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과 관련된 글을 하나 퍼와 본다. 양운덕씨가 쓴 글인데, 아쉽게도 글의 내용은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언제 쓰여진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젝의 후반부의 작업의 성과물은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글이다. 개인적으로 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젝이 헤겔철학을 어떻게 그의 라캉주의에 도입 하고 있는가와 같은 부분이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지젝의 탁월함은 그의 헤겔철학과의 접합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 점은 더욱 아쉬운 부분이다. 헤겔 변증법과 라캉과의 관계를 상세하면서도 쉽게 논한 글을 어서 빨리 보고싶다. 그런 내용의 글을 아시는 분은 소개좀 해주시면 감사하겠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양운덕 (고려대 강사, 서양철학)


I 문제제기

지젝은 '라깡주의자'를 자처한다. 그는 그가 속했던 슬로베니아 라깡 학회의 다른 구성원들
처럼 라깡의 틀로 전통적인 근대철학(독일 관념론)을 재해석하고, 문화, 예술(특히 영화)을 라깡주의적으로 분석하고, 라깡의 틀로 이데올로기, 권력 이론을 구성하는데 몰두했다. 지젝은 이들 가운데 이론적 성과가 두드러진 인물이다.
흔히 지젝을 라깡의 난해한 개념들을 대중문화 현상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이론가로 본다. 하지만 이런 해석이 단순히 라깡 이론을 쉽게 전달하려는 것만은 아니고 라깡 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라깡이 '프로이트주의자'이기를 고수하면서 구조주의 언어학 등을 원용하여 '프로이트의 진리'를 일정하게 보완, 수정하고 '다르게' 반복하는 것처럼, 지젝 역시 라깡을 '다르게' 해석하면서 그 이론의 가능성을 자신의 문제 영역(대중문화에서 이데올로기 이론에 걸친 영역)에 펼친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사회 현실과 정치적 영역은 욕망-현실의 다채로운 얼굴들로 나타난다.
프로이트가 제기했던 무의식의 문제틀이 주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욕망, 사회적 증상,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설명하는 틀로 발전된다.
지젝은 초기 저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에서 자신의 이론적 지향을 제시한다. 그
는 흔한 오해(라깡을 '포스트 구조주의자'로 보는 점)에 맞서서 라깡이 합리주의의 계보를 이어서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얘기하는 근본적인 계몽주의자임을 밝히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데리다를 비롯한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라깡의 틀이 차이 철학이 지닌 공허함을 보완하는 다른 길임을 강조한다. 또한 지젝은 '헤겔로 돌아가기' 위해서 라깡 틀로 헤겔 변증법을 재해석한다. 그는 헤겔이 '관념론적 일원론'이 아니라 차이와 우연성을 중시한다고 본다. 그의 부정의 부정, 반성 논리에 대한 독특한 해석과 그것을 이데올로기 이론으로 연결시키는 점은 눈길을 끌만하다. 또한 그는 상품물신성 같은 고전 사회이론의 주제들과 (이데올로기와 무관해 보이는) 라깡의 주요개념들--고정점, 숭고한 대상, 잉여-향유 등--을 재해석하고 연결시켜서 새로운 이데올로기 이론을 마련하고자 한다. 그는 이런 작업이 '이데올로기 이후'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포스트 모던의 덫에 걸리지 않으면서 현대 이데올로기 현상들(냉소주의, 전체주의, 민주주의의 허약함)을 파악하려는 것이

라고 본다. 지젝은 라깡 후기 이론이 (예를 들어서 상징계에서 실재계로, 욕망에서 충동으로) 초점을 옮겼다고 본다. 예를 들어서 흔히 라깡을 상징계 이론가로 볼 때 주체가 상징계 안에서 기표들에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고 기표들이 마련한 자리를 부여받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라깡을 '양처럼 순하게' 늘어서 있는 주체들을 질서의 이름으로 길들이려는, 주체들에게 욕망의 허망함을 가르치려는 이론가로 여겼다. 지젝은 이런 해석에 반대하고 라깡의

'실재계'를 전면에 부각시켜서 새로운 방식으로 주체와 사회적 관계의 '진리'를 말하려고 한다. 그는 실재계와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재해석해서 이데올로기 이론, 사회적 환상, 전체주의적 욕망 만들기를 나름대로 이론화한다. 지금까지 개인의 주관적 욕망과 사회 현실을 접맥시키려는 시도들이 별달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지젝은 나름대로 프로이트와 맑스를 '라깡을 매개로' 삼아서 결합시키려고 한다. 그의 욕망의 사회철학이 현재의 사회, 정치적 현실에 참여해서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지젝이 21세기의 이론가가 될 수 있으려면 이런 오래된 시도를 보다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작업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프로이트와 맑스를 잇는 작업의 중요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지젝의 다양하고 흥미로운 시도 가운데 이데올로기 비판과 관련된 몇 가지만 살
펴보려고 한다.


II '나는 알아, 하지만...'의 논리--증상을 고안한 맑스?


라깡은 맑스가 증상개념을 고안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어떻게 맑스가 그의 상품을 분석하면
서 프로이트가 꿈, 신경증 등에 관한 분석에 적용한 증상 개념을 만들었다는 것인가? 자못 궁금하다. 지젝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지젝은 맑스와 프로이트의 해석 방식(상품 분석과 꿈 분석)에 근본적인 상동성이 있다고 본다. 이때 양자의 상동성은 그 내용이 아니라 그 구조나 형식이 동형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지젝은 문제가 되는 두 분석에서 형식 자체의 비밀에 주목한다.

 

그는 프로이트가 꿈을 분석할 때 흔한 해석학적 모델처럼 현재적(顯在的:manifest) 내용에서 그 숨겨진 비밀, 곧 잠재적 꿈 사고Traum-Gedanken를 찾지 않는다. 지젝은 잠재적 꿈 사고의 내용이 아니라 이 꿈 사고가 왜 그런 '형식'을 취하는가에 주목한다. 마찬가지로 맑스의 상품 분석에서도 상품의 숨겨진 핵심(노동)을 밝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왜 노동이 상품가치 '형식'으로 나타나는가가 초점이다.[각주 1-이런 지적은 먼저 프로이트에 대한 흔한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우리 심리 안의 깊은 곳에 감추어진 것으로 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억압에 의해서(Ur-Verdrangung:원-억압) '다른 무대'로 밀려난 무의식은 우리 안에 없다. 무의식은 의식에 들어오기 위해서 의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꿈 사고는 그 일종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꿈에서 그 내용이 아니라 꿈 작업의 왜곡(전치와 압축) 장치를 무의식적이라고 보았다. 지젝은 이와 관련하여 무의식이 사고가 아니라 '사고 형식'이라고 본다. 이런 사고 형식은 사고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사고 바깥에 있는 것, 주관적이면서 또 객관적인 것이다. 이런 사고 형식은 상징 질서를 구성한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상품 형식의 '무의식'을 찾는다. 그는 상품 분석에 원용된 물신성(物神性:Fetischismus) 논리와 프로이트가 도착증의 한 형식으로 본 물신주의(Fetischismus)를 연결시킨다.

 

지젝은 상품을 교환하는 주체들에게서 '마치 ...처럼'의 논리를 찾는다. 교환을 하는 동안에 개인들은 마치 상품이 물질적 교환에 예속되지 않는 듯이 행위한다. 물론 그들은 의식적으로는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화폐는 다른 물질적 대상처럼 시간에 따라서 변한다. 그런데 시장의 사회적 현실에서는 마치 그것이 변치 않는 실체를 지닌 것처럼 다룬다. 지젝은 이런 점이 '나는 잘 알아, 하지만...'이라는 물신적 태도와 연결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서 '나는 엄마가 팔루스를 지니고 있지 않은 점을 알아. 하지만...[나는 그녀가 팔루스를 지닌다고 믿어]'. '나는 화폐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물질적 대상임을 안다. 하지만...[화폐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특수한 실체로 만들어진 것이다]' (Zizek, 1989, 18-9)

이런 화폐의 물질적 성격에 따른 신비화는 화폐가 숭고한 대상이고, 이런 화폐의 다른 몸, 비물질적 신체성, '신체 안에 있는 신체'를 믿는 것이다. 교환행위를 하는 동안 개인들의 행위에는 어떤 '오인'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런 오인이 교환행위를 유효하게 하는 필수조건이다. (Zizek, 1989, 20) 이런 점에서 이데올로기의 근본 차원은 단순히 현실에 대한 '가짜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가 그 참여자의 비-지식을 포함하는 사회현실을 구성하는데, 이 현실은 개인들이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에만 유효하게 작용한다. 지젝은 주체의 비-지식이 포함된 점 때문에 이것을 '증상'으로 본다.

 

지젝은 이런 틀로 상품물신성을 새롭게 해석한다. 보통 상품물신성은 인간들 간의 사회관계가 사물들간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서 생산 자본을 투입해서 잉여가치가 산출된 경우에 이 잉여가치가 노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본이 산출한 것이라고 믿는 태도는 자본을 물신화하는 것이다. 자본이란 사물-신이 스스로 운동하고 잉여가치를 창조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어떤 상품의 가치는 상품생산자들간의 사회관계의 표지이다. 그런데 이런 가치가 어떤 사물(상품, 화폐)의 준-자연적인 속성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특정한 상품의 가치가 일정량의 화폐로 표시된다. 지젝은 상품물신성의 핵심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사물화되는 것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구조적 효과로 해석한다. 곧 구조와 요소들 간의 관계에 따른 효과가 마치 한 요소의 '직접적인' 속성인 것처럼 나타나는 점에서 찾는다. 곧 한 요소가 다른 요소와 관계 맺지 않고 그 자체로 어떤 속성을 갖는다는 오인을 문제삼는다.

 

단순한 가치 형식을 살펴보자. 상품 A는 그 가치를 (등가인) 다른 상품B와 관련해서만, 비교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 이때 상품 B가 A에 대해서 거울 역할을 한다. 상품B는 A가 그것과 관련되는 한에서만 등가이다. 그런데 B는 A와 관계 맺지 않는 것처럼, B가 그 자체로 A의 등가인 듯이 나타난다. '등가(being an equivalent)'의 속성이 B의 자연적 속성인 것처럼 여겨진다. 비슷한 예를 보자. 한 사람이 왕인 것은 오로지 타인들이 그에게 신하의 관계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들은 왕이 왕이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신하인 듯이 상상한다. '왕이 됨'은 왕과 신하간의 사회 관계에 따른 효과이다. 그런데 사회 안에 있는 이들에게 이 관계는 전도된 형식으로 나타난다. 마치 '왕이 됨'이 사회적 관계와 무관하게 (그들이 자신들을 신하로 여기고 그에게 봉사하는 것과 무관하게) 왕 개인의 자연적 속성인 것처럼 오인한다. 왕-신하의 관계의 산물인 왕이 아니라 '왕은 왕이기 때문에 왕이다.' (Zizek, 1989, 24-5)

 

