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분 1
조디 피콜트 지음, 곽영미 옮김 / 이레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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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분이면, 당신은 앞뜰의 잔디를 깎고, 머리를 염색하고, 하키 경기 3분의 1을 관람할 수 있다.

 19분이면, 당신은 스콘을 굽거나 치과에서 이를 하나 넣거나 다섯 식구의 빨래를 갤 수 있다.

 19분이면, 당신은 세상을 멈추게 하거나, 세상에 공격을 개시할 수 있다.

 19분이면, 당신은 복수를 당할 수 있다.
바람이 지나간다. 겨울이라는 계절에 알맞게 말 그대로 뼛속까지 시려오는 듯 차가운, 그렇지만 가슴 속 답답한 기운을 한 번에 가져가주는 상쾌한 바람이다. 아무리 상쾌하다 해도 지하철을 기다리는 일만 아니었다면 오래 맞고 싶지 않은 바람이었지만 오늘따라 햇살은 왜 그리 따뜻하고 찬란한지. 햇살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물들이 모두 반짝이는 듯 해서 나는 눈을 조금 찌푸려야 했지만 순간 나 자신까지 반짝이는 듯한 착각에 눈부심이야 조금 참아보기로 한다. 

장소는 한 번 지하철을 놓치면 10여분은 기다려야 하는 중앙선의 어느 역.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역에 도착한 후 19분이 지난 후에야 나는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19분. 19분 전에 나는 역에 도착했고, 19분 동안 여기저기서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나의 그 19분은 매우 평화로웠다. 꼭 들어야 하는 수업을, 학교 다닐 때도 해본 적 없는 수업 거부를 하고 나온 참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활기찬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몰래 빠져나오기를 잘 했다 싶었다. 나의 인생에서 19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또 조용히 흘러갔지만 누군가에게는 운명이 결정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으리라. 

2007년 3월 6일 10시, 뉴햄프셔 주의 스털링 고등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용의자는 피터 호턴. 호리호리한 몸에 안경을 쓰고 하얀 피부를 가진, 17세 소년. 그는 자동차 한 대를 폭파시키고 학교의 카페테리아, 교실, 화장실, 계단, 복도, 그리고 경찰에게 붙잡힌 라커룸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 마주쳤던 사람을 모두 공격했고 시작된 지 19분만에야 사건은 끝이 났다. 그러나 매슈 로이스턴을 포함한 10명의 사망자와 아름다운 얼굴을 잃게 된 헤일리 위버를 비롯한 많은 수의 부상자, 신체적인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남은 평생 죽음에 대한 공포와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게 될 학생들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낳은 사건은, 피터 호턴에게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 지를 밝혀내며 다시 시작된다.

   모두들 내가 그 애들의 인생을 망쳤다고 하지만, 내 인생이 망가지고 있을 땐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요. -1권, p232
'맞춤형 아기'라는 다소 충격적인 설정의 작품 [마이 시스터즈 키퍼 : 쌍둥이별]로 많은 감동과 아픔을 전해주었던 조디 피콜트가 이제는 '왕따 문제'와 '총기난사 사건'을 소재로 소외당하고 상처받은 아이들의 마음을 위로한다. 많은 이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도 남은 평생 커다란 상처를 남길 사건의 표면적인 부분이 아니라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희생자들 외에 가해자 또한 상처받고 있지 않았는지를 깊이있는 시각으로 섬세하게 다루었다. 가해자 또한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었음을, 홀로 고통받은 시간에 누구도 곁에 있어주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는 이 작품을 읽다보면 2007년 4월 버지니아 주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조승희가 만들어낸 참담함과 아픔이 아니라 그의 무덤가에 누군가가 가져다두었던 편지와 꽃다발들이. 

