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진씨는 맑스주의는 그의 책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1장에서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마르크스 사상 자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잘못된 독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특히 자본론에 대한 이해의 오류를 이야기하면서 크게 논리역사주의와 신리카도주의의 형태로 나타나는 오류를 지적한다.
먼저 논리역사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을 살펴 보겠다.
논리역사주의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전통과 함께 오래된 그리고 '정통'으로 간주되어 온 마르크스의 방법에 대한 해석"이라고 그는 말한다. 논리역사주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고 보는데, 1) 자본론 제 1권 제 1편 모두 상품은 단순상품생산의 상품이다. 2) 상품가치의 실체인 추상노동은 초역사적, 생리학적 범주이다. 3)가치법칙은 단순상품생산의 법칙이며 자본주의의 잉여가치법칙과 구별된다. 4)'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논리는 단순상품생산의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으로의 역사적 이행에 대응한다. 5) 일반적으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향의 논리적 전개는 현실의 역사발전에 대응한다. 로 요약될수있다고 본다. 이런 논리역사주의는 엥겔스의 자본론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됬는? 뒤이어 레닌이나 스탈린 그리고 심지어 만델이나 로스돌스키등의 트로츠키계열의 학자들 마저도 취하는 오류라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논리역사주의의 오류 중 하나는 맑스의 1편의 단순상품생산 편을 전 자본주의적이고 초 역사적인 논리적 추상으로서 간주하고 자본론의 서술이 이러한 추상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체에로 상승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논리적 전개는 현실에 있어서 역사발전에 즉 사적 유물론에 대응하는 것으로 볼수있다는 관점이다. 그런데 정성진씨는 정작 맑스자신은 이러한 논리역사주의를 주장한 적이 없다고 한다. 특히 그의 <정치경제학비판 요강>을 보면
"경제학적 범주들은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규정적이었던 순서에 따라서 차례로 배열하는 것은 실행이 불가능하며 또 오류다. 오리려 그 순서는 그것들이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서 상호 간의 관계에 의하여 결정되며 이 관계는 자연그대로의 순서에 따라 나타나는 것 또는 역사적 발전의 계열에 상응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와 같은 구절들에서 발견할수 있다는 것이다. 아서Arthur와 같은 학자들은 엥겔스가 <요강>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와같은 논리역사주의적 오류를 범했다고 이야기한다고 한다. 또한 <자본론>의 단순상품생산편도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상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상품이라는 것인데 정성진은 그 근거로 <자본론>의 다음 구절을 인용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서 나타나며, 개개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는 상품의 분석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구절 그대로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내의 '상품'이지 논리적이고 추상적이며 초역사적인 '상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성진은 <자본론>의 이 '상품'이 자본주의의 특수한 상품이고 역사적인 상품분석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상품으로 시작하는 <자본론>의 서술방식 자체가 논리적이지 않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분업, 노동, 재화가 아니라, 즉 형태 규정을 무시한 초역사적 범주가 아니라 특수역사적 형태인 상품에서부터 논리적으로 상향 전개하는 방법으로 서술했다." (25쪽)
즉 그는 맑스의 <자본론>의 서술방식자체가 논리적인 체계로 추상에서 구체로 향하는 상향식 전개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만큼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가 논리역사주의와 다른 점은 바로 1편의 상품이 초역사적이지 않고 바로 자본주의적 상품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데 있다. 또 그는 자본주의의 가치법칙과 단순상품생산이 온전히 작동하려면 자본주의라고 하는 현실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인용한다.
"가치가 교환에 선행하여 주어진 실체가 아니라 교환형태 속에서만 또 교환형태를 통해서만 발전하는 것이라면, 가치가 형태와 내용에서 하나의 현실이 되고, 가치의 논리가 양적으로 규정적인 상품생산법칙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경제의 운동에 강제하게 되었음이 입증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할 때에만 가치는 완전히 발전할 수 있다." (아서Arthur "Engels as Interpreter of Marx's Capital" Rethinking Marxism)
"가치법칙은 그 완전한 발전을 위해 대공업생산과 자유경쟁 사회, 즉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전제한다." (맑스,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
논리역사주의가 이처럼 초역사적 단순상품생산을 이야기하였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1권과 3권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점 ,즉 "가치론과 생산가격론의 모순 이른바 전형문제"등과 같은 모순들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가치법칙이 통용된 시대를 자본주의가 아닌 단순상품생산 단계에 한정하고, 경쟁자본주의 단계에는 생산가격론 및 잉여가치법칙,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는 독점가격론 및 최대한 이윤의 법칙 또는 독점이윤의 법칙이 지배하게 된다는 스탈린주의 경제학 체계가 성립할 수 있게 된다."고 그는 본다. 특히 가치법칙이 사회주의에서도 작동한다고 보는 스탈린주의적 시각은 "논리역사주의의 정점"이라는 것이다.