그러면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어디에서 생기는가? 사고 영역인가 아니면 행위 영역(또는 현실 자체)인가? 지젝은 맑스가 지적한 이데올로기적 착각이 지식의 측면이 아니라 이미 '현실 자체', 개인들의 행위의 측면에 있다고 본다.(*그렇다. 문제는 생각이 아니라 행위Practice이다.) 예를 들어 개인들이 화폐를 사용할 때 그들은 그것에 어떤 마술적인 힘이 없음을 매우 잘 안다. 일상적인 수준에서 개인들은 사물 관계 배후에 인간관계가 있음을 안다. 문제는 그들이 사회적 행위를 할 때 '마치' 화폐가 (사회관계가 아니라) 부 자체를 직접 구현하는 것'처럼' 행위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실제 행위에서 물신주의자이다/물신주의자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사물들의 실제 모습을 잘 알고 있지만 마치 그들이 모르는 것처럼 행위한다. 지젝은 이런 무의식적 착각을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라고 부른다.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차원이 (사물들의 실제 상태를 은폐하는 착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회 현실 자체를 구조화하는 무의식적 환상에 있다고 본다. '개인들은 그들이 행위하면서 착각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행위한다.' (Zizek, 1989, 30-3) 이런 물신fetish은 도착의 일종이고, 거세를 거부하는 방식의 하나이다. 그런데 지젝은 이 물신주의의 정식('나는 알아, 그렇지만...')으로 도착적인 '전체주의적 대상'을 설명한다. 전체주의적 권위를 지지하는 자는 자신이(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아주 잘 알지만') 특수하고 뛰어난 자질을 지닌 사람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서 당(黨)-물신에 참여하는 개인들은 자신들을 역사 의지를 직접 구현하는 자라고 믿는다. 이들은 사회, 역사 발전 객관적인 법칙이 지배하며 당은 객관적인 법칙을 직접적으로 구현한다고 본다. (Zizek, 1

991, 251-2)[각주 2-라깡은 사드가 칸트의 진리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사드적 주체, 희생자에게 가학적으로 행위하는 실행자가 쾌락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그 자신이 아니라 '큰 타자의 향유'를 위해서 일한다. 곧 는 타자의 의지의 도구가 된다. 이런 태도는 이른바 전체주의, 또는 (역사) 법칙을 (불법적으로) 실행하는 수단인 당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라깡은 도착이 환상이 뒤집어진 효과라고 본. 곧 주체가 자신을 대상으로 규정하는 태도이다. 라깡이 환상을 S(빗금쳐진 S) a 라고 했을 때 기표로 대표된 주체가 그의 욕망의 원인-대상과 만나서 분열됨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사디즘적 도착자는 이 구조를 뒤집는다. a S(빗금쳐진 S). 곧 자기 자신이 대상의 자리를 차지한다. 자신을 큰 타자의 의지를 구현하는 수행자로 만든다. 그는 주체를 구성하는 분열을 회피하고 자기의 분열을 타인에게 옮긴다. 사디스트는 타인을 위하여 대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타자의 향유를 위하여 도착자로 행위한다. 스탈린주의의 큰 타자, 곧 역사 발전의 필연적인 법칙은 최고악의 한 변형이다. 그 자신을 객관화, 도구화하는 것은 오로지 역사적 필연성의 도구가 되려는 확신에 바탕을 둔다. 그는 자신을 큰 타자(역사)의 의지를 실현하는 투명한 수단으로 삼아서 그의 핵심을 이루는 분열을 회피한다. 물론 그 대가로 그의 향유를

전적으로 소외시킨다. 부르조아적 주체가 자유로운 참여의 권리를 내세운다면 전체주의적 주체는 이런 자유가 큰 타자의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과 관련하여 그 자신의 의지는 전적으로 도구화된다. (Zizek, 1991, 234-5)]


III 큰 타자의 결핍을 메워라!--이데올로기적 환상


1. 이데올로기적 고정점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환상의 틀로 설명하면서 이데올로기 비판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러면 사회적 환상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주체들의 욕망을 틀 지우는가? 라깡은 기표들의 체계에서 기표와 기의가 만나지 못한다고 보았다(S/s에서 /는 양자가 만나는 것을 불가

능하게 하므로 의미는 고정될 수 없다). 기표들은 차이 관계에서 기의 없이, 고정된 의미 없이 떠돈다. 라깡은 이런 기표들을 잠정적으로 고정시켜서 의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고정점(point decapiton)'이 필요하다고 본다.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소파의 등받이를 잠정적으로 소파에 고정시킬 수 있는 것처럼 의미를 일시적이나마 고정시킬 수 없다면 의미는 계속 방황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 담론 공간을 떠다니는 요소들은 차이 관계망에서 고정된 동일성을 마련하지 못한다. '자유'는 무엇이고, 누가 '개혁파'이고, 누가 '민주주의자'인가? 여기에 떤 이데올로기적 고정점이 개입해서 떠다니는 기표들을 꿰매어서(quilting) 그것들의 의미를 고정시킨다. 이런 꿰매기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안정된 전체로 만든다. 지젝은 이와 관련하여 상징질서인 큰 타자가 자체 안에 결핍을 지닌 것임을 지적한다. 그래 이런 큰 타자의 결핍을 채워줄 환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라깡은 상징계가 두 얼굴을 지닌다고 본다. 한 얼굴은 상징 질서가 각 요소를 일정한 자리에 배치하고 나름의 의미와 역할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이런 상징질서는 요소를 뛰어넘는 전체이고 의미를 배당하는 우월한 주인이다. 그래서 이런 상징 질서는 그 요소들에게 낯설고 넘볼 수 없는 '타자'(l'Autre)로 여겨진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처럼 군림하는 상징 질서는 온전한 전체를 이루지 못한 채 어떤 결핍을

지닌다. 기표들의 차이관계에서 각 기표는 다른 기표와 다르기 때문에 자기이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가능하려면 각 기표의 개별적인 차이들에 앞서는 '차이 자체'가 있어야 한다. '사랑'과 '미움'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사랑'도 '미움'도 아니고 '사랑과 미움의 차이'이다. 그러면 이런 '차이'를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이런 '차이 자체'를 나타낼 기호는 없다. '차이'는 고정된 내용을 갖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상징계의 대타자는 상징계 전체의 질서를 조율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고정된 내용을 가지지 못한, 즉 결핍된 차이 자체라는 것)

 

라깡은 이런 점 때문에 상징 질서가 결핍을 안고 있고, 이런 결핍 주위에서 상징질서가 구조화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결핍을 지닌 큰 타자(상징질서)는 완결된 전체에 대한 욕망을 갖는다. '큰 타자의 욕망'이란 표현이 어색할 지 모르지만 이런 큰 타자가 전체가 아니므로(pas-toute; not-all) 나름대로 결핍을 채우려 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 점을 라깡은 "타자는 현존하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2. 큰 타자의 질문--'당신이 (참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젝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주체가 동일시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긋남주목한다. 라깡-알뛰세르는 (상상적, 상징적) 동일시를 통해서 주체와 그의 욕망이 일정한 사회적-상징적 영역에 통합되는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주체는 상징 질서가 위임하는 명령(mandate)을 짊어지고 있다. 곧 그는 상징 관계의 상호주관적 망 안에 주어진 자신의 자리를 갖는다. 당신은 '아버지'/'학생'/'주부'이다. 이렇게 호명된 주체는 그 부름에 답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와 의미에 적합한 자기를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부름과 응답은 일치하는가? 지젝은 이런 명령이 자의적이고, 일정한 역할을 촉구하는 수행적인 것일 뿐이라고 본다. 래서 동일시가 이루어진 경우에도 항상 틈이 남게 된다. (히스테리적) 주체는 "이것은 내가 (참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주체는 호명된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큰 타자가 질문한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Che vuoi?" 교사는 학생에게,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국가가 시민에게, 엄마는 아이에게 묻는다--지젝은 재미있게 mother를 (m)Other로 쓴다. '너는 나에게 이것을 원한다고 했지만 네가 참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너는 무엇을 목표로 삼는가?'

 

큰 타자는 마치 주체가 이 질문에 답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묻는다. 그런데 주체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주체는 왜 그가 상징적 관계망에서 바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모른다. (주체는 이런 상징화가 실패한 빈자리일 뿐이다.) 그러면 무엇이 이런 타자의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3. 환상이 큰 타자의 결핍을 은폐한다

 

지젝은 라깡이 환상을 그 답으로 제시했다고 본다. 이런 (사회적) 환상이 큰 타자의 수수께끼, 큰 타자 안에 있는 결핍을 은폐한다. (Zizek, 1989, 118) (지젝은 환상이 흔히 오해하듯이 단순히 헛된 만족을 주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환상은 '현실'을 구성하고 주체들이 어떻게, 무엇을 욕망할 지를 가르친다. 그래서 개인적 환상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상도 나름의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고 주체들에게 완전한 사회를 추구하려면 떤 욕망의 좌표를 가져야 하고 무엇을 욕망 대상으로 삼아야 할지를 알려준다)

 

그러면 큰 타자가 환상을 구성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지젝은 라깡 이론의 근본적 차원이 (주체의 분열보다는) 큰 타자의 분열, 큰 타자의 근본적인 불가능성에 있다고 본다. 만약 큰 타자에 이러한 결핍이 없다면 완결된 구조를 갖출 것이다. 그러면 꽉 짜인 타자 안에 있는 주체는 소외를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큰 타자의 결핍이 주체에게 숨쉴 공간을 주고 전면적인 소외를 피하게 한다. (같은 책, 122) 그러면 큰 타자는 결핍을 그대로 두는가? 이 결핍을 어떻게든 채워야 한다. 가족, 회사, 교회, 국가가 메울 수 없는 결핍을 지니고 있다면 큰일이 아닌가? 이때 결핍 없는 타자란 환상이 필

요하다. '환상'이 큰 타자 안에 열려있는 빈곳을 채우고, 그 비정합성을 가린다. 환상은 큰 타자가 상징화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주체는 이런 환상을 통과하면서 마 큰 타자 안에서 자신들의 욕망이 조화롭게 정해진다고 여긴다.


4. 사회적 환상 통과하기

 

(주체들이 환상을 통해서 욕망 대상을 찾듯이) 사회적 환상을 만드는 큰 타자는 조화로운 전체에 대한 불가능한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어떤 환상이 필요하고 욕망을 일으키는 어떤 원인-대상이 필요할까? 이것을 지젝이 종종 드는 반유태주의의 '유태인 형상' 만

들기로 살펴보자.

 

1) 먼저 담론 수준에서 '유태인 형상'이 상징적 (중층)결정에 따라 만들어진다. (꿈의 왜곡 작업에서 본 '전치'와 '압축'이 동원된다) 먼저 전치displacement를 통해서 중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의 자리를 바꾼다. 이 속임수로 사회적 적대를 엉뚱한 곳으로 옮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온전한 전체인) 사회는 불가능한 것'이고, 사회적인 것은 적대에 기초를 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이런 적대가 존속하고 조화로운 전체가 불가능한 이유를 유태인에게 떠넘긴다. 타락의 원천이 사회의 한 부분인 유태인에 배당된다. 적대의 원천인 노동계급과 자본 계급 간의 계급적 적대 대신에 생산계급과 그들을 착취하는 자들(유태인)사이의 가짜 적대가 마련된다.

이와 함께 '유태인 형상'을 만들기 위해서 대립적인 측면들을 압축condensation한다. '유태인 형상'에 경제적(폭리를 취하는 자), 정치적(음모가, 비밀 권력을 지닌 자), 도덕적-종교적(타락한 반 기독교도), 성적(무고한 소녀들을 유혹하는 자) 적대 등을 압축시켜 일련의 이질

적인 적대들이 모아진다. 한마디로 유태인의 형상이 증상, 사회적 적대의 암호가 된다. (같은 책, 125-6) 그리고 이런 왜곡에 더하여 열광적인 힘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사회적 환상을 통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유태인'이 환상의 틀 안에 들어가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향유를 훔쳐간다."

