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좋다는 건 집이 담배 피우기에도 좋다는 뜻이고 

그건 술 마시기에도 좋다는 뜻이어서 

담배 잘 피우고 있다가 조금 전 맥주 사왔다. 

둘레길 30초 컷 오지라서 편의점이 슬세권에는 없다. 레트로한 수퍼가 있음. 어두컴컴하고 층고 낮은, 바닥도 두 계단쯤 반지하 느낌 수퍼. 몇년동안 편의점 맥주만 마셨었는데, 여기 와서 테라, 클라우드 마신다. 수퍼는 기네스 팔지 않는다.  


이 집에서 담배 피움은 위 그림을 기억함이다. 

본질은 같음. "at the window." 창가에서 피운다 해도 보통은 연기가 집안으로도 들어오고 재도 날리고 좋지 않은데, 여기선 좋다. 환기가 과하게 잘된다. 그리고 마주보는 집이 없다. 또한, 예전 집은 "동선" 개념을 조롱하는 공간이었던 데 반해 이 집은 흡연자이며 독자인 사람이 흡연이 독서를, 독서가 흡연을 돕는 동선을 구상하면서 방들을 만든 거 같다. 


위와 같은 즐거움은 물론 순수히 즐거움인 것만은 아니다. 담배는 끊겠다고 오늘도 여러 번 작정해 보기도 했고. 

그런데 이사하고 다음 날 책상에 책 펴놓고 앉아 있다가 의자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서 느꼈던 그 기묘한 즐거움은, 그 기묘하고 충격적이던 강한 즐거움은 기록해둘 가치, 탐구해볼 가치가 있지 않나 한다. 나는 진짜로는 그런 생각을 지금까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저 때엔 "아 정말 있는 집 애들이 공부든 뭐든 잘 할 수 밖에 없는 건 그들의 공간 때문이다"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신체의 자유는 신체에 어떻게 기입되는가. ;;;;;;; 신체의 자유는 어떻게 정신의 자유가 되는가. 


한국에 와서 바로 이만큼 넓은 집에서 살 수 있었다면 나는 다른 글을 ㅆ(.....). 이렇게 생각할 뻔했다. 

좁은 집, 좁은 방에서 <공간의 시학> 같은 책을 쓴 바슐라르 때문에, 바슐라르 기억하면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지만, 한 번 진지하게 시험해 보고 싶기도 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내게 최적의 환경을 준다면 과연 읽기와 쓰기가 달라질 것이냐. <자기만의 방> 논지에 추가할 세밀한 경험들을 해볼 수 있을 것이냐. 지금 책상 왼쪽으로 길게 이어서 쓸 책상과 거실 벽들을 채울 책장들이 내일 올 예정인데, 이것들로 집을 채워놓고 나서 과연 변화가 있을지, 삶이 달라질지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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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스의 책에 라킨의 이 서한집 서평도 실려 있다. 

라킨과 모니카의 관계도 매우 특이한 관계였다. 버지니아 울프, 레너드 울프 같은 관계 절대적으로 아니었고 

..... 이들과 비슷한 관계가 문학사나 지성사에 있었다면 에이미스가 언급을 했겠지만 언급하지 않은 걸 보면 

유례가 없는 관계인 것으로. 에이미스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모니카에게 라킨은 "미친 기인 이모에게 영원히 고문 당하는 (소심하고 영리한) 조카"였다. 


라킨은 20대에 이미 뛰어난 소설을 두 편 쓴 소설가이기도 했다.  

소설을 더 쓰겠다는 욕망이 그에게 있었다. 그러나 쓰지 못하는데 이유는 

"쓴다면 그건 모니카에 대한 공격이 될 것"이라서. 이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 한편 증오하면서 그러나 또한 깊이 사랑하면서, 30년 세월을 함께 했나에 대해, 다 납득이 되는 얘기들을 에이미스가 해준다. 


라킨과 모니카의 관계보다 더 흥미로운 관계는 라킨과 에미미스의 부친 킹슬리 에이미스와의 관계. 

마틴 에이미스는 라킨을, 아버지의 친구로 처음 알았다. 아버지가 호스트인 모임에 라킨이 자주 있었다. 

