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 정신의 체계, 자유와 이성의 날개를 활짝 펼치다 인문고전 깊이읽기 15
김준수 지음 / 한길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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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저자가 쓴 사실상 최초의 `체계적` 헤겔 입문서. 헤겔을 알고 싶다면 번역서보다는 일단 이 책부터 읽을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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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논리학 1 불교 논리학 시리즈 1
데오도르 체르바츠키 지음, 임옥균 옮김 / 경서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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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벌번역만도 못한 번역. 차라리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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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1234 2024-09-12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만드신 분의 성의와 지식을 평가할 수준이 되시나요?
 
용수의 중관사상 여래 동양철학 시리즈
나카무라 하지메 지음, 남수영 옮김 / 여래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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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사상의 표준적 입문서라 할만 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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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이 말은 성철스님이 조계종 종정으로 취임법문으로 유명한 구절입니다만 사실 성철 스님이 최초로 한 말은 아니고 선가禪家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말입니다. 이 말의 해석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가능하다고 봅니다만 제 나름대로 이 말의 의미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일단 가장 단순하게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AA이다라는 동일률로 먼저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산은 산이기에 산이고 물은 물이기에 물이다라는 논리죠. A=A이므로 산을 단지 산으로 물을 단지 물로 말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으로부터 우리는 동일한 어구의 반복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사실 저 말은 다음과 같은 좀더 긴 문장에서 따온 말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렇게 구성되는 전체 문장의 마지막 구절만 따온 것이죠. 먼저 처음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할 때의 그것은 동일률의 논리에 기반합니다. 그런데 동일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한 객체가 항상 그러하다라는 사태를 전제합니다. , 객체와 그 객체를 바라보는 주체의 동일성을 전제해야만 성립하는 것이죠. 대상을 분별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은 처음 인식했을 때의 그 양태와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 그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의식도 항상 일정해야 하죠. 대상A가 갑자기 대상B로 바뀐다던가 하는 현상이 생긴다면 산은 산일수 없고 물도 물일수 없는 것이죠. 그리고 이와 같은 동일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타 대상과의 구별이 가능해야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주체와 객체간의 이원적 구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내가 바라보는 것이 내 마음 속의 것인지 나와는 무관한 내 밖의 것인지 혼동되면 여기서 동일성에 기반한 동일률은 더 이상 가능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에 기반한 세계가 바로 이런 세계입니다. 상식적이면서 일상적인 현상계 그리고 동일률, 모순률, 배중률과 같은 형식논리와 인과율이 지배하는 세계인 것이죠. 그리고 한번 이렇게 어떤 대상을 AB로 규정하게 되면 그 대상은 그 개념으로 고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체로서의 AB는 늘 변화하는 과정에 놓여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것처럼 만물은 늘 유동하는 것이죠. 그런데 AA라고 부르는 순간 AA(라는 개념)으로 고정됩니다. 말이나 개념에 의해 우리는 A를 분별할수있게 되었지만 그순간 실체로서의 A는 잊혀지게 되는 것이죠. 때문에 우리는 이런 일상적 분별력으로서의 현상계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이 현상계의 배후나 본질을 캐묻지 않을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시도는 다양한 지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죠. 비단 철학이나 종교에서만 이런 본질인식의 추구를 한 것이 아니라 과학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20세기물리학의 하나인 양자역학과 같은 경우죠. 양자단위의 극소세계에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세계에서의 물리학 다시말해 고전물리학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습니다. 양자의 세계는 양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알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측정대상과 측정행위간의 명백한 분리도 여기서는 불분명해집니다. 대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대상에 영향을 줄수있기 때문입니다.

 