 

이처럼 환상은 적대적 분열을 가린다. 라클라우가 지적하듯이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것(the Social)은 항상 비정합적인 것이어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곧 사회는 항상 (상징 질서로 통합될 수 없는) 적대적 분열에 의해서 관통된다. 그런데 이런 적대를 부정하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완전한 사회'의 비전을 내세운

다. 이것은 적대적 분리에 의해서 분열되지 않은 사회, 그 부분들이 유기적인 조화를 이룬 사회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렇게 내세운 비전이 실현되지 않는 까닭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어떤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건전한 사회를 타락시킨 외적인 요소, 곧 물신fetish이다. 그것은 '마치' 사회의 불가능성을 긍정적이고,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준다. 이런 물신은 사회적 영역에서 향유를 폭발시킨다.

 

주체들이 환상을 통과하면서 '유태인'에게 귀속시킨 것이 사실은 사회 체제에 불가피한 적대, 무질서이다. 바로 사회에 고유한 적대, 피할 수 없는 내부적 부정성을 '유태인'이란 형상으로 (그 바깥에) 투사한 것이다. (같은 책, 126-8) 이런 점 때문에 지젝은 이데올로기 비판을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폭로하는 작업으로 보지 않는다. 이 환상의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 환상은 아무 것도 가릴 것이 없음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초점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IV 마치면서

이상에서 부족하나마 지젝의 정신분석학적 이데올로기 이론의 일부를 살펴보았다. 이런 틀
에서 지젝은 본질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차이의 혼란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며, 동일성의 진리를 추종하지 않으면서도 변증법적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필자는 그의 실천적 이데올로기 이론이 욕망과 현실의 매개, 개인과 사회-역사의 변증법의 모범적인 예가 되길 바란다.

필자가 보기에 지젝은 다양한 작업에서 근, 현대의 서구 이론가들을 라깡적 주제로 재해석하고 그들에게서 라깡적 사고틀을 찾고 라깡적 답을 보충한다. 이것은 새로운 해석의 풍요로움 낳을 수 있지만 라깡주의가 '이론의 주인'이 되려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지젝이 앞으로도 여전히 라깡주의자로 머물지, 아니면 독자적인 이론가로 나설 것인지가 궁금하다. 필자는 지젝의 넘치는 '이론 욕망'을 보면서 부러움이 앞선다. 그래서 우리 현실과 문화(의 욕망)에 대한 생동감 넘치는 분석과 정치하고 세련된 논의가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욕망 이론가들'이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이 구조화된 현실을 잘 설명할 수 있을 때 그들에게 라깡과 지젝에게 묻고 싶었지만 감히 물을 수 없었던 것들을 물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Slavoj Zizek (1989),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London and New York, Verso.
(1991),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Enjoyment as a Political Factor. London and New York, Verso.
(1991a),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 Cambridge, Mass and London, MIT Press.
(1992), Enjoy Your Symptom! Jacques Lacan in Hollywood and Out. New York and London, Routledge.
(1993), Tarrying with the Negative: Kant, Hegel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1994), The Metastases of Enjoyment: Six Essays on Women and Causality. London and New York, Verso.
(1996), The Invisible Remainder: An Essay on Schelling and Related Matters. London and New York, Verso.
(1997), The Plague of Fantasies. London and New York, Verso.
(1998), The Ticklish Subject: A Treaties in political Ontology. London and New York, Verso.
Judith Butler, Ernesto Laclau & Slavoj Zizek (2000),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Contemporary Dialogues on the Left. London and New York, Verso.
홍준기 (2000), 지제크의 라캉 읽기: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중심으로. 문학과 사회 52호 pp.1881-1899. 2000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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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주의 체제의 실체?

- 1917년 이전의 러시아 – 국가의 폭력 기구가 비대화되고, “위로부터”의 국가 지휘 하의 자본주의가 발전되기 시작한 매우 “전통적인” 사회 – 약 80%의 수출은 농산물이었음. 농촌에서 – 약 3만 호구의 대지주 (주로 귀족)들은 약 7천만 데샤티나, 즉 천만 농민 가구들이 소유한 면적만큼이나 소유하는 등 농촌은 극단적인 “불균형적 토지 소유 관계”에 시달렸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1914년에 도시 공업에서 500명 이상의 대규모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전체의 54%에 달하는 등 노동 계급의 대규모 작업장에서의 집중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았음. 후진적인 러시아이었지만 군사적 “열강”이었기에 군수공업은 세계적 수준에 있었으며, 대표적인 군수 공업 업체인 Putilov 공장 (St.-Peterburg)은 약 3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등 그 당시 세계 최대이었음. 결국 대공장에서 집중된 노동자들이 혁명 사상에 쉽게 노출됐으며, 도시 노동자의 혁명 운동과 농촌에서의 농민 반란 운동이 합쳐지는 순간 제정 러시아 체제나 매우 취약한 러시아 자본가들의 지배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 “복합형 불균형 발달의 과정”은 러시아 혁명을 다 준비해놓았음.
- “고질화된 불만의 상태” – 내전이 종식된 1921년 이후에 사실상 재현됐음. 농민들이 노동자 위주의 새로운 국가를 아직 강력하게 이질시했음. 풍년 때에 곡물의 과잉 공급으로 시장 식량품 가격들이 폭락할 수 있었기에 특히 부농들이나 중농들이 식량 방매를 유보하는 등 “식량 파업”을 벌이곤 했으며 국가는 가격의 폭등을 막기 위해 법정 수매 가격을 정해 그 나름의 “저곡가 정책”을 시도하는 등 농민과 국가는 “準 적대 관계”에 있었음. 트로츠키파의 경제학자 Preobrazhensky – 1925년에 “저곡가 정책을 통해서 농민층을 ‘착취’하지 않으면 산업화와 진정한 사회주의로의 이동을 이룰 수도 없으며 부농들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는 노동자들을 달랠 수도 없다, 법정 저곡가 정책을 펴서 농촌의 잉여를 산업 투자로 돌리자”는 이야기로 유명해졌음. 결국 국정 참여 기회가 거의 없었던 농민과, 농업보다 산업을 우선시하는 “도시인들의 국가”의 숙명적 갈등.
노동자들이 산업 발전이 지지부진하는 “신경제정책” 시절 (1921-1928)에 높은 실업률 (25%)과 매우 열악한 생활 조건 등에 시달리고 “무엇을 위한 혁명이었던가”와 같은 질문들을 공개적으로 던지곤 했다. 공업 관료 (주로 당원이 아닌 지배인 등)와 당 관료에 대한 불만 – 트로츠키파 등에 대한 상당수 평당원들의 지지로 이어졌다. 반대파의 지지기반 – 공업시설이 가장 밀집한 모스크바의 소콜니키, 크라스나야 프레스냐 등의 지역. 성장률 2%밖에 안되는 1920년대의 소련 도시 사회 –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노조 – 관료화되어 더 이상 “밑바닥”을 거의 대표하지 않았음. 노조의 지도부 – 당원이 아닌 일반 노동자의 비율은 12-13%이었음 (1926년). 일반 노동자와 노조 간부, 십장, 지배인과의 관계 – 거의 “혁명 이전의 예속적인 형태”로 돌아왔다는 평가. 
- “1920년대의 구조적 위기” – 결국 스탈린 지도부가 2 가지 방법으로 돌파했음:
* 포섭 – “미완의 혁명”에 대한 좌절과 불만에 젖은 노동자나 농민들을 위해 “신분 상승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1924년 교육부의 훈령 – 대학 입학은 노조 조합원들에게만 허할 것, 전역 군인과 Rabfak (노동자 출신들을 위한 예비 과정) 출신, 내전의 상이군 등을 특채로 뽑을 것 등을 명령했다. 원칙상 해당 노조의 추천서가 있는 젊은 노동자에게는 고등교육 받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 됐다. 그런데 사실상 1930년에 대학생들 중에서는 노동자, 농민 출신의 비율은 37%에 불과했음. 다수는 전문가, 지식인, 자영업자 출신들이었음 – 대학 입학을 좌우하는 대학 교수들은 되도록이면 노동자/농민들의 비율을 줄이려고 노력했음. 대학 교육은 노동자에게는 무상이었지만 노동자/빈농이 아닐 경우에는 여전히 학비를 징수했음. 1933년 경 – 초등학교 입학률이 거의 100% 이름. 1940년대말 – “문맹 퇴치” 거의 완성. 1970년대 중반 – 거의 100%에 가까운 학생들이 중학교 졸업하게 됨 – 중등 교육 보편화. 대학교 입학생의 총수 – 몇 배 증가하여 1940년쯤에 백만 명에 이름. 그런데, “노동자/농민들을 위한 역차별 정책”들에도 불구하고, 대학생 중의 노동자/농민 자녀의 비율은 사실 1980년대초까지 45% 정도 넘지 못했음 – 여전히 실질적인 사회적 헤게모니는 고학력자 중산층에 있었음. 1920년대의 또 다른 對사회 “유화 정책” – 낙태수술의 허용 (허가제 – 불법 수술의 비율은 약 20-30%), 이혼 절차의 간소화, 동성연애의 인정 등 – 새 정권에 대한 도시 사회 특히 젊은이들의 환심 사는 데에 큰 역할을 했음 - 1930년대 후반에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거의 다 사라졌음.
* 폭력 – 국가에 의한 사회의 무력화와 공포 분위기 조성, 개인의 원자화 – “가시적인 공판” - 1928년의 Shakhty 공판 (“사회주의적인 생산을 사보타주하는 부르주아적 전문가 응징”) 이후 특정 집단들을 겨냥하는 일련의 공판들이 열림. 절정 – 1936-37년의 레닌의 주요 동지 (“파시스트 간첩이자 트로츠키주의적 테러리스트”)에 대한 공개 재판 (“Moscow Processes”). 사법적인 폭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이미 사회가 경험한 기존의 폭력의 규모를 염두에 두어야 함 – 1917-1921년간에 내전, 대량 기아, 이민 등으로 러시아의 전체 인구가 약 1천3백만 명으로 줄어들었음. 그런데, 1940년에 수용소와 감옥을 합쳐서 수감돼 있는 인구는 정확히 1.850.258명 이었음 – 즉, 다수의 주민들에게 스탈린의 숙청보다도 1917-1921년간의 일련의 참극들이 “진정한 참사”로 보였을 것. 수감자 중에서는 거의 상당수를 이루는 것은 각종의 “정치, 사상범”이었음: 1937-1938년에 정치 관련 범죄로 체포, 수감된 인구는 1.344.923명, 그 중에서는 총살된 인구는 681.692명. 그 뒤에는 연간 총살자의 수가 크게 줄어들어 1940년대에 (정치범에 한해서) 7500명 정도이었음. 대체로 총살되는 이들 – 거의 다수의 “舊 공산당원” 등 잠재적으로 반체제 활동을 할 가능성이 있었던 자 – 잠재적인 적에 대한 “선제공격”. 결과 – 원자화된, 순치된 사회 – “사회적 운동” 가능성의 봉쇄. 
경제적 폭력 – 특히 “농민들의 협동화” – 1929년 이후 – 사실상 농민들의 자율성을 말살시키고 농촌으로부터 잉여를 수취하여 공업부문에 투자시키기 위한 매우 가혹한 “농업 희생 정책”. 결과 – 특히 우크라이나 지방에서의 대량 아사 사태, 아사자의 수는 전국적으로는 1932-34년간 약 4백만 명으로 추산됨. “생존 경쟁” 사회의 탄생 – 하류층 출신의 소련 시민에게는 최대의 과제란 “굶어죽지 않기”, “가족 살리기” 정도. 정권이 안정된 상황에서는 “생존”의 주된 방법은 정권에 대한 충성 – 소련 국민의 “가시적인 충성심”은 상당부분 내면화된 생존의 전략.
* 성장 – 폭력적인 “농촌 말살”을 기반으로 하여 공업 경제는 1930년대에 기적적인 압축 성장을 이루어 도시 주민에 대한 포섭 정책을 가능케 했다. 성장률 연간 13-15%. 1928-1937년간 강철 생산은 3백만 톤에서 1천5백만 톤으로 늘어남 – 거의 5배 정도의 증가. 1930년대말 – 자동차 (연간 20만대), 비행기 생산 등 – 군사화된 중공업의 구축이 거의 완성됐음. 대가 – 실질 임금의 동결 내지 소폭 하락 (1928-1940), 구조화된 과로 (하루 15시간씩 노동), 매우 높은 산재사망률 – 그런데 교육, 의료 분야에서의 국가의 포섭 정책이 민중의 희생에 대한 일종의 “대가”를 지불하는 셈이었음.
결국 – 박정희 정권보다는 오히려 스탈린주의는 “대중 독재”의 형태에 다 가까웠음 – 기본적인 위로부터의 압축 성장 패턴은 비슷해도.