아버지는 어김없이 매일 라킨의 시를 암송하거나 읽었고 라킨을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 중 하나로 생각했다. 

그런데 라킨은 전혀 킹슬리를 가까운 친구로 여기지 않았고 그랬다는 증거를 이 서한집의 편지들에서 아주 방대하게 볼 수 있다. 라킨은 모니카에게 쓴 편지들에서 수시로 킹슬리와의 거리감, 이질감을 말하고 킹슬리 식의 삶에 대해 조롱, 농담한다. 


아버지가 사랑했던 친구.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사랑했던 친구. 

그러나 은밀히 아버지를 경멸했던 친구. 몇 번이고 등에 (어떤 기준들에 따르면) 칼 꽂은 친구. 


라킨과 킹슬리의 관계가 저런 것이었고 마틴 에이미스 자신 저렇게 규정하기도 하는데 

그런데 이걸 근거로 라킨을 비난하거나, 라킨에 맞서 아버지를 옹호하거나, 전혀 조금도 눈꼽만큼도 그러지를 않는다. 


이게 나는 참으로 

이것이 배운 사람의 방식이다........... 같은 느낌이었따. 


아버지의 사랑이 틀린 것도 아니고 

라킨의 배신이 틀린 것도 아닌. 두 사람은 각자 자기의 삶을, 각자의 한계와 각자의 재능 안에서, 살았던 것인. 


어떻게 잘, 확 와닿게 정리하기는 어려운데 

무척 감탄하면서 읽었다. 가족을 포함해 타인의 삶을 진정 이해함의 모범이 여기 있다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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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5-20 1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킨은 제가 좋아하는 현대 시인중 한명인데
마틴 에이미스 라킨 아버지 킹슬리 까지 얽힌 에피소드 흥미롭네요
영국 문단계에서 마틴 에이미스는 마당 발인데 ㅎㅎㅎ

몰리 2021-05-20 17:36   좋아요 1 | URL
마틴 에이미스 약간 슬로터다이크 같아요. 우파로 보이는 면모, 그런 행실을 해와서 좌파들이 미워하는 것까지. 말장난 좋아하는 것도! 자기 아버지와 그런 사이였는데도 라킨 시를 아주 우호적으로 아주 깊이 있게 읽더라고요. 그런 게 참, 호소력 ㅎㅎㅎㅎㅎ 갖습니다. 응 당신은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야 같은 호소력.
 




The rub of time에 이 책 길게 논의하는 글이 있다. 

책에서 인용도 길게 하는 편이다. 부친의 "공격적으로 코믹한 스타일"을 정확히 지목할 형용사는 무엇인가 

오래 궁리해 왔다고 한다. 그 스타일을 보여주는 사례로 책에서 인용하는 게 이런 대목이다. 



단순화하고 타락한 라틴어가 프랑스어의 기원이다. 그 라틴어는 이를테면 제국의 변방에 파견된 로마의 병사들, 상인들과 그  지역 농민들 사이에 한때 쓰인 라틴어다. 실제로는 반달족이나 파르티아족 출신인 로마 병사가 지방 촌놈에게 호령하는 상황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촌놈은 병사가 하라는 대로 하고 싶지만 아직 라틴어를 잘 모른다. 


병사 (극히 저급한 라틴어로): 나는 물을 원한다. 물을 가져와라. Aquam. 

촌놈: 응(Ugh)? 

병사: Aquam! 말해 봐라, aquam. 이 바보야. 말해 봐. aquam. 

촌놈: 오(O)? (수세기 뒤 프랑스어가 쓰기의 단계로 진입할 때 O는 eau가 될 것이다). 

병사: 그래 그걸 저 높은 곳으로 가져와라. 저기 높은 곳. Altum. 

촌놈: 응(Ugh)? 

병사: Altum! 말해봐라, altum. 이 촌놈아. 말해 봐. altum. 

촌놈: 오(O)? (이 O는 나중 haut로 표기될 것이다).  



이거 많이 웃겼다. 

