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브레스 - 당신은 어떤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미나미 교코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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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주쿠 의과대학병원 종합진료과에서 근무하는 미토 린코는 어느 날 오코치 교수로부터 계열 병원으로 나가주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열심히 한다고는 했지만 평소 업무 속도가 느린 것에 대해 주변으로부터 불만을 들어왔고, 많은 여성 의사들이 결혼이나 출산 후 의국의 가혹한 체제를 견디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며 어느 병원이냐고 묻는 그녀에게, 오코치 교수는 '무사시 방문클리닉'이라는 이름을 올린다. 재택의료를 담당하는 곳으로 고령의 환자나 병원에서 치료를 계속하지 않고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한 진료소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향한 진료소에서 만난 다양한 환자들. 뇌경색으로 쓰러져 지금은 움직이기는 커녕 음식을 삼킬 수조차 없이 마냥 누워만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해 환자들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걷는 린코. 지금까지 죽어가는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녀와 환자들이 전하는 가슴 따뜻하고 애잔한 이야기들이 코 끝을 찡하게 만든다.

대부분의 의사는 투쟁을 멈추는 것을 패배라고 오해한다. 그런데 투쟁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조만간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때 요구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의료이다. 죽기 전 남은 시간에 누긋하게 곁을 지켜주는 치료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나는 체험으로 깨달았다.

p319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과 의사, 치료는 환자를 살리기 위한 것으로 생각한다. 최종목표는 살아남는 것. 그 과정이야 어떻든 일단 생존하는 것이 최우선과제인 것이다. 린코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유방암으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아야코는 날카롭게 질문한다. '포기하지 않는 게 절대적으로 좋다고 보증할 수 있어요?'라고. 신약을 시험해 볼 기회를 마다하고 퇴원해 자택에서 지내는 아야코는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채 부작용의 고통을 감당하지 않겠노라 당당히 선언한다. 죽음을 앞둔 그녀 앞에서 린코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야코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 뿐. 선천적으로 근육이 서서히 쇠퇴하는 병을 가진 아마노 다모쓰, 이제 자신은 여한이 없다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기를 원하는 후미에, 여러 장애를 보이는 말 못하는 소녀, 의국의 전설이라 불렸던 의사 등을 돌보며 린코는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고칠 생각밖에 없는 의사는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 환자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려. 그렇다고 환자를 방치할 수도 없으니 어영부영 치료를 질질 끌다가 결국 병원 침상에서 고통만 안겨 주는 상황이 되지. 이건 환자에게나 가족에게나 정말 불행한 일이야.

p288

[사일런트 브레스]는 자신이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지, 그리고 소중한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편하게 세상을 떠나고 싶었던 후미에를 이용해 결국은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녀의 아들, 오랜 시간의 간병을 견디다 못해 결국 아들을 포기하고 마는 어떤 엄마의 모습을 비난하는 것은 쉽지만 과연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었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린코는 환자들을 통해 배운 것을 아버지와의 이별에 적용하며 의사로서, 한 인간으로서 한단계 도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되뇌이게 하는 작품.

 

