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화를 그리는 화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시공사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2008 발롬브로사 그레고르 폰 레초리 상 수상작'-한 번에 읽기는 커녕, 읽다가 혀가 꼬이지 않으면 성공이라고 생각될만한 긴 상을 받았다는 이 작품의 소재가 흥미로웠다.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전쟁의 참상과 불행한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던 전직 사진작가. 그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으로 인해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잃고 오직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찾아 헤맸다는 한 남자. 분명 두 남자의 쫓고 쫓기는 서스펜스 스릴러라고 생각했건만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버린다. 얼마 간의 유예 기간을 통해 천천히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작가는 그 두 남자를 통해 전쟁 속에서, 삶 속에서 존재하는 '규칙'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는 듯 하다. 

과거에는 뛰어난 사진작가로 화려한 명성을 자랑했으나, 이제는 지중해의 한 버려진 망루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는 안드레스 파울케스. 그의 삶은 아침에 일어나 망루 앞에 펼쳐진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벽에 전쟁화를 그리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 그의 앞에 이보 마르코비츠라는 남자가 나타난다. 유고슬라비아 부코바르에서 퇴각하던 크로아티아군 패잔병들을 마주한 파울케스는 그의 공허하고 피곤한 모습을 사진 속에 담았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피사체로만 인식하고 찍은 한 장의 사진이었으나 그 사진으로 인해 마르코비츠는 아내와 아들을 잃었다. 파울케스의 사진으로 인해 가족을 모두 잃었다 생각한 마르코비츠는 그를 죽이기 위해 찾아왔다고 말하면서 파울케스가 그리고 있는 그림에 관심을 보인다. 과거와 전쟁,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그런 두 사람 사이에, 그리고 파울케스의 과거 속에 한 여자가 있다. 올비도 페라라. 

두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는 묘하다. 그를 죽이러 왔다고 고백하면서도 선뜻 파울케스를 죽이지 못하는 마르코비치와 죽음의 위협에도 담담하게 그림을 그려나가며 그와의 대화를 즐기는 파울케스. 그랬다. 내 눈에는 파울케스가 마르코비치와의 대화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병마와 싸우고 있던 그에게 죽음은 그 어떤 위협도 되지 못했을 뿐더러,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상 누군가는 그 그림을 봐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림을 통해, 자신의 지나온 삶과 그가 찍어온 사진들을 통해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온 그의 생각과 가치를 알아봐 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처럼 극적인 긴장감은 부족하다. 죽이러 왔다고, 늘 위협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마르코비치가 과연 파울케스를 죽일 수 있을 것인가, 궁금해진다. 이미 그들은 예고된 피의자와 피해자 사이가 아니라 마치 친구같은, 둘 사이에 놓인 하나의 공감대를 놓고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데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르코비치가 파울케스를 죽이지는 못할 거라고, 그의 삶의 '면도날'이 되었고, 많은 생각을 나눈 그를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는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들이 나눈 대화는 폭넓다. 예술, 전쟁, 삶, 우연을 관장하는 규칙, 신. 전쟁이라는 가장 잔혹한 시간들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결코 간단하고 쉽게 읽히는 작품이 아니어서인지 이 작품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리는 것도 쉽지 않다. 완전 재미있지도 않지만 또 그리 썩 나쁜 느낌은 아닌 것이, 오묘하다. 대중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언젠가 이 책을 다시 읽게 된다면 작가의 의중을 더 깊게 알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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