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7
정용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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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접하는 핀 시리즈입니다. 다양한 국내 작가의 작품을 접하게 된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저에게 이 핀 시리즈는 읽을 때마다 커다란 과제를 부여받는 기분이 들어요. 재미와 즐거움이 독서의 제1기준, 스릴러와 미스터리를 읽을 때와는 달리 작품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숙고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까지 책을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작가의 의도에 맞추어 작품을 읽어야 하는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끔은 이런 독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읽을 때는 작품이라는 배를 타고 제 몸과 마음이 둥실둥실 흘러가는 느낌이라면, 핀 시리즈를 읽을 때는 천천히 걸으며, 때로는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 풍경을 바라보는 자신이 연상되거든요.

 

이번 핀 시리즈는 정용준 작가님의 [유령]입니다. 당 총재를 비롯한 현직 국회의원 셋, 청와대 관련인사 넷, 경호원 하나, 일반인 셋을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은 그. 교도소 안에서 그를 담당하는 윤. 이름도, 주민번호도 알려져 있지 않은 채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사람들을 죽여온 그는 어째서인지 하루라도 빨리 형이 집행되기를 기다립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특이체질인 그의 진심과 내면을 살피는 윤은 그가 두렵기도, 흥미롭기도 하죠. 접견인이라고는 한 명도 없던 그에게 어느 날 신해경이라는 여성이 찾아오고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가 동요합니다.

 

일견 미스터리 소설처럼 읽혔습니다. 그의 과거는 무엇인지, 그가 행해온 일은 무엇이었는지, 그녀 신해경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어요. 그녀와 그는 남매입니다. 둘 다 고통을 못 느끼는 특이체질이죠. 그들은 서로의 눈동자를 살펴주고 입안을 들여다보며 혹시라도 상처가 있을까 걱정합니다. 서로에게는 둘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 그녀가 그를 떠나요.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그 이후의 그의 인생은 그리 이어져 온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죽일 때마다 캔콜라를 마시고, 따개를 모아온.

 

악으로 묘사된 그는, 그녀의 고백을 들은 후 살아남고 싶어합니다.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반성한다 말하며 교화될 시간을 달라고 해요. 그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들, 그를 살리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고, 그녀 역시 그가 살아나길 바랍니다.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남자의 아픈 인생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요. 그가 그런 일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건, 유년시절의 아픔 때문이었다고. 신체적인 통증은 모르던 남자가,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의 고통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었다고.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의 아픔과 저지른 일은 별개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품해설에는 우리는 악을 모를 권리가 없다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는 시종 474라는 수감번호로 나타내지지만, 어느 순간부터 신해준이라는 형체를 갖춘 인물이 됩니다.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는 순간부터 그는 범죄자가 아니라 어쩌면 불쌍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라는 감정과 싸워야 해요. 그럼에도 악은 악이라는 것, 그것에서 눈 돌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연 없는 인생이 얼마나 될까요. 그렇다고 누구나 그, 신해준과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으니까요.

 

흥미롭게 읽었지만 작품의 의도를 생각하자니 다시,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이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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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뇌를 끌어안고
치넨 미키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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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뇌라니, 제목을 보자마자 조금 찔립니다. 스릴러 소설 좀 그만 보라는 짝꿍이 보면 한 마디 할 것 같아서요. . 다행히 표지그림 때문인지 별 말 없이 넘어갑니다. 제가 봐도 자극적인 제목이라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는데 의외로 이 소설은 자신이라는 것’, ‘세상에 태어난 이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머릿속에 폭탄을 끌어안고 사는 여주인공을 통해 살아있는 순간순간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들을 위한 호스피스 병동인 하야마곶 병원. 환자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들어준다-는 신조로 운영되고 있어요. 그곳으로 수련을 나간 우스이 소마는 악성뇌종양을 앓고 있지만 밝고 따스한 여인 유카리를 만나게 됩니다. 어린 시절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에 대한 상처로 괴로워하는 우스이와 외출공포증을 앓고 있는 유카리.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게 된 두 사람. 우스이는 유카리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고백하려하지만 유카리는 자신은 환상이라는 말을 남기며 그를 밀어냅니다. 본가로 돌아간 우스이에게 들려온 유카리의 사망소식. 잠자코 있을 수 없었던 우스이는 다시 하야마곶 병원으로 향하고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던 진실에 다다르게 됩니다.

