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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와 장미의 나날
모리 마리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일본의 유명 근대 문학가인 모리 오가이의 딸로서, 풍요했던 과거와 상대적으로 덜 화려한 현재를 비교하며 비판에 빠지는 일 없이 자기만의 미의식으로 세운 왕국에서 우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천진하고도 강한 정신적 귀족.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으면 소설이 안 써진다’고 말하는 일본 최고의 미식가이자 에세이스트인 모리 마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삶을 겉에서 들여다보면, 부족함 없이 귀하게 자란 아가씨가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경험하고 마지막에는 홀로 쓸쓸한 노년을 맞는 비극적인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자신만의 기쁨을 즐겁게 누린 귀여운 여인이 존재해요. 어찌 보면 순진한 것 같기도, 어찌보면 다소 철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글은, 그럼에도 ‘아, 이런 인생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어느 지점에서 납득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삶을 결코 진흙탕으로 만들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남들에게는 진짜 사금이 아니라 구리나 운모라 하더라도, 이 정신적 귀족은 틀림없이 공상의 세계에서 찬란한 금빛을 확인할 것이다.
[홍차와 장미의 나날]은 모리 마리의 요리와 음식에 대한 찬미가이자 그녀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기록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 약혼과 결혼생활이 어떠했는지, 큰아들 자쿠와 연인처럼 보냈던 기억, 좋아하는 음식과 추천하는 음식, 음식에 서린 추억까지. 고귀하게 자랐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신세한탄은 엿볼 수 없고, 오직 현재의 자신, 특히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요리하는 것을 즐기는 지금의 모습에 집중해 이야기를 풀어놓았는데요, 그 맛이 담백합니다.
좀 곤란한 인생이지만 잘 먹겠습니다.
좋은 처지에 있다가 상대적으로 곤란한 입장에 놓이게 되면 한 번쯤은 과거를 그리워하며 비관할 거라 생각해요. 모리 마리도 ‘한번은’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작품집 안에서의 그녀 모습은 강하고 멋집니다. 좋아하는 요리와 음식에 집중해 싱크대도 공용으로 써야 하는 셋방의 침대 위를 은접시와 유리병으로 장식해 유럽으로 변신시키고 흔한 올리브색 천에서 보티첼리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삶에 대한 자세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힘을 내게 하고 인생의 영락을 겪으면서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음식에 대한 사랑. 그녀를 정신적 귀족으로 만들어준 삶의 비결입니다.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삶을 지속시켜줄, 삶을 즐길 수 있게 해줄 무언가. 어떤 우울하고 슬픈 일이 있었더라도 버티게 해 줄 무언가. 누군가에게는 보잘 것 없는 것처럼 여겨지거나 한심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힘을 내게 해 줄 무언가라고 자신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인해 인생을 조금은 더 즐겁게 살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 책을 읽는 저, 그리고 당신 또한 정신적 귀족이 될 수 있는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국내의 에세이는 감정에 치우친 글을 많이 접한 편이라 그리 즐겨 읽지 않는데요, 이렇게 담백하고 절제된 문장들을 만나면 즐거워집니다. 그리 길지 않은 한 편의 이야기들을 조금씩 나눠서 읽는 맛이 좋았어요. 오후의 차 한 잔과 디저트가 간절히 생각나는, 맛있는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