작가의 이력이 매우매우 독특하다. 남편의 전근으로 영국 현지에서 출산과 육아를 병행하다가 의사와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자 홀로 공부를 시작하고, 결국 33세에 대학 의학부에 입학, 38세에 졸업하여 대학병원에서 근무했다. 자신의 의료경험을 소설로 쓰고 싶다는 생각에 낮에는 근무하고 밤에는 습작을 계속하여 55세라는 나이에 드디어 작가로 데뷔하는 쾌거를 이룬다. '인간승리'라 부를만한 작가의 이력이 작품의 선전에 도움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런 이력이 아니었어도 이 작품은 분명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 과하지 않게 흐르는 감동, 삶과 죽음에 대해 숙고하게 만드는 철학적인 메시지까지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로 가득찬 소설이다. 처음에는 에세이인 줄 알고 읽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 읽었으면 큰일날 뻔 했다. 출판사 북스피어, 마포 김사장님의 안목을 칭찬해 드리고 싶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조만간 또 만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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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노래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1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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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에 죽은 형 강영호의 유품을 정리하던 강상호는 형의 방에서 여러 장의 사진이 제목에 따라 분류되어 있는 두툼한 파일북 한 권을 발견한다. 그 속에 정리되어 있던 천산에 꼭대기에 집을 짓고 사람들이 생활하던 헤브론성에 대한 자료들. '한국의 오지 여행' 정도로 콘셉트를 잡고 진행되어 가던 형의 원고와 사진들을 바탕으로 출판사 관계자와 함께 답사를 떠난 강상호가, 헤브론성을 찾은 것은 답사 일정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 곳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부서진 채 방치되어 있는 돌집과 돌집 내부의 지하 공간, 지하방들에 가득 들어찬 글자들. 그 벽서들의 내용은 대부분 성경 구절들이었는데, 강영호의 유고집이 출간된 뒤 몇 달 후 대학에서 교회사를 강의하는 강사가 천산의 벽서와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한 권의 책을 비교하여 기독교 신문에 소개했다.

 

과거, 한 남자가 있었다. 박 중위라 불리던 남자는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군인으로 세상으로 돌아가면 유학을 떠날 잘 나가는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런 그가 복무하던 소년 후의 마을에서 후의 누이 연희를 만난다. 첫눈에 그녀에게 이끌린 박 중위는 연희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고, 열정을 담아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연희는 그런 그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는 고아인 채 아버지나 다름없는 삼촌 집에 얹혀 사는 자신과는 다른 배경을 가진 남자, 얼마 안 있어 제대하면 곧 이 마을을 떠날 남자. 연희는 한사코 그의 마음을 거부하지만 그 '아버지나 다름없는 삼촌'과 욕망으로 두 눈이 멀어버린 남자에 의해 능욕당하고 버려져 마을을 떠난다. 모든 상황을 또렷이 알지는 못했지만 연희의 실종과 박 중위가 연관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한 후는 비내리는 어느 밤, 박 중위를 칼로 찌르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천산을 올라 헤브론성의 '형제들'과 마주한다. 기도하고, 성경구절을 읽고, 성경을 필사하는 단조롭지만 온화한 생활. 그 생활 속에서 후는 마침내 자신의 진짜 얼굴을 마주한다.

 

그리고 또 한 남자. 자신이 모시던 장군과 함께 세상 속에서 달리던 남자. 그는 자신의 어느 생일 날 아내가 선물로 준 선글라스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자신의 눈빛을 숨긴다. 그런 그를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읽던 아내가 죽음을 맞이하고, 그는 그제서야 아내가 마지막으로 전달하려던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자기 얼굴이 일그러지고 부서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지 않기 위해 거울을 외면하고 선글라스를 벗지 못했던 그, 한정효. 그는 이제 선글라스를 벗고 자신이 속해 있던 '이곳' 아닌 '저곳'에 속한 헤브론성에 들어온다. 겉에서 보기에는 감금이었으나 스스로 걸어들어갔으니 그것은 그에게 감금이 아닌, 오히려 원하던 삶에 가까웠을까.

 

