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하게 살기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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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이 쓴 새 책이 나왔다는 신문기사를 읽으며 여간 설레지 않았습니다. 마침 지난 5월에는 이오덕, 권정생, 하이타니겐지로 선생님의 삶과 책을 전시하는 '아이처럼 살다' 전시회가 서울도서관에서 열리기도 하였지요. 


'온 삶을 아이들처럼 살다 간' 세 분을 모두 좋아합니다만, 어쩐지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의 작품이 가장 끌리더군요. '아이처럼 살다' 전시회에 갔더니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을 일컬어 "상냥함을 태양처럼 품고 산 사람"이라고 하였더군요. 


그가 쓴 책들에서 건져낸 표현 같더군요. <상냥하게 살기>, <태양의 아이> 같은 책 제목들이 연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하는 <상냥하게 살기>는 "일본의 대표 작가이자 교육실천가였던 저자가 세상에 대해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던 40대 무렵에 발표한 64편의 글을 모은 산문집"입니다. 


자급자족 생활을 위해 아와지 섬으로 귀농한 뒤에 경험하는 초보 농사꾼의 실패와 성공담, 농업을 천대하는 정부 정책, 교과서 왜곡과 헌법 개정에 대한 비판적 입장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경험하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어린이 문학작품에서 알아챌 수 없었던,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의 일본 사회와 정치에 대한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특히 5.18 광주민중항쟁과 서준식, 서승씨 간첩조작 사건을 통해 애국심과 통일에 관하여 쓴 글을 읽을 때는 놀랍고도 서글펐습니다. 



자연이 사람을 상냥하게 만든다


이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어는 역시 '상냥함'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상냥함은 그냥 친절함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자연과의 만남,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되는 마음가짐 같은 것입니다. 


"밭을 갈고 채소를 자급자족하면서 나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 앞으로 하나하나 이야기할 생각인데, 모든 생명은 둘도 없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내 안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다. 여태껏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보아도 그것이 생명의 집합체이며 세상의 모든 생명은 대등한 관계로 이어져 있기에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 <상냥하게 살기> 본문 중에서


그는 아와지 섬으로 들어와 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상냥해진다' 하더군요. 섬과 도시 사이를 바다가 막아주기 때문에 '상냥해지는 것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책에는 떠돌이 닭과 병아리들을 함께 키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떠돌이 닭이 병아리들이 병아리들의 대리모가 되어주면 좋겠다는 기대는 빗나가고 말지만 서로 싸우거나 괴롭히는 일이 생기지도 않습니다. 


"자연 그 자체로 살아가는 동물은 자기 생명을 지키는 일에는 냉혹하리만큼 가차 없지만 다른 생명에게 비뚤어진 간섭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 <상냥하게 살기> 본문 중에서


하이타니 겐지로가 직접 유정란을 부화시킨 병아리들을 키우는데, 이웃집 농부가 알을 품던 닭 한 마리를 데려다주면서 생긴 일입니다. 자연의 섭리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 살아가는 사람의 삶, 그리고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모습이 이처럼 다릅니다. 그 까닭은 사람이 자연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1934년생인 하이타니 겐지로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밀'은 가난의 기억으로 남은 농작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제비가 주식이었고 볶은 밀이 귀한 간식이었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만이 가지는 밀밭에 대한 추억이 있더군요,


"밀기울을 물에 풀어 끓여 먹은 적도 있다. 아무리 없이 살던 시절이라지만 정말로 먹기가 힘들었다. 그걸로 한 끼를 때워야 할 때면 눈물이 복받쳤다. 그 눈물을 보고 더 힘들어했던 건 부모님이었으리라." - <상냥하게 살기> 본문 중에서


섬에 와서 처음 밀농사를 지어 수확을 앞두고 있을 때 어린 시절 밀에 얽힌 추억들을 회상하면 쓴 글입니다. 밀 이삭을 뭉쳐 넣어 껌처럼 씹던 추억으로부터 어머니를 도와 맷돌을 돌리던 기억으로까지 이어지더군요. 


싼 값에 팔린다는 것은 누군가 그 희생을 치른다는 것


이 책에는 섬으로 귀농하여 살면서 경험하는 농사이야기가 많습니다만, 농사를 지으며 일어나는 의식의 변화과정도 흥미롭습니다. '마을 경제2'라는 글에는 싼 것이 좋은 것이라고 믿었던 생각이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시에서 살면 무조건 값싼 물건이 최고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싼 것이 최고라는 사고방식에는 큰 함정이 있다. 몇몇 사람의 희생으로 물건값이 싸졌는데도 그런 물건을 사는 것은 죄라는 의식이 없다면 그 사회는 타락하고 만다." - <상냥하게 살기> 본문 중에서


