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맑스주의 』5장 '노동거부'에

관하여


승준(reds), 자율평론 상임만사


5장 노동거부

이 장은 ‘어떻게 사회적 공장이라는 닫힌 공간 속에서 그에 적합한[소수적] 정치를 발전시킬 것인가’라는 주제 하에서, 노동거부의 정치학을 검토하고, 오뻬라이스모의 ‘관점의 전환’과 ‘계급구성’ 개념에 대한 일련의 해석적 진단을 내린 후, 이후 아우또노미아 운동의 3가지 실천적 활동인 노동거부, 사회적 임금, 문화창조의 기법 등을 (쏘번의 용어로는) ‘사회적 탈주선들과의 현대적 교전’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한다.

오뻬라이스모의 정치학은 ‘민중의 현전’을 전제삼는 정통맑스주의나 사회민주주의 모델이 실제적 포섭에서는 자본주의적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처럼 ‘민중이 없는 소수적 조건의 긍정’에서 출발하는 오뻬라이스모의 언어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그것이 다수언어인 ‘정상적 담론’과 대립할 뿐만 아니라, 소수문학의 특징적 스타일인 상황적 교전 속에서 출현하기 때문이다.





노동거부

‘노동자들은 자기조직화 속에서 코뮤니즘의 본질을 실현할 것’이라는 평의회주의와, ‘자주관리’를 ‘노동에 대한 사회주의적 긍정의 다른 판본’으로 이해하는 경우는 모두 코뮤니즘을 실현할 집단이 확정된 것으로 전제하며, 또한 ‘노동’의 문제를 ‘관리’의 문제로 오해한 것이다. 이때 이들은 실제적 포섭에서 노동이 이미 언제나 자본으로 기능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다. 이 점에서 뜨론띠는 노동의 형식이나 기능, 그리고 노동의 주체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혁명적 정치의 기초조건이며, 정치는 ‘외적’ 통제에 대항하는 노동의 갱생이 아니라 노동의 거부이자 노동자 주체의 거부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거부는 사회적 공장의 생산체제 내부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창의적 실천을 향한 추진력이자, 프롤레타리아적 구성의 양식일 수 있다.


계급구성, 그리고 관점의 역전

‘계급구성’1)은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요인들을 병합하는 양극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이다. 오뻬라이스모는 계급을 “역사적 변형가능성의 맥락 속에 틀”지우며, “동력학과 힘의 장에 연결”시키며, 이때 계급구성은 특정한 사물을 지칭하지 않는 하나의 구성과정을 지시한다. 그래서 계급구성론은 구성의 정치적 형식·변이·창조들(그리고 실천들)에 특별한 강조점을 두면서, ‘관점의 역전’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관점의 역전’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 뜨론띠(그리고 ꡔ제국ꡕ의 하트·네그리)는 노동계급이라는 독립된 주체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본’과 ‘투쟁하는 노동계급’이라는 양극적 전쟁게임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투쟁이 창조성의 원리 자체가 됨에 따라 자본으로부터의 특정한 독립을 가정하게 되며 그로 인해 투쟁은 보편적인 방식으로 제시되게 된다. ⓑ 네그리는 한 때 이러한 관점의 역전을 ‘노동자주의의 썩은 변증법’이라고 비판2)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가 본 것처럼 ‘투쟁의 포획의 주기 자체에 대한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의 ‘불확정적[우연적]’ 성격에 있는 것이다. 즉 그에게 투쟁은 자율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운동을 자율적 생산으로 나아가도록 강제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 쏘번이 걷는 길 : 저항과 자본을 이분법 속에서 이해하거나 저항이 생산적 자율성을 향한 운동을 유발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관점이 역전이 어떻게 더욱더 소수적이며 프롤레타리아적인 조건 속에서 제기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즉 권력에 대한 다소 취약한 반응으로 상정된 푸코의 저항모델보다 욕망하는 생산의 우선성에 대한 들뢰즈·가따리의 강조를 따르는 것이 더 유효하다. 들뢰즈에게 탈주선은 어떤 아상블라주로부터의 탈주라기보다는 각각의 아상블라주가 그 위에 배치되는 발명력이다. 자본주의적 사회체는 투쟁과 저항의 결과로서만 재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많은 속성들과 그것의 다양한 탈주선들의 결과로서 재배치된다. 만약 우리가 관점의 역전을 탈주선의 맥락 속에서 생각하면, 정치적 실천은 순수한 [독립적·자율적, 혹은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찾거나 긍정할, 혹은 통일된 저항의 힘을 제안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정치적 실천은 그들의 탈주선을 따라가면서, 그리고 노동의 체제와 그것들에 내재하는 등가물을 탈영토화하면서, 사회적인 것을 통해 많은 실천·욕망·발명·필요들과 교전해야만 한다. 이러한 접근은 여전히 도주의 과정에 존재론적·인식론적 우선권을 부여한다. ‘관점역전’테제의 결정적 시험은 역사적 변화에 대한 총체화하는 설명이라는 그것의 메타차원들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이 계급구성과 투쟁의 형태들의 특유성 및 세부에 대한 강렬한 탐구를 자극하고 또 그것과의 적극적 교전을 자극한다는 점에 있다. 라이트는 오뻬라이스모에게서 ‘정치적 조급성’이 보인다고 말하는데, 그 원인은 관점역전테제의 ‘약한 판본’이 가진 문제점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즉 투쟁의 자율적 성격은 그것이 출현할 때마다 무비판적 긍정을 야기한다.