앞서의 일상적 분별력에 기반한 의식을 표층의식이라고 한다면 일상적 분별이 불가능한 무분별의 세계를 바라보는 의식을 심층의식이라고 합니다.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하게는 대상의 분별가능성에 있습니다. 일상적 의식으로는 서로 다른 것으로 인지되는 AB는 심층의식의 관점에서는 무분별 혹은 무분절적인 일자나 전체로서의 실체일 수 있습니다. 현상적이거나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AB는 다르지만 그 본질을 들여다보니 사실은 구분되지 않은 동일한 실체라는 시각이죠. 표층의식이 현상을 보는 의식의 상태 혹은 관점이라면 심층의식은 대상의 이면이나 본질을 들여다 보려는 의식입니다. 표층의식으로 봤을 때 산은 산일 뿐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산이 산이 아닐 가능성을 이 때 보게 됩니다. 산이 물일 수도 있고 물이 산일 수도 있을 가능성 혹은 잠재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지질학적 시간대로 보면 이 말은 액면 그대로 사실이죠. 산은 강이나 호수 혹은 바다였고 혹은 바다가 융기해서 산이되는 경우는 흔하니까요) 이렇게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로 이행하게 됩니다. 현상적 분절의 상태에서 본질적 무분절의 상태로 이행한 것이지요. 현상의 배후 혹은 기초적 본질로서의 무분절 혹은 상호관계성으로의 이행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무분절의 상태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무분절만으로는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죠. 현실화되지 않는 잠재성만으로는 현상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체로서의 일자만으로는 세계는 우리에게 인식될 수 없는 물자체일 뿐입니다. 흔히 불교를 모든 것을 공으로만 보는 허무적이며 명상적인 종교나 철학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불교 특히 화엄종에서는 다즉일多則一과 동시에 일즉다一則多를 이야기합니다. 하나인 동시에 전체이고 전체인 동시에 하나인 상호연관으로서의 연기緣起를 말하는 것이죠. 때문에 불교를 정적이고 허무적으로 보는 관점은 편협한 관점일 수 있습니다. 일자에서 다자로의 이행 역시 불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불가분한 요소이기 때문이죠. 스피노자의 실체론도 이와 유사합니다. 전체로서의 자연을 자기원인으로서의 일자로 보고 세계의 다수성을 이 일자가 분화한 다양한 양태로 보는 관점 역시 전체로서의 무분절적 일자에서 분절적 다수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논리입니다. 헤겔의 변증법도 이와 유사하죠. 즉자는 부정을 통해 대자화 되고 다시 이를 부정함을 통해 즉자대자가 됩니다. 일자로서의 즉자는 부정을 통해 분별적 대상이 됩니다만 이는 다시 부정,지양되어야만 비로소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절대지로 고양될 수 있는 것이죠. 주자의 성리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주자가 쓴 <태극도설>을 보면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세계의 참된 실재 혹은 본질로서의 무극은 현실적 다수성으로서의 태극과 같다라는 말이죠. 여기서도 전체로서의 하나에서 현실적 세계로서의 다수성으로의 이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리학이 정치이념으로서 보면 조선의 건국이념으로 고려시대의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사상이긴 합니다만 사실은 철학적으로 보면 지극히 불교적인 이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성리학 다시말해 송대의 신유학의 성립배경자체가 고전의 자구해석에만 그쳤던 훈고학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의 존재론을 도입하면서 유교를 혁신했던 것인데 그 과정에서 이처럼 불교의 세계관과 존재론을 수용했던 것이죠.

 