 

유카리의 뇌에는 실제로 폭탄이 자리잡고 있지만, 사실 우리 모두 잠재적인 폭탄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 실체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일 뿐이죠. 제한된 시간 속에서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유카리를 보면서 순간순간을 더 소중히 여겨야겠다,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아침에 각자의 일로 헤어졌던 가족이 저녁에 다시 만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 생각해보면 엄청난 기적이니까요. 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우스이 또한 병마와 싸우는 그녀 자체를 오롯이 인정하며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결국,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한 후에요.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헤어지는 순간이 아쉽지 않도록 매일매일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고 하고 싶습니다. 그러고보니 오늘 몸살 기운이 있어 애꿎은 첫째 곰돌군에게 살짝 짜증을 냈는데 잠자는 얼굴을 보니 무척 미안해지네요. 오늘 곰돌군들과 짝꿍에게 자기 전 꼭 귓가에 속삭여줘야겠습니다. 사랑한다고. 나에게 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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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왕이 온다 히가 자매 시리즈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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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출혈로 쓰러진 후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 곁에서 소년 히데키는 만화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때 딩동, 초인종이 울려요. 현관 너머로 보이는 회색빛 형체. 처음에는 할머니 이름을, 그 다음에는 죽은 외삼촌의 이름을 부르는 정체불명의 존재. 히데키가 두려움에 몸이 굳은 채 대답을 못하자, 그 존재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부릅니다. ‘긴지씨, 긴지씨, 긴지 씨는 계세요?’ 그리고 느닷없이 들리는 할아버지의 고함소리. ‘돌아가!’ 형체가 사라진 후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할아버지는 히데키에게 문을 열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그게 무엇인지 묻는 손자에게 자신의 말이 들리면 돌아오니 지금은 말할 수 없다는 의문투성이 말을 남깁니다. ‘그것의 존재를 확실히 체감하게 된 것은 히데키가 가나와 결혼을 하고, 아내가 딸 치사를 임신한 후예요. ‘그것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아이의 이름을, 이미 알아내고.

 

으아. 작품의 시작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전 스릴러, 미스터리는 좋아하지만 호러는 정말 싫어해요. 스릴러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도 무섭지만, 일본 호러 소설에 등장하는 그것들의 존재감은 정말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을 정도에요. 책 속에 담긴 어둠의 기운이 현실세계에 살아가는 저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 호러라는 이름이 붙은 영화나 소설을 읽고나서는 꼭 꿈자리가 좋지 않았습니다. [보기왕이 온다]는 새벽, 유축하려고 일어나 정말 우연히,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터치하고 읽기 시작했어요. 당연히 무서웠습니다. 그 새벽에 저 혼자. 그런데 무서운데도 뒷이야기가 궁금한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무서워하면서 사전연재되는 분량을 전부 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끝을 볼 수밖에요.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치사의 이름을 대며 손님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려준 직원은, 무언가에게 물어뜯긴 상처를 입은 채 병원에 입원하고, 날이 갈수록 쇠약해집니다. ‘그것의 존재를 느낀 히데키는 부적과 호신구 등을 구입해 집에 장식하지만 어느 날, 그것들이 모두 찢기고 망가져 가나와 태어난 치사마저 공포에 질리고 말아요. 민속학자인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한 히데키는 영매인 마코토와 그녀의 연인이자 오컬트 작가이기도 한 노자키를 소개받고, ‘그것의 이름이 보기왕이라는 것을, 그것이 히데키와 그의 가족들을 노리고 있다는 경악할만한 진실을 알게 됩니다.

