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큐피드의 동생을 쏘았는가
데이비드 헌트 지음, 김승욱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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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회색빛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주인공 케이가 명암만을 구분할 수 있는 색맹이었기 때문일까. 이 책은 한 편의 흑백영화처럼 내 머리속에 각인되어 있다. 건조함과 고독함, 그리 강하게 불지 않는 바람을 맞으며 쓸쓸하게 거리를 거니는 듯한 분위기.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일어난 살인사건을, 색맹의 여류 사진작가 케이가 조사하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일본 하드보일드 소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라 료의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의, 내가 좋아하는 사와자키 탐정의 모습과 케이가 겹쳐보이는 것은 왜였을까. 흘러넘치지 않는 감정을, 그나마도 건조한 문체로 그려낸 작품의 분위기가 무엇보다도 마음에 든다. 

사진작가인 케이. 그녀는 [노출]이라는 작품집을 준비하고 있다. 그녀가 찍는 대상은 아름다운 남창 팀. 그녀는 그를 통해 뻔한 것이 아닌 좀 더 깊숙한 그들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한다. 그를 만나기로 한 어느 날 저녁. 약속 장소에 팀은 나타나지 않고 다음 날 아침 쓰레기통에서 그의 머리가 발견된다. 흔히 일어나는 남창의 죽음이라 치부해버리려는 경찰에 맞서 수사를 시작한 케이는 이 사건이 과거 자신의 아버지가 관계했던 T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알아낸다. 과거의 범인이 다시 범행을 시작한 것인가, 단순한 모방살인인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과거의 베일이 하나씩 벗겨지면서 팀이 간직했던 비밀 또한 조심스레 옷을 벗기 시작한다. 

다른 작품들과 비교할 때 이 이야기 역시 그리 독특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죽고 범인이 존재하고 그 내막을 파헤치기 위해 주인공이 움직이고. 결말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간단하게 매듭지어져, '우웅?'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줄거리가 이 작품의 매력 포인트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분위기, 바로 그것이다. 모든 추리소설의 전개과정은 비슷비슷하다. 그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어떻게 도드라져 보이게 만들 수 있는가, 그것은 분위기가 결정하는 게 아닐까. 가보지 않은 샌프란시스코는 역시 가보지 못한 뉴욕의 그것만큼이나 황량했다. 인간의 비틀린 욕망, 외로움, 고독감,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한 가닥의 온기. 지나치지 않게 절제된 감정 표현이 우선 일품이다. 

어느 새 다시 여름, 추리와 스릴러의 계절이 왔다. 그 동안 읽은 이야기들도 꽤 된다는 생각에 이제 웬만한 책에는 질리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내 취향의 분위기 있는 작품이 나와주어 무척 기쁘다. 이런 작품들 뿐이라면 앞으로의 여름은 대환영. 미국의 권위있는 '람다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고, <뉴욕타임스>의 올해의 주목할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는데 이번만큼은 그런 평가를 믿어봐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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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의 랜덤 워크 - 영화와 음악으로 쓴 이 남자의 솔직 유쾌한 다이어리
김태훈 지음 / 링거스그룹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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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은, 글쎄. 어떤 사람일까. 가끔씩 방송을 통해 비춰진 그의 모습은 말을 좀 잘 하는 것 같고, 연애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충고를 해주는 듯 보이지만 그 자신은 노총각이라는 것. 여전히 엄마의 그늘에서 아둥바둥 사는 것처럼 보이고, 여기저기 관심이 많지만 정작 자신의 결혼에는 관심이 없다는 정도일까. 그러고보니 내가 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그에 대해 아는 것도 많지 않고 딱히 그이에 대해 알고 싶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책이 내 손에 떡 들어앉아 있는 것은, 어쩌면 그저 단순한 책욕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김태훈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술을 얼마나 마시든, 담배를 얼마나 피우든, 그건 그렇고 이건 이렇다면서 딱딱 부러지게 요점만 쓱쓱 짚어주는 듯한 냉랭함. 좋은 감정을 가지고 들으면 조금은 낭랑하게도 들리는 그 목소리가 내 귀에는 잘 꽂혔다. 흥분하면 말의 속도가 빨라지기만 할 뿐 정작 중요한 논리는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뒤엉켜버리는 나와 달리, 그는 그 어떤 순간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다. 뭐, 그 자신은 그의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든 '늙은 공수부대'라는 취급을 받는 천덕꾸러기일지라도 말이다. 나에게 그는 팝 칼럼니스트여도, 연애 칼럼니스트여도, 혹은 영화를 소개해주는 사람 중 무엇이라도 괜찮았다. 그 냉랭한 목소리로 '이것이 진리야'라고 말하는 듯한 어투만 간직해준다면야. 