작가는 사건이 일어나면 으레 피해자들에게만 국한되기 쉬운 초점을 이 작품에서는 가해자인 피터에게 맞추었다. 그리고 그의 부모, 단 한 명의 친구라 부를 수 있었던 조지 커미어, 조지의 엄마인 알렉스의 시점을 넘나들며 각 인물들의 내면심리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피터가 어떤 아들이었는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듣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서 책을 읽어내려가기가 무서워질 정도였다. 아이라서, 순진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친구를 놀리고 괴롭히는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어쩌면 그 순진함만큼이나 같은 비율의 잔인함도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난 단지...네가 우리와는 다른 애들을 대하는 방식이 싫은 것뿐이야, 알겠어? 낙오자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 애들을 괴롭혀도 되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런 애들이 없으면 우리도 없는 거야.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1권, p376
'인기있고 싶다'는 점에서는 아이 뿐만 아니라 어른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왕이면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고 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욕구는 당연하다. 때문에 늘 괴롭힘과 놀림을 당하는 피터 곁을 떠나 인기있는 아이들과 어울리려는 조지의 행동을 아무도 비난할 수는 없다. 특히 아이들에게 있어 인기는 사막에서의 물 한모금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니까.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다름'을 '틀리다'로 판단하고 배척해버리는 판단의 부족함일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도 '왕따'는 민감한 문제다. 정신적인 학교폭력이며, 따돌림을 당한 학생들이 자살하기도 하는 등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안타깝고 부끄럽지만 '왕따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내기란 어렵고도 어렵다. 하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에 어설프게 어른이 끼어들어 더한 폭력을 조장할 수 있다는 얼버무림, 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늘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말들, 스스로가 강해져야 한다는 그럴듯한 충고와 핑계들이 어쩌면 상처받은 아이를 더 외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일들은 인생이라는 웅대한 게획에서 퍼즐의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2권, p86) 는 걸 깨닫는 때는 현재가 아니라 먼 훗날이 될 것이므로. 문제의 심각성은 알고 있으면서도 적절한 대안이 마련되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의 인생을 망가뜨려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작품 속에서 누군가는 영원히 걸을 수 없고 누군가는 제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으며 또 누군가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자식들과 함께 점심을 먹거나 그들이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부모는 자살을 하기도 하고 피페해진 삶 속에서 한 조각의 희망도 발견할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겪었던 이상의 고통을 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말이 듣기 싫거든, 적어도 자신을 세상 속으로 보내 준 자신의 부모 또한 영원히 자식을 잃게 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고통의 순간을 그들이 함께 해주지는 못했어도 말이다. 그것 또한 부족하거든 자신 또한 스스로를 잃게 될 것이라는 점이라도 기억해주기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주위에 있는 한 그것은 여전히 존재하는 거야. -2권, p358
조디 피콜트는 '회색지대'를 그리는 작가라는 점에서 무척 마음에 든다. [쌍둥이별]에서도 그렇지만 [19분]에서도 세상을 흑백논리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 속에는 가해자는 없고 오직 상처받은 사람들만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에만 의존한 결말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쉼없이 달려운 진실의 마라톤 끝에서 그녀가 선택한 결말은 덤덤하고 현실적이다. 시사성 있는 소재, 섬세한 표현력을 잃지 말고 멋진 작품으로 다시 찾아와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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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날의 파스타>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보통날의 파스타 - 이탈리아에서 훔쳐 온 진짜 파스타 이야기
박찬일 지음 / 나무수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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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한 가지 지켜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뱃속을 비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 나는 심지어 저녁을 먹고나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도 먹음직스런 파스타 사진에 밀려오는 배고픔을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나는 특히 토마토 소스 파트타를 좋아하는데 평소 즐겨먹지 않던 크림소스 파스타 사진에도 입맛을 다셨을 정도다. 어디 파스타 뿐인가. 이탈리아의 만두 라비올리에 뇨키와 리조또까지! 캬~요리와 관련된 책은 밤에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스타는 비교적 만들어먹기 쉬운 요리다. 예나 지금이나 '혼자 있으면서 뭘 해먹어!'라는 신념을 굳게 지키고 있는 나조차도 '몇 번' 정도는 파스타를 만들었던 적이 있다. 그것도 몇 년 전 이야기지만. 전문성에는 한참 못미치지만 마트에서 파는 파스타면과 소스를 사다 대충 만들어먹은 파스타는 나름대로 먹을만했다고 기억하고 싶다. 예전에는 무슨 특별한 일이 있을 때나 기분 내기 위해 먹었던 파스타는, 지금은 일상에서 쉽게 만들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우리와 가장 친숙한 요리 중 하나가 되었다.