# 스탈린주의를 “사회주의”로 인정할 수 없는 여러 이유:
- 철저한 비민주성.
- 혁명 이전의 시절을 방불케 하는 양극화 - 1930년대 후반의 노동자 월급 평균 150루불, 고급 간부는 보통 3000-4000루불 이상. 같은 탄광에서 광부와 지배인의 월급 차이는 약 80배.
- 전사회의 군사화
- 퇴영적이며 제국주의적 “민족 정책”. 이미 1924년부터 이슬람 공산주의자 Sultan-Galiev 등에 대한 박해 시작 – 1930년 체포, 1937년 총살. “소수 민족 공산주의자”, 즉 소수 민족 해방을 위해 투쟁할 수 있었던 거의 일체 활동가 - 1930년대말 총살됐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상당수의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데올로기적 배경 – 국민주의/대러시아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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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로츠키 사상.

1) 트로츠키 생애: 1879년 – 유대계 평민 출신의 지주 가정에서 태어남. 유대계지만 가정에서는 Yiddish 대신에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사용 – “러시아화된 유대인”. 여동생인 Olga – 볼셰비키당의 주요 지도자 중의 한 명인 Lev Kamenev과 결혼 – “혼맥을 통한 밀접한 관계”. 1896년 – 노동 운동에의 입문, 1900-1902년 – 시베리아 귀양과 도망, 해외 망명 (원래 이름 – Bronstein; Trotsky는 위조된 여권에서 찍힌 이름). 1902년부터 런던에서 러시아 사민당 기관지인 Iskra 편집에 참여, Plekhanov 등 “구파”와 대립 관계에 돌입. 개방적인 사생활 – 첫 부인 (Sokolovskaya)와 이혼하여 두 번째 부인 (Sedova)를 맞이한 뒤에도 첫 부인과 매우 친근한 친구 관계 유지했음. 1903년 러시아 사민당 분당 (分黨) 사태 때에 – 처음에 레닌의 비민주성에 격분하여 멘셰비키에 가담했지만 그 뒤에는 “자유주의자들과의 연대 노선”에 실망하여 1904-1917년간 “독립적인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해왔음 – 억압적인 규율을 不忍하는 정치적인 성질. 1905년 – 러시아에서 인기 있는 사회주의 신문 발행인 및 논객이 됐으며 “직접 민주주의” 기관인 페테르부르그 소비예트의 지도자가 됨. 소비에트 – 제정 러시아 정부가 빌린 외국 차관 (외채)를 갚을 필요 없다는 선언을 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음. 1906년 – 체포, 공판, 귀양. 1907년 – 다시 한번 도망해서 런던으로 탈출했음. 소비에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트로츠키의 무산계급 집권론 – 총파업과 “무산자들의 연대”를 “반란”보다 훨씬 더 강조했음: “The main weapon of the Soviet was a political strike of the masses. The power of the strike lies in disorganizing the power of the government. The greater the “anarchy” created by a strike, the nearer its victory. This is true only where “anarchy” is not being created by anarchic actions. The class that puts into motion, day in and day out, the industrial apparatus and the governmental apparatus; the class that is able, by a sudden stoppage of work, to paralyze both industry and government, must be organized enough not to fall the first victim of the very “anarchy” it has created. The more effective the disorganization of government caused by a strike, the more the strike organization is compelled to assume governmental functions.
The Council of Workmen’s Delegates introduces a free press. It organizes street patrols to secure the safety of the citizens. It takes over, to a greater or less extent, the post office, the telegraph, and the railroads. It makes an effort to introduce the eight hour workday. Paralyzing the autocratic government by a strike, it brings its own democratic order into the life of the working city population” 소비에트 – 다수의 동의를 바탕으로 하는 “대안적인 非권력적인 권력”.
1907-1914 – 런던에서 빈으로 이동하여 주로 빈에서 살면서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활동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했음. 독립적인 사회주의적 신문 <프라우다> 발행 (나중에 볼셰비키당 기관지가 그 이름을 “도용”했다고 트로츠키는 매우 격분했음). 많은 문제에 있어서는 볼셰비키들과 충동했음. 1912년 - <Kievskaya Mysl’>의 종군 기자로서 발칸 전쟁을 취재하여 발칸지역의 사회, 정치적 발전, 현대 전쟁의 문제 등을 깊이 연구했음.
1914-1917 – 스위스, 프랑스, 스페인, 미국 등지에서 반전 활동을 하다가 결국 1917년2월 부르주아 혁명 이후로 러시아로 돌아감. “개량주의적 사민주의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레닌보다 훨씬 더 중도적인 soft line – 전쟁에 대한 반대를 굳게 하면서 제2차인터네서널의 완전한 파탄을 면하게 하려고 노력했음 – 레닌보다 예컨대 국제감각이 다소 예리하고 조금 더 “원대한” 구상을 지닌 듯함 –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을 우려해서 “주류 사민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려고 노력했음.
1917년 – 여름에 볼셰비키들에게 합류하여 1917년10월 혁명을 사실상 주도했음. 혁명 이후에 – 멘셰비키 등 온건 사회주의자들과의 “연합 정권” 구상을 반대했음 – 레닌과 마찬가지로 보다 급진적인 혁명을 지향함.
1918년3월까지 트로츠키 – 외무부 장관 (외무 인민 위원) – 독일과의 강화의 문제에 있어서는 역시 미래 지향적인 중도적 입장을 취했음 – 독일제국과의 협정을 맺음으로서 소비에트 정권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고 일단 독일과의 협상에서 시간 끌기 하고 독일 병사 사이의 혁명적 선전에 중점을 두자 – 즉, 독일에서의 혁명에 주력하자는 입장 – “전쟁”의 문제에 있어서의 가장 “국제주의적” 접근. 그런데 독일에서의 혁명이 늦어져 결국 레닌의 제안대로 강화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강화 협정은 볼셰비키들의 국내 혁명적 명분을 크게 실추시키고 좌파 사회혁명당 등의 농촌의 혁명 세력들과의 유대 관계를 파괴하게 했음 – 트로츠키의 반대는 이유가 있었음. 
1918년3월-1920년간 – 赤軍 (적군 – 소비에트 공화국의 국군) 지휘자 (국방부 장관)으로서의 트로츠키 – 적군의 “정규군化” – 구 제정정권 군 장교 재임명 (배신 시 원칙상 전 가족 총살 내지 수용소로의 체포), 징병제, 사병들에 대한 군재판, 탈영 등 범죄 시 총살. 트로츠키 – “민주적인 노동자 권력”의 이상을 저버리지 않았겠지만 정규군인 백군 (白軍 – 반동군)이나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군과의 전투에서 “비대칭적 전투”로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통감하여 “현실과의 타협”을 한 셈임. 실제 “군인”으로서의 트로츠키 – 나름대로의 “중도 노선” - 1920년의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폴란드 영토로의 진입 등 “혁명의 수출” 시도를 반대했음 (결국, 1920년8월에 바르샤바 정복의 시도가 좌절됨 – 트로츠키 의견이 맞았음). 그런데 1920-21년에 트로츠키가 “노조의 국가기관화”와 “노동의 군사화” – 노동자의 직장 이동 권리 박탈 및 국가 기관에 의한 무제한적 징발, 전직의 가능성 – 를 주장하여 특히 노동자 출신의 공산당 중간, 고급 간부로부터 많은 원망을 샀음 (“노동자 반대파”). 이 “노동 군사화” 제안은 군대, 철도 책임자로서의, 즉 고급관료로서의 트로츠키 입장을 반영했음. 트로츠키는 “노동자의 국가에서 노동자가 국가의 명령을 미워할 이유가 없으며 국가를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하여 “국가”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을 보여주었음 – 근대 지상주의적인 볼셰비키들의 “국가/권력 집중의 숭배” – 볼셰비즘의 공동된 문제. 
- 1922년 – 레닌이 치명적인 병환을 앓고 있는 데에, 총서기관이 된 스탈린과 볼셰비키들의 “정통적 지도자”인 지노비예프/카메네프는 트로츠키의 집권 시도를 우려하여 “삼두 마차”로서 “반트로츠키 블록”을 만들었음. 1922년 후반부 – 소수 민족들을 다루는 스탈린의 비민주성을 목격한 레닌이 스탈린이 지휘하는 당 관료의 잠재적 반동성에 위기 의식을 느껴 트로츠키와는 급속히 가까워졌음. 1923년부터 – 스탈린/지노비예프 등이 트로츠키와 가까운 관료들을 좌천시키는 등 트로츠키와 “권력형 암투”를 노골적으로 벌임 – 이 과정에서는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허구성이 드러남 (라코브스키 주영국 대사로의 좌천 등).
- 1923년10월8일 – 트로츠키는 중앙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당내 민주주의의 실종”을 극론함 – 지역 서기관들이 중앙으로부터 임명되는 시스템을 “당의 관료화”의 원천으로 생각함 – 그 후 1927년까지 “합법적인 당 민주주의 반대파”로 기능해온 것. 1923-25 – 반대파가 그 의견을 <프라우다> 등에서 발표하여 공개적인 논쟁을 할 수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지는 게임”이었음 – 각종의 당 대회, 회의에서 대표자의 선출부터 이미 위로부터 임명된 서기의 선출에 의거했기 때문에 “당 중앙”을 반대하는 어떤 의견도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음. 트로츠키 입장 – 보다 급속한 공업 경제 건설 (“총동원”을 주장하지 않았음), “일국 사회주의” 불가능성과 세계 혁명 지향 노선 등 – 많은 면에서 옳았다 해도 이미 국가의 관료 기구가 된 당에서는 권력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어떤 입장도 “힘”을 얻지 못했음. 트로츠키 입장의 치명적 약점 – 그가 “당내 민주주의의 부활”을 주장했지만 “당외 민주주의” (예컨대 같은 사회주의적 계통의 멘셰비키 등의 합법적 활동 허용)에 대해 무관심했음 – “볼셰비키 국가”에 대한 맹신의 지속. 1926년 – 계속 강화돼 가는 스탈린의 권력이 눌린 지노비예프/카메네프가 트로츠키 편에 옮기지만 1927년부터 스탈린이 반대파에 대해 비밀 경찰의 탄압을 이용하기 시작했음. 1927년 – 많은 반대파들이 당적 박탈. 1928년 초기 – 트로츠키가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로 귀양가야 함 – 사실상 스탈린의 “무제한 독재”의 시초.
- 1929-1940 – 트로츠키의 해외 망명 생활 –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 멕시코 – 처음에는 소련 주도의 코민테른과 “경쟁”하려 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코민테른이 파시즘의 독일에서의 집권을 방지하지 못하고 나서는 1938년에 “제4차 인터네서널”을 결성했다. 문제 – “리더” 중심의 중앙 집권적 구조로 인해서 그 트로츠키주의적 분파들이 계속 분당 과정을 겪어 작은 섹트 (종파)로 나누어짐 – 극단적 “수령주의”와 교조주의. 가장 큰 분열의 원인 – “입장주의” (entrism)의 문제 –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대중적인 노동자 정치를 펴고 있는 사민당/공산당에 의견그룹으로서 입당할 필요가 있는가? 이외에는 스탈린주의 국가들을 “타락된 노동자 국가”로 봐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분열의 가장 큰 이론적인 기제이었음.

