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7
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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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랑'이라는 주제로 나를 주체할 수 없이 울려버린 한 권의 책과 한 편의 영화가 있다.

영화는 장이모우 감독의 <山楂树之恋(산사나무 아래)>,

책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영화 얘기 할 거는 아니고, 그냥 꺼내봤다. 지금 내 머릿속에 온통 산사나무뿐이라! "我是静秋! 我是静秋!" ㅠ_ㅠ) 

 

평소에 지인의 추천이나 입소문으로 접하게 되는 책이 많은데, 이 책 <시라노>는 어째서 여태껏 내게 추천해주는 이가 없었는지 의아하다.

'모태 짝사랑' '짝사랑의 달인' 등등으로 자칭하는 내가 최고로 치는 짝사랑 소설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인데, 그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짝사랑으로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게 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내 짧은 독서 경력으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후 최고! 지금은 베르테르보다 더 마음에 품은 책!

 

어쩌면 시라노에게서는 베르테르에게서 느끼지 못한 또다른 '동병상련'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실린 작품 해설 제목은 '잘생긴 외모가 아니라 침묵과 헌신으로 지켜낸 사랑'인데, 바로 그 점, '잘생긴 외모가 아니라'는 이 부분이 나에게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시라노의 심정을 더욱 절절하게 이해하고 마치 나의 고통인 듯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책 표지 그림처럼 기형적으로 거대한 코를 가진 인물이다. 아마, 훤칠하게 잘생긴 큰 코가 아니고 정말 괴이하리만치 컸던가 보다. 어느 누구라도 시라노 앞에서 코 얘기를 꺼냈다가는 '큰코 다칠 것이다'! (아, 위험한 표현이었다!)

코가 커서 사는 데 불편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여인을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사랑하는 그녀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없다. 이처럼 추한 얼굴을 한 자신을 그녀가 받아주리라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던 중 그녀가 다른 청년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알고 만다. 심지어는 아주아주 잘생긴 청년을! 자, 이제는 시라노 위에 내가 겹친다. 마음에 둔 남자가 아주아주 예쁘고 몸매마저 우월한 모델 같은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평소에 마시지도 않는 술을 사와 혼자 자취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홀짝홀짝 마셨다. 그 '선남선녀' 커플을 생각하며, 나 따위가 언감생심 못 올라갈 나무를 바라봤군 자책하면서 홀짝홀짝, 훌쩍훌쩍. 자, 이제는 다시 시라노.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 시라노, 그가 아주 잘생겼다는 말에 모든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그와 겨뤄볼 여지가 없는 것이다. 시라노는 나처럼 '홀짝홀짝, 훌쩍훌쩍' 하는 대신 '끼적끼적' 한다. 그녀에게 닿을 연애편지를... 아니,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데 연애편지를 쓴다고? 쓴다, 그 남자를 위해. 그 남자를 통해 그녀에게 전해질, 원래는 시라노의 언어였으나 그녀에게 가 닿을쯤엔 다른 남자의 언어가 되어 있을 사랑의 문장들을. 바보 같은 시라노! 그냥 그녀에게 그 남자는 입 안이 텅 빈 공터 같은, 그녀가 원하는 시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라고는 애당초 할 줄도 모르는 남자라고 말해버리지! 시라노는, 그녀의 사랑을 지켜준다.

 

바로 이런 시라노가 나를 엄청 울려버렸다. 그녀의 발코니 아래에서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로 가장해 대신 사랑을 말해주는 시라노. 그 절절한 사랑의 언어가 그녀의 마음에 닿을 때는 다른 남자의 얼굴로 둔갑해 있지만 비록 어둠 속에 숨어서라도 그녀에게 사랑을 말할 수 있음에 가슴 벅차한다. 바보 시라노! 비록 그녀가 다른 남자를 껴안고 입 맞출지라도 그녀가 입 맞추는 것은 방금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간 그 언어들이라며 홀로 위로한다. 바보 시라노, 바보 시라노!! 그리고 그녀를 지켜주는 그 사랑을 평생 이어간다. 시라노의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바보, 바보 같은 시라노…… ! 하지만,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귀한 사랑을 평생 동안 지켜온 시라노가, 나는 부럽다. 설령 평생 바보가 될지라도 그런 사랑 해볼 수 있다는 것, 그 또한 엄청난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니니까.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시라노의 숭고한 사랑. 나는 홀짝홀짝, 훌쩍훌쩍 하고 몇 해 뒤에는 완전히 그 사람을 잊었지만, 시라노는 죽는 순간까지 그 여인을 심장에 품고 눈 감을 수 있었으니…… 행복한 사람, 행복한 시라노!

