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노래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1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년 전에 죽은 형 강영호의 유품을 정리하던 강상호는 형의 방에서 여러 장의 사진이 제목에 따라 분류되어 있는 두툼한 파일북 한 권을 발견한다. 그 속에 정리되어 있던 천산에 꼭대기에 집을 짓고 사람들이 생활하던 헤브론성에 대한 자료들. '한국의 오지 여행' 정도로 콘셉트를 잡고 진행되어 가던 형의 원고와 사진들을 바탕으로 출판사 관계자와 함께 답사를 떠난 강상호가, 헤브론성을 찾은 것은 답사 일정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 곳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부서진 채 방치되어 있는 돌집과 돌집 내부의 지하 공간, 지하방들에 가득 들어찬 글자들. 그 벽서들의 내용은 대부분 성경 구절들이었는데, 강영호의 유고집이 출간된 뒤 몇 달 후 대학에서 교회사를 강의하는 강사가 천산의 벽서와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한 권의 책을 비교하여 기독교 신문에 소개했다.

 

과거, 한 남자가 있었다. 박 중위라 불리던 남자는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군인으로 세상으로 돌아가면 유학을 떠날 잘 나가는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런 그가 복무하던 소년 후의 마을에서 후의 누이 연희를 만난다. 첫눈에 그녀에게 이끌린 박 중위는 연희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고, 열정을 담아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연희는 그런 그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는 고아인 채 아버지나 다름없는 삼촌 집에 얹혀 사는 자신과는 다른 배경을 가진 남자, 얼마 안 있어 제대하면 곧 이 마을을 떠날 남자. 연희는 한사코 그의 마음을 거부하지만 그 '아버지나 다름없는 삼촌'과 욕망으로 두 눈이 멀어버린 남자에 의해 능욕당하고 버려져 마을을 떠난다. 모든 상황을 또렷이 알지는 못했지만 연희의 실종과 박 중위가 연관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한 후는 비내리는 어느 밤, 박 중위를 칼로 찌르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천산을 올라 헤브론성의 '형제들'과 마주한다. 기도하고, 성경구절을 읽고, 성경을 필사하는 단조롭지만 온화한 생활. 그 생활 속에서 후는 마침내 자신의 진짜 얼굴을 마주한다.

 

그리고 또 한 남자. 자신이 모시던 장군과 함께 세상 속에서 달리던 남자. 그는 자신의 어느 생일 날 아내가 선물로 준 선글라스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자신의 눈빛을 숨긴다. 그런 그를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읽던 아내가 죽음을 맞이하고, 그는 그제서야 아내가 마지막으로 전달하려던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자기 얼굴이 일그러지고 부서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지 않기 위해 거울을 외면하고 선글라스를 벗지 못했던 그, 한정효. 그는 이제 선글라스를 벗고 자신이 속해 있던 '이곳' 아닌 '저곳'에 속한 헤브론성에 들어온다. 겉에서 보기에는 감금이었으나 스스로 걸어들어갔으니 그것은 그에게 감금이 아닌, 오히려 원하던 삶에 가까웠을까.

 

이 모든 내용들은 앞서 등장한 교회사 강사 차동연의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고 연락해 온, 전직 군인이었으나 이제 죽음을 앞둔 '장'의 이야기와 맞물려 등장한다. 성경에서 이복누이 다말을 폭력으로 얻은 암논, 그런 암논에게 복수하기 위해 2년을 기다렸던 압살롬을 보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후. 그는 압살롬이고자 했으나 제 안에 그릇된 욕망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자신도 암논이었음을 자각한다. 한정효 또한 아내의 죽음을 통해 그 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 위에서 자신의 얼굴이 짓이겨지고 일그러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 이대로는 안 된다고, 멈춰야 한다고 장군에게 제안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경고였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길 위에서 만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길 위에 자신을 올려놓아보라던 한정효. 그것이 자신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그의 말에 따라 이제 그 길을 후도 따라 걷는다. 결코 편치 않은 시간들, 고통과 오롯이 혼자인 시간들. 그들은 길 위에서 사람들의 냉대와 오해, 추기와 허기로 인해 고단했지만 그 고단함이 자신들의 더러움을 씻어주는 과정이라 믿었던 것 같다. 명확하게 손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알 것도 같았다. 길 위에 자신을 올려놓고 걸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곳'의 부당함이 어쩔 수 없이 불러내는 '저곳'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곳'의 부당함으로 대표되는 욕망과 정치. 욕망의 페르소나로 등장하는 후와 정치의 페르소나로 등장하는 한정효는 성경을 거울 삼아 자신의 내부를 깊이 들여다보고 그것들을 벗어던지고자 한다. 통렬한 자기 비판과 자기 인식. '이곳'의 부당함을 벗고 '저곳'을 동경하며 넘어가길 원했던 마음이 남긴 것이 바로 천산의 '벽서', <지상의 노래>다. 다른 작품에서였다면 결말 부분에서 그저 후와 한정효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슬퍼했을텐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예상하지 않았지만, 마치 예상했던 듯한, 응당 그러해야 했을 것 같은 결말에 안심하면서 전율했던 것 같다.

 

이승우 작가의 작품이 쉬운 편은 아니라 하여 책을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조금 긴장했다. 문장이 단순하지는 않았다. 단순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가 의아해할만한 문장들이었다. 평소라면 이런 말장난같은 문장들에 진저리를 쳤을 터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승우 작가의 문장들에는 그저 몸과 마음을 모조리 맡겨버렸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것 같은 느낌도 좋았고, 마치 이 작품이 나에게 하나의 '거울'이 되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부추기는 것 같기도 했다. 삶은 무엇이고 나의 욕망은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 '이곳'의 부당함과 '저곳'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후와 한정효에게 성경이 그러했듯, [지상의 노래] 자체가 어쩐지 나에게 거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책과 마주했던 시간이 아주 좋았다.

거울을 들여다볼수록 형제는 거울이 아니라 형제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을 읽을수록 형제는 성경이 아니라 형제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p1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