이 모든 내용들은 앞서 등장한 교회사 강사 차동연의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고 연락해 온, 전직 군인이었으나 이제 죽음을 앞둔 '장'의 이야기와 맞물려 등장한다. 성경에서 이복누이 다말을 폭력으로 얻은 암논, 그런 암논에게 복수하기 위해 2년을 기다렸던 압살롬을 보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후. 그는 압살롬이고자 했으나 제 안에 그릇된 욕망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자신도 암논이었음을 자각한다. 한정효 또한 아내의 죽음을 통해 그 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 위에서 자신의 얼굴이 짓이겨지고 일그러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 이대로는 안 된다고, 멈춰야 한다고 장군에게 제안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경고였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길 위에서 만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길 위에 자신을 올려놓아보라던 한정효. 그것이 자신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그의 말에 따라 이제 그 길을 후도 따라 걷는다. 결코 편치 않은 시간들, 고통과 오롯이 혼자인 시간들. 그들은 길 위에서 사람들의 냉대와 오해, 추기와 허기로 인해 고단했지만 그 고단함이 자신들의 더러움을 씻어주는 과정이라 믿었던 것 같다. 명확하게 손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알 것도 같았다. 길 위에 자신을 올려놓고 걸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곳'의 부당함이 어쩔 수 없이 불러내는 '저곳'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곳'의 부당함으로 대표되는 욕망과 정치. 욕망의 페르소나로 등장하는 후와 정치의 페르소나로 등장하는 한정효는 성경을 거울 삼아 자신의 내부를 깊이 들여다보고 그것들을 벗어던지고자 한다. 통렬한 자기 비판과 자기 인식. '이곳'의 부당함을 벗고 '저곳'을 동경하며 넘어가길 원했던 마음이 남긴 것이 바로 천산의 '벽서', <지상의 노래>다. 다른 작품에서였다면 결말 부분에서 그저 후와 한정효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슬퍼했을텐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예상하지 않았지만, 마치 예상했던 듯한, 응당 그러해야 했을 것 같은 결말에 안심하면서 전율했던 것 같다.

 

이승우 작가의 작품이 쉬운 편은 아니라 하여 책을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조금 긴장했다. 문장이 단순하지는 않았다. 단순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가 의아해할만한 문장들이었다. 평소라면 이런 말장난같은 문장들에 진저리를 쳤을 터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승우 작가의 문장들에는 그저 몸과 마음을 모조리 맡겨버렸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것 같은 느낌도 좋았고, 마치 이 작품이 나에게 하나의 '거울'이 되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부추기는 것 같기도 했다. 삶은 무엇이고 나의 욕망은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 '이곳'의 부당함과 '저곳'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후와 한정효에게 성경이 그러했듯, [지상의 노래] 자체가 어쩐지 나에게 거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책과 마주했던 시간이 아주 좋았다.

거울을 들여다볼수록 형제는 거울이 아니라 형제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을 읽을수록 형제는 성경이 아니라 형제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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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 - 7인 7색 연작 에세이 <책장 위 고양이> 1집 책장 위 고양이 1
김민섭 외 지음, 북크루 기획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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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는 2020년 3월부터 5월까지 3개월간 ‘작가 초대 플랫폼 북크루’에서 진행한 ‘에세이 새벽 배송 서비스 [책장위고양이]’를 통해 주 7일 새벽 6시마다 구독자들의 메일함을 두드렸던 총 63편의 글을 모은 연작 에세이집이다. 김민섭, 김혼비, 남궁인, 문보영, 오은, 이은정, 정지우. 일곱 명의 에세이스트가 각각의 주제에 맞춰 자신들의 기억 속 편린들을 깔끔하고 재치있는 문장과 내용으로 풀어냈다. 사실 에세이를 그리 선호하지 않기도 하고, 이 일곱 명의 작가들 중 그나마 들어본 이름은 남궁인 작가님(책은 한 권도 읽어보지 않음) 뿐이라 과연 어떤 내용들일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읽기 시작했다. 이름만 들었던 남궁인 작가님은 생각보다 똘끼(?!)가 있는 데다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신 듯한 느낌에 재미났다. 무엇보다 나에게 이런 아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의 글 속에 등장하는 어머니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글들이었다.