[보통날의 파스타] 는 제목 그대로 파스타에 관한 책이다. 이미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라는 책으로 친숙한 작가는, 이탈리아 요리학교를 수료했고 시칠리아에서 연수한 후 귀국 후 셰프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 동안 그냥 무심코 입 속에 넣기 바빴던 파스타. 스파게티가 파스타의 다른 이름인 줄 알아왔던 그 파스타의 세계가 현란한 사진과 레시피, 정겨운 이탈리아 문화와 함께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점은 스파게티가 파스타의 한 종류였다는 것이다. 그 동안 스파게티의 다른 이름이 파스타인 줄로만 알았던 나는 콘길리에, 라자냐, 펜네, 페투치네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또 꾸불꾸불하고 짧은 파스타의 이름이 푸질리라는 것도. 파스타의 다양한 종류에서부터 재료, 소스와 이탈리아 사람들이 파스타를 어떻게 즐기는지, 그들의 식생활과 문화는 어떠한지에 관한 이야기가 파스타와 버무려져 맛있게 전개된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고등어 파스타에 참치 스파게티, 이름은 들어봤지만 본 적조차 없는 오징어 먹물 파스타 등 파스타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그리고 더불어 나의 배고픔은 깊어만 갔다.  

정보도 자세하고 맛있어보이는 사진에 덤으로 레시피까지 실려있지만, 사실 쪼콤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그냥 먹고만 싶은데 이런 것도 다 알아야 해?' 라는.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이나 셰프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정말 유용한 책이겠지만 일반 사람들이 읽기에는 살짝 지루할 수도 있는 책이니 고려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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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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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가족'이라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가족'이라는 단어를 입에 머금으면 나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내다버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들'. 분명 우리나라 작가의 인터뷰 중 하나였는데 누가 말한 것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 사람이 저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은 내다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가족=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면 아마 그 사람은 저렇게 모질게 말할 수 없었겠지.

나에게 가족은 처음으로 나의 존재를 명명해주었던 사람들이자, 사랑과 미움, 원망과 애정, 실망과 친밀함 등 온갖 감정들을 나누고 꾸미지 않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라는, '가족이 뭐냐!'라는 말들로 모든 것이 통용될 수 있는 관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그 '가족이니까'를 외치면서 타인에게 원하는 것보다 더한 사랑과 관심, 관용과 배려를 요구하게 되는 관계. 그 요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한다. '이놈의 집구석, 징글징글해. 혼자 자유롭게 살았으면'. 하지만 어쩌면, 역시 가족 없이 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저 말을 아무 느낌 없이, 간단하게 내뱉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만해도 징글징글한 이놈의 집구석, 여기에도 있다. 아버지는 돈 잘 버는 무역업체 사장,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재혼했으나 곧 또다시 이혼, 누나는 어릴 적 받은 상처로 제대로 된 생활을 이끌어나가지 못하는 상태이며 멀쩡해 보이는 남동생에게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다. 그리고 현재 아버지와 누나와 남동생은, 화교인 새어머니와 의붓동생과 함께다. 그런데 잘하는 것이라면 바이올린 연주, 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생활하던 의붓동생이 사라졌다. 막내의 실종을 둘러싸고 가족들이 숨기고 있던 비밀이 하나씩 둘씩 밝혀지고 그들은 과연 자신들이 가족이었던가, 가족이라 해서 서로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자문한다.

아마도 작가는 막내의 실종을 기점으로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서먹서먹해 했던 가족들이 하나로 뭉치는 과정과 가족이므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것일 게다. 하지만 계산이 조금 어긋난 것은 아닐까. 그들은, 소설 안의 이 가족들은 결코 처음부터 가족이었던 사람들과 온전히 같을 수 없다. 혈연의 문제가 아니다. 거짓과 은폐의 문제다.