트로츠키 인생의 가장 큰 모순 – 한편으로는 권력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늘 권력에 반발해왔지만 또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국가”와 “당”의 권력을 물신화/절대화시킴 – 자신을 죽인 소련 국가를 끝내 “타락된 노동자 국가”라고 옹호해왔음. 근대주의적 정치인의 특징 – 특정 이데올로기/정당을 “역사의 논리를 전개시키는 주체”, 거의 헤겔의 “신의 의지의 실행자”로 보는 입장. 결국, 1923년 이후의 트로츠키의 반스탈린주의적 투쟁이 대단히 “온건”했다 – 그는 끝내 “반스탈린 혁명”을 주장하지 않았다.

2) 트로츠키 사상의 요점:
- “지속 혁명” (permanent revolution) – 1905년의 부르주아 혁명 이후에 개발해왔음 – 후진국에 있어서는 부르주아들은 민주혁명조차 이루어낼 수 없기에 미완의 민주혁명 바로 뒤에 무산계급이 주도하는 지속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이어져야 함. 왜 혁명이 후진국에서 일어나는가? 트로츠키의 대답은 “복합적이며 불균형한 발전의 법칙” (law of combined and uneven development) – 발전 수준이 고르지 않은 나라들이 같은 역사적인 세계적 과정 (예컨대 세계대전)으로 휘말리는 와중에서 “약한 고리” (국가 권력이 역하거나 부패한 후진국)가 먼저 터질 수 있다는 논리:
“The first and most general explanation is: Russia is a backward country, but only a part of world economy, only an element of the capitalist world system. In this sense Lenin solved the enigma of the Russian Revolution with the lapidary formula, “The chain broke at its weakest link.”
A crude illustration: the Great War, the result of the contradictions of world imperialism, drew into its maelstrom countries of different stages of development, but made the same claims on all the participants. It is clear that the burdens of the war would be particularly intolerable for the most backward countries. Russia was the first to be compelled to leave the field. But to tear itself away from the war, the Russian people had to overthrow the ruling classes. In this way the chain of war broke at its weakest link.
Still, war is not a catastrophe coming from outside like an earthquake, but, as old Clausewitz said, the continuation of politics by other means. In the last war, the main tendencies of the imperialistic system of “peace” time only expressed themselves more crudely. The higher the general forces of production, the tenser the competition on the world markets, the sharper the antagonisms and the madder the race for armaments, so much the more difficult it became for the weaker participants. That is precisely why the backward countries assumed the first places in the succession of collapse. The chain of world capitalism always tends to break at its weakest link.” – 국가간의 경쟁과 전쟁 등이 멈추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약한 고리”들이 계속 생겨날 것이라는 예상. 한 국가 안에서의 “불균형 발전”도 마찬가지 (재벌과 중소 기업 사이의 괴리): “While peasant agriculture often remained at the level of the seventeenth century, Russia's industry, if not in scope, at least in type, reached the level of progressive countries and in some respects rushed ahead of them. It suffices to say that gigantic enterprises, with over a thousand workers each, employed in the United States less than 18 per cent of the total number of industrial workers. In Russia it was over 41%. This fact is hard to reconcile with the conventional conception of the economic backwardness of Russia. It does not on the other hand, refute this backwardness, but dialectically complements it.
The same contradictory character was shown by the class structure of the country. The finance capital of Europe industrialised Russian economy at an accelerated tempo. The industrial bourgeoisie forthwith assumed a large scale capitalistic and anti-popular character. The foreign stock-holders moreover, lived outside of the country. The workers, on the other hand, were naturally Russians. Against a numerically weak Russian bourgeoisie, which had no national roots, there stood confronting it a relatively strong proletariat with strong roots in the depths of the people”
러시아의 “복합형 발전”이라는 과정 속에서 외연이 강해도 국내적 민중과의 연결이 약해 강력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러시아 부르주아들이 결국 전제 정권이 물러나는 대로 무산계급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는 논리 – 후진국의 국가의존 외세의존형 자본계급의 약점을 매우 정확하게 꿰뚫어봄. 그러기에 무산계급에 의한 “지속 혁명”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In accordance with its immediate tasks, the Russian Revolution is a bourgeois revolution. But the Russian bourgeoisie is anti-revolutionary. The victory of the Revolution is therefore possible only as a victory of the proletariat. But the victorious proletariat will not stop at the programme of bourgeois democracy: it will go on to the programme of socialism. The Russian Revolution will become the first stage of the Socialist world revolution” (<In Defence of October>, Denmark, 1932).

- 국가와 노동자 민주주의 문제. 문제 – 만약 후진적인 국가의 무산계급을 지도한다는 공산당 그 자체가 억압적인 국가의 골간이 된다면? 여기에서는 “민주주의”가 견제 장치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노동자의 직접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트로츠키는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원칙상 노동자의 생산 과정 통제를 요구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국가의 틀 안에서라면 노동자들의 생산 통제 참여는 “계급간의 협력” 그 이상이 못되고 어차피 부르주아에 의해서 견제 받아 잘 실행될 수 없다고 내다봤음. 즉, 트로츠키에게는 노동자의 생산 통제에서의 참여는 “부르주아 국가 파괴의 첫 단계”, 즉 “국가 권력의 문제”로서만 의미 있음. 비록 부르주아 국가라는 한계가 있어도 생산 민주주의 그 자체의 잠재력을 트로츠키는 과소평가함:
“What state regime corresponds to workers’ control of production? It is obvious that the power is not yet in the hands of the proletariat, otherwise we would have not workers’ control of production but the control of production by the workers’ state as an introduction to a regime of state production on the foundations of nationalization. What we are talking about is workers’ control under the capitalist regime, under the power of the bourgeoisie. However, a bourgeoisie that feels it is firmly in the saddle will never tolerate dual power in its enterprises. workers’ control consequently, can be carried out only under the condition of an abrupt change in the relationship of forces unfavorable to the bourgeoisie and its state. Control can be imposed only by force upon the bourgeoisie, by a proletariat on the road to the moment of taking power from them, and then also ownership of the means of production. Thus the regime of workers’ control, a provisional transitional regime by its very essence, can correspond only to the period of the convulsing of the bourgeois state, the proletarian offensive, and the failing back of the bourgeoisie, that is, to the period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 in the fullest sense of the word.
If the bourgeois is already no longer the master, that is, not entirely the master, in his factory, then it follows that he is also no longer completely the master in his state. This means that to the regime of dual power in the factories corresponds the regime of dual power in the state.
This correspondence, however, should not be understood mechanically, that is, not as meaning that dual power in the enterprises and dual power in the state are born on one and the same day. An advanced regime of dual power, as one of the highly probable stages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 in every country, can develop in different countries in different ways, from differing elements. Thus, for example, in certain circumstances (a deep and persevering economic crisis, a strong state of organization of the workers in the enterprises, a relatively weak revolutionary party, a relatively strong state keeping a vigorous fascism in reserve, etc.) workers’ control of production can come considerably ahead of developed political dual power in a country” (<Workers’ Control of Production>, 1931).
트로츠키는 주로 “부르주아 국가 파괴의 단계”에서의 노동자에 의한 생산 통제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평소”에 노동자들이 공장 운영 위원회에서 직접적 민주주의의 경험을 쌓는 데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경멸적이었음 (“계급간의 협조”) 그리고 “노동자의 국가”가 되면 일단 “노동자의 국가에 의한 국유화”가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것처럼 예상함 – “노동자 국가”의 물신화, “노동자 국가” 안에서의 모순 관계를 보지 못하는, 비변증법적 사고.

국가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한다는 반론에 대해서 트로츠키의 반박: “With the exception of one country, state power throughout the world is in the hands of the bourgeoisie. It is in this, and only in this, that,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proletariat, the danger of state power lies. The proletariat’s historical task is to wrest this most powerful instrument of oppression from the hands of the bourgeoisie. The Communists do not deny the difficulties, the dangers that are connected with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But can this lessen by one iota the necessity to seize power? If the whole proletariat were carried by an irresistible force to the conquest of power, or if it had already conquered it, one could, strictly speaking, understand this or that warning of the syndicalists. Lenin, as is known, warned in his testament against the abuse of revolutionary power. The struggle against the distortions of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has been conducted by the Opposition since its inception and without the need of borrowing from the arsenal of anarchism.
But in the bourgeois countries, the misfortune lies in the fact that the overwhelming majority of the proletariat does not understand as it should the dangers of the bourgeois state. By the manner in which they treat the question, the syndicalists, unwittingly of course, contribute to the passive conciliation of the workers with the capitalist state. When the syndicalists keep drumming into the workers, who are oppressed by the bourgeois state, their warnings about the dangers of a proletarian state, they play a purely reactionary role. The bourgeois will readily repeat to the workers: “Do not touch the state because it is a snare full of dangers to you.” The Communist will say to the workers: “The difficulties and dangers with which the proletariat is confronted the day after the conquest of power – we will learn to overcome them on the basis of experience. But at the present time, the most menacing dangers lie in the fact that our class enemy holds the reins of power in its hands and directs it against us.” (<The Errors in Principle of Syndicalism>, 1929)
국가 위험성에 대한 몰이해는 자본주의 국가의 개량주의자들에게 더 강하며, 소련 안에서는 국가의 관료화에 대해서는 좌파 반대파가 잘 투쟁하고 있다는 것은 이 반박의 논지. 문제 – “좌파 반대파의 투쟁”은 실제로 승산이 없었으며 트로츠키 예상과 달리 스탈린의 독재 국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말았다. 결국 – “국가의 위험성”을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나 반체제 운동 (공산주의 운동) 등에서나 동질적인 것으로 봐야 하지 않나? 그런데, 트로츠키는 이와 같은 시각에 끝내 동의하지 않았음.

- 소련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서: “Dissertations upon “the dictatorship of the bureaucracy over the proletariat” without a much deeper analysis, that is, without a clear explanation of the social roots and the class limits of bureaucratic domination, boil down merely to high-faluting democratic phrases so extremely popular among the Mensheviks. One need not doubt that the overwhelming majority of Soviet workers are dissatisfied with the bureaucracy and that a considerable section, by no means the worst, hates it. However, it is not simply due to repression that this dissatisfaction does not assume violent mass forms; the workers fear that they will clear the field for the class enemy if they overthrow the bureaucracy. The interrelations between the bureaucracy and the class are really much more complex than they appear to be to the frothy “democrats.” The Soviet workers would have settled accounts with the despotism of the apparatus had other perspectives opened before them, had the Western horizon flamed not with the brown color of fascism but with the red of revolution. So long as this does not happen, the proletariat with clenched teeth bears (“tolerates”) the bureaucracy and, in this sense, recognizes it as the bearer of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In a heart to heart conversation, no Soviet worker would be sparing of strong words addressed to the Stalinist bureaucracy. But not a single one of them would admit that the counterrevolution has already taken place. The proletariat is the spine of the Soviet state. But insofar as the function of governing is concentrated in the hands of an irresponsible bureaucracy, we have before us an obviously sick state. Can it be cured? Will not further attempts at cures mean a fruitless expenditure of precious time? The question is badly put. By cures we understand not all sorts of artificial measures separate and apart from the world revolutionary movement but a further struggle under the banner of Marxism. Merciless criticism of the Stalinist bureaucracy, training the cadres of the new International, resurrecting the fighting capacity of the world proletarian vanguard – this is the essence of the “cure.” It coincides with the fundamental direction of historical progress” (<The Class Nature of the Soviet State>, 1933)

트로츠키가 소련 관료계급이 아직도 “지배계급”이 되지 못했다고 보고 그들의 “사회적 기생성”을 폭로해도 그들을 과거의 부르주아와의 동질의 존재로 파악하지 않았음. 즉 “타락된 노동자 국가” 논리. 사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국가의 부활이 두려워서 관료적인 타락을 견디는” 형태는 아니었음. 새로운 국민 국가에서의 사회적 진출의 기회에 많은 노동자들이 신흥 국가에 대한 충성을 느꼈음 – 매우 빠른 사회 진출의 가능성. 1941-45년의 소독 전쟁 이후 – 새로운 국가는 막강한 국민주의적 이데올로기까지 만들어낼 수 있었음. “국가에 의한 대중의 포섭” – 트로츠키가 역시 놓친 부분.