딱히 그이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은 조금 그의 생활이 궁금했었다. (그러니까 책을 부여잡고 있었겠지) 자기는 결혼도 안 하면서 모든 사랑에 대해 다 아는 듯이 말하는 것도 그렇고, 무슨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지 호기심이 생겼다. 과연. 그는 이것저것에 관심이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그리고 술과 담배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글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변해준다고 했던가. 그의 책은 꼭 그와 닮아 있다. 그의 전문인 음악에서부터 영화와 책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지식을 자랑한다. 나는 잘 모르는 사람들과 영화, 음악이 대거 등장해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며 무작정 읽어내려가니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해 읽기가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책은 산만했다. 평소 산만하다는 건 그리 좋은 어감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그에게는 꼭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그만큼 그가 독특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려나. 

말 그대로 다이어리 같은 책이다. 한 챕터가 그리 길지 않고 짧게 짧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게 그에게는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 또한 그 나름대로의 독자를 위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그에게만 익숙한 이야기들을 길게 늘어놓는 건 나같은 독자에게 있어 고문이나 다름 없었을테니까. 으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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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흩어진 날들
강한나 지음 / 큰나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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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인가 여행 에세이를 잘 읽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부러워만 하며 쉽게 떠나지 못하는 내 모습이 한심스러웠고, 그들의 경험이 결코 내 경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 책을 덮고 또 다른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저 가고 싶다는 바람만을 가슴 속에 간직한 채 평범한 일상을 보내게 될 거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대리만족. 한 때는 중요하게 생각한 책읽기의 목적이었으나, 더 이상 대리만족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된, 그럼에도 힘내어 한 발을 내딛을 수 없는 내가 지키고자 한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떠나기로 했고, 그 곳 또한 일본의 오사카였기 때문에 이 책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오사카, 교토, 나라, 고베. 그 어떤 곳보다도 항상 갈망했던 곳. 그 곳에서 저자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 지 궁금했다. 

하루종일 비가 내리는 토요일 오후, 여유로운 마음으로 책을 펼친다. 벚꽃이 흩날리는 듯한 예쁜 표지만큼이나 책의 내용도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를 기대하면서. 일본에서 '글로벌 웨더자키'라는 타이틀로 현지 기상캐스터로 활동했다는 그녀의 일본에 대한 반가움과 그리움, 여행을 떠나 어쩌면 내가 묵게 될지도 모를 작고 소박한 방의 모습은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관광 안내 책자 같은 에세이가 아니라 낡았지만 깊고 풍부한 맛이 있는 삶의 그대로의 모습을 사진으로 드러낸 것도. '여기 내가 가보려고 생각한 곳인데, 앗, 여기 나도 가봐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그녀의 여정을 따라갔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 수록 나의 기대는 무너지고 만다. <빈티지 감성 여행 에세이, 일본>이라는 부제가 나타내는 것처럼 이 책은 감성으로 충만하다. 하지만 그 감성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그녀의 잃어버린 사랑과 삶에 대한 독백이었다. 물론 여행을 하면서 느낀 삶에 대한 생각, 잃어버린 것들에 관한 추억을 얼마든지 곱씹을 수는 있다. 하지만 자칭 '여행 에세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있다면 자신을 중심에 둘 것이 아니라 일본을 중심에 놓고 자신은 주변으로 밀어두었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다 생각나면 일본의 풍경과 특징을 묘사하는 듯한 분위기가 나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책을 읽다보면 '이이는 이별하고 충동적으로 일본에 간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지나간 사랑에 대한 독백이 수없이 등장한다. 낡은 것에 대한 그리움조차 자신의 끝난 사랑에 빗대어 묘사할 정도다. 감성은 중요하다. 나도 감성을 중요시하는 사람이고 세월이 흘러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날카로운 감성만큼은 잃지 않기를 기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나친 감성은 듣는 이를 지치게 만든다. 꿈과 사랑, 홀로 여행하는 순간 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우리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의 꿈과 지나간 사랑, 그리고 뻔한 자기연민은 입 밖에 내어 이야기하면 할 수록 시시해진다는 것을, 이이는 정말 모르는 것일까. 