가족도 결국은 각기 다른 개개인이 모여 살아가는 집단인데 사소한 비밀 한 가지씩 없을 수는 없다. 친구관계, 만나는 사람, 그 날 있었던 일 중 말하고 싶지 않은 것, 말할 수 없는 것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진실이라고는 한 점도 찾을 수 없었던 관계가 막내의 실종을 계기로 갑자기 진실과 사랑, 희생으로 변할 수 있을까. 그들 가족 중 가장 솔직한 사람은 누나 뿐이다. 불안한 정서의 소유자지만 미움과 증오, 연민과 애정을 숨김없이 표출하는 사람은 그녀 한 사람이다. 나머지는 모두 가면을 쓰고 연기하고 있을 뿐. 그러므로 가족의 희생, 큰 일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설정은 작위적이다.

이야기 면에서도 조금 아쉽다. 한 남자의 죽음으로 시작된 이야기. 그 남자와 아이의 관계는 무엇이며 그의 죽음의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증을 일으키며 기세좋게 시작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세심함이 받쳐주지 못한다. 미스터리 형식을 도입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꾀했으나, 당연히 누구나 추측할 수 있는 희망을 내놓으며 이야기는 갑자기 종결된다. 흐지부지. 뒷심이 부족하다.

작가는


   진심을 다해 소설을 썼고, 세상에 내놓는다. 그것이 전부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조금 두렵다.

라고 말한다. 그녀의 그 말로 인해 나는 이 소설이 '어느 정도 재미는 있었으나 그리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라고 말하기가 조금 겁이 났다. 창작의 고통은 조금도 모르는 내가 과연 그녀를 두렵게 만들어도 되는 것인가. 하지만 나는 독자고 그녀는 작가다. 그녀의 작품은 '독자'가 있어야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고 믿고 싶다. '가족'이라는, 우리나라 사람 누구의 가슴을 울릴만한 소재로 글을 썼다고 해서, 책을 읽으며 마음을 졸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해서 그녀에게 기꺼이,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훌륭한 작품' 이라는 타이틀을 주고 싶지는 않다.

글의 끝에서, 나는 가족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자문해본다. 어려운 문제다. 우리도 소설 속 가족들처럼 '집 안'에서 보여지는 그들의 모습을 알고 있을 뿐이지 집 밖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가족에 대해 전부 알 수 없고, 가족도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가족이란, 자신의 눈으로 보는 모습들이 진실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가족'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가족에 대한 정의는 각자가 살아온 환경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겠지만 그것이 나를 둘러싼 '가족'에 대한 정의다. 작가가 나에게 '너는 가족에 대해 모른다'고 한다면 나는 그저 '다는 모른다' 라고 대답하면 그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되묻고 싶다. '당신은 가족에 대해 무얼 아느냐' 고.

완벽한 해답은 없다. 그저 함께 웃고 울고 화내고 미워하고 사랑하면서 부대끼며 살아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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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맨스 랜드 - 청춘이 머무는 곳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생각과느낌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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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작품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무엇일까. 올해는 책의 권수에 구애받지 말고 질에 더 중점을 두고 싶어 손에 쥐는 책마다 꼼꼼하게 살펴보게 된다. 이건 영 아니다 싶은 책, 재미는 있으나 뭔가가 부족한 듯 싶은 책은 애처롭지만 나의 기준에서 살짝 벗어난다. 내용이 조금 심오하다 싶으면 으레 표현이 어려워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는 책도 나에게는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메세지도 있고, 문장도 물 흐르듯 술술 읽히고 게다가 재미와 감동까지 전해준다면 정말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감성과 이성의 도전적인 물음. -카네기 메달 심사평 중
인용한 문구 그대로 되시겠다. 그저 감정만으로 이끌어가는 책이 아니라 마음과 머리를 동시에 자극하는 작품이다. 나는 책을 읽다보면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다. 일어났던 사건과 배경들을 모두 기억의 저편으로 날려버린 채 한 작품을 그저 '어떤 어떤 느낌이었다'는 감정만으로만 기억하는 것이다. 그것을 나는 애써 '가슴으로 받아들인 책'이라며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감동적이었다, 좋았다' 같은 표현으로만 기억하기에는 어쩐지 아까운 그런 책이다. 뭔가 중요한 메세지가 있는데 (그것이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온전히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지금같은 때는 난감하다. 누가 내 목구멍을 탁 쳐서 그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는 중요한 것을 튀어나오게 해준다면 좋으련만. 