 

나는 '짝사랑'이라는 주제에 예민한 편이어서 이 책의 '짝사랑' 요소를 깊게 흡입하며 지나치게 거기 열중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짝사랑'이라는 소재를 빼놓더라도 이 책은 요리 보고 조리 봐도 누구에게든 추천하고 싶은 명작이라는 생각이다! 시라노가 남의 연애편지를 괜히 대신 써줬겠는가? 뛰어난 명필가 시라노의 손끝에서 탄생한 아름다운 사랑의 속삭임들이 책장 가득 흘러 넘친다. 우리 시라노 씨는 명문장뿐 아니라 유머에도 일가견이 있다. 책 군데군데 풋ㅡ 웃음이 터져나오도록 재밌는 언어 유희와 장면들이 이 책의 재미를 한층 끌어올려준다. 시라노 못 만나보고 죽어 하늘나라 갔다가 누군가가 "내가 생전에 시라노라는 책을 읽었는데……" 하며 소개해 준다면, 하늘나라에서 땅을 칠 뻔한 책. 나 다시 태어나 시라노를 읽을 테야!! 절규하려나? (좀 오버 했나? 뭐, 그만큼 내 마음에 큰 파장을 몰고 오고, 나의 큰 사랑을 받은 책이므로!)

 

시라노 이야기는 작년에 개봉한 국내 영화 <시라노; 연애 조작단>을 통해서도 만나볼 수 있고, 곧 소설판 『시라노』로도 출간된다. 나는 '삼색 매력'의 시라노를 모두 만나본 운 좋은 사람. 기회가 되면 외국에서 만들어진 시라노 관련 영화들도 볼 수 있게 되길! '시라노'는 앞으로 내 삶에서 지워지지 않을 소중한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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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대산세계문학총서 6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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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밤이었다.

이 책은, 조금쯤 '느닷없이', 조금쯤은 '몽롱하게', 조금쯤은 '운명처럼' 내게 다가왔다.

지금껏 어떤 책을 받아들고 그 밤의 그런 느낌을 맛본 적 없었으므로, 딱 어떠한 만남이었다고, 나도 잘 설명하지 못하겠다.

다만, 아주 특별했다는 것. 오래오래 기억 남을 만큼 아주아주 특별했다는 것.

그리고,

이 삶이 온통 선물처럼 느껴졌다는 것...

 

책을 받던 그 밤으로 바로 펼쳐 들었다.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시집이기에, 어떤 시들이 실려 있나 살짝 맛만 볼 생각이었다.

그럴 수 있는 시집, 아니었다.

한 편 한 편 아껴가며 읽고 싶은 마음은, 시집에 수록된 시 한 편 한 편의 매력에 사로 잡힌 내 마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고인들이여, 내 기억 속에서 당신들의 존재가 점차 희미해진데도, 너그러이 이해해달라.

시간이여, 매 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우치노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여, 태연하게 집으로 꽃을 사 들고 가는 나를 부디 용서하라.

벌어진 상처여, 손가락으로 쑤셔서 고통을 확인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라.

지옥의 변방에서 비명을 지르는 이들이여, 이렇게 한가하게 미뉴에트 CD나 듣고 있어 정말 미안하구나.

기차역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여, 새벽 다섯 시에 곤히 잠들어 있어 참으로 미안하구나.

막다른 골목까지 추격당한 희망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_ '작은 별 아래서' 부분

 

이 작은 별 아래 펼쳐지는 60억 개 '연극 무대'를 떠올리고, 때로는 과분하다고 때로는 부족하다고 때로는 타당하다고 때로는 부조리하다고 느껴지는 나의 연극 무대를 가만 돌아본다.

언젠가는 반납 예정인 나의 심장과 간에 대해, 타고난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묵묵히 뛰고 있는 심장에 대해, 가만가만 나를 덮쳐올 듯 하다가 덮치지 않는 불운에 대해, 중요한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쉼보르스카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건져 올리는 비범한 삶의 지혜이다.' '쉼보르스카의 시는 특별히 현학적인 시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소박하고 진솔한 언어로 우리에게 삶의 소중한 진리를 일깨워준다. 시인은 결코 목소리를 높여 단언하거나 애써 독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단순 명료한 어조로 독자들의 귓가에 생의 의미에 대해 나직하게 속삭이고 있을 뿐이다.'(옮긴이 해설)

나직하지만 웅숭깊은 속삭임. 그로부터 길어 올리는 '삶의 소중한 진리', '생의 의미'는 오롯이 나의 몫.

