서 장 아메리는 외젠 민코프스키의 "살았던 시간 (Le tempe vecu)"의 개념을 언급하고 있다. (p. 164) 이는 동일한 시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듯하지만 각자가 개별적인 체험을 하며 살아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세상과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

 

장 아메리는 비참한 것이든 장엄한 것이든 그것은 우리의 세계고, 그 세계는 온전히 우리의 것이라 말한다. (p. 208) 이는 우리 각자는 자신이 스스로 구축한 세계에 속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세계 바깥에 위치한 누군가가 그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외면적으로 관찰 가능한 단편적인 현상만으로 종교나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월권이며, 지나친 요구일 수 있다. 만약 세계의 구축자가 스스로 그 세계를 붕괴시키는 행위를 한다고 할지라도... 본서의 주제인 '자유 죽음'은 오늘날에도 뜨거운 감자다. 이는 생명의 존엄에 대한 사유이며, 주체성을 가지고 인생 논리와 삶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고뇌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 죽음'과 관련된 여론에는 기독교 전통에서 비롯된 금령이 아직까지도 시퍼렇게 살아있고, 사회는 여전히 '자유 죽음'으로부터 멀리 거리를 두고 그 간격을 좀처럼 좁히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자유 죽음'은 모순적인 상황에서 잉태된 것이다. '자유 죽음'을 행하는 자는 인생 논리를 긍정하는 인격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결과적으로 끝내 부정함으로써 인생 논리를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장 아메리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인생 논리라는 사슬을 박차고 나오면서도, 여전히 그 사슬에 묶여 있다." (p. 105) 따라서, '자유 죽음'은 자기 부정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긍정인 동시에 부정이다. 이처럼 '자유 죽음'은 그 존재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모순이기 때문에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장 아메리가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심리학이나 사회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오히려 과학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장 아메리는 '자유 죽음'에세크(echec)’ 상태에 있는 이, 즉 돌이킬 수 없는 총체적 삶의 실패에 직면한 이가 모든 삶의 충동에 저항하며 '에세크'를 돌파하는 유일한 길이자, 자유를 가장 급진적으로 실천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자유 죽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삶의 양보다는 질을 중시한다. 이들은 자신의 생명 보존보다는 '질 높은 삶'을 더 높은 가치로 여긴다. 질 높은 삶에는 질 높은 죽음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이유에서든 존중받아야 할 한 생명을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당장의 고통만으로 쉽게 포기해선 안 된다는 생명윤리 중시자들의 주장도 있다. 죽음이 용인되는 범위가 늘어난다면 결국 사정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누군가의 죽음이 외면 받는 결과가 초래되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생명은 경제논리로 설명할 수 없으며, 국가 차원의 복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유 죽음'에 대한 논의를 이어 나가기 위한 전제조건은 개인의 자기결정권 행사는 사회 시스템을 포함하여 개인이 자신의 삶을 보다 가치 있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한 다양한 선택지가 충분히 보장 받은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어려운 경우에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지막을 맞을 것인가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마지막을 대비해야 하는지, ‘아름다운 마지막이란 어떤 것일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가 25세의 나이에 쓴 첫 소설로 친구의 약혼녀를 사랑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모든 청년들은 베르테르처럼 사랑하기를 원했고모든 처녀들은 로테처럼 사랑받기를 원했다.”는 괴테의 말처럼 소설이 탄생한지 2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소설의 주인공 베르테르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절대적 사랑을 갈망하는 순수한 영혼과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로서또 사회모순을 직시하는 예리한 지성의 소유자로서 청년들의 영원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소설 속에서 베르테르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노란색 조끼와 푸른 연미복을 입고 있다괴테는 세계적인 대문호이자 정치가였지만 빛과 색채를 연구한 과학자이기도 했다그는 자신이 저술한 <색채론>에서 색의 근원을 노랑과 파랑 두가지로 규정하고 있다노랑은 가장 빛에 가까운 색이고 파랑은 가장 어두운 색이기 때문에 이 두가지 색의 조화는 빛과 그림자힘과 나약함포용과 분리를 상징하며 두 가지 색의 공존 자체가 역동적인 의미를 생성하는 근원이라는 의미에서다.

 

살아가면서 이러한 괴테의 생각에 공감하게 되는 순간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베르테르의 열정적 사랑이 금빛 물결이 되어 흘러가다가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여 저 푸른 심연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빛과 어둠기쁨과 슬픔희망과 절망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삶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들 말이다이러한 삶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어둠을 빛으로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힘은 무엇일까나는 베르테르의 고백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베르테르는 "내가 아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으니유일하게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이 마음뿐"이라 말한다로테를 향한 자신의 마음의 열정과 진심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베르테르의 순수함과 진정성은 마지막 순간 자신의 삶의 논리를 유지시키기 위한 결단에서 빚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 아메리의 말처럼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감이었던 것처럼, 죽기로 각오한 당당함은 오히려 삶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 각자는 저마다의 인격과 세계관을 가진 섬이다. 하지만,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우리네 삶이란 저마다 쌓아둔 사연을 가진 섬들간에 나누는 대화와 같다서로가 나누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온기를 나눌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간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씩 퇴보하고 소멸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하지만 인간이 죽음을 예정하고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삶 속에서 인간적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존재와 소멸의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정글과도 같은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절망속이라 해도 함께 있다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아픔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과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인정’ 그리고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다그것은 환경의 제약 속에서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격이 자신의 세계와 삶을 스스로 파괴하는 선택을 할 경우 사회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을 잣대로 그 행위를 평가하고 이해해야 할까? 우리가 한 사람이 담고 있는 개별적 세계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까? 그 사람의 과거의 현재의 모습을 세부 디테일까지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포착해내지만 순간순간의 정적인 단면만을 제공하는 사진보다는 긴 시간 동안 각각 다른 빛과 환경 속에서 일련의 특징감정생각 등 개인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모습을 깊이 있게 담아낼 수 있는 초상화와 같은 방식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그림에는 한 사람을 일정 시간 이상 바라본 만큼의 시간성이 농축되어 있어어딘가 불분명한 선들로 이뤄진 한 사람의 형상이 오랜 시간 그 사람과 만나며 끌어 모은 세부사항들로 합성된 이미지처럼 나타날 수 있다각기 다른 시간과 빛을 거치며 덧입혀진 개인적 삶과 역사가 순간의 단면을 정확히 포착한 사진 보다 더 풍부하고 깊은 맛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장 아메리는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모든 시절은, 그러니까 실제에 있어 인생의 모든 순간은 저마다 나름의 논리를 가지며, 그에 알맞는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 (p. 36)"고 말한다. 그의 주장처럼 우리는 자기 자신을 끝내 부정하고, 결국 인생 논리를 부정하게 되는 스스로가 모순적인 상황을 만들어가면서까지 그러한 선택을 내리게 된 사람의 이야기에 먼저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 어떤 과학적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고, 전적으로 이해 받을 수도 없는 그 삶에 대해 순간적 속사(速寫)'자유 죽음'이라는 결정을 내린 순간의 단면만을 포착해 낸 사진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화가가 되어 오랜 시간이 농축된 그의 삶을, 그의 세계를 되짚어보고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왜 우리를, 그리고 세상을 버렸는지 조리 있게 따지는 일은 그 다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삶에 대한, 또 인간에 대한 예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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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8-23 09: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한 인간의 마지막 선택을 논리로 따지기 보다는 그의 농축된 삶을 마음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우선해야한다는 마무리 글이 마음에 와닿네요.
저도 관심있는 책인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잭와일드 2022-08-23 09:36   좋아요 3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논의는 사회학이나 심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고, 오히려 과학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