 

 

 

 

 

고양이, 작가, 친구, 방, 뿌팟퐁커리, 비, 결혼, 커피. 한 작가당 하나의 주제를 제시하고 그것에 맞춰 글을 쓰는 형식. 그저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첫 주제인 <고양이>에서 김민섭 작가님의 글에 심장을 강타당했다. 주말 점심, 운전을 하면서 돈가스 집으로 향하던 그는 교차로 중간에 상체만 일으킨 채 누워있는 고양이를 발견한다.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잠시 망설이는 사이 고양이를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다. 유턴을 해 다시 돌아가봤지만 고양이를 구할 수는 없게 된 상황. 조수석에 앉아있던 친구는 '아까 차를 세웠어야 했다'며 몇 번이나 그를 원망했고, 작가님은 뒤에 시내버스가 한 대 따라오고 있었으므로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변명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그의 가슴 한 켠에 자리잡은, 차마 구하지 못했던 고양이. 그 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자신의 인생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거라 여전히 자책하면서 인생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

                            

누구나 크고 작은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저마다의 회전교차로에 진입하게 된다. 20대의 내가 마주한 그 교차로는 아주 컸고 갈림길도 많았다. 그게 반드시 취업이나 진학으로의 길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태도라든가 지향을 선택하는 더욱 중요한 길이 있다. 거기에 어떻게 진입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응당 자기 자신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예를 들어 '고양이를 구한다든가' 하는 일을 한다면, 내가 가야 할 길로 들어설 수 있지 않을까.

p17

친구의 고양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적은 김혼비 작가님의 글도 아주 좋았다. 친구 D가 여행 간 사이 잠시 그의 고양이 토토를 맡아두었던 또 다른 친구. 뭔가에 화들짝 놀라 품 안에서 빠져나가 숲 속으로 사라진 그 고양이로 인해 여러 사람의 인생이 바뀔 위기에 처한다. D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고양이를 잃어버렸다는 죄책감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고 D를 만나러 간 그 친구는, 오히려 D가 건네는 위로의 말에 그만 눈물을 쏟고 만다. 자신의 고양이를 잃어버린 슬픔도 컸을텐데, 그 고양이를 잃어버린 죄책감으로 평생을 괴로워할 친구를 먼저 걱정하는 D.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온몸이 찌릿거릴 정도의 큰 감동과 멋진 이야기였다.

남는 건 모진 상처와 자괴뿐일 걸 알면서도 감정에 휩쓸려 파탄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란 얼마나 쉬운가. 그럼에도 절대 그 경계선을 넘지 않고 그 바깥에 단단하게 서서 호흡을 고르며 다른 걸 볼 줄 아는 사람이 있다. D는 그런 '어른'이었다.

p21

오늘 아침 첫째에게 또 독을 쏘고 만 나는, D와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며 결국 또 발버둥을 치고 있다.

 

작가에 관해 쓴 문보영 작가님의 글도 재미있었다. 어떤 사람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한 뭉치의 두툼한 원고 뭉치로 보일 때 일기를 쓴다는 그. 그런데 그 순간을 경계해야 한단다. 자신에게 연필을 잡게 할 때 이 충동에 적당히 대응하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연인 앞에서는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아도 뒤에서 연인에 대한 글을 쓰느라 대꾸도 잘 하지 못하는 웃픈 상황. 뒤이어 등장하는 한 문장에 그만 포복절도하고 말았다.

"왜 나랑 안 놀아" 왜 맨날 글만 써" 사랑하는 자가 항의한다.

"나는 더 본질적으로 너랑 놀고 있는데?" 따위의 말을 하는 쓰레기가 되는 일이 없길 빈다......

p66

재미난 이야기들이 한가득이라 다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키득키득 웃기도 하고, 마음을 치는 충격에 멍-해지기도 하고, 한 권의 책으로 다양한 감정을 경험했다. 에세이가 이리 재미있을 줄이야. 이야기 맛집, 다채로운 감정 맛집이다! [책장위고양이] 두 번째 프로젝트도 진행되기를, 또 새로운 글들을 만나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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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천문학 - 미술학자가 올려다본 우주, 천문학자가 들여다본 그림 그림 속 시리즈
김선지 지음, 김현구 도움글 / 아날로그(글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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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도 좋아하고, 그림 속에 담겨 있는 신화와 성서 이야기도 좋아하고, 잘은 모르지만 별자리 이야기도 좋아한다. 언젠가 아이들과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별자리 하나하나 찾아보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꿈꾸기도 하는데, 그런 나의 꿈에 딱 안성맞춤인 책이라니! 책이 손에 들어온 날부터 기뻐 날뛰며 조금씩 아껴 읽었다. 심지어 표지까지 취향저격! 한국천문연구원 웹진에 게재한 '명화 속 별 이야기'라는 짧은 글을 발견한 출판사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는데, 그 글 발견하신 분 누구신지 엉덩이라도 토닥여주고 싶은 심정이다. 게다가 저자의 남편 분은 한국천문연구원에서 근무하고 계신다니, 이런 찰떡궁합이 어디 있겠는가. 미술과 역사를 전공한 저자와 천문학자 남편 분은 일 년내내 이 주제에 매달려 살았다는데, 부부가 하나의 프로젝트에 매달려 공감하고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도 참 멋져 보인다.