많은 책들이 얼마나 힘들게 세상 빛을 보고 있는 지 안다. 그러니 그럴수록 '이 정도의 에세이는 나도 쓰겠다. 그냥 일본 가서 사진 몇 장 찍고 상황에 맞게 연결시키면 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은 들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나이를 먹었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가슴 속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고해성사를 하는 듯한 예민한 노력이 필요했다던 그녀라기에, 그녀의 책에 쉽게 칭찬표를 던지지 못하는 내가 되려 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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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 - 특별하지 않은 청춘들의, 하지만 특별한 이야기
박근영 지음, 하덕현 사진 / 나무수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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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마음이 무거웠다. 내년부터 실시될 교육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저기에서 들을 때마다, 학교에서는 그리 중요하다고 인식되지 않는 내 과목 때문에 괜시리 서러웠다. 대학 가는 데 필요없으니 공부하지 않아도 괜찮다, 굳이 공부할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다는 어떤 선생님에게도 섭섭했고,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이 헛된 것만 같아서 가슴이 답답했다. 아이들이 감정에 치우쳐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상처받으면서 이 자리가 내 자리가 맞는지, 어울리지도 않는 공명심에 사로잡혀 내 것이 아닌 일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온갖 생각이 다 들던 때였다. 

처음부터 이 책을 꼼꼼히 읽을 생각은 아니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 읽고 돌아서면 그만일 타인의 삶 따위 내게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누군가의 성공은 내 성공이 될 수 없고, 누군가의 실패 또한 내 것이 아니었으므로 읽고나서 금방 잊어버릴 책이라면 대충 읽어도 어떠랴 싶었다. 그런데. 이 책의 첫 번째 주인공 포토그래퍼 하덕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지도 못하게, 눈물이 뚝 떨어지고 만다. 하등 슬픈 이야기가 아니었다. 울만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이이의 이야기를 읽기도 전에 제목에서부터 나는 눈물을 예감한다. <상처 받은 자는 걷는다>. 

이 책을 읽기 며칠 전 나는 일본여행을 위해 항공과 호텔편을 예약했다. 근 5년만의 여행, 그리고 태어나 처음 발딛는 나홀로 여행이었다. 국내도 아닌 국외에 혼자 가겠다는 나를 부모님은 무척 걱정하셨지만 나에게는 어떤 결심같은 것이 있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맞추면서까지 내가 원하는 것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 혼자서도 뭐든 잘 해내고 싶다는 욕망, 만약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때가 왔을 때 결코 도망가지 않겠다는 다짐, 그런 것. 나는 용감해지고 싶었고 당당해지고 싶었다. 

이 책 속에서 숨쉬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흔한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 아니라 지금도 어디선가 이 삶을 살아내고 있을 사람들. 아프고 힘들어서 멀리 여행을 떠났다가도 위로받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면 다시 또 돌아와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사람들. 이 책이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이야기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영광과 아픔에 사로잡히지 않고 앞만 보며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에 닥친 어려움을 영웅처럼 뛰어넘은 사람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고민하고 아파하고 두려워하면서 한 발 한 발을 내딛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내가 저기서도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구나, 라는 감동을 느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누군가의 삶에 대한 경이와 순수한 감동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들에게 '정해진' 인생은 없다는 것이다. 몇 살에는 취직을 해야 하고, 몇 살이 되면 결혼을 해야 하고, 또 몇 살이 되기 전에는 집과 자동차와...같은 틀은 찾아볼 수 없다. 현대인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조바심과 타인에 대한 경쟁심 대신, 그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삶에 당당해지고자 하는 의지다. 내가 알 속에 갇힌 병아리라면 그들은 날개를 활짝 펴고 비바람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성숙한 새였다. 