그 밤 이후 수시로 시집 펼쳐 두레박 던져 넣는다. 어느 구절을 읽어도 청량하고 깨끗한 우물물 같은 시편들.

이 시집을 만나게 해 준, 이 시집을 만날 수 있었던, 이 시집을 만났던 모든 순간순간이 선물 같은, 나의 연극 무대.

이 시집에 '시작'은 있을지언정, '끝'은 없을 것만 같다.

 

 

어쩌다 보니 이 화창한 아침,

어느 한적한 강가의 나무 그늘 아래 이렇게 앉아 있다.

이것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는 결코 기록되지 않을

지극히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동기가 무엇인지 낱낱이 분석되어져야 할

중요한 전투나 조약도 아니고,

기억할 만한 폭군의 학살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바로 지금 이 강변에 앉아 있고,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사실.

내가 이 자리에 이렇게 도달했다는 건

어딘가에서 이곳을 향해 출발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갑판에 오르기에 앞서 다른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육지의 여러 곳에서 은둔하고 있었으리라.

 

비록 일시적인 순간에 불과하다 해도

누구나 자신만의 무수한 과거를 지니고 있으니

토요일이 오기 전에는 자신만의 금요일이 있으며,

유월이 오기 전에는 자신만의 오월이 있게 마련.

사령관의 망원경에 포착된 동그란 풍경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자신만의 지평선을 가지고 있다.

 

(……)

 

어쩌다 보니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바로 이 자리에서 강물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 위로 하얀 나비가 오직 자신만의 것인 날개를 파닥거리며,

내 손에 그림자를 남긴 채 포드닥 날아간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자신만의 것인

그림자를 남긴 채.

 

이런 광경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더 이상 확신을 할 수가 없다.

과연 중요한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있는지. _ '제목이 없을 수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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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노코와 마들렌 여사
마키메 마나부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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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렌, 와산본, 미켈란젤로, 캔디……

이 마을 고양이들의 이름이다. 이 중 마들렌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의 주인공.

동네의 많은 고양이들 중 마들렌 여사가 주인공이 된 데는 그녀의 아주 특별한 장기가 한몫 했으리라.

"얘기 들었어요? 우리 동네에 외국어를 할 줄 아는 고양이가 나타났대요."

바야흐로 글로벌 시대. 어딜 가든 외국어 실력이 우대를 받는 요즘 시대에, 동물들 세계에서도 '외국어 우대'는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마들렌은 '외국어' 구사 능력으로 마을 고양이들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외국어란, 다름 아닌, 음, 뭐라고 부를까나, 그러니까 그게, '개소리'...?!

 

마들렌은 그녀의 남편 겐자부로(커다란 덩치의 시바견이다! 인간 세상에서 말하는 '국제 결혼' 쯤 되겠다.)와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단, 그녀의 남편과만.

"바깥 분이랑만 통한다는 건 그럼…… 사랑 이야기라는 뜻?"

"어머머! 그런 뜻이려나?"

어머머, 그런 뜻일지도 모르겠다. 오로지 둘이서만 통하는 언어. (오로지 둘이서만 통하는 언어를 가진다는 것, 아아, 로맨틱하다!)

그리고 마들렌과 겐자부로가 사는 집에는 귀여운 여자 아이 가노코가 있다. 친해지고 싶은 친구와 마음처럼 가까워지지 않자 이 부부를 보며 한탄도 하는 귀여운 소녀.

"하여튼, 너희는 서로 말도 안 통하는데 어쩜 그렇게 사이가 좋니? 우리는 말이 통해도 영 안되는데."

 

이야기는 소녀 가노코와 고양이 마들렌 여사의 시점으로 이어진다. (나는 개를 좋아하므로 겐자부로에게 따로 한 챕터 내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다소 불만(?)스러웠지만. 흠흠)

가노코와 '문경지우(刎頸之友)' 스즈의 맑고 순수한 우정과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마들렌 여사의 활약이 서로 다른 매력으로 이야기의 재미를 더해준다.

실은 워낙 판타지 요소를 즐기지 않는 나인지라 마들렌의 활약보다는 두 소녀의 우정 이야기가 참 예쁘고 뭉클했다.