얼마 전 읽은 야마오 산세이의 책에서도 이런 글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도쿄에서 살다가 자급자족을 하기 위해 야쿠시마로 귀농한 야마오 산세이 역시 어느 날 가게에서 '야자 잎 모자'를 헐값에 사면서 수공예로 모자를 만든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는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하이타니 겐지로 역시 농산물 값이 너무 싸고 농민들이 바라지 않는데도 유통과정에서 투기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음식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고 고백합니다. 농산물 값이 싸다는 것은 어떤 농민이 그 희생을 치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슈퍼에 파는 깨끗하게 손질되어 진열된 채소의 이면에는 농민들의 눈물이 숨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밥풀 하나도 남기지 못하게 하던 내 아버지도 '쌀 한 톨이 농부의 땀 한 방울'이라고 가르치셨지요. 바로 이런 깨달음도 그가 말하는 '상냥함'의 원류입니다. 



상냥함의 원류는 자연과 아이들


하이타니 겐지로가 말하는 상냥함의 또 다른 원류는 아이들입니다. 이 책의 2부는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이들의 삶과 아이들이 쓴 글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인간적인 상냥함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가 어떻게 체득되는지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생활과 삶을 통해서 체득되는데, 이때 생활이란 물질적인 풍요여부와 상관없이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과정을 말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생활과 자신이 단단히 이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더 없이 상냥해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모가 권위만 휘두르거나 아이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할 경우 단절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잠깐 언급하였던 것처럼 이 책에는 하이타니 겐지로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레이건과 전두환사이에 오고 간 '인권보다 안보가 우선'이라는 공동 성명서 읽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과연 무엇이 살아 있는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입니까. 하루 삼시 세끼 끼니만 이어가면 사는 것입니까? 도대체 한 나라에서 어린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백 수천 명이 자기 나라 군인들한테 희생되어 피를 흘려가며 쓰러져 죽어 가는데 나만, 우리 식구만 무사하면 된다는 말입니까?'라고 광주사태에 항의하고 분신자살을 시도한 젊은 노동자 김종태 씨의 숭고한 민족애는 뭐가 되는가." - <상냥하게 살기> 본문 중에서


책을 읽다 한국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놀랐고, 저자가 5.18광주민중항쟁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웠습니다. 아마 한국인들 중에도 5.18광주민중항쟁은 알아도 김종태씨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또 재일교포 간첩단(서준식, 서승 형제) 사건으로 온갖 고초를 겪었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읽으며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그가 쓴 책을 여러 권 읽었지만 하이타니 겐지로가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애국심이란 단순히 적국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만 아니다


하이타니 겐지로는 두 아들이 죽음 목전에까지 가는 고초를 겪은 서준식, 서승 형제 어머니 오기순씨가 조국을 원망하지 않고 조국의 국민들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조국애'란 무엇인가 하고 반문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애국심은 가상의 적국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애국심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장애인이 웃는 얼굴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려는 마음, 길을 걷다가 나무 그늘에서 쉴 수 있는 나라를 만들려는 마음을 우리는 애국심이라고 부른다." - <상냥하게 살기> 본문 중에서


전쟁이 났을 때 가장 먼저 고통 받는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나라를 만들려는 마음이 애국심이고, 정치가들과 부도덕한 기업들의 부정부패를 뿌리 뽑으려는 마음이야말로 애국심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민중에게는 깊은 인간애와 높은 윤리의식이 있는데 나라의 지도자들에게는 없다는 점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호전적인 정치가들을 낳는 풍토까지 똑같은 것이 너무 슬픈 일이라고도 이야기 하더군요. 


하이타니 겐지로는 '오키나와'에 대해서도 어떤 부채의식 같은 미안함 혹은 애틋한 마음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마오 산세이의 책에서도 오키나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공감대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오키나와 풍진아'라는 글이 있습니다. 1965년 오키나와를 휩쓴 풍진 때문에 난청을 앓는 장애아가 600명이나 태어났는데도 본토에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키나와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사실 오키나와는 단순히 차별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오키나와의 역사를 보면 오히려 국가내 내부 식민지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베트남전 참전 죄값을 치르는 오키나와 아이들


하이타니 겐지로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풍진에 감영된 것은 미군들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사실은 이미 충분히 확인되었는데, 일본 정부만 외면하고 있다더군요. 베트남 전쟁을 위해 오키나와에 드나들었던 미군들이 미국에서 대유행하던 풍진을 옮겨왔다는 것입니다. 