 

보기왕은 괴물입니다. 요괴에요. 책에서 묘사되는 보기왕은 날이 갈수록 영악해지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희생물을 속일 수 있는 간교함까지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잔혹하죠. 하지만 보기왕은 어디서 온 것일까, 보기왕의 목적은 무엇일까, 왜 히데키의 가족을 노리는 걸까.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하다보면 결국 다다르게 되는 지점은 인간의 어둠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건 부르지 않으면 안 올 걸세

보기왕이 나타나게 된 배경도, 보기왕이 히데키의 가정에 오게 된 이유도 사람으로서 하면 안 되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해하고 저주하는 마음이 모여서 보기왕이라는 어둠의 덩어리가 되고 말았던 거예요.

 

안타까운 것은 히데키와 가나의 관계입니다. 자신이 누구보다 육아에 열성적이고 좋은 남편, 좋은 아빠라고 믿어온 히데키. 하지만 그런 그를 바라보는 가나의 시점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합니다. 둘 사이에서 부족했던 것은 소통과 대화. 그들의 벌어진 틈 사이로 들어온 어둠은 결국 보기왕을 불러들이는 이유가 되고 말았지만, 히데키가 가족을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진심은 전해질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요.

 

자리잡고 앉아 읽은 호러소설은 처음이고 읽는 내내 무서웠지만, 이유 없는 공포는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조금 슬프기도 했어요. 보기왕을 만들어내고 말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비단 소설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니까요. 묘한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은 이 작품, 영화 [くる]로 제작되어 찾아온다고 합니다. 영화 속에서 보기왕을 어떻게 묘사했을지, 이 괴물과 담판을 짓는 한판 승부가 어떻게 그려져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만, 과연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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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맘마미아 가계부
맘마미아 지음 / 진서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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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다가오면 소소하게 준비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다이어리와 가계부인데요, 결혼 전에는 다이어리를 썼고 결혼 초에는 두 가지를 같이 썼다면 작년부터는 가계부 하나만 사용하고 있어요. 두 가지를 같이 쓰려니 번거롭기도 하고, 가계부를 조금 큰 걸로 구입하면 공란이 넉넉해서 다이어리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매년 이맘 때가 되면 새로운 가계부를 구입하곤 하는데, 항상 고민이었어요. 지금은 제가 육아휴직 중이라 짝꿍 혼자 저희 가족 생계를 담당하고 있는데 매달 아낀다고 하면서도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기거나, 조금만 아차 해도 금방 예산을 넘어서고 말았거든요. 내년에는 좀 더 규모있게 생활해보자! 하는 마음에 새로운 가계부를 알아보던 중 [2019 맘마미아 가계부]를 알게 된 것이었던 것입니다.

 

가계부도 예쁜 것을 쓰고 싶은 것이 주부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도착한 요 맘마미아 가계부는 저를 당황하게 만들었어요. 표지 색도 그렇고 내지 색도 그렇고, 도무지 예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서점에 가서 다른 가계부들과 비교하면서 구입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아웃 오브 안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40만 회원 감동 실천’ ‘초간단 가계부’ ‘절약효과 최고’ ‘저축액 증가등의 문구가 표지에 적혀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동안 제가 사용했던 가계부들 중에는 사실 표지나 내지 색에 집중했던 것도 있었고, 기록하기 복잡해서 도중에 미로를 헤매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 것들도 상당했어요. 그래서 일단 가계부를 펼쳐보았습니다.

 

맘마미아 가계부가 다른 가계부들과 다른 점은 기존의 모든 지출 항목을 쓰는 것이 아니라 생활비(변동지출)만 매일 기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냉장고 가계부를 활용해 식비를 효율적으로 줄이는 방법, 돌발&득템 수입을 기록하는 곳, 돌발지출 기록하는 곳 등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작성 칸 위에는 매달 제철 채소, 수도요금 감면, 에어컨 실외기에 신경 쓰기 등 생활에 도움 되는 팁들도 세심하게 곁들여져 있습니다. 맨 뒤에는 부록 형식으로 공과금 절약법과 201812월 가계부까지 실려 있어요.