두 명의 제이콥이 있다. 먼저 1944년 네덜란드에서 독일과 전쟁을 치르는 영국군인 제이콥의 이야기부터 하자. 2차 세계대전을 치르던 중 부상을 입고 헤르트라위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제이콥. 영국에 아내와 가족들이 있지만 그를 못된 불륜남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고 언제 어느 때 죽을 지 알 수 없는 상황, 독일군에게 붙잡혀 포로로 끌려가느냐 명예와 조국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싸워야 하느냐 하는 상황은 처해보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을 테니까. 

두 번째 제이콥은 1995년의 네덜란드에 있다. 전쟁 중 할아버지를 보살펴 준 가족들을 만나러 온 손자 제이콥이다. 원래는 할머니 새라가 오기로 되어 있었지만 할머니가 엉덩이 수술을 받는 바람에 네덜란드에 오게 된 제이콥. 헤르트라위의 가족인 테셀 아주머니와 단, 단의 친구이자 게이인 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알마 할머니, 매력적인 소녀 힐레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엄청난 진실 앞에서 고뇌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소설의 매력은 우선 감정과 이성의 균형을 잘 맞추었다는 데 있다. 감정적이면서도 감정에만 치우치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야할 현실적인 문제들-안락사라든가, 사랑에 관해서라든가-을 적절하게 배치해서 딱딱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각해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어떤 주제에 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어떤지 차분히 더듬어볼 수 있는 시간들. 그럼에도 감정의 끈을 죄었다 풀었다 하며 순간순간 울컥하게 만드는 것도 잊지 않는 멋진 기술.


   그가 갑자기 멈춰 서는 순간 생명이 그의 눈을 떠났다. 그가 그의 눈에서 떠났다. -p358

다른 독자들은 어땠을 지 모르지만 나는 저 문장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의 생명이 머무는 곳, 어떤 사람이 떠났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눈. 매우 간단하고 아무렇지 않게 쉽게 쓴 표현인 것 같지만 나는 어쩐지 작가가 죽음을 접했었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죽음은 그저 숨을 거두었다, 숨을 멈췄다, 움직이지 않았다 등으로 표현되지 '눈'으로 표현된 적은 드물기 때문이다. 오싹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 장면의 가슴 철렁함과 숨막힐 듯한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듯 했다. 

전쟁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도 충분히 가슴 아프지만 마음을 찌르르 울린 것은 많은 군인들이 그 때의 상황을 묘사한 부분이었다. 실제로 있는 책에서 인용한 듯 한데 허탈감과 공포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귓가에는 총성이 울리고 낙하산 부대의 숨소리가 손에 만져질 듯 느껴진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일까.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책이 들려주는 답은 하나다.

