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밟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낮잠을 잔 데다 바람이 거세 창문이 소란스럽게 덜컹거리는 바람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이 뻑뻑해서 책읽기도 싫어 TV를 켜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고정한 프로는 <사랑과 전쟁>. 좋지 않은 이야기들은 유독 머릿속에 쉽게 남는다. 영향을 받기도 쉽다. 그래서 평소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던 프로였지만 시간은 밤을 넘고 새벽을 건너 아침을 향해가던 때라 취침예약을 해놓고 멍하게 보기 시작했다. 그 날의 주제는 <못생긴 남편>. 앞부분부터 보지는 못했지만 신부대기실에서 신부가 울상을 짓고 있는 데다 찾아오는 친구들은 신부를 불쌍해하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기에 신랑이 정말 못생겼구나 짐작은 했다. 결혼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변호사인 신랑의 선물공세와 주위사정에 의해 쫓기듯 결혼하게 됐다는 신부의 넋두리 뒤에 등장한 그의 얼굴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해도 못생겼었다. 물론 분장을 과도하게 한 탓도 있겠지만 코주부 코에 툭 튀어나와 다물어지지 않는 입, 고르지 않다는 표현도 과분할 정도로 뒤틀린 치열. 아내는 아이를 임신한 뒤로 남편이 자기 몸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자기 할 도리는 다 했다며 육아를 남편에게 맡긴 채 다른 남자를 만나며 밖으로 겉돌기 시작한다.

예전 알랭 드 보통의 [너를 사랑한다는 건] 이라는 책에서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발톱이 발에 붙어 있으면 그건 괜찮아. 하지만 일단 떨어져 나가면 그건 쓰레기잖아. 예를 들어, 사람 머리에 난 머리카락을 보는 것하고 욕조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보는 건 다르잖아.

그런데 왜 발톱을 깎는 게 섹스를 하는 것보다 더 친밀한 거야?

섹스를 하는 상대는 그 앞에서 발톱을 깎아도 창피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얘기일 뿐이야.

나는 이 문장들을 보면서 결국 사랑한다는 건 자신의 가장 부끄럽고 창피한 부분을 공유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깨달았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사랑의 결실이라고 생각하는 결혼은 아마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고 깊은 부끄러운 부분들을 공유하게 되는 일일 것이다. 사랑해서 결혼해도 헤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인데 선물공세와 남편의 경제력에 떠밀려 결혼한 신부의 마음은 어땠을까. 쳐다보기만 해도 싫고 밥 먹는 모습도 꼴 보기 싫어지는 사람과 평생을 같이 살 약속을 한 그녀의 어리석음을 탓할 일이지만 그것이 과연 남의 일이기만 할까 생각해보게 된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 그런 때가 찾아오지 않을까. 그가 밥 먹는 모습, 걸음걸이, 말투 그 외의 많은 것들을 사랑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그 모든 것들에 진저리를 치게 되는 날이. 발톱을 깎는 그의 모습이 싫어지게 되는 날이.

루이스 어드리크의 [그림자밟기]는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는 아내 아이린과 그런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는 남편 길의 이야기이다.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한 마음에 그녀가 쓰는 일기를 훔쳐보는 길. 그리고 그런 길의 행동을 알아채고 블루 노트북과 레드 다이어리, 두 권의 일기장을 만드는 아이린. 아이린은 블루 노트북에는 진실을, 레드 다이어리에는 길에게 보여주기 위한 내용을 적으며 길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화가와 모델로 만나 한 때는 깊은 친밀감을 느끼며 서로에게 애정을 쏟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나고, 비뚤어진 욕망만이 그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아내를 모델로 그녀의 속살까지 화폭에 옮겨담으며 그녀의 이미지를 통해 예술가의 혼을 불태우려했던 길. 그런 남편 옆에서 타인에게 소모되는 이미지가 더 이상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주체성을 되찾고 싶어하는 아이린은 이혼을 요구한다.

아이린은 생각했다. 이미지는 사람이 아냐. 심지어 사람의 그림자도 못 돼. 그러니 이미지처럼 모호한 것을 묘사한 그림, 설령 비약이나 과장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그림에 굳이 상처받을 필요는 없잖아?

 

그들의 관계는 기괴하다. 사랑이라기보다 이제는 집착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길의 언행과 그를 감싸안는 듯 내치는 아이린의 모습. 특히 마지막에서 보여지는 아이린의 선택-그것이 정말 그녀의 선택일까 싶기도 하다-을 보면 그녀의 길에 대한 감정도 완전히 사그라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아이린은 멈추지 않는다.

예전에 위니 제인은 아이린에게 자갈로 그림자를 덮어 없애려 하는 아이들을 찍은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로 병자들을 치료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자기 그림자에서 힘을 얻는 어느 사악한 위디고 전사는 딱 정오만되면 어린 소녀에게도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영혼은 그림자를 통해 빼앗을 수 있었다. 이것을 오지브웨 언어에서는 ‘와바무지차그완’이라고 하는데, 거울을 뜻하는 이 말은 그림자와 영혼을 뜻하기도 한다. 인간의 영혼은 눈에 보인다는 것. 길은 아이린을 그리면서 그녀의 그림자를 밟았다. 그녀가 아무리 기를 써도 그의 발에 짓밟힌 그림자의 실타래를 당길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을 통해 부부사이에서의 소유라는 개념과 애증이라는 감정을 표현한 작가는 대학시절 교수와 학생으로 만난 마이클 도리스와 결혼했지만 16년의 결혼생활 끝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이린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길에게는 남편 마이클의 모습을 투영했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화한 바 있다고 고백한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내가 이 작품을 어렵게 느꼈던 이유는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것들,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엮이지 않는다면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 있을 것이므로. 지금의 나는 알 듯도, 모를 듯도 하다. 손에 잡힐 것처럼 잡히지 않는 생각들이 있다. 언젠가 내가 결혼을 하고 오랜 시간 누군가와 함께 보내게 된다면 이 작품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지독하게 길을 밀어내고 싶어했지만 그의 심장에서 흔들리지 않는 빛을 봤을지도 모를 아이린의 선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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