 

조금 촌스럽게 느껴지는 가계부지만 있을 건 다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넉넉하게, 201811월 정도부터 기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점이에요. 가계부를 받고나서 바로 사용해볼 수 있도록요. 지금 당장 사용해보지 않는 이상 이 가계부가 정말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고, 한 달이라도 더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조바심이 생기거든요. 내년 가계부에서는 이 점을 조금 보충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곰돌군을 돌보는 사이, 저도 모르게 벌써 11월이 되었네요. 연말은 특히 시간이 빨리 가는데 금방 12월이 되고, 또 금방 2019년의 새 날이 열리겠죠. 길어지는 육아휴직으로 생계의 부담(?)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짝꿍을 위해서라도, 내년에는 둘이 머리 맞대고 좀 더 아끼고 충실하게 보내는 날이 될 수 있도록, [맘마미아 가계부]가 한 몫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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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와 장미의 나날
모리 마리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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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명 근대 문학가인 모리 오가이의 딸로서, 풍요했던 과거와 상대적으로 덜 화려한 현재를 비교하며 비판에 빠지는 일 없이 자기만의 미의식으로 세운 왕국에서 우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천진하고도 강한 정신적 귀족.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으면 소설이 안 써진다고 말하는 일본 최고의 미식가이자 에세이스트인 모리 마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삶을 겉에서 들여다보면, 부족함 없이 귀하게 자란 아가씨가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경험하고 마지막에는 홀로 쓸쓸한 노년을 맞는 비극적인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자신만의 기쁨을 즐겁게 누린 귀여운 여인이 존재해요. 어찌 보면 순진한 것 같기도, 어찌보면 다소 철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글은, 그럼에도 , 이런 인생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어느 지점에서 납득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삶을 결코 진흙탕으로 만들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남들에게는 진짜 사금이 아니라 구리나 운모라 하더라도, 이 정신적 귀족은 틀림없이 공상의 세계에서 찬란한 금빛을 확인할 것이다.

[홍차와 장미의 나날]은 모리 마리의 요리와 음식에 대한 찬미가이자 그녀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기록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 약혼과 결혼생활이 어떠했는지, 큰아들 자쿠와 연인처럼 보냈던 기억, 좋아하는 음식과 추천하는 음식, 음식에 서린 추억까지. 고귀하게 자랐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신세한탄은 엿볼 수 없고, 오직 현재의 자신, 특히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요리하는 것을 즐기는 지금의 모습에 집중해 이야기를 풀어놓았는데요, 그 맛이 담백합니다.


좀 곤란한 인생이지만 잘 먹겠습니다.

좋은 처지에 있다가 상대적으로 곤란한 입장에 놓이게 되면 한 번쯤은 과거를 그리워하며 비관할 거라 생각해요. 모리 마리도 한번은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작품집 안에서의 그녀 모습은 강하고 멋집니다. 좋아하는 요리와 음식에 집중해 싱크대도 공용으로 써야 하는 셋방의 침대 위를 은접시와 유리병으로 장식해 유럽으로 변신시키고 흔한 올리브색 천에서 보티첼리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삶에 대한 자세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힘을 내게 하고 인생의 영락을 겪으면서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음식에 대한 사랑. 그녀를 정신적 귀족으로 만들어준 삶의 비결입니다.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삶을 지속시켜줄, 삶을 즐길 수 있게 해줄 무언가. 어떤 우울하고 슬픈 일이 있었더라도 버티게 해 줄 무언가. 누군가에게는 보잘 것 없는 것처럼 여겨지거나 한심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힘을 내게 해 줄 무언가라고 자신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인해 인생을 조금은 더 즐겁게 살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 책을 읽는 저, 그리고 당신 또한 정신적 귀족이 될 수 있는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국내의 에세이는 감정에 치우친 글을 많이 접한 편이라 그리 즐겨 읽지 않는데요, 이렇게 담백하고 절제된 문장들을 만나면 즐거워집니다. 그리 길지 않은 한 편의 이야기들을 조금씩 나눠서 읽는 맛이 좋았어요. 오후의 차 한 잔과 디저트가 간절히 생각나는, 맛있는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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