결국 정리해보면 성철스님이 말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의 의미는 다음의 세 단계를 거치는 것과 같습니다. 1. 산은 산이고 물은 물(현상적 대상으로서의 산과 물) 2.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산과 물의 본질로서의 보편성은 하나 혹은 전체로서의 일자에 있다) 3.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전체로서의 일자성을 깨달은 뒤에 다시 돌아온 세계) 이런 과정을 거친 뒤의 그 산과 물이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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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일본사상>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1980년대이후 일본 사상의 변천사를 다루고있는데
그중에서도 흥미로운 부분은 2000년대 일본사상은 아즈마 히로키의 독무대이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저자의 평가에 의하면 아즈마히로키는 오늘날의 (일본) 사상이 더이상 비판적 이데올로기로서나 혹은 참여적 사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현실을 다만 감수하고 관찰하는 역할에만 그친다고 보고 이러한 변화한 현실에 사상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변화된 현실이 설정한 새로운 게임의 규칙에 사상을 변화시키는 시도를 한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이론이나 사상도 세상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하기에 누구도 읽지 않는 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읽힐 수 있는 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아즈마 히로키는 2000년이후 일본사상을 주도할수 있었다라는 이야기 입니다. 저자가 생각하는 재설정된 오늘날의 게임규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재설정된 게임보드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어쨋든 승패가 확실히 결정되는 것, 둘째는 어떤 구체적인 성공과 결부되는 것입니다. 첫번째 조건을 통과하지 않으면 곧바로 '상대화'에 휩쓸리고 맙니다. 그렇다고해서 2000년대의 사상이 예컨대 1980년대의 오타쿠가 그랬던 것처럼 취미 판단의 특수성(센스)이나 축적한 지식이나 정보의 많고 적음을 경쟁하지는 않습니다. '센스가 좋다'라든가 '다른사람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라든가 '알고 있는 것'의 빠름이나 늦음 같은 것은 오히려 거기서는 모멸의 대상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규칙'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000년대의 사상은 플레이어들에 의해 널리 '공유'된 필드(주로 오타쿠계문화/하위문화)와 어떤 사람에게도 거의 공통된 문제(사회나 인터넷이나 공공성등)를 상대하게 됩니다. ...........'현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사상'은 그에 대항하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아니라 같은 도식에 감히 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단순한 심심풀이 놀이가 되어 버립니다. 2000년대의 사상이라는 게임은 이제 유희일수 없으며 그것이 어떤 의미든 진지한 경기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게 아니라면 사람들이 왜 이제와서 일부러 '사상'같은 걸 하려고 하겠습니까?"  (<현대일본의 사상> 사사키 아쓰시 291~2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최근 논란이 된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과 관련된 일들이 생각나더군요. 비단 사상뿐만 아니라 같은 대중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한참 인기있는 아이돌위주의 댄스음악이 아니기에  아무리 노래를 잘부르고 가창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대중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지 못해왔던 가수들이 소위 서바이벌이라는 포맷을 도입하여 예능프로그램을 만들어 보여주니 전에 없던 폭팔적 관심을 받게 된 사건말입니다. 이는 위에서 말한것처럼 "재설정된 게임보드"의 규칙에 음악을 도입하고 이를 통해 승패가 확실히 갈리면서 "구체적 성공과 결부"되는 방식을 정확히 적용한 케이스에 해당합니다. 예를들어 이전까진 김범수나 김건모의 가창력이나 음악적 해석능력이라는 것들은 대중들사이에서 "공유된 필드"에 해당하는 사항은 아니었고 도리어 이렇게 공유되지 않은 필드를 '나혼자'펼쳐보이면 '허세'라는둥 모멸이나 핀잔을 받을 뿐이었지만 이러한 사상 혹은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공유되지 못한 필드들이 서바이벌이라는 게임보드의 규칙에 오르는 순간 비로소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케이스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들이 교차하게 되면서 다시한번 씁쓸함을 느끼게 되는게 뭐냐면 소위 지식혹은 예술자체가 가진 탁월함과 그것의 사회적 수용은 서로 별개의 문제일수 있고 때로는  양립불가능할수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후자를 위해서 전자는 타협을 하거나 절충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할수밖에 없게 됩니다.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가수들이 그들의 음악적 자존심을 버려가면서까지 출연을 결정하였다면 바로 이런 '현상황'에 대한 절충이요 타협이라고 볼수있는것도 이 때문이지요. 하물며 대중음악내부에서조차도 사정이 이럴진데 그렇지 않아도 독서인구가 갈수록 줄어들고 소위 거대서사에는 관심을 상실한듯한 오늘날의 상황에서 사상이나 이론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겠지요. 원래 아즈마 히로키는 아사다 아키라나 가라타니 고진이 만든 <비평공간>이라는 평론지를 통해 등단했던 인물입니다만 후에 그가 이들과 결별했던 이유도 이러한 새로운 게임보드의 규칙의 수용문제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존재론적, 우편적 -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과 같은 본격적인 철학이나 문예이론서로 글쓰기를 출발했던 그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같은 대중들이 쉽게 공유할수 있을만한 영역으로 타켓을 변경한 것도 이러한 배경이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고요.  



그러나 저는 사상이나 철학은 '비판'이라는 성격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는 현실과의 타협이나 절충보다는 사상그자체의 탁월함이나 진리성으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정치도 마찬가지라고 보는데요. 다만 비판이라는 작업이 현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다수대중들과의 접점을 찾을 수밖에 없는데 또 그러기 위해서 때로는 아즈마히로키나 나는 가수다와 같이 새로운 게임보드의 규칙을 수용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네요. 사상이나 예술자체가 가진 진리를 절충시키지 않으면서 현실의 변화를 동시에 받아들일수 있는 방법이 오늘날 있을까요? 저로선 이에 대해 뚜렷한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 않아보이네요. 마치 종교재판에서 자신의 신념인 지동설을 포기함으로써 목숨을 건진 갈릴레이가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던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이게 다 원래 현실이라는 것은 언제나처럼 영원히 풀리지 않는 아포리아로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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