"풍진의 감염원이 미군이라면 (난청을 앓는)이 아이들은 분명 전쟁 희생자입니다. 아무 죄도 없는 이 아이들이 베트남전에 가담한 일본인의 죄값을 대신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 <상냥하게 살기> 본문 중에서


하지만 절대 다수의 많은 일본인들은 오키나와에 이런 장애아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 일본의 현실이라고 합니다. 독자들은 또 한 번 애국심에 대하여 질문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끝으로 단순한 친절을 넘어 서는 저자가 생각하는 상냠함에 대하여 조금 더 소개해 보겠습니다. <상냥하게 살기>라는 책 제목으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저자는 여러 글에서 상냥함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인간의 상냠함은 조상이 남겨준 문화유산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느냐에 달렸다."


"그것보다 더 힘들고 슬픈 것은 사람들 마음 속에서 서민감각이라는 상냥함이 사라지는 일이다." 


"섬사람들의 상냥함은 모든 생명을 대등하게 바라보는 지점에서 생겨나는 것 같았다."


"오키나와는 그런 상냥함의 문화로 지탱되어온 곳이기에... 인간의 존재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수업을 하자 다연한 일이지만 오키나와 아이들은 훌륭한 집중력을 보였다."


"아이들은 모든 사라에 매우 예민하다. 아이들의 상냥함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평등하다'는 생명의 근원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생활과 자신이 단단히 이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더 없이 상냥해진다."


"어린이가 지닌 상냥함의 근원은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느끼는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냥함은 인간의 조건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길'로써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 <상냥하게 살기> 본문 중에서


저자는 아이의 인생이든 어른의 인생이든 둘도 없이 소중하다는 의미에서 대등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함께 배우려는 자세는 늘 아이보다 부모나 교사에게 부족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어른들을 얕잡아 본다고 하지만 실은 아이를 얕잡아 보는 부모와 교사들이 훨씬 많다고 주장합니다. 


"고난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야말로 인간적인 배려가 몸에 배어 있고, 깊은 절망을 헤치고 나온 사람만이 한없는 상냥함을 지닐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아이들에게서 배운 상냥함을 잃지 않고 살다 세상을 떠난 아이를 닮은 어른이었습니다. 


2005년 가을 식도암과 췌장암 판정을 받은 저자는 약물치료를 거부하고, 자신의 생명을 자연에 맡긴 채 살아가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습니다. 2006년 11월 23일 유언에 따라 장례식을 하지 않았으며 한 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갔습니다. 



"고난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야말로 인간적인 배려가 몸에 배어 있고, 깊은 절망을 헤치고 나온 사람만이 한없는 상냥함을 지닐 수 있다"

"인간의 상냠함은 조상이 남겨준 문화유산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느냐에 달렸다."

"그것보다 더 힘들고 슬픈 것은 사람들 마음 속에서 서민감각이라는 상냥함이 사라지는 일이다."

섬사람들의 상냥함은 모든 생명을 대등하게 바라보는 지점에서 생겨나는 것 같았다."

"오키나와는 그런 상냥함의 문화로 지탱되어온 곳이기에... 인간의 존재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수업을 하자 다연한 일이지만 오키나와 아이들은 훌륭한 집중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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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미원주 2015-06-30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읽고 있는 책이에요. 상냥함에 대해서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이타니 겐지로가 농사지으며 자연에서 발견한 소증한 얘기가 잔잔히 맘을 건드립니다. ^ ^
 
슬로리딩 - 생각을 키우는 힘
하시모토 다케시 지음, 장민주 옮김 / 조선북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슬로리딩>은 2013년 101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한 하시모도 다케시 선생이 100세가 되던 해인 2012년에 쓴 책입니다. 그는 생애 절반인 50년을 효고현에 있는 사립 나다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지냈는데, 이 학교는 일본 최고의 사립 학교이자 입시 명문 학교라고 합니다.


입시교육과 서열화를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입시 명문 학교'와 그 교육 밥업을 소개하는 것이 찜찜하기도 했습니다만, 주입식 암기교육으로 입시 명문 학교를 만들려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하시모토 선생님은 1934년에 당시 후기학교였던 나다중학교에 부임하여 나카 간스케가 쓴 <은수저>라는 소설 책을 중학교 3년 동안 읽게 하는 '전대미문'의 수업을 시작하였는데, 이 수업의 결과 대학진학에 놀라운 성과를 냈다고 합니다.


"1962년에는 은수저 2기생들이 나다학교 최초로 교토대 합격자수 일본 내 1위를, 1968년에는 사립고 최초로 도쿄대 합격자수 일본 내 1위를 기록했다." - 본문 중에서


우리나라 고등학교들과 입시학원들이 내건 <서울대 합격 OO명> 같은 광고 현수막이 떠올라 손발이 오그라듭니다만, 지방의 후기학교였던 나다교에서 이런 성과를 기록하였다는 것은 어쨌든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소설책으로 공부했는데...도쿄대 합격자 수 1위?