그는 논리역사주의에서처럼 가치법칙이 보편이고 초역사적인 경제법칙이 아니라 "가치법칙 자체가 잉여가치법칙"이다라고 말한다. 맑스의 다른 여러 개념들 예컨대 화폐, 가격, 이윤, 임금, 지대 및 이자 등과 같은 범주들도 이와같은 가치법칙에서 도출되는 범주라는 것이다.
또 논리역사주의는 1장에서 가치의 실체라고 규정한 추상노동도 초역사적 범주로 규정한다고 한다. 초상노동을 초역사적 범주로 생리학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사실 고전 정치경제학의 특징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추상노동이 특수한 것임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정성진은 이야기한다.
"리카도는 상품의 상대가치(혹은 교환가치)가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 노동의 특징은 더 이상 검토되지 않는다. ...리카도는 형태, 다시 말해서 교환가치를 창조하는 혹은 자신을 교환가치로 드러내는 노동의 특징, 즉 노도의 성격을 검토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이 노동의 화폐와의 관련성 혹은 그것이 화폐의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다. ....처음부터 그는 가치량에만 관심을 가진다. 즉, 상품의 가치의 양이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양에 비례한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가진다. (MEW, vol31 강조는 맑스)
이처럼 추상노동도 초역사적 범주가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추상노동'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소외된 노동, 강제된 노동, 끝없는 노동"인 것이다.
한편 그는 "마르크스의 가치형태 전개는 상품에 내재한 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의 '내재적 자기초월'과정으로서의 변증법적 전개"라고 말하면서 논리역사주의가 <자본론> 1권 2편에 있는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가 단순상품생산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역사적 전화라고 보는 점을 비판한다. 그는 이 부분 즉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는 "C-M-C 와 M-C-M의 형태적 및 내용적 구별"에 의해서 이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라는 마술, M-C-M' 의 모순은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가 전제되는 것으로부터 이미 여건으로 되어있던 노동력 상품을 연구대상에 도입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말해 그것은 "우리들의 눈앞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이지, 역사적 전화같은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행'은 "표면으로부터 심층으로의 이행"과같은 이론적 서술방식에 기인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마르크스는 단순유통을 부르주아적 총생산과정의 추상적 표면이며 이는 심층에 존재하는 과정인 산업자본의 단순한 현상형태"라고 설명한다. 즉 단순상품생산과 자본이전의 화폐와 같은 설정은 심층으로 이행하기 위한 표면으로 <자본론>의 1장에 서술되어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실제 자본주의의 역사적 이행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에서는 유통의 자본으로의 역사적 이행을 문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순유통은 오히려 부르주아적 총생산과정의 추상적 부면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규정에 의해 그 배후에 놓인, 즉 그것으로부터 결과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낳는 더 심층적인 과정-산업자본-의 계기, 단순한 현상형태라는 사실을 스스로 실증하는 것이다. (MECW , vol 29)"
그밖에도 그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에서 나오는 '부정의 부정'도 역사적 발전과는 무관한 이론적 서술일 뿐이라고 한다. 이처럼 그는 <자본론>이라는 저작을 "특수역사적 사회인 자본주의를 논리적으로 해명한 것이며, 그 논리 전체에 따라 자본주의의 역사성을 논증한 과학이라는 성격을 가진다"라고 본다. 또한 "자본주의의 순수한 모습을 논리적 방법으로 해명하는 것과 자본주의의 발생,발전, 소멸 과정을 연구하는 것은 서로 완전히 다른 연구방법이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자본론>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사고 속에서 재구성하는 사회경제 범주들의 체계적 전개"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계속해서 그는 신리카도주의를 비판한다. 신리카도주의는 보르트키에비치(L. Bortkiewicz)나 스라파 등과같은 인물들에 의한 맑스주의 해석이다. 신라카도주의는 맑스의 경제학을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의 계승으로 파악하고 맑스의 가치법칙은 "본질적으로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동일하다"고 본다고 말한다. 다만 맑스주의 경제학은 잉여가치법칙의 발견 그리고 이에따른 자본주의의 비판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돕(Dobb)은 "맑스와 고전 정치경제학의 본질적 차이는...잉여가치론이다'"라는 해석이 그래서 도출된다.
