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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맨스 랜드 - 청춘이 머무는 곳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생각과느낌 / 2010년 1월
평점 :
좋은 작품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무엇일까. 올해는 책의 권수에 구애받지 말고 질에 더 중점을 두고 싶어 손에 쥐는 책마다 꼼꼼하게 살펴보게 된다. 이건 영 아니다 싶은 책, 재미는 있으나 뭔가가 부족한 듯 싶은 책은 애처롭지만 나의 기준에서 살짝 벗어난다. 내용이 조금 심오하다 싶으면 으레 표현이 어려워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는 책도 나에게는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메세지도 있고, 문장도 물 흐르듯 술술 읽히고 게다가 재미와 감동까지 전해준다면 정말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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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과 이성의 도전적인 물음. -카네기 메달 심사평 중 |
인용한 문구 그대로 되시겠다. 그저 감정만으로 이끌어가는 책이 아니라 마음과 머리를 동시에 자극하는 작품이다. 나는 책을 읽다보면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다. 일어났던 사건과 배경들을 모두 기억의 저편으로 날려버린 채 한 작품을 그저 '어떤 어떤 느낌이었다'는 감정만으로만 기억하는 것이다. 그것을 나는 애써 '가슴으로 받아들인 책'이라며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감동적이었다, 좋았다' 같은 표현으로만 기억하기에는 어쩐지 아까운 그런 책이다. 뭔가 중요한 메세지가 있는데 (그것이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온전히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지금같은 때는 난감하다. 누가 내 목구멍을 탁 쳐서 그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는 중요한 것을 튀어나오게 해준다면 좋으련만.
두 명의 제이콥이 있다. 먼저 1944년 네덜란드에서 독일과 전쟁을 치르는 영국군인 제이콥의 이야기부터 하자. 2차 세계대전을 치르던 중 부상을 입고 헤르트라위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제이콥. 영국에 아내와 가족들이 있지만 그를 못된 불륜남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고 언제 어느 때 죽을 지 알 수 없는 상황, 독일군에게 붙잡혀 포로로 끌려가느냐 명예와 조국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싸워야 하느냐 하는 상황은 처해보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을 테니까.
두 번째 제이콥은 1995년의 네덜란드에 있다. 전쟁 중 할아버지를 보살펴 준 가족들을 만나러 온 손자 제이콥이다. 원래는 할머니 새라가 오기로 되어 있었지만 할머니가 엉덩이 수술을 받는 바람에 네덜란드에 오게 된 제이콥. 헤르트라위의 가족인 테셀 아주머니와 단, 단의 친구이자 게이인 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알마 할머니, 매력적인 소녀 힐레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엄청난 진실 앞에서 고뇌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소설의 매력은 우선 감정과 이성의 균형을 잘 맞추었다는 데 있다. 감정적이면서도 감정에만 치우치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야할 현실적인 문제들-안락사라든가, 사랑에 관해서라든가-을 적절하게 배치해서 딱딱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각해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어떤 주제에 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어떤지 차분히 더듬어볼 수 있는 시간들. 그럼에도 감정의 끈을 죄었다 풀었다 하며 순간순간 울컥하게 만드는 것도 잊지 않는 멋진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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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갑자기 멈춰 서는 순간 생명이 그의 눈을 떠났다. 그가 그의 눈에서 떠났다. -p358 |
다른 독자들은 어땠을 지 모르지만 나는 저 문장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의 생명이 머무는 곳, 어떤 사람이 떠났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눈. 매우 간단하고 아무렇지 않게 쉽게 쓴 표현인 것 같지만 나는 어쩐지 작가가 죽음을 접했었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죽음은 그저 숨을 거두었다, 숨을 멈췄다, 움직이지 않았다 등으로 표현되지 '눈'으로 표현된 적은 드물기 때문이다. 오싹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 장면의 가슴 철렁함과 숨막힐 듯한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듯 했다.
전쟁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도 충분히 가슴 아프지만 마음을 찌르르 울린 것은 많은 군인들이 그 때의 상황을 묘사한 부분이었다. 실제로 있는 책에서 인용한 듯 한데 허탈감과 공포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귓가에는 총성이 울리고 낙하산 부대의 숨소리가 손에 만져질 듯 느껴진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일까.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책이 들려주는 답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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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 일을 한 건 너희를 위해서였어! -p321 |
노 맨스 랜드-전장에서 양쪽이 대치 상태에 있어서 어느 한쪽에 의해서도 점령되지 않은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넘치는 무인 지대를 가리킨다고 한다. 할아버지 제이콥이 헤르트라위와 사랑에 빠졌던 곳. 손자 제이콥이 어떤 선택을 해야할 지 망설이고 있는 곳. 젊은이들의 이상이 그들을 억압하는 가치와 대치되는 그 곳. 아픔과 고통이 자리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희망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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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 화술을 변화시키는 기법, 주제에 대한 주의 깊은 선택에 찬사를 보낸다-국제 안데르센 상 재단 |
평소 선전문구는 믿지 않지만, 먼저 읽어본 사람으로서 이번만은 믿어도 좋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앞으로 사랑하게 될 작가 중 한 명이 될 듯. 다른 작품인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를 지르기 위해 재빨리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