 

PART 1에서는 별과 행성에 관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역시 처음을 장식하는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 얼마 전 이윤기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은 터라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데, 다시 또 여기서 만나니 반갑다. 제우스는 주피터로, 헤라 여신은 주노로 이탈리아식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제우스의 바람기가 어디 가겠는가. 태양계의 왕자라 불릴 정도로 우리 태양계에서 가장 큰 행성인 목성. 그래서 목성을 주피터라 부르는데 그 목성의 주변을 돌고 있는 위성들의 이름이 인상적이다. 많은 위성들 중 1610년 갈릴레오가 발견한 네 개 위성의 이름은 이오,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로 모두 제우스와 사랑을 나눈 신화 속 인물들.

 

밤하늘에서 달에 이어 두 번째로 밝은 천체이자 태양계의 두 번째 행성인 금성은 서양에서는 비너스라 불린다. 금성에 대한 천문학적 지식과 함께 소개되는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비너스 조각들과 르네상스 최초의 누드화이자 그림을 좀 본 사람들은 웬만큼 다 알고 있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등장한다. 명왕성은 태양계의 행성에서 배제된 왜소행성이다. 14-16등급으로 어둡게 보이는 명왕성은 소형 망원경으로도 잘 보이지 않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하데스, 플루토라는 이름이 붙었다. 명왕성은 미국인 천문학자가 발견한 유일한 행성으로 덕분에 미국인들의 명왕성 사랑이 남다르다고 한다. 여기에 페르세포네를 신부로 맞아들인 하데스의 이야기와 그를 바탕으로 그린 명화, 조각들이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움직임이 느리다고 해서 늙은 신 사투르누스의 이름이 붙은 토성. 사투르누스는 시간을 다스리는 그리스의 크로노스와도 동일시되는 인물인데, 그는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쫓아냈지만 그 또한 자식들에에 왕위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식들이 태어나는 족족 잡아먹는다. 그런 상황을 그린 고야와 루벤스의 어둡고 잔혹한 그림은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하다. 여기에 바다의 신 넵튠의 이름이 붙은 해왕성과 우라노스라는 이름이 붙은 천왕성, 공전주기는 88일에 평균 궤도 속도가 48킬로미터로 가장 빠르다 해서 전령의 신 헤르메스를 뜻하는 머큐리라는 이름이 붙은 수성, 이름만으로도 낭만적인 디아나 달, 전쟁의 신의 이름이 붙은 화성 마르스, 게다가 태양신 아폴로까지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태양계와 신화들의 이야기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다.

 

PART 2에서는 별과 우주, 밤하늘을 그린 화가들이 이야기가 펼쳐진다. 외계인과 UFO, 미스터리로 가득찬 뒤러의 <멜랑콜리아>, 읽으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인 베리 공작의 기도서, 혜성을 포착한 중세미술의 혁신가 조토, 미술계의 천문학자라 불리는 엘스하이머와 루벤스, 그리고 밤하늘 하면 빠질 수 없는 화가인 고흐, 호안 미로와 알렉산더 칼더의 별자리 연작, 꽃과 사막에서 우주를 본 조지아 오키프의 이야기까지 아주 풍성하고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꽉꽉 담겨 있다.