이에 대해 정성진씨는 가치론에서 고전 경제학과 맑스주의 경제학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리카도주의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리카도는 교환가치가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가치의 본질에만 관심을 가졌으나 맑스는 리카도가 제가하지 않은 문제, 즉 왜 가치가 필연적으로 화폐형태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고전 경제학의 한계는 "가치를 교환가치로 나타나게 하는 가치형태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맑스는 그의 가치형태론과 물신성 비판을 통해서 가치의 수량분석에만 그치는 고전경제학을 뛰어넘어서 "가치의 질적 분석"을 했다고 본다.
"나의 책에서 가장 요긴한 것은 ... ① 바로 제 1장에서 강조된, 노동이 사용가치에서 표현되느냐 가치에서 표현되느냐에 따른 노동의 이중성, ② 잉여가치를 그 특수한 형태들인 이윤, 이자, 지대 등과 독립해서 취급한 점이네 "(<자본론에 관한 서한집> 중원문화사. 160p. 강조는 맑스)
그런데 신리카도주의는 맑스의 가치론에서는 자본주의의 비판의 성격을 찾아볼수 없고 "노동과 노동력개념의 구별 이후에 , 즉 잉여가치 범주의 도입과 함께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은 논리역사주의와 마찬가지로 초역사적인 추상노동 규정이라는 성격을 신리카도주의도 가지고 있다고 정성진씨는 지적한다. 이처럼 신리카도주의는 노동을 초역사적 범주로 보기 때문에 "가치를 시장 범주, 분배 범주로만 간주하며, 가치를 부의 형태 자체로 파악하지 못"하게 되어 부를 창조하는 노동의 자본주의적 특수성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추상노동을 자본주의에 간접적인 것으로 신리카도주의는 보는데 이는 "맑스의 노동개념을 오해"한 것이라는 것이다.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즉각적으로 사회적인 성격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라고 보았고 지적한다. 드 브로이(M, De Vroey)로 대표되는 이른바 추상노동학파는 "추상노동의 간접적으로 사회적인 성격만 강조하고 추상노동에 고유한 사회적 관계의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드 안젤리스(De Angelis)같은 학자는 비판한다고 한다.
한편 보르트키에비치가 발견한 소위 '전형문제'도 이와 동일한 문제점을 자기고 있다고 한다. '전형문제' 즉 맑스가 가치를 생산가격으로 전형하는 과정에서 산출만 전형하고 투입을 전형하지 않아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형된 후에도 가치의 총합과 가격의 총합이 같고 잉여가치의 총합과 이윤의 총합이 같아야 한다는 명제중 하나는 성립하지 않게 된다" 는 문제점을 맑스주의 경제학은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전형문제로 인해 최근 '불균형론' 이나 '시점 간 단일체계(Temporal Single System, TSS)'론이 대두되기 까지는 맑스의 가치론은 폐기되어 왔다는 것이다. 스티드만(Steedman)같은 신리카도주의학파 학자는 "생산기술조건과 실질임금이 주어지면 가치개념을 우회할 필요없이 가격과 이윤율을 직접 도출할 수 있으므로 가치에서 생산가격으로의 전형은 불가능할 뿐더러 불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프리맨(A, Freeman), 카르체디(G, Carchedi), 맥글론과 클리먼(McGlone & Klimann)등과 같은 '불균형론자'들이나 '시점간 단일체계론'자들이 나오면서 "맑스에게 '전형문제'가 존재한다는 신리카도학파의 전제 자체를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투입'시점의 가격과 '산출'시점의 가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신리카도학파는 양자를 동일시하여 '생산이 시간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현실에서는 "자본가들이 먼저 투입을 구매하고 재화를 생산한 뒤 그것을 투입과는 다른 새로운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사실이며 맑스의 전형은 이러한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 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르트키에비치는 "하나의 경제에서 상이한 두 시점간의 가치와 가격 간의 문제"를 "동일한 시점에서 상이한 두 경제간의 가격들의 관계문제"롸 바꿔치기함으로써 존재하지도 않은 '전형문제'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투입 가치를 가격으로 전형하지 않은" 것에서 생기는 전형문제는 맑스의 방법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면서 모슬리(Moseley)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맑스의 자본 일반과 경쟁 개념의 주된 목적은 경제 전체의 잉여가치 총량의 생산과 이 잉여가치 총량의 개별 자본가들로의 분배를 구별하는 것이다....잉여가치 총량은 이 잉여가치 총량의 개별 자본가들로의 분배에 선행하여 그와 독립적으로 자본 일반의 총량 분석 수준에서 결정된다." 때문에 "가치의 생산가격으로의 '전형'은 총가격에서 개별가격으로의 이행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투입은 생산가격의 결정에서 가격단위로 주어여 있으므로 가치량에서 가격량으로 전형될 필요가 없다." 고 모슬리(Moseley , Marx's Method in Capital. Humanities Press)는 이야기한다.
