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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평점 :
찰리 채플린은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을 남겼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이는 일견 행복으로 충만해 보이는 삶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려움과 고통, 삶에 대한 ‘비의(悲意)’가 내포되어 있다는 삶의 내밀한 속성을 잘 포착해낸 체험적 진리다. 제임스 설터도 "나뭇잎을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 보면 잎맥이 보이는데, 다른 건 다 버리고 그 잎맥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이는 저마다의 방향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잎맥처럼 삶은 다면적이고 정답을 찾기 힘든 것이지만, 삶에 대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멀리서 숲을 조망하기 보다는 숲 안으로 깊숙히 침잠하여 나뭇잎의 형태와 주위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그 미세한 변화들에 주목해야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들의 삶은 미스터리였다. 숲과 비슷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되고 묘사될 수 있었지만, 가까이 갈수록 흩어져 빛과 그림자로 조각났고, 그 빽빽함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는 형태가 없었고, 경이로울 정도의 디테일만이 어디나 가득했다.” - <가벼운 나날> p. 51 -
이를 반영하듯 <가벼운 나날 (light years)>에서 설터는 네드라와 비리의 결혼생활을 통해 삶의 내밀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성공한 건축가인 남편과 아름다운 아내, 사랑스런 두 딸, 전원주택에서 파티를 즐기는 여유로운 삶. 멀리서 보면 너무나 단란하고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다. 하지만 설터는 화려한 삶 그 이면에 감춰진 공허함과 미세한 균열들을 들추어 낸다. 이를 통해 자아실현, 사랑, 결혼, 육아 등 인생에 있어 중요하게 다뤄지는, 누구나 동경하고 행복의 기준이자 지향점이라고 여기는 사건들이 사실은 빛과 그림자라는 조각난 형태로 존재하며, 이 마저도 명멸하는 빛처럼 너무나도 짧게 삶의 한 순간을 조명하고 일순간에 흩어져버린다는 걸 지적한다. 소설의 서문에 등장하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삶이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이 다른 삶이다”는 문구는 삶은 ‘빛(light)’의 스펙트럼처럼 다면적인 것이고, 일견 밝고 따뜻해보이지만 감추어진 실상은 너무나 ‘가볍고(light)’ 허무한 것이라는 설터의 철학을 대변하고 있다.
어둠속에서 짧게 명멸하는 빛처럼 삶은 빛과 그림자, 그리고 감춰진 어둠이 점철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은 설터의 소설들을 관통하는 주제다. <고독한 얼굴>에서 설터는 이를 구현하기 위해 ‘고산 등반’이라는 소재를 택한다. 소설의 제목 <고독한 얼굴 (Solo faces)>에는 그의 다른 소설 <가벼운 나날> 처럼, 또한 서창렬 번역가가 언급한 것처럼 다면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는 홀로 우뚝 솟아 있는 고봉 자체를 뜻하기도 하고, 주인공인 랜드처럼 혼자서 하는 등반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소설의 한국어 제목처럼 고봉을 홀로 등정하는 과정에서 대면하게 되는, 인간이라면 숙명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고독한 얼굴’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한국어 제목과 선택된 표지의 그림을 보면 출판사와 편집자는 세번째 의미로 해석한게 아닐까 싶은데, 소설을 읽으며 물론 '언어의 마술사', '완벽한 스타일리스트' 답게 중의적인 의미를 의도했겠지만, 작가도 인간의 고독한 내면에 주목하여 소설의 스토리를 구상하고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고독한 얼굴>의 버넌 랜드는 대학과 군대 모두 적응에 실패하고 교회 지붕을 수리하면서 특별한 꿈이나 목표 없이 적당히 현실에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 외롭고 물직적으로 피폐한 삶 속에서도 빛과 온기만을 쫓지 않는 삶의 태도를 견지하던 랜드는 우연히 과거에 함께 산을 오르던 친구 캐벗을 만나며 잊고 지낸 등반에의 열정을 떠올리며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랜드는 샤모니로 향해 동료들과 드뤼를 포한한 여러 등반에 성공하고, 홀로 암벽 등반을 시도하던 중 드뤼에서 조난자들을 구하게 되면서 등반가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해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해. 나머지는 그들의 상상에 맡기고”라는 그의 말처럼 산을 향한 순수한 열망으로 등반이라는 행위 자체에 몰입하던 랜드는 명성이 가진 유혹 앞에 나약해지는 인간의 모습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설터는 한 등반가의 성공과 좌절에 관한 이야기로 인간의 순수한 욕망과 이중적 본성, 숙명적인 고독과 삶의 의미를 되짚는다.