타락한 라틴어가 불어의 조상이라는 건 불어, 외국어 관심 있다면 곧 듣게 되는 얘기인데 

그런 관념이 가리키는 실제 상황은, 그러니까 누가 그걸 이렇게 써주기 전엔, 알기 어렵고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eau와 haut 둘 다, 그 자신 라틴어를 잘 못하는 변방출신 로마 병사를 상대하던 프랑스 농민의 O였다.... 는 게 실제로 불어학자들도 맞다고 할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웃김. 


아 오늘도 엄청난 하루였다. 

내일도 그럴 예정. 오늘 맥주 마시고 내일도 맥주 마실까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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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라킨과 그가 청혼할 만큼 좋아하지는 않았던, 그럼에도 30년을 함께 했던 그의 연인 모니카 존스. 

에이미스의 책에서 특히 재미있는 글이 필립 라킨 주제 글, 그리고 그의 부친 킹슬리 에이미스 주제 글이었다. 

인간은 각자 어떤 비참 속에서 사는지. 삶을 사랑한다는 것, 언어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이것들에 대해 아주 본격적으로 해주는 말들이 있다. 






인터넷 연결은 어제야 되었는데 

연결은 된 게 맞았겠지만 (wi-fi는 됨) pc가 문제가 있어서 

(모니터가 문제인지 본체가 문제인지도 일단은 불분명했지만) 

..... 어느 시점 이후 인생이 언제나 그랬듯이 근원적으로 잘못된 세계, ;;;; 하튼 그 느낌과 함께 

인터넷 하고 있는 중이다. 컴닥터라는 업체에서 수리하러 오신 분이 적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이거 진짜 오래된 거네요"의 한숨. 어떻게 이것 안에서는 불가능하고 윈도우즈10을 깔아야 하는데요 (....) 


윈도우즈 10으로 바뀌고 나니 사진 파일이 jfif 이런 파일로 저장되어서, 지금 사진 파일도 잘 못 올리겠는 상황. 

위의 이미지는 이사온 방의 사진이다. 오른쪽으로 회전이 필요한데, 뭐 그러지 않아도. 

이사하면 방 하나에 책이 전부 들어갈 수 있을 걸로 예상했으나 아니었다. 저만큼이 있고 

거실 벽 하나가 더 있다. 


책장을 하나씩 조립해서 정리할 일이 남아 있는데 

.... 이건 사실 책 덕후라면 기대되는 일. 하고 싶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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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saint 2021-05-18 2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쉬엄쉬엄 하셔요~ 책에 깔리지 않게 조심하시구요~^^

몰리 2021-05-19 08:13   좋아요 0 | URL
네 어떤 책들이 발굴될지 기대가 됩니다. 2-30년 전으로 가는 순간들이.....

han22598 2021-05-19 0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구본...귀여워요 ㅋㅋ

몰리 2021-05-19 08:15   좋아요 0 | URL
작은 집엔 미니 지구본. 그래서 사보았더니 나라들이 거의 형체가 없고 (이름도 판독이 쉽지 않고) 대륙도 대충 알아보이는 지구본! 지구본 다운 지구본은 넓은 집이어야 가능하.... ㅜㅜ 다는 억울함!
 




클라이브 벨은 버지니아 울프 언니 바네사의 남편. 

블룸스베리 그룹의 중요 멤버였다. 웃기고 활수하고 (약 이십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활수하다 이 말 썼더니, 그 말 실제로 쓰는 사람 처음 본다던 사람이 있었.... 누군가를 기억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말들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 그 웃김과 활수함으로 블룸스베리 그룹의 형성과 유지에 지대한 역할을 했지만, 결국 작가도 예술가도 지식인도 아니었던 사람. 버지니아 울프, 리튼 스트래치, 메이너드 케인스, 등등에게 "미만잡." 한참 미만잡. 


대강 저런 게 클라이브 벨에 대한 후대의 평가였다.  

그가 아무 것도 안 쓴 건 아니고 그가 남긴 예술 비평, 예술 이론 저술들이 있긴 해서, 그것들을 놓고 그를 모더니즘 미학 이론의 선구자로 읽는 시도들이 있기도 했다. 대세는 바뀌지 않음. 그런데 6백 페이지 분량의 전기가 올해 나왔고, 무슨 얘기가 여기 있을지 궁금하다. 