그런데 신리카도학파가 이와같은 오류에 빠지게 된 원인은 "바로 이 본질과 현상에의 추상수준 구별 및 이드의 변증법적 매개관계를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가치와 가격, 잉여가치와 이윤의 '전형'관계는 자본일반과 다수자본의 차별적 추상수준의 관계임과 동시에 본질과 현상형태의 매개의 변증법적 관계"라는 것이 정성진씨의 결론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본질과 현상형태의 구별이 맑스의 것이 아니라 헤겔의 잔재이므로 기각해야 한다는 알튀세르(Althusser)의 주장"도 문제가 있게 된다. 모슬리등의 비판에 의거해 정성진씨는 알튀세르의 '인식론적 단절'과 관련된 주장, 예컨대 <자본론> 제 1권 제 1편은 "헤겔주의적 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시 써야한다."와 같은 주장은 맑스의 가치형태 분석의 의의를 부정하는 이론이라고 본다. 그는 알튀세르가 비록 논리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은 될 수 있지만 "스탈린주의적 문제설정에서 벋아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다음으로 사회주의론에 대한 정성진씨의 견해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맑스주의 경제학과는 본질적인 관련이 없다고 본다. 맑스주의 경제학에서는 추상노동과 가치범주가 존재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적 범주이므로 "그러한 범주들의 현존을 자타가 공인한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규정함으로써 패러다임의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맑스가 말한 자본주의의 기초는 '사적소유'가 아니라 '소외된 노동'에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사적소유는 소외된 노동의 표현이며 결과이지, 그 원인이 아니"라고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맑스는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또한 '위로부터의 계획'도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이며 이와는 달리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계획'이야말로 반자본주의적 방식의 계획이라는 것이다. 총자본가(집단적 자본가)의 생산과정상의 지휘는 "이중적 성격"을 가지는데 이는 생산과정이 "한편으로는 생산물의 생산을 위한 사회적 노동과정"이면서 동시에 "자본의 가치증식과정"이라는 특징을 자본주의사회는 가진다. 따라서 "소유관계의 변혁(국유제)"나 "분배관계의 변혁(계획)"만으로는 그것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극복이라고 볼수없으며 "시장과 형태만 다른 추상노동의 강제기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구 소련의 계획경제도 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진 것이 된다.
"1935~1937년의 반혁명은 계획의 도입과 함께 시작된 과정의 절정이었다. 계획은 노동자와 경영자를 직접 충돌시켰다. 노동조합이 국가기구 속으로 해소된 것은 계획당국과 노동자 사이의 이어질 수 없는 엄청난 간격을 상징했다....1936년 이래 러시아의 경험은 유산계급이 아닌 다른 계급에 의한 계획이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법칙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산산조각 내버렸다"(Dunayevskaya, Marxism and Freedom. 228p. Columbia University Press)
또한 맑스는 기존의 통속적 견해처럼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즉 사회화된 생산과 사적 소유간의 모순으로 이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맑스는 "자본주의 생산영역 자체의 내부모순",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과 새로운 생산양식의 가능성간의 모순"으로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을 설정하였다는 것이다.