트로츠키 사상의 장점: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의 복합성을 정확하게 파악한 부분, 혁명의 이상에 충실해온 부분. 단점 – “국가/당 등 유사 국가적 조직의 내재적 위험성”에 다소 무감각하고 특히 소련의 국가/당을 끝까지 물신화했음 – 대중의 민주적 자율성의 문제를 잘 간파하지 못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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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사상:

1) 레닌의 생애:
- 가정적 배경 – 외조부 – Aleksander Dmitrievich Blank – 유대계/스웨덴계의 부유한 의사, 정교회로 개종하여 경찰의관으로서 출세, 귀족 신분까지 부여 받았음. 외조부의 부인: 부유한 독일계 상인 가정의 출신 (Groschopf 가문). Blank가는 Kokushkino 라는 농장을 보유했으며, 거기에서 1861년의 농노제 혁파 이전까지 농노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레닌 – 자신이 세습적인 귀족이라는 사실을 적어도 제정 러시아 시절에 숨기려 하지 않았음 – 각종 신청서 등에서 “세습적 귀족”이라고 사인했음. 레닌 아버지 쪽 – 비교적으로 미미한 가문 (농노 출신의 수공업자). 그러나 레닌의 아버지 Ilya Nikolaevich Ulyanov – 교육관료계에서 자수성가하여 일선 교사에서 Simbirsk도(道) 교육감까지 올랐음. 아버지의 品等 – “국가자문관” (State Councillor) – 군대에서의 장군급과 같은 수준. 1886년에 아버지가 죽은 뒤에 가정은 유가족 연금과 Kokushkino농장의 소작료로만 경제 문제 해결. 레닌의 아버지 – “개명 관료” – 아이들을 평등하게 대해주고 가정 잡지 발행해주고 각자에게 자신의 방을 주고, 집안에서 외국어 사용을 장려했음. 레닌 – 늘 학급 우수생이었으며 어릴 때부터 대단한 자신감을 과시했음 – 가정에서 “천재”로 인정됨. 레닌을 “모범생”에서 “혁명가”로 바꾼 경험 – 형 Aleksander의 사형 집행 (1887년) – 황제 암살 음모 혐의. 레닌의 형 – 비상한 정직함과 용기를 보임 (끝까지 반성문 작성을 거부하여 감형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음). 레닌 – 이 기회에 “영웅주의적 투쟁의 한계” 통감, “대중 노선”을 택했음. 형의 사형 집행 이후 – 레닌이 경찰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어 Kazan대학교로부터의 제적 등 각종의 처벌에 시달렸음. 정상적인 대학생이 될 수 없었으며 상트페테르부르그 황립대학고 법학부 “원격 학생” 신분으로 겨우 졸업했음. 주로 독습에 의존했음 – 가장 애호하는 작가 – Chernyshevsky “무엇을 할 것인가?” – 자기 희생적 “혁명적 전위”의 타입을 보여주었음. “민중 노선”이 돼도 레닌은 끝내 그의 형과 같은 “인민주의자”들의 영웅주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듯함 – “수단과 방법을 가릴 일 없는 혁명 전위” 강조 – Vladimir Voitinsky와의 대화에서 1905년에 “혁명을 하얀 장갑을 끼고 할 수 없다. 우리에게 가끔가다 몹쓸 짓을 할 수 있는 이들도 바로 몹쓸 짓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필요하다”. 일종의 “혁명 엘리트 현실주의”.
- 레닌과 Krupskaya 결혼 – “운동권 방식의 결합” – 같이 마르크스주의 노동 운동에 종사해온 부인이 남편과 운동을 함께 하게 됨 – 그런데 외형은 “동지적 결합”이었지만 실제로는 “내조”형에 가까웠음 – 남편의 원고 작업 등 도와주는 일이 주종을 이룸. 1909년 이후 레닌 – Inessa Armand – Krupskaya의 “삼각형 관계” – 세 사람 다 동의했으며 “부르주아적 가족 이상의 타파”와 “혁명적 동지애” 차원에서 문제 삼지 않았음 – 일부일처제 타파의 성공적인 사례.
- 레닌의 재정적인 상황 – 개인 재정과 당 운영비 철저하게 분리했음 – “깔끔한 재정 운영”. 개인 재정 – 어머니 재산에서 나오는 이자 소득 + “당으로부터 주이지는 활동비” (최대한 350스위스 프랑크 – 숙련공 월급보다 다소 높음). 레닌 – “철저한 근대인” – 일체 영수증 등 늘 전부 다 보관했음, 가계부 작성. 당 운영비 – 1905-1907년간 – “은행털이”로 얻어지는 소득 – 1907년7월26일 Tiflis에서의 은행 마차 “털이”가 제일 유명했음 (3명 사망). 이외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출신의 “물주”들의 도움 – Savva Morozov (1905년 자살, 그 유서에 의해 그 재산이 Gor’ky를 통해 볼셰비키당에 귀속됐음) 등. 당 운영비 관리 때문에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의 분쟁 결과 - 1910녀부터 3명의 독일 사민당 지도자 (Zetkin, Kautsky, Mehring)가 러시아 사민주의 운동 활동비 최고 관리자로 임명됐음. 레닌 – 재정 등의 문제에 있어서는 Kausky와 V.Adler 등 독일, 오스트리아 동지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아왔음 – 그 만큼 그들과의 궁극적인 단절은 마음 아픈 일이었음.
- 레닌과 1905년 혁명 – 레닌이 무장 반란 (“무산 계급과 농민계급이 주도할 민주 혁명”)을 조직할 길을 모색하고 있었음. 1905년 – 레닌 – “민주혁명에 있어서의 사민주의자들의 두 개의 전략” 집필, 무장 혁명 준비 지향. 레닌의 급진 노선 – 당에 인기를 끌었음. 1906년말 – 당원의 수는 거의 15만 명을 넘었음. 그 당시의 러시아에서는 제정 정권의 폭정보다는,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무장 투쟁이라 하더라도 차라리 “차악”으로 여겨질 만한 분위기는 팽배했음 – 레닌 급진주의의 “현실적인 근거”.  레닌의 “무장 폭동 노선” – “도시 게릴라전”을 총체적인 무장 반란의 “준비 단계” 내지 ‘보조적인 작전’으로 인식했음. <게릴라전에 대해서> (1906년9월) – 라트비아 사민주의자들의 무장 폭력 노선을 다음과 같이 “모범”으로 제시했음:
“The Lettish Social-Democratic Labour Party (a section of the Russian Social-Democratic Labour Party) regularly issues its paper in 30,000 copies. The announcement columns publish lists of spies whom it is the duty of every decent person to exterminate. People who assist the police are proclaimed “enemies of the revolution”, liable to execution and, moreover, to confiscation of property. The public is instructed to give money to the Social-Democratic Party only against signed and stamped receipt. In the Party’s latest report, showing a total income of 48,000 rubles for the year, there figures a sum of 5,600 rubles contributed by the Libau branch for arms which was obtained by expropriation” (http://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06/gw/index.htm) 민족 모순들과 계급모순이 중첩된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탐정 박살” 등의 잔혹성은 불가피했는지도 모르지만, 과연 현재의 지배계급의 왜곡된 도덕관과 질적으로 다른 생명 존중 위주의 사회주의적인 도덕관이 있는지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게끔 하기도 함.  

2) 1890-1900년대의 독일 사민주의: 현실과 사상의 괴리. 현실 – 체제에의 포섭이 돼감. 사상 – Kautsky – “중소 기업의 경쟁에서의 소멸, 전체 경제가 하나의 커다란 기업 되기” – 독점화 경향 이론을 극단적으로 설명했음. 역시 현실에의 안주의 반영 – 사회주의의 도래를 거의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설명했음 – “不可逆의 사회, 경제적 경향”. 그것보다 훨씬 더 현실 순응주의로 나아간 것은 Bernstein – 노동가치론의 전면적인 부정, 상품의 가치를 “원가 + 이윤 마진”으로만 이해하고 “잉여가치”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했음. Bernstein – 긍정적인 측면이라면 “민주주의”를 ‘무산 계급의 독재” 달성의 수단이라기보다는 노동 운동의 “목표”로 설정한 것 – 즉 사회주의를 “전면적인, 포괄적인 민주주의의 사회”로 이해한 것. 급진주의와 개량주의 사이에 있었던 이론가 – Hilferding - <금융자본론> (1910) –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유착론, 금융자본과 국가 권력의 일체화 경향 – 자국의 금융자본을 위해 무리한 식민지 획득을 마다하지 않는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무력 갈등 가능성의 제고 – “자본주의는 경제적으로 종말을 고하지 않아도 정치적으로 세계 전쟁이라는 통로를 통해 망할 수 있는 것이다”. 레닌 – Kautsky를 일종의 “스승”으로 받들면서도 혁명에 있어서의 “주관적인 요인”, 즉 전위정당의 조직력과 전투성을 훨씬 더 강조하는 등 “개량주의자”들과 노골적인 강등을 빚지 않으면서도 유럽 사민주의의 “급진파”를 이루었다. 또 한 가지 특징 – 서구 중심주의의 일정한 타파 – 비서구 민중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관심 - (1908) – 중국이 “중세적 민란”의 형태를 벗어나 근대적 혁명 운동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예견했음: “In China, too, the revolutionary movement against the medieval order has made itself felt with particular force in recent months. True, nothing definite can yet be said about the present movement’—there is such scanty information about it and such a spate of reports about revolts in various parts of the country. But there can be no doubt about the vigorous growth of the “new spirit” and the “European currents” that are stirring in China, especially since the Russo-Japanese war; and consequently, the old-style Chinese revolts will inevitably develop into a conscious democratic movement.” 그리고 “아시아 혁명”이 러시아 혁명의 핵심적인 우군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음: “The Russian revolution has a great international ally both in Europe and   in Asia, but, at the same time, and for that very reason, it has not only a national, not only a Russian, but also an international enemy” “세계 혁명”의 구도를, “유럽”의 한계를 넘어서 구체화했음.   
3) 제1차세계 대전 – 사민주의 사상의 전환점 – 레닌 - <자본주의 최후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1916) – 제국주의를 “경제결정론적” 입장에서 이해함:
“If it were necessary to give the briefest possible definition of imperialism we should have to say that imperialism is the monopoly stage of capitalism. Such a definition would include what is most important, for, on the one hand, finance capital is the bank capital of a few very big monopolist banks, merged with the capital of the monopolist associations of industrialists; and, on the other hand, the division of the world is the transition from a colonial policy which has extended without hindrance to territories unseized by any capitalist power, to a colonial policy of monopolist possession of the territory of the world, which has been completely divided up.
(…) We must give a definition of imperialism that will include the following five of its basic features:
(1) the concentration of production and capital has developed to such a high stage that it has created monopolies which play a decisive role in economic life; (2) the merging of bank capital with industrial capital, and the creation, on the basis of this “finance capital”, of a financial oligarchy; (3) the export of capital as distinguished from the export of commodities acquires exceptional importance; (4) the formation of international monopolist capitalist associations which share the world among themselves, and (5) the territorial division of the whole world among the biggest capitalist powers is completed. Imperialism is capitalism at that stage of development at which the dominance of monopolies and finance capital is established; in   which the export of capital has acquired pronounced importance; in which the division of the world among the international trusts has begun, in which the division of all territories of the globe among the biggest capitalist powers has been completed”
즉, 레닌이 제국주의를 단순히 “생산, 자본의 집중화,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결합, 자본의 수출, 국제적 독점 자본의 형성, 주요 자본주의 열강 사이의 지구 나누어먹기” 식으로 이해함. 기본적으로 맞는데, 빠진 부분은 근대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Kautsky가 레닌에게 반론을 제기했듯이, 아직 “자본주의의 최후 단계”까지 가지 못하는 후진적 열강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도 이미 침략주의적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함  - 1910년, “한일합방” 그 당시의 일본도 마찬가지, 아직도 중공업마저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했음. 여기에서 침략의 엔진 – (사회의 모든 계급들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보유하는 근대 국가. 근대 국가가 먼저 성립되어 자본가 계급을 탄생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후진 국가에서 (특히 1868년 이후의 일본), 대외 침략의 시작은 근대 국가 탄생의 시점과 같음 (일본 – 1873년 오키나와 병합, 1876년 강화 조약 강요). 근대 국가의 대외 침략 – 물론 자본가 계급을 위해주는 측면이 강하지만 그걸로만 설명되지 않음 (일본 산업 자본의 본격적인 한반도 투자 - 1920년대 후반기부터). 성공적인 침략 – 국가의 “정통성 확립”, 승리 의식을 통한 “민족 만들기” – 일본에서의 “민족/국민 만들기”에서의 청-일,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의 역할. 레닌 – 근대 관료국가의 자율적인 역할 과소 평가, 그리고 총체적으로는 민중에 대한 국가의 포획력, “민족주의적” 주술의 힘을 과소평가했음. 결국 – 본인이 1917년 이후에 만든 “혁명적인” 근대 국가가 일반적인 국가 자본주의 체제로 전락하는 과정에서는 필요한 조치를 거의 취하지 못하고 혁명의 퇴락을 막지 못했음.