어제부터, 공기 청정기 아무리 돌려도 수치가 50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바깥 미세먼지 수치가 100-200 사이라면 틀고 10-30분이면 청정기 수치가 30 근처로 내려갔던 거 같은데 어제 오늘 같은 수치면 아무리 돌려도. 어제 밤에 틀고 잤는데 일어나서 보니 150 근처. 밤새 틀어도 "보통" 수준이 되지 못함. 바깥 수치는 오늘 600을 넘었었지. 몇 년 전 며칠 동안 200-400 그랬을 때,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는가, 우울하고 무력하다 한탄했었던 거 우스워지는 어제 오늘의 수치. 이런 수치에 익숙해지면 100-150까지는 좋은 공기로 느끼게 될 거 같다. 나가서 뛰고 깊이 들이마시고 그럴 것이다. 



니체와 과학. 니체의 과학철학. 이런 주제로 연구하고 글 쓰는 분들이 있고 

그 분들을 삐딱하게 보는 분들도 있다. 니체가 무슨 과학철학자야. 니체에게 무슨 과학철학이 있어. 진심이세요? 

그런데 삐딱하게 보기엔 니체가 과학을 정말 너무 많이 말한다. 독어 단어 Wissenschaft가 자연과학만이 아니라 사회과학, 인문학도 포함하는 단어라는 것, 영어로 의미에 충실하게 저 단어를 말하라면 science가 아니라 scholarship, intellectual inquiry, 이런 쪽이 더 맞는 역어가 될 것이라는 게 사정을 복잡하게 만들지만, 어쨌든 Wissenschaft, 이것이 그에게 극히 중요한 주제였다. 


인간의 정신은 거대한 방이 되어야 한다. 예술과 과학, 상충하는 힘들이 그 안에서 공존해야 한다. 

더 높은 문화는 과학과 비-과학을 동시에 다루는 "이중 두뇌 double brain"를 요구한다. : 이런 게 그의 입장이기도 했다. 


"이중 두뇌." 바로 바슐라르가 연상될 법도 한 구절. 

실제로 니체 저술들 여러 곳에, 그가 말하는 "새로운 철학자"는 바슐라르 같은 철학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 대목들이 있다. 바슐라르의 과학철학에, 이건 과학철학의 니체주의라고 볼 수 있는 여러 대목들이 있기도 하고. 이 모두를 앞에 놓고 "바슐라르, 니체의 후예" 이런 주제 페이퍼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아주 좋은 주제라고 생각한다. 극히 흥미로운 (그리고 심지어 중요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주제다. 그러나 그런 결과가 나오려면, 적어도 한 번의 생애가 필요하고 (....) 아마 대가여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구상은 나도 (나따위도) 할 수 있지만, 구현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되는 주제인 것임. 


미미한 구현이라도, 구현하다 실패할 뿐일지라도 좋으니 해보겠다면 

거대한 방으로서의 정신들이 모인 곳에 있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만인이 만인을 가장 좁은 방에 가두려 하기. 이것이 한국의 경험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구상은 하더라도 구현은 하지 못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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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1-05-09 0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상에서 구현까지. 정말 한 사람의 생애로는 부족할지도 모르겠어요.
과학과 비-과학이라고 말하면 과학 아닌 분야를 과학과 너무 반대쪽에 놓는 느낌이 들때가 있어서, 비과학이란 말 대신 과학을 넘어선 분야라고 생각하고 싶을 때가 많아요.

몰리 2021-05-09 07:10   좋아요 0 | URL
정말 한 번의 생애는 무엇을 하든 제대로 하기엔 부족하지 않나는 생각도 듭니다. 내 손으로 집도 지어보고 싶고 목공도 배워보고 싶다면 그러면서 동시에 책도 읽고 글도 쓰기는 거의 불가능. 얼마 전에 윤회설에 대해 들으면서, 아 이것이 주는 막대한 위안이 있구나, 다른 삶에서 해보았다, 다른 삶에서 해볼 것이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