"현실적 부의 창조는 노동시간과 고용노동량에 의해 좌우되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시간 중에 작동되는 요인들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 ... 이와 같은 변화 속에서 생산과 부의 거대한 기초로 나타나는 것은 인간 자신이 수행하는 직접적 노동도 아니며 또 그가 노동하는 시간도 아니라, 그 자신의 일반적 생산력의 취득, 자연에 대한 그의 이해 및 사회유기체로서 그의 존재에 의한 자연의 지배 -- 한마디로 말하면 사회적 개인의 발전 -- 이다. ....대중의 잉여노동은 이미 일반적 부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 아니게 되며 소수자의 비노동도 인간 두뇌의 일반적인 힘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 아니게 된다. (MECW , Vol.29: 90~91p)
이러한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은 사적소유와 시장의 폐지와 같은 분배관계의 변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기본 범주들의 폐지, 즉 추상노동과 가치범주의 폐지, 소외된 노동범주의 폐지를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말해 이것은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노동자체가 이론적으로 비판되고 실천적으로 전복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성진씨는 자율주의를 평하길 "사회주의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폐지가 아니라 자기 실현으로 간주한다."고 말하면서 "자율주의에서 노동은 절대적 주체로 우상화될 뿐이며 그 자체로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네그리의 경우...맑스의 잉여가치론을 특권화하고 가치 형태론을 무시하는 대목에서 기존의 맑스 경제학으로 회귀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그의 비판은 자율주의의 소위 '노동 거부'개념과 전략과는 다소 배치되는 듯한 설명이다. 자율주의에서는 자본주의적인 노동자의 자율성이 기반이 되지 못한 소외된 노동은 거부되며 그것은 그들의 '노동거부'개념과 전술로 표현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부분은 보다 상세한 논의가 필요한 듯 하다. )
한편 맑스에게서 주체는 구체적 인간이 아니라 "대상화된 관계들"로 구성되며 특히 "추상노동 즉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매개활동을 하는 노동의 특수성"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부정은 추상노동에 의해 매개된 자본관계의 총체성의 폐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총체성의 존재를 주장"하는 루카치의 입장과 "총체성의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동전의 양면일 뿐이라고 본다. 맑스는 총체성 자체를 부정하지도 혹은 "초역사적 총체성의 존재를 존재론적으로 승인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또한 "고전 정치경제학이 노동의 입장에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라면 맑스의 경제학 비판은 자본주의의 노동자체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사회주의는 전자의 입장에서는 가치의 탈신비화를 통해 노동의 원리를 입증하는 것에 그치는 반면, 후자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가치의 탈신비화 예를들면 시장의 계획으로의 대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의한 인간관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것은 "가치체계의 파괴, 추상적 지배의 폐지, 생산의 내재적 요인으로서의 직접적 인간노동의 폐지"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맑스를 인용해 보자.
"이전의 모든 혁명에서는 활동양식은 언제나 변하지 않았으며 단지 노동을 새롭게 분배하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공산주의 혁명은 기존 활동양식의 변혁을 지향하며 노동을 폐지한다." (MECW, Vol. 5 : 52p)
이에 의하면 구사회주의 국가는 "자본주의의 한 형태인 국가주도적 자본축적양식, 즉 국가자본주의로 규정"된다고 한다. 구사회주의 국가는 상품, 화폐, 자본의 유통이 일시적으로 중지되었을 뿐 노동의 국가에 의한 통제가 여전히 이루어졌고 추상노동의 가치형태의 폐지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소련 동유럽 블록의 붕괴를 자본주의 지양 시도의 실패로 보고 이를 근거로 맑스의 패러다임 자체를 기각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맺음말"로 그는 쿤을 인용한다. 그는 하나의 패러다임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그 패러다임의 내부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때문에 현재 맑스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대체할 만한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는 한 우리는 맑스로 돌아가 그 내적인 입장이 무엇인지 다시금 재평가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요약해 본 이 책 1장에서의 그의 결론이다.
(진행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