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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7
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최근, '사랑'이라는 주제로 나를 주체할 수 없이 울려버린 한 권의 책과 한 편의 영화가 있다.
영화는 장이모우 감독의 <山楂树之恋(산사나무 아래)>,
책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영화 얘기 할 거는 아니고, 그냥 꺼내봤다. 지금 내 머릿속에 온통 산사나무뿐이라! "我是静秋! 我是静秋!" ㅠ_ㅠ)
평소에 지인의 추천이나 입소문으로 접하게 되는 책이 많은데, 이 책 <시라노>는 어째서 여태껏 내게 추천해주는 이가 없었는지 의아하다.
'모태 짝사랑' '짝사랑의 달인' 등등으로 자칭하는 내가 최고로 치는 짝사랑 소설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인데, 그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짝사랑으로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게 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내 짧은 독서 경력으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후 최고! 지금은 베르테르보다 더 마음에 품은 책!
어쩌면 시라노에게서는 베르테르에게서 느끼지 못한 또다른 '동병상련'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실린 작품 해설 제목은 '잘생긴 외모가 아니라 침묵과 헌신으로 지켜낸 사랑'인데, 바로 그 점, '잘생긴 외모가 아니라'는 이 부분이 나에게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시라노의 심정을 더욱 절절하게 이해하고 마치 나의 고통인 듯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책 표지 그림처럼 기형적으로 거대한 코를 가진 인물이다. 아마, 훤칠하게 잘생긴 큰 코가 아니고 정말 괴이하리만치 컸던가 보다. 어느 누구라도 시라노 앞에서 코 얘기를 꺼냈다가는 '큰코 다칠 것이다'! (아, 위험한 표현이었다!)
코가 커서 사는 데 불편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여인을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사랑하는 그녀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없다. 이처럼 추한 얼굴을 한 자신을 그녀가 받아주리라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던 중 그녀가 다른 청년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알고 만다. 심지어는 아주아주 잘생긴 청년을! 자, 이제는 시라노 위에 내가 겹친다. 마음에 둔 남자가 아주아주 예쁘고 몸매마저 우월한 모델 같은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평소에 마시지도 않는 술을 사와 혼자 자취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홀짝홀짝 마셨다. 그 '선남선녀' 커플을 생각하며, 나 따위가 언감생심 못 올라갈 나무를 바라봤군 자책하면서 홀짝홀짝, 훌쩍훌쩍. 자, 이제는 다시 시라노.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 시라노, 그가 아주 잘생겼다는 말에 모든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그와 겨뤄볼 여지가 없는 것이다. 시라노는 나처럼 '홀짝홀짝, 훌쩍훌쩍' 하는 대신 '끼적끼적' 한다. 그녀에게 닿을 연애편지를... 아니,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데 연애편지를 쓴다고? 쓴다, 그 남자를 위해. 그 남자를 통해 그녀에게 전해질, 원래는 시라노의 언어였으나 그녀에게 가 닿을쯤엔 다른 남자의 언어가 되어 있을 사랑의 문장들을. 바보 같은 시라노! 그냥 그녀에게 그 남자는 입 안이 텅 빈 공터 같은, 그녀가 원하는 시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라고는 애당초 할 줄도 모르는 남자라고 말해버리지! 시라노는, 그녀의 사랑을 지켜준다.
바로 이런 시라노가 나를 엄청 울려버렸다. 그녀의 발코니 아래에서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로 가장해 대신 사랑을 말해주는 시라노. 그 절절한 사랑의 언어가 그녀의 마음에 닿을 때는 다른 남자의 얼굴로 둔갑해 있지만 비록 어둠 속에 숨어서라도 그녀에게 사랑을 말할 수 있음에 가슴 벅차한다. 바보 시라노! 비록 그녀가 다른 남자를 껴안고 입 맞출지라도 그녀가 입 맞추는 것은 방금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간 그 언어들이라며 홀로 위로한다. 바보 시라노, 바보 시라노!! 그리고 그녀를 지켜주는 그 사랑을 평생 이어간다. 시라노의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바보, 바보 같은 시라노…… ! 하지만,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귀한 사랑을 평생 동안 지켜온 시라노가, 나는 부럽다. 설령 평생 바보가 될지라도 그런 사랑 해볼 수 있다는 것, 그 또한 엄청난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니니까.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시라노의 숭고한 사랑. 나는 홀짝홀짝, 훌쩍훌쩍 하고 몇 해 뒤에는 완전히 그 사람을 잊었지만, 시라노는 죽는 순간까지 그 여인을 심장에 품고 눈 감을 수 있었으니…… 행복한 사람, 행복한 시라노!
나는 '짝사랑'이라는 주제에 예민한 편이어서 이 책의 '짝사랑' 요소를 깊게 흡입하며 지나치게 거기 열중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짝사랑'이라는 소재를 빼놓더라도 이 책은 요리 보고 조리 봐도 누구에게든 추천하고 싶은 명작이라는 생각이다! 시라노가 남의 연애편지를 괜히 대신 써줬겠는가? 뛰어난 명필가 시라노의 손끝에서 탄생한 아름다운 사랑의 속삭임들이 책장 가득 흘러 넘친다. 우리 시라노 씨는 명문장뿐 아니라 유머에도 일가견이 있다. 책 군데군데 풋ㅡ 웃음이 터져나오도록 재밌는 언어 유희와 장면들이 이 책의 재미를 한층 끌어올려준다. 시라노 못 만나보고 죽어 하늘나라 갔다가 누군가가 "내가 생전에 시라노라는 책을 읽었는데……" 하며 소개해 준다면, 하늘나라에서 땅을 칠 뻔한 책. 나 다시 태어나 시라노를 읽을 테야!! 절규하려나? (좀 오버 했나? 뭐, 그만큼 내 마음에 큰 파장을 몰고 오고, 나의 큰 사랑을 받은 책이므로!)
시라노 이야기는 작년에 개봉한 국내 영화 <시라노; 연애 조작단>을 통해서도 만나볼 수 있고, 곧 소설판 『시라노』로도 출간된다. 나는 '삼색 매력'의 시라노를 모두 만나본 운 좋은 사람. 기회가 되면 외국에서 만들어진 시라노 관련 영화들도 볼 수 있게 되길! '시라노'는 앞으로 내 삶에서 지워지지 않을 소중한 키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