 

지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책이기도 하고, 아이와 함께 읽으면 더 없이 좋을 책이기도 하다. 조만간 캠핑을 갈 예정인데 서울이 아니니 별이 더 잘 보이려나. 그 때까지 재독, 정독, 열독해서 아이에게 해 줄 이야기들을 마음 속에 채워가야겠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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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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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티투시온의 조부모님이 사시던 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 나. 유서깊은 저택들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지만 대부분 호텔이나 요양원으로 바뀌었거나 폐허로 방치된 채 있다. 1871년 황열병이 도시를 휩쓸자, 귀족 가문들은 이를 피해 도시의 북쪽으로 달아났고,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텅텅 빈 채로 방치된 탓에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동네. 마약 중독자들, 강도, 여장남자들이 어슬렁대는 거리인지라 여자 혼자 살기에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지만 '나'는 거기 사정에 훤하고 일정이나 시간대를 잘 알고 있다면 위험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집 앞 길모퉁이에서 임신한 엄마와 다섯 살쯤으로 보이는 아들이 노숙하고 있다. 그저 길바닥에 낡은 매트리스 세 개를 깔고 자는 더러운 아이와 엄마는, 언제나 그 길모퉁이에서 구걸을 한다. 돈을 위해서라면 주술사들의 모임에 나가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던 엄마가 돌아오지 않은 어느 밤, 그 남자아이가 '나'의 집 문을 두드린다. 아이를 집안으로 들여 약간의 음식을 대접하고 아이스크림까지 사주지만 아이의 엄마에게서 부조리한 공격과 욕설을 당한다. 그리고 자취를 감춘 그들. 그 일주일 뒤에 잔혹한 모습으로 발견된 한 아이의 시체. 그 시체가 자신이 음식을 내주었던 아이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있던 '나'는 출산 뒤 아이들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엄마를 만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집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다시 그 더러운 아이가 찾아와 집 안으로 들여보내달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리면서.

 

21세기의 '에드거 앨런 포'라 불린다는 아르헨티나 작가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소설들은 나처럼 무서운 것을 보고 난 뒤에는 밤잠을 못 이루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다. 음습하고 무거운 이야기들, 잔혹한 묘사와 여기에 여운을 남기는 결말은 더운 여름밤 끈적끈적함을 남기며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선사했다. 작품 속 배경은 하나같이 밝지 않다. 타락한 경찰들은 아이들을 죽이는 것도 망설이지 않으며, 마약에 취한 친구들은 다른 친구의 애인을 죽이기도 하고, 폐가에 들어간 실종된 아이로 인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오빠가 있으며, 우울증을 앓던 주인공 앞에는 세모 모양의 이빨을 가진 아이가 나타나 고양이를 물어뜯기도 한다. 공포와 환상 속에서 과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가운데, '우리들의 공포, 그것은 대부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공포다'라는 말이 눈에 띈다.

 

표제작인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항의의 표시로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급진주의적인 여성 단체를 그리고 있다. 이 단체의 여성들은 남성우월주의에 의한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여성성과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내는데, 화상 입은 몸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며 저항의 뜻을 전달한다. 주인공은 운동에 협력하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는데, 섬뜩한 것은 자신들은 나이를 먹어 불가능하다며 그녀에게 불 속으로 들어가기를 권하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비록 사회적인 이념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여자들이지만, 원하지 않는 행위를 강권하는 폭력도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막연히 사회적인 억압과 권력에 의한 공포가 작품 전반에 떠돌고 있다는 것은 감지했지만, 작품해설을 읽고나니 작가의 의도를 더 명확히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쉽지 않은 내용과 작품 해설이지만, 이 작가의 작품이 또 출간된다면 충분히 즐길(?) 용의가 있다. 그 때는 아마 더 꼼꼼하게 작품을 분석할 수 있지 않을까. 환상이 현실에 침투해 결국 현실까지 먹혀버리는 다채롭고 매혹적인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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