나는 시간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말을 믿는다. 나 또한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지금의 내가 아닌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인생을 즐길 줄 알고, 타인의 눈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사람. 겁내지 않고 무엇이든 부딪혀 볼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7월에 계획한 일본 여행에 대한 얕은 두려움이 사라져버린 것은 이들의 영향이 크다. 그들은 나를 모르겠지만, 언젠가 우연히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당신 때문에 위로 받았노라고, 참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다. 

언제부터였을까.
막연히 무언가 모든 것이 두렵고 낯설어졌다.
시간과 존재에 대한 질문들이 소년기를 관통했다.
그 정답은 위대한 수령님도 모를 듯 하다.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
이제는 늙지 않고 영원히 성장해야 할 시간.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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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화를 그리는 화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시공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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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발롬브로사 그레고르 폰 레초리 상 수상작'-한 번에 읽기는 커녕, 읽다가 혀가 꼬이지 않으면 성공이라고 생각될만한 긴 상을 받았다는 이 작품의 소재가 흥미로웠다.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전쟁의 참상과 불행한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던 전직 사진작가. 그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으로 인해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잃고 오직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찾아 헤맸다는 한 남자. 분명 두 남자의 쫓고 쫓기는 서스펜스 스릴러라고 생각했건만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버린다. 얼마 간의 유예 기간을 통해 천천히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작가는 그 두 남자를 통해 전쟁 속에서, 삶 속에서 존재하는 '규칙'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는 듯 하다. 

과거에는 뛰어난 사진작가로 화려한 명성을 자랑했으나, 이제는 지중해의 한 버려진 망루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는 안드레스 파울케스. 그의 삶은 아침에 일어나 망루 앞에 펼쳐진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벽에 전쟁화를 그리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 그의 앞에 이보 마르코비츠라는 남자가 나타난다. 유고슬라비아 부코바르에서 퇴각하던 크로아티아군 패잔병들을 마주한 파울케스는 그의 공허하고 피곤한 모습을 사진 속에 담았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피사체로만 인식하고 찍은 한 장의 사진이었으나 그 사진으로 인해 마르코비츠는 아내와 아들을 잃었다. 파울케스의 사진으로 인해 가족을 모두 잃었다 생각한 마르코비츠는 그를 죽이기 위해 찾아왔다고 말하면서 파울케스가 그리고 있는 그림에 관심을 보인다. 과거와 전쟁,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그런 두 사람 사이에, 그리고 파울케스의 과거 속에 한 여자가 있다. 올비도 페라라. 

두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는 묘하다. 그를 죽이러 왔다고 고백하면서도 선뜻 파울케스를 죽이지 못하는 마르코비치와 죽음의 위협에도 담담하게 그림을 그려나가며 그와의 대화를 즐기는 파울케스. 그랬다. 내 눈에는 파울케스가 마르코비치와의 대화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병마와 싸우고 있던 그에게 죽음은 그 어떤 위협도 되지 못했을 뿐더러,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상 누군가는 그 그림을 봐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림을 통해, 자신의 지나온 삶과 그가 찍어온 사진들을 통해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온 그의 생각과 가치를 알아봐 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처럼 극적인 긴장감은 부족하다. 죽이러 왔다고, 늘 위협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마르코비치가 과연 파울케스를 죽일 수 있을 것인가, 궁금해진다. 이미 그들은 예고된 피의자와 피해자 사이가 아니라 마치 친구같은, 둘 사이에 놓인 하나의 공감대를 놓고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데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르코비치가 파울케스를 죽이지는 못할 거라고, 그의 삶의 '면도날'이 되었고, 많은 생각을 나눈 그를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는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들이 나눈 대화는 폭넓다. 예술, 전쟁, 삶, 우연을 관장하는 규칙, 신. 전쟁이라는 가장 잔혹한 시간들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결코 간단하고 쉽게 읽히는 작품이 아니어서인지 이 작품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리는 것도 쉽지 않다. 완전 재미있지도 않지만 또 그리 썩 나쁜 느낌은 아닌 것이, 오묘하다. 대중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언젠가 이 책을 다시 읽게 된다면 작가의 의중을 더 깊게 알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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