“인생은 시련 아닌가요? 우리는 끊임없이 시험당하고 있어요. 이런 시험의 단적인 모습 또는 극적인 순간을 선택하는 건 내게는 드문 일이 아닐 거예요.”
- Paris Review 인터뷰 중 -
사실 다양한 얼굴을 하고 찾아오는 삶의 시험 앞에 놓인 인간을 그려내기 위해 ‘고산 등반’ 만큼 적합한 소재도 없을 것이다. 등반은 기본적으로 역경과 고난의 과정이고, 인간의 힘으로 좌우할 수없는 압도적인 운명과 환경, 시련에 맞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와 도전, 몰입과 집착, 성취와 실패, 한계와 허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등반에 대한 철학, 등반 기술과 도구의 적용과 등반 방식, 등반 성공으로 얻는 명성과 유혹과 반대로 느껴지는 공허함과 마주하는 순간 등에서 수많은 인간군상을 빚어내고 인간의 속성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14좌를 최초로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는 등반가로서의 업적과 명성만큼이나 독특한 등반원칙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바로 스폰서와 안내인 (셰르파) 없이, 최소한의 장비만을 가지고 홀로 산에 오르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모든 걸 준비하고, 안전을 책임져 줄 안내인까지 대동한다면 진정한 산을 만날 수 없다는 그만의 이유 때문이었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싶고 느끼고 싶기 때문에 이 원칙을 고수한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자신이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은 영하 40도의 추위나 시속 80km의 강풍, 심장을 터뜨리는 희박한 산소가 아닌 바로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저건 정말 멋진 선이야." 그가 마지막으로 눈을 들어 말했다.
"저게 바로 우리를 정상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 그렇잖아?"
"혹은 그 이상까지."
- <고독한 얼굴> p. 91 -
설터는 등반을 향한 순수한 열망을 가지고 등반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그가 고집했던 등반 방식처럼 자유분방하지만 외롭고 고독한 히피로서의 삶을 살았던 등반가 게리 헤밍의 삶을 투영하여 이 소설을 집필했다. 등정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삶에 견줄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한계에의 도전과 성취라는 테마는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에 대입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극복할 수 없는 신분의 한계 속에서 사랑이라는 감정 마저도 자본이 가진 물성으로서 회복하고자 했던 한 인물의 실패담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의 전반에 걸쳐 ‘up’이라는 단어는 총 202번이나 등장하여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자 했던 주인공 개츠비와 작가의 열망을 대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고산 등반이라는 행위는 인간이 가진 수많은 욕망들과 그 욕망들이 소비되고 성취되는 과정, 혹은 실현되지 못하고 좌절하는 과정들을 대변하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소설에서 “당신은 산을 사랑하는군요.”라는 질문에 “산이 아닙니다. 산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삶을 사랑합니다. (p. 195)”라는 랜드의 대답은 이 같은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우리네 삶과 마찬가지로 등반 과정은 시련의 연속이다. 인생이라는 산을 등반하기 위해서 우리는 저 아득히 멀리 존재하는 정상을 바라보며 걷기 보다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다음 내디딜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가 삶을 오롯이 통제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등반과정에도 예측 불가능한 돌발상황이 수시로 발생하고 등반가는 생존을 위해 순간적으로 상황을 인지하고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 시간을 두고 판단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고, 판단이 옳았는지, 또 다른 대안은 없었는지에 대해서 끊임없는 의구심이 치솟는다. 안전한 지상에서는 사소한 사건이나 큰 의미 없는 행동들도 산에서는 생명을 위협하는 돌이킬 수 없는 위험으로 돌아온다. 이 모든 결정에 따른 결과는 등반가 자신이 감내하고 짊어져야 한다. 때로는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산은 인간의 작은 움직임이나 품고 있는 일말의 희망도 허락하지 않기도 한다. 인간은 상황이 변하고 산이 등반을 허락하길 숨죽여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삶을 완전히 통제하여 온전히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아니 행복을 논하기 전에 우리의 삶 속에서 완벽히 통제가 가능한 영역이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완벽히 통제하고 선택하지 못한다. 다만 이미 발생하여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에 대해 대처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삶의 시련은 고통과 고난을 수반하지만 때로는 고난이 우리가 삶을 대하는 자세를 가다듬고, 내면 성찰과 위기를 극복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우리는 저마다 삶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와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와 신념들이 결국 우리가 삶을 대하는 자세가 되고, 행복에 대한 가치를 만드는 것일 것이다. <가벼운 나날>에서 설터는 완전한 삶이란 없고, 인간은 그 조각만을 소유할 뿐 아무것도 온전히 가질 수 없는 존재임을 설파한다. <고독한 얼굴>의 랜드 또한 인간을 압도하는 대자연 앞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p. 174)
"내가 등반에 대해 배운 한 가지가 뭔 줄 알아? 단 한 가지 교훈 말이야."