- 약한 개념화와 강한 개념화 : 홀로웨이는 자신의 견해가 관점역전테제의 ‘약한 판본’(‘자본은 노동계급 투쟁에 대한 반작용이다’, ‘노동계급은 자본 내부에서-그것에 대립하는 힘’)이라고 말하지만, 쏘번은 ‘강한 판본’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 “자본이란 노동계급의 생산물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며 따라서 매분매초마다 그 재생산을 노동계급에게 의존한다.”


자기가치화

- 차이와 독립 : 네그리는 “프롤레타리아적 자기가치화를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과정의 총체성에 대한, 그리고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으로 제시하며, 그 ‘대안’적 장소를 3가지 방법론으로 기술한다. ⓐ 노동자운동에 대한 ‘타자성’, ⓑ 자본주의적 발전으로부터의 ‘탈구조화와 재구성’으로 이해되는 분리관계, ⓒ 규범적인 자본주의 문화의 형식·실천·언어들과의 분리. 이러한 규정은 그것의 장점을 별도로 하면, 네그리의 최근 작품에서 드러나는 문제점과 연결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신과 불연속성의 과정으로, 그리고 실제로 지속적으로 탈구조화하는 자본주의적 관계로 제시됨에도 불구하고, 그 활동의 내용은 하나의 해방된 주체성으로서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향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기가치화는 노동계급의 독립적 존재론의 긍정이 된다. 네그리는 사회적인 것 자체(포섭된 대항문화)를 자율적 창조성의 장소쯤으로 넘겨짚는다.

- 차이·필요 그리고 임금 : 필요(혹은 욕구)들은 삶의 형식이자, 자본주의적 관계들과 가치들 속에 휘말려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정치의 결정적인 장소이다. 그래서 자기가치화의 정치는 노동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넘어 사회화의 지평 전체를 덮을 정도로 확장한다. 자기가치화는 욕구들의 증식과정이자 욕구들의 공리화의 파괴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점에서 ꡔ맑스를 넘어선 맑스ꡕ의 네그리는 자기가치화를 사회적 임금의 확장에 대한 강조와 결합시킴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소수적 실천으로 새기고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유효하다. 그것은 계급구성의 다양한 소수자들의 ‘작은 계략들’을 사회적 전체와 연결시키는 일종의 경계잇기 때문이며, 새로운 소수적 욕구들과 스타일들을 발전시키는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 사회적 노동자와 다중 : 후기의 네그리에게서는 과도하게 일반화된 생산의 지평과 다중의 이론을 위해 계급구성의 특유성과 복잡성을 평면화하는 경향이 있는 하나의 종합을 탐지할 수 있다. 이것이 문제일 것이다. 만일 사회적 노동자 개념이 소수적, 프롤레타리아적 방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허구적 종합을 필요로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특유한 환경 속에서 정치적 배치의 복잡성과의 교전을 피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유용한 정치적 형상으로 그려질 수 있는데 말이다. ‘노동거부’는 네그리가 말했던 대로 ‘자살적 자기파괴’가 아니며, 자본주의적 형성체에 내재하는 공리화하는 관계들에의 비판적 개입이라는 점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노동이 존엄성이라는 네그리의 테제는 탈영토화를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승]


문제제기

- 쏘번이 개념적 강조점을 둔 ‘탈주선’과 맑스·네그리의 ‘산노동’의 차이는 무엇인가? 혹시 쏘번은 work와 labor의 의미상의 차이를 너무 가볍게 넘기는 것은 아닌가? 네그리에게서 ‘긍정’의 개념을 혹시 쏘번은 자본주의 안에서의 ‘자율적 주체성’의 긍정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나로서는 변증법을 완전히 탈각하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composition’개념과 ‘constitution’은 번역상이 아니라 개념사용의 차원에서도 구분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컨대 ꡔ혁명의 만회ꡕ의 ‘고고학과 기획’의 구절들이나 혹은 예컨대 제국의 서술방식이 고려되거나 ‘정치(학)’에 대한(ꡔ구성권력ꡕ이나 ꡔ디오니소스의 노동ꡕ의) 네그리의 관심이 고려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 부정적 방식의 문제제기 : 투쟁의 ‘불확정성’이 문제라면, ‘교전’의 광의적 사용은 어찌해야 하는가?

- 쏘번이 홀로웨이를 빌어 말한 관점역전테제에 대한 ‘강한 판본’과 ‘약한 판본’은 양립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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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급구성이라는 말로, 나는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성격들의 결합을 의미한다. ... (1) 노동-능력의 .. 역사적으로 주어진 구조. (2) 그 자신의 독립적 동일성을 향하는, 필요들과 욕망들이 굳어진 일정한 수준으로서의, 역동적 주체로서의, 적대적 힘으로서의 노동계급” (네그리, ꡔ혁명의 만회ꡕ)


2) “프롤레타리아 투쟁들이 지속적으로 자본주의적 통제형식들의 재구조화를 유발하며 그것이 다시 계급의 새로운 주체적 윤곽과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불확정적으로) 대면한다고 보는 연결관계는 결정적으로 붕괴되었다.”

▒▒The Autonomy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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