4) 레닌의 반군사주의 (anti-militarism) 특징 – 군인들의 “혁명화”에 중점을 둠 – 어떻게 해서 병영에서 혁명적인 선전, 선동을 할 수 있는가 (1907: “Anti-Militarist Propaganda and Young Socialist Workers’ Leagues”).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레닌은 어느 “추상적인 평화주의자”보다도 근대적 전쟁의 사회, 경제적인 배경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있었다. 레닌 – 군수 복합체 (아직은 그 용어는 없었지만 그 뜻임)가 정치에 깊이 개입하여 사실상 “돈벌이로서의 전쟁”을 주도하고 있다고 봤다: “Armaments are considered a national matter, a matter of patriotism; it is presumed that everyone maintains strict secrecy. But the shipyards, the ordnance, dynamite and small-arms factories are international enterprises, in which the capitalists of the various countries work together in duping and fleecing the public of the various countries, and   making ships and guns alike for Britain against Italy, and for Italy against Britain.
An ingenious capitalist set-up! Civilisation, law and order, culture, peace—and hundreds of millions of rubles being plundered by capitalist businessmen and swindlers in ship building, dynamite manufacture, etc.!
Britain is a member of the Triple Entente, which is hostile to the Triple Alliance. Italy is a member of the Triple Alliance. The well-known firm of Vickers (Britain) has branches in Italy. The shareholders and directors of this firm (through the venal press and through venal parliamentary “figures”, Conservative and Liberal alike) incite Britain against Italy, and vice versa. And profit is taken both from the workers of Britain and those of Italy; the people are fleeced in both countries.
Conservative and Liberal Cabinet Ministers and Members of Parliament are almost all shareholders in these firms. They work hand in glove. The son of the “great” Liberal Minister, Gladstone, is a director of the Armstrong concern. Rear-Admiral Bacon, the celebrated naval specialist and a high official at the Admiralty, has been appointed to a post at an ordnance works in Coventry at a salary of £7,000 (over 60,000 rubles). The salary of the British Prime Minister is £5,000 (about 45,000 rubles)” (“Armaments and Capitalism”, 1913).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결정에 대해서는 레닌은 “일본과의 태평양 지역을 둘러싼 전쟁의 준비 작전”, “상비군 증강을 위한 전략”, “민주적인 구호는 오로지 기만일뿐”이라고 매우 정확하게 꿰뚫었다: “On the question of America entering the war I shall say this. People argue that America is a democracy, America   has the White House. I say: slavery was abolished there half a century ago. The anti-slave war ended in 1865. Since then multimillionaires have mushroomed. They have the whole of America in their financial grip. They are making ready to subdue Mexico and will inevitably come to war with Japan over a carve-up of the Pacific. This war has been brewing for several decades. All literature speaks about it. America’s real aim in entering the war is to prepare for this future war with Japan. The American people do enjoy considerable freedom and it is difficult to conceive them standing for compulsory military service, for the setting up of an army pursuing any aims of conquest a struggle with Japan, for instance. The Americans have the example of Europe to show them what this leads to. The American capitalists have stepped into this war in order to have an excuse, behind a smoke-screen of lofty ideals championing the rights of small nations, for building up a strong standing army” (“War and Revolution”, May 1917)
전쟁에 대한 철저한 사회, 경제적인 분석이 가해지는 한편, 혁명적이지 않는 평화 운동을 역시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와 연결시켜 분석한다. 레닌에 의하면 “주류 평화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민주적인 평화 체계”는 기만일뿐, 자본주의가 남아 있으면 전쟁들이 불가피함. 그래서 전쟁 와중에서는 그가 “평화 진영”을 세 가지로 분류함:
“In the realistic politics of the capitalist countries, three kinds of peace sympathies can be seen:
(1) The more enlightened millionaires wish an early peace because they are afraid of revolutions. They have soberly and correctly described any “democratic” peace (without annexations, but with limited armaments, etc.) as Utopian under capitalism.
This philistine Utopia is being advocated by the opportunists, the adherents of Kautsky, and the like.
(2) The unenlightened masses of the people (the petty bourgeois, semi-proletarians, part of the workers, etc.) whose desire for peace is very vague, are thereby expressing a growing protest against the war and a growing but as yet vague revolutionary sentiment.
(3) The revolutionary Social-Democrats, the enlightened advance guard of the proletariat, are attentively studying the sentiments of the masses, utilising the latter’s growing striving for peace, not in order to bolster the vulgar utopias of a “democratic” peace under capitalism, not in order to encourage hopes being placed in the philanthropists, he authorities, and the bourgeoisie., but to bring clarity into vague revolutionary sentiments, to enlighten the masses with a thousand facts of pre-war politics; basing that work on the experience of the masses and on their sentiments, they are out to prove systematically, steadfastly and unswervingly the need for mass revolutionary action against the bourgeoisie and the governments of their respective countries as the only road towards democracy and socialism” (1915, “Bourgeois Philanthropists and Revolutionary Social-Democracy”)
“주류 평화주의”의 유토피아적인 성격에 대한 레닌의 지적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데,  “폭력 혁명”을 지향하지 않는 반자본주의적인 평화 운동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레닌이 무관심했다. 그에게는 “영구적인 평화”로의 유일한 길은 “세계 전쟁을 계급간의 내전으로” 바꾸는 일이었음.  

레닌 – 제1차세계 대전의 참극을 목도하면서 새로운 “계급간의 내전”을 이미 이론적으로 구상한다. 그에게는 장기적인 내전이란 성공적인 혁명의 불가피한 결과다. 사회주의가 먼저 한 나라에서 승리할 경우, 이 나라는 다른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의로운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레닌으로서는 “역사의 당연한 논리” – 대량적인 군사적 폭력의 지속을 통한 “해방의 역사의 전개”를 예상한다:
“Civil war is just as much a war as any other. He who accepts the class struggle cannot fail to accept civil wars, which in every class society are the natural, and under certain conditions inevitable, continuation, development and intensification of the class struggle. That has been confirmed by every great revolution. To repudiate   civil war, or to forget about it, is to fall into extreme opportunism and renounce the socialist revolution.
(…) The victory of socialism in one country does not at one stroke eliminate all wars in general. On the contrary, it presupposes wars. The development of capitalism proceeds extremely unevenly in different countries. It cannot be otherwise under commodity production. From this it follows irrefutably that socialism cannot achieve victory simultaneously in all countries. It will achieve victory first in one or several countries, while the others will for some time remain bourgeois or pre-bourgeois. This is bound to create not only friction, but a direct attempt on the part of the bourgeoisie of other countries to crush the socialist state’s victorious proletariat. In such cases, a war on our part would be a legitimate and just war. It would be a war for socialism, for the liberation of other nations from the bourgeoisie. Engels was perfectly right when, in his letter to Kautsky of September 12, 1882, he clearly stated that it was possible for already victorious socialism to wage “defensive wars”. What he had in mind was defense of the victorious proletariat against the bourgeoisie of other countries.
Only after we have overthrown, finally vanquished and expropriated the bourgeoisie of the whole world, and not merely in one country, will wars become impossible. And from a scientific point of view it would be utterly wrong—and utterly unrevolutionary—for us to evade or gloss over the most important things: crushing the resistance of the bourgeoisie—the most difficult task, and one demanding the greatest amount of fighting, in the transition to socialism. The “social” parsons and opportunists are always ready to build dreams of future peaceful socialism. But the very thing that distinguishes them from revolutionary Social-Democrats is that they refuse to think about and reflect on the fierce class struggle and class wars needed to achieve that beautiful future”.  (1916, “The Military Programme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 즉, 러시아 내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격렬한 내전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이미 설파하는 것임.

집권 이후의 레닌 – 1917년12월20일 – 비밀경찰 (ChK) 창설, 1920년 – 중앙 및 지방 비밀경찰은 약 3만 명에 가까운 요원을 확보했음; 1918년5월에는 전국적인 징병제 부활 (그전에는 “노동자 민병대”들은 혁명의 기둥이었음) – 약 5만 명의 구 제정 러시아 군대의 장교들을 동원 내지 초빙하여 이 새로운 군대의 “기간병”으로 삼았음. 1924년까지는 공산당의 “정치 위원” (Komissar)은 장교를 감시해야 했지만 그 후에는 군대는 다시 한 번 “장교 권력 일원주의”로 귀결됐음. 졸병들의 80% - 농민 출신. 농민은 – “무산계급 독재 국가”에서 아예 법적으로까지 평등권을 누리지 못했음 – 도심지역에서 중앙 소비에트 대표 1사람을 2만5천 명이 뽑았지만 지방 (농촌 지대)에서는 12만5천 명이 뽑았음 – 법제화된 차별대우. 대신에 군복무를 마친 농민에 대해서는 국가는 각종의 혜택을 부여했음 (대학교 입학 우선권 등) – “準노동자” 신분 – 군 복무는 “입신출세의 디딤돌”로 인식되게 됐음 – 초기 소비에트 러시아 대다수 제도권 남성의 공통 경험. 사회의 군사화와 당의 군사화 - 1919년에 50만 명의 전체 공산당 당원 중에서는 약 절반은 군복무를 여러 형태로 하고 있었음. 군 복무 – 농민들을 위해 “입당 – 출세”의 첩경. 결국, 레닌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내전의 결과 – 철저하게 군사적으로 조직된 “총동원 사회”.