책을 읽고난 후 한동안 이 책을 읽은 지인들 사이에서 가노코와 스즈의 '코 나부나부 놀이'와 '다회 놀이'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우리도 코 나부나부를 해보면 어떨까 하외다. 그거 좋은 생각이외다. 나부나부를 하면 더 친해질 것 같지 않소이까. 동감이외다.)

 

간만에 맑고 순수한 이야기에 마음이 정화되었던 책.

'문경지우'를 꿈꾸게 되었던 책.

우리 강아지와 서로 통하는 언어가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보게 한 책.(^^;)

 

 

"이건 뭐라고 읽어?"

"문경지우刎頸之友."

"무슨 뜻인데?"

"사이가 아주 좋은 친구라는 뜻이란다."

"처음부터 그냥 '사이가 아주 좋은 친구'라고 하면 안 돼?"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일부러 어려운 말을 쓰는 편이 더 멋있거나, 하고 싶은 말이 더 잘 전달될 때도 있거든."

 

(……)

 

말을 알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문경지우'라는 말을 알게 된 지 일주일 뒤, 가노코는 진짜 '문경지우'를 만날 기회를 얻었다. (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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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식당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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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초난난』을 읽고 작가의 글에 반해 바로 다른 책도 찾아 읽었다.

(오가와 이토의 소설은 국내에 두 권 소개 되어 있고, 또 다른 한 권이 곧 출간 될 거라고 들었다. 이제 막 작가의 글에 반했는데 더 찾아 읽을 책이 많지 않다는 것은 슬픔이기도 하고, 앞으로 작가의 신간을 늦지 않게 발맞추어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기쁨이기도 하고...)

 

이 책은 어느날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하니, 남자친구가 돈이며 조리도구며 집 안의 모든 것을 들고 사라져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다. 졸지에 모든 것을 잃은 그녀는 오랫동안 서먹하게 지내온 엄마의 집으로 들어가 자기만의 식당을 열고, 음식을, 마음을 요리한다.

 

『초초난난』에서도 음식에 관한 뛰어난 묘사를 살짝 엿볼 수 있었기에, 이 책에서는 더 본격적으로 음식 이야기를 만날 수 있겠구나 기대했다.

그리고 이 책은 내 기대 이상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감동을 안겨주었다.

음식에 관한 맛깔스러운 묘사는 물론, 음식을 대하는 자세에 관한 감탄할 만한 문장들, 마지막까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토리가 책 잡은 손을 멈추지 않게 했다.

 

(내 기준으로) 늘 먹고, 가끔은 요리하고, 아주 가끔은 만들어서 먹이고 하는 행위가 더 없이 숭고하게 다가온 책.

정성스러운 마음 가득 담아 사랑하는 이들에게 먹이고 싶은 마음 들게 한 책.

 

오늘 점심에 내가 먹은 한끼 식사에는 얼마나 큰 엄마의 정성이 담겨 있으며, 얼마나 많은 농사꾼과 어부와 태양과 땅과 빗물의 수고가 담겨 있을까.

음식, 물질로서의 그 자체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숭고한 노동과 정성을 생각할 때, 음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늘 잊지 말아야 할 것. "감사히 먹겠습니다~~!!"

 

 

_ 장작패기를 마친 구마 씨와 함께 점심으로 우동을 먹은 후, 나는 아까 따온 산포도를 정성껏 씻어서 조려 발사믹 식초를 만들었다.

완성되는 것은 12년 후. 어떤 맛으로 태어날지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어쩌면 도중에 실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12년 후에도 나는, 이렇게 지금과 같은 신선한 마음으로 주방에 서 있고 싶다. 그런 강한 바람을 담아서 나는 신중하게 발사믹 식초의 원액을 소독한 병에 담았다. (69-70)

 

_ 지금 이 요리를 만들기 위해 살아 있던 닭 한 마리가 희생된 것이다.

그러니 목숨을 내어 준 토종닭을 위해서도, 그리고 할머니를 위해서도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를 하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했다. (88)

 

_ 거식증 토끼가 왔다거나, 오늘은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건 손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런 것이 요리에 영향을 미친다면 프로로서 실격이다. (129)

 

_ "초조해 하거나 슬픈 마음으로 만든 요리는 꼭 맛과 모양에 나타난단다. 음식을 만들 때는 항상 좋은 생각만 하면서, 밝고 평온한 마음으로 부엌에 서야 해."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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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 - 지금 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당신에게 주고 싶은 시 90편 딸아,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 1
신현림 엮음 / 걷는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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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엄마 마음.