   우리가 그 일을 한 건 너희를 위해서였어! -p321


노 맨스 랜드-전장에서 양쪽이 대치 상태에 있어서 어느 한쪽에 의해서도 점령되지 않은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넘치는 무인 지대를 가리킨다고 한다. 할아버지 제이콥이 헤르트라위와 사랑에 빠졌던 곳. 손자 제이콥이 어떤 선택을 해야할 지 망설이고 있는 곳. 젊은이들의 이상이 그들을 억압하는 가치와 대치되는 그 곳. 아픔과 고통이 자리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희망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 화술을 변화시키는 기법, 주제에 대한 주의 깊은 선택에 찬사를 보낸다-국제 안데르센 상 재단
평소 선전문구는 믿지 않지만, 먼저 읽어본 사람으로서 이번만은 믿어도 좋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앞으로 사랑하게 될 작가 중 한 명이 될 듯. 다른 작품인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를 지르기 위해 재빨리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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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천사 1 -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1-1 추락천사 1
로렌 케이트 지음, 홍성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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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찌된 일인지 요즘은 다른 세상의 존재를 소재로 한 책을 쭉 읽고 있습니다. 뱀파이어,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을 가진 사람에 이어 이번에는 마침내 '천사'의 등장입니다. 이 작품은 출간되기 전부터 한껏 기대하고 있던 책이었습니다. 고딕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점도 그렇고 색감이 무척 마음에 들었거든요. 표지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흐뭇해지는 그런 책인데다, 판타지 로맨스물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만큼 자신만만하게 내세운 불멸의 천사들의 사랑이 어떻게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만들어 줄 것인지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책을 다 읽은 지금 자꾸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주인공은 열일곱 살의 루스 프라이스입니다. 17년의 세월동안 환영과 환청에 시달리며 살아왔고 급기야는 데이트하던 남학생이 눈 앞에서 불에 타 죽고 마는 불행을 겪었어요. 결국 그 일을 계기로 비행청소년들을 감화시킬 목적으로 세워진 소드 앤 크로스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됩니다. 학교라기보다는 감화원,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감옥같은 그런 분위기가 느껴져요. 전학 첫 날 다니엘에게 강하게 끌리게 된 루스는 어떻게든 그에게 다가가고 싶어하지만 다니엘은 그녀를 밀어내기에 필사적입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오는 또 다른 남자 캠. 그 와중에도 루스를 따라다니던 수상하고 어두운 그림자는 계속 그녀 주위를 맴돌고 다니엘에게 다가가고 싶은 루스는 그가 숨기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밝혀내고자 하죠. 

저는 책이나 영화를 볼 때 일종의 '기대'를 하면서 즐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행복에 잠겨 있을 때도, 위기에 처해있을 때도 그런 '기대'를 하는데요, 적절한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 상황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을 거라는 심리입니다. 주인공이 느끼는 행복, 두려움에 의한 긴장 모두 어느정도 지속되다보면 지루해지기 마련입니다. 재미있는 작품일수록 내용과 분위기에 굴곡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생각하는 재능있는 사람은 어느 순간에 어떤 이야기를 집어넣어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런 저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이 작가, 로렌 케이트는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추락천사] 역시 시리즈물이라 작가가 이야기를 뒷편에서 풀어내기 위해 감추고 있는지 몰라도 1부격인 이 책에서 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루스를 쫓아다니는 그림자나 다니엘, 그리고 캠이 숨기고 있는 내용이 살짝 어두운 분위기를 조성하려고는 하지만 '재미있는 긴장감'이 부족해요. 무려 300페이지 가까이 이야기가 진행될 때까지 대체 이 책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이번 생에서 넌 겉으로 보이는 모습 그대로야. 멍청하고, 이기적이고, 무지하고, 버릇없고, 잘생긴 남학생이랑 데이트 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세상 전체가 살아났거나 죽었다고 생각하는 여학생이지.-p377


또한 여주인공에 대한 매력도가 떨어져요. 사랑에만 열심인 약한 이미지라고 할까요. 그게 예전의 삶과 연결되어 있어서인지 아니면 작가의 인물구상이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 대사는 작품 안에서 루스의 적이 루스를 향해 내뱉는 말인데, 제가 생각하는 그대로를 나타내고 있어서 옮겨봤습니다. 어쩌면 작가도 무의식 중에 주인공 루스가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킁.

작품의 마지막에서야 대형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벌어져 그나마 다행(?) 이었습니다. 2부에서는 어째서 그들이 추락천사가 되었는지, 루스와 다니엘, 캠의 관계는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게 될까요? 표지만큼 멋진 작품이 나와주길, 정말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이대로라면 표지가 너무너무 아까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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