레닌 사상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 – 한편으로는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탁월한 급진적인 분석.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의 극복 방안으로서 레닌이 제안한 것은 단순히 근대적 “총동원 전쟁”의 “혁명적” 연장에 불과했음 – 근대 자본주의적 수단으로 근대 자본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입장의 모순성. 레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만성”을 폭로한 것은 상당부분 타당하지만 그에게는 노동계급의 자율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없었으며 “사회주의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자각은 매우 희박했다. 결국 1917년10월 혁명 이후에 그와 그의 당이 사실상 중앙집권적인 전시 국가 자본주의적 체계를 확대, 심화시켜 부활시킨 것은 – 결코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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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5-1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퍼가겠습니다. 박노자 선생의 글을 요약하신 건가요? ㅎ

yoonta 2007-05-11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약아니구요. 그냥 퍼온겁니다.^^ 박노자선생 블로그에 올라온 글입니다.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
 

 

들뢰즈 맑스주의 』5장 '노동거부'에

관하여


승준(reds), 자율평론 상임만사


5장 노동거부

이 장은 ‘어떻게 사회적 공장이라는 닫힌 공간 속에서 그에 적합한[소수적] 정치를 발전시킬 것인가’라는 주제 하에서, 노동거부의 정치학을 검토하고, 오뻬라이스모의 ‘관점의 전환’과 ‘계급구성’ 개념에 대한 일련의 해석적 진단을 내린 후, 이후 아우또노미아 운동의 3가지 실천적 활동인 노동거부, 사회적 임금, 문화창조의 기법 등을 (쏘번의 용어로는) ‘사회적 탈주선들과의 현대적 교전’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한다.

오뻬라이스모의 정치학은 ‘민중의 현전’을 전제삼는 정통맑스주의나 사회민주주의 모델이 실제적 포섭에서는 자본주의적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처럼 ‘민중이 없는 소수적 조건의 긍정’에서 출발하는 오뻬라이스모의 언어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그것이 다수언어인 ‘정상적 담론’과 대립할 뿐만 아니라, 소수문학의 특징적 스타일인 상황적 교전 속에서 출현하기 때문이다.





노동거부

‘노동자들은 자기조직화 속에서 코뮤니즘의 본질을 실현할 것’이라는 평의회주의와, ‘자주관리’를 ‘노동에 대한 사회주의적 긍정의 다른 판본’으로 이해하는 경우는 모두 코뮤니즘을 실현할 집단이 확정된 것으로 전제하며, 또한 ‘노동’의 문제를 ‘관리’의 문제로 오해한 것이다. 이때 이들은 실제적 포섭에서 노동이 이미 언제나 자본으로 기능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다. 이 점에서 뜨론띠는 노동의 형식이나 기능, 그리고 노동의 주체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혁명적 정치의 기초조건이며, 정치는 ‘외적’ 통제에 대항하는 노동의 갱생이 아니라 노동의 거부이자 노동자 주체의 거부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거부는 사회적 공장의 생산체제 내부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창의적 실천을 향한 추진력이자, 프롤레타리아적 구성의 양식일 수 있다.


계급구성, 그리고 관점의 역전

‘계급구성’1)은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요인들을 병합하는 양극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이다. 오뻬라이스모는 계급을 “역사적 변형가능성의 맥락 속에 틀”지우며, “동력학과 힘의 장에 연결”시키며, 이때 계급구성은 특정한 사물을 지칭하지 않는 하나의 구성과정을 지시한다. 그래서 계급구성론은 구성의 정치적 형식·변이·창조들(그리고 실천들)에 특별한 강조점을 두면서, ‘관점의 역전’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관점의 역전’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 뜨론띠(그리고 ꡔ제국ꡕ의 하트·네그리)는 노동계급이라는 독립된 주체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본’과 ‘투쟁하는 노동계급’이라는 양극적 전쟁게임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투쟁이 창조성의 원리 자체가 됨에 따라 자본으로부터의 특정한 독립을 가정하게 되며 그로 인해 투쟁은 보편적인 방식으로 제시되게 된다. ⓑ 네그리는 한 때 이러한 관점의 역전을 ‘노동자주의의 썩은 변증법’이라고 비판2)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가 본 것처럼 ‘투쟁의 포획의 주기 자체에 대한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의 ‘불확정적[우연적]’ 성격에 있는 것이다. 즉 그에게 투쟁은 자율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운동을 자율적 생산으로 나아가도록 강제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 쏘번이 걷는 길 : 저항과 자본을 이분법 속에서 이해하거나 저항이 생산적 자율성을 향한 운동을 유발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관점이 역전이 어떻게 더욱더 소수적이며 프롤레타리아적인 조건 속에서 제기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즉 권력에 대한 다소 취약한 반응으로 상정된 푸코의 저항모델보다 욕망하는 생산의 우선성에 대한 들뢰즈·가따리의 강조를 따르는 것이 더 유효하다. 들뢰즈에게 탈주선은 어떤 아상블라주로부터의 탈주라기보다는 각각의 아상블라주가 그 위에 배치되는 발명력이다. 자본주의적 사회체는 투쟁과 저항의 결과로서만 재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많은 속성들과 그것의 다양한 탈주선들의 결과로서 재배치된다. 만약 우리가 관점의 역전을 탈주선의 맥락 속에서 생각하면, 정치적 실천은 순수한 [독립적·자율적, 혹은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찾거나 긍정할, 혹은 통일된 저항의 힘을 제안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정치적 실천은 그들의 탈주선을 따라가면서, 그리고 노동의 체제와 그것들에 내재하는 등가물을 탈영토화하면서, 사회적인 것을 통해 많은 실천·욕망·발명·필요들과 교전해야만 한다. 이러한 접근은 여전히 도주의 과정에 존재론적·인식론적 우선권을 부여한다. ‘관점역전’테제의 결정적 시험은 역사적 변화에 대한 총체화하는 설명이라는 그것의 메타차원들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이 계급구성과 투쟁의 형태들의 특유성 및 세부에 대한 강렬한 탐구를 자극하고 또 그것과의 적극적 교전을 자극한다는 점에 있다. 라이트는 오뻬라이스모에게서 ‘정치적 조급성’이 보인다고 말하는데, 그 원인은 관점역전테제의 ‘약한 판본’이 가진 문제점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즉 투쟁의 자율적 성격은 그것이 출현할 때마다 무비판적 긍정을 야기한다.

- 약한 개념화와 강한 개념화 : 홀로웨이는 자신의 견해가 관점역전테제의 ‘약한 판본’(‘자본은 노동계급 투쟁에 대한 반작용이다’, ‘노동계급은 자본 내부에서-그것에 대립하는 힘’)이라고 말하지만, 쏘번은 ‘강한 판본’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 “자본이란 노동계급의 생산물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며 따라서 매분매초마다 그 재생산을 노동계급에게 의존한다.”


자기가치화

- 차이와 독립 : 네그리는 “프롤레타리아적 자기가치화를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과정의 총체성에 대한, 그리고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으로 제시하며, 그 ‘대안’적 장소를 3가지 방법론으로 기술한다. ⓐ 노동자운동에 대한 ‘타자성’, ⓑ 자본주의적 발전으로부터의 ‘탈구조화와 재구성’으로 이해되는 분리관계, ⓒ 규범적인 자본주의 문화의 형식·실천·언어들과의 분리. 이러한 규정은 그것의 장점을 별도로 하면, 네그리의 최근 작품에서 드러나는 문제점과 연결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신과 불연속성의 과정으로, 그리고 실제로 지속적으로 탈구조화하는 자본주의적 관계로 제시됨에도 불구하고, 그 활동의 내용은 하나의 해방된 주체성으로서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향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기가치화는 노동계급의 독립적 존재론의 긍정이 된다. 네그리는 사회적인 것 자체(포섭된 대항문화)를 자율적 창조성의 장소쯤으로 넘겨짚는다.

- 차이·필요 그리고 임금 : 필요(혹은 욕구)들은 삶의 형식이자, 자본주의적 관계들과 가치들 속에 휘말려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정치의 결정적인 장소이다. 그래서 자기가치화의 정치는 노동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넘어 사회화의 지평 전체를 덮을 정도로 확장한다. 자기가치화는 욕구들의 증식과정이자 욕구들의 공리화의 파괴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점에서 ꡔ맑스를 넘어선 맑스ꡕ의 네그리는 자기가치화를 사회적 임금의 확장에 대한 강조와 결합시킴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소수적 실천으로 새기고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유효하다. 그것은 계급구성의 다양한 소수자들의 ‘작은 계략들’을 사회적 전체와 연결시키는 일종의 경계잇기 때문이며, 새로운 소수적 욕구들과 스타일들을 발전시키는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 사회적 노동자와 다중 : 후기의 네그리에게서는 과도하게 일반화된 생산의 지평과 다중의 이론을 위해 계급구성의 특유성과 복잡성을 평면화하는 경향이 있는 하나의 종합을 탐지할 수 있다. 이것이 문제일 것이다. 만일 사회적 노동자 개념이 소수적, 프롤레타리아적 방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허구적 종합을 필요로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특유한 환경 속에서 정치적 배치의 복잡성과의 교전을 피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유용한 정치적 형상으로 그려질 수 있는데 말이다. ‘노동거부’는 네그리가 말했던 대로 ‘자살적 자기파괴’가 아니며, 자본주의적 형성체에 내재하는 공리화하는 관계들에의 비판적 개입이라는 점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노동이 존엄성이라는 네그리의 테제는 탈영토화를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승]


문제제기

- 쏘번이 개념적 강조점을 둔 ‘탈주선’과 맑스·네그리의 ‘산노동’의 차이는 무엇인가? 혹시 쏘번은 work와 labor의 의미상의 차이를 너무 가볍게 넘기는 것은 아닌가? 네그리에게서 ‘긍정’의 개념을 혹시 쏘번은 자본주의 안에서의 ‘자율적 주체성’의 긍정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나로서는 변증법을 완전히 탈각하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composition’개념과 ‘constitution’은 번역상이 아니라 개념사용의 차원에서도 구분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컨대 ꡔ혁명의 만회ꡕ의 ‘고고학과 기획’의 구절들이나 혹은 예컨대 제국의 서술방식이 고려되거나 ‘정치(학)’에 대한(ꡔ구성권력ꡕ이나 ꡔ디오니소스의 노동ꡕ의) 네그리의 관심이 고려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 부정적 방식의 문제제기 : 투쟁의 ‘불확정성’이 문제라면, ‘교전’의 광의적 사용은 어찌해야 하는가?

- 쏘번이 홀로웨이를 빌어 말한 관점역전테제에 대한 ‘강한 판본’과 ‘약한 판본’은 양립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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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급구성이라는 말로, 나는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성격들의 결합을 의미한다. ... (1) 노동-능력의 .. 역사적으로 주어진 구조. (2) 그 자신의 독립적 동일성을 향하는, 필요들과 욕망들이 굳어진 일정한 수준으로서의, 역동적 주체로서의, 적대적 힘으로서의 노동계급” (네그리, ꡔ혁명의 만회ꡕ)


2) “프롤레타리아 투쟁들이 지속적으로 자본주의적 통제형식들의 재구조화를 유발하며 그것이 다시 계급의 새로운 주체적 윤곽과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불확정적으로) 대면한다고 보는 연결관계는 결정적으로 붕괴되었다.”

▒▒The Autonomy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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