 

신현림 시인이 그런 엄마의 마음으로 엮은 시선집이다.

이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야 할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들을 모아, 이 세상 모든 딸들에게(물론 아들에게도) 전하는 책.

프롤로그를 읽다가, 그만 목이 메였다. 엄마의 사랑이란 그런 거다.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울컥하게 하는. 절로 눈물을 떨구게 하는...

 

이것만은 알아주렴. 딸아, 네가 상처받고 아파할 때 엄마도 같이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결국은 네가 짊어질 인생이기에 말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음을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덜 상처받고, 덜 아프기만을 바라지는 않아. 좀 상처 입으면 어때, 좀 아프면 어때, 까짓것 다시 일어나면 되지 뭐, 하면서 훌훌 털고 나아가는 딸이길 바란단다. 그렇게 괴로움을 용감하게 뛰어넘는, 그래서 온몸으로 인생을 껴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단다. _ '프롤로그'에서

 

'그렇게 괴로움을 용감하게 뛰어넘는, 그래서 온몸으로 인생을 껴안는 사람이 되'는 데 든든한 동반자가 될 시들이 바로 이 책에 담겨 있다.

이 시집을 읽는 나의 마음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포근해졌다.

마치 나의 엄마가 딸인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차곡차곡 적어두었던 공책을 선물 받은 것처럼, 이 안에서 느껴지는 엄마의 사랑에 가슴 뭉클했다.

얼마나 좋은 시들만 담았을까. 자식에게 좋은 것만 먹이고 입히고 싶은 엄마의 심정으로 시들을 골랐을 게다.

책을 읽는 내내 그 시들 뒤에 숨어 있는 '엄마의 마음'이 느껴졌다. 시들이 온기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따스하고 풍요롭고 감사한 이 시집은 엄마의 정성으로 차려진 무공해 밥상 같은 기분.

한 입만 떠 먹어도 몸이 튼튼해질 것 같은 그런 기분, 아니, 한 줄만 읽어도 마음이 튼튼해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 절로 드는 책.

엄마의 마음이니, 때로는 '잔소리'처럼 느껴지는 시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잔소리도 이렇게 시로 들려준다면 귀 기울여 듣게 될 것 같다.

 

"넌 뭐 해보지도 않고 못 하겠다고 해! 어서 해 봐!"라고 야단치는 대신 이런 글을 읽어준다면...

 

길은 가까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헛되이

먼 곳을 찾는다.

 

일이란 해 보면 쉬운 것이다.

그러나, 시작도 안 하고

먼저 어렵게만 생각하기에

할 수 있는 일들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_ 맹자

 

이런 '잔소리'라면 자꾸자꾸 듣고 싶을 것 같다.

그렇다고 마냥 교훈적인 시만 담긴 것은 아니다. 소녀의 감성을 더욱 충만하게 해줄 시, 인생의 아픔을 맛볼 수 있게 해주는 시, 가슴 가득 사랑을 느끼게 하는 시...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인생의 희로애락 모든 순간들에 딸에게 건네고 싶은 시편들.

 

여행길에 이 시집을 읽었다. 함께 여행하는 이에게 여기 실린 시 몇 편을 읽어주었다. 그만큼 나누고 싶은 시들이었다.

이렇게 가슴 벅찬 엄마의 사랑을 나 혼자 받기가 아쉬웠기에.

허기진 마음으로 떠나던 여행길이 이 시집으로 인해 출발부터 풍요로웠다.

나는 앞으로도, 외롭고 힘들 테면 시를 읽을 테다. 이 책에 실린 시들도 좋겠다.

 

내가 읽고 (혹시 있게 된다면) 나의 딸에게도 물려주고 싶은 시집이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몰아다가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_ 도종환 '쓸쓸한 세상'

 

 

 

떠나라

낯선 곳으로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그대 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단 한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대 떠나라

 

아기가 만들어낸 말의 새로움으로

할머니를 알라뿌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그리하여

할머니조차

새로움이 되는 곳

그 낯선 곳으로

 

떠나라

그대 온갖 추억과 사전을 버리고

빈주먹조차 버리고

 

떠나라

떠나는 것이야말로

그대의 재생을 뛰어넘어

최초의 탄생이다 떠나라 _ 고은 '낯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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