"뭐지?"
"등반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거." "진짜 투쟁은 그 후에 온다는 걸."
- <고독한 얼굴> p. 256 -
등반과정에서 가장 큰 성취이자 환희를 느낀 순간은 언제일까? 많은 이들이 등반과정에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정상에 올라 황홀한 희열을 느끼며 함께 오른 동료들의 환하게 빛나는 얼굴을 확인하고 손을 맞잡던 순간을 언급할 것이다. 하지만 설터는 랜드의 입을 빌어 등반이 주는 단 한 가지 교훈은 등반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고, 진짜 투쟁은 그 후에 온다고 말한다. 이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그때 그곳에서 (There and Then)>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설터는 <그때 그곳에서>에서 “사람들은 모두 끝난 뒤의 승리를 기억하지만 그건 행복처럼 막연한 것이며, 절망의 순간이 훨씬 더 생생하고 잊히지 않는다. (p. 186)”고 말한다. 또한, “등반은 원시적이어서, 멍청하고 마초에 이기적일 수있는 등반가들도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는데, 자신의 영혼, 말하자면 자신의 품성에 관해서 알게 된다는 것. (p. 187)”이라고 말한다. 이는 정상에서의 성취도 중요하지만 보다 의미 있는 것은 정상에 오르는 과정에서 역경과 고난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한 순간이라는 것 아닐까?
또한, 진짜 투쟁은 그 후에 온다는 것은 성공에 따른 대중의 관심과 명성에 취해 순수한 열망과 초심을 잃는 것, 정상에 도달하지 못한 채 실패와 좌절 속에서 표류하는 것, 이 모두를 경계하면서 일상의 삶으로 복귀하는 과정, 즉 삶의 정상성을 회복하는 과정이 진정한 투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때 그곳에서>에서 설터는 “가장 즐거운 경우라도 등반은 도전이며, 도전이 없다면 의미도 없다. (p. 187)”고 말한다. 설터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도전 과정에서 고난을 극복한 경험과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상에 다다른 이후 다시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돌아오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 아니었을까? 등반가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열을 올리는 정상까지 올라가는 법에 비해 정상에 도달한 이후 다시 이전의 삶으로 회귀하는 과정은 상대적으로 도외시되기 마련이다. 어쩌면 정상에 다다른 이후 무탈하게 잘 내려오기 위한 지혜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견디는 거예요. 두려워 하지 말고.” - <고독한 얼굴> p. 281 -
삶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안정된 상태라고 느끼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미지의 것이 느닷없이 닥친다. 이렇게 질서가 무너진 혼돈 속에서 우리 삶은 현실부정과 절망,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잠식되어 간다. 삶은 질서와 혼돈으로 점철되어 있다. 안정된 질서 속에 갑자기 혼돈이 찾아오기도 하는 반면, 모든 것을 상실한 듯한 절망적 순간에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도 한다. 삶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질서와 혼돈의 경계 위에 있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삶에는 빛과 온기만이 아닌 불안과 균열도 함께 공존한다는 설터의 시각은 그래서 우리에게 진솔한 위안이 된다. 보여주기 위한 표면적인 삶이 아닌 우리의 삶이 가진 실체적 진실이 그렇다고 한다면 빛 뿐만 아니라 너울져 있는 그림자와 어둠도 우리 삶의 조각임을 그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잎맥을 따라 삶의 조각난 진실을 꿰어놓는 설터의 세계에 주목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비록 우리가 원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왜냐하면 우리는 상실과 결핍, 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 무의미해요.그가 외쳤다.
– 왜요?
– 당신의 삶이요. 그가 말했다.
– 왜냐하면 그 안에 고통이 없어요.
이따금씩 약간의 슬픔마저 없는 삶이란 결국 뭘까요?
- <가벼운 나날> p. 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