도쿄대 합격자수 일본 내 1위 같은 겉으로 드러난 성과 말고도 그의 은수저 학습방법에서 뭔가 배울만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고안한 은수저 수업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예를 들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연놀이나, 100가지 일본 시를 카드로 만들어 맞추는 놀이를 실제로 수업 시간에 해 보는 수업법이죠. 이렇게 '샛길'로 빠지는 사이, 아이들이 배우는 즐거움과 재미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고안해 낸 수업법입니다." - 본문 중에서 


바로 이 수업이 <은사의 조건> <기적의 교실> 같은 책과 여러 매체 통해 '슬로리딩'으로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자 역시 나다교는 '죽어라 공부만 시키는 주입식 교육의 최전방'은 아니었다고 강조합니다.


다만, 이 학교는 한 번 교과 담임을 맡으면 중학교와 고등학교 6년 동안 같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교사의 재량이 그만큼 넓었다는 것이 전대미문의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 책의 첫장은 100세를 앞둔 2011년 6월, 27년 만에 나다교의 교단에 서서 토요강좌라는 특별 수업을 진행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2001년 6월 당시 나다중학교 학생들에게 옛날처럼 <은수저>를 교재로 수업을 했다고 합니다.


98세의 늙은 국어교사는 아이들에게 놀다와 배우다라는 두 단어에 대한 생각을 묻습니다. 아이들의 대답은 단순합니다. "놀다는 좋아하지만 배우다는 싫어합니다"


놀다는 좋아하고 배우다는 싫어한다는 것은 아이들이 배우는 즐거움을 깨우치지 못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단순히 "그렇게 말하지 말고 논다는 기분으로 배우면 되지"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한 답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배움의 즐거움을 깨우쳐주는 '슬로리딩' 수업을 실현해 보여줍니다. 아이들에게 놀다(아소부)와 배우다(마나부)라는 단어를 보고 생각나는 것이 뭐가 있는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자 아이 하나가 평범한 답을 내놓습니다.


"둘 다 히라가나 세 글자로 마지막에 '부'가 붙습니다"라고 답하는데, 그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훌륭한 지적이야! 정말 그렇구나!"하고 칭찬하며 다소 과장된 반응을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문을 품는 일에서부터 생각의 폭이 크게 확장된다"고 강조합니다.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국어수업...당연한 것도 다시 생각해보라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질문과 대답으로부터 생각의 확장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아소산' '아소해'처럼 '아소'가 붙은 산 이름 바다 이름이 있는데, 부가 붙으면 놀다가 되고, 마나에도 부가 붙으면 배우다가 되며, 부가 붙는 단어를 떠올려보면 부 동사 컬렉션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곧장 '부'가 들어가는 동사를 세기 시작하고, 어떤 아이들은 일본어 50음순을 따라 세면서 동사를 찾아냅니다. 하시모토 선생님은 일본어 50음순을 암기하는 아이들에게 반대 순서로 암기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놀이와 배움을 섞어 놓아 흥미를 북돋움니다.


저자는 정말 중요한 것은 배우는 과정이 재미있어야 하고, 아이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어른들이 놀이의 요소를 '제대로' 던져주기만 하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것을 배워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독특한 수업은 점점 더 확장됩니다. 그는 자주 시험을 치렀지만 점수로 경쟁시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수업시간에 배웠던 내용으로 자주 시험을 쳤지만 학생들끼리 답안을 교환해 채점하게 하고, 점수에 대해서 채점자와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생각보자 점수가 낮다고 느껴진다면 그 이유에 대해 채점자와 이야기를 해 보세요. 너무 점수가 빡빡한 거 아니냐고." - 본문 중에서


이 부분에 참 공감이 갔습니다. 점수와 채점의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법, 서로 다르게 느끼는 것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잘 쓰고 못 쓰고는 없다, 쓰기만 하면 모두 만점


이 시험은 점수가 몇점이든 모두 만점이었고, 성적에 반영되지도 않았다고 하더군요. 한 달에 한 권씩 과제 도서를 선정해서 줄거리와 독후감을 쓰는 시험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어떤 애기든 쓰기만 하면 만점"으로 처리하였고, 암기를 통해서 답할 수 있는 출제를 하지 않고 생각을 확장해야 하는 출제를 하였기 때문에 암기식 시험공부에만 매달리지 않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벼락치기 시험 경험을 회고하면서 "금방 도움이 되는 것은 금방 쓸모가 없어진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국어교사인 그는 국어 실력이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문과 이과를 가릴 것 없이 모든 과목에서 설명이나 지문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생활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도 국어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국어실력 = 생활능력인 것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자신의 입장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는 인관관계의 기본적이고 중요한 국면에서 국어실력과 독해력은 원하든 원치 않든 시험을 받게 됩니다." - 본문 중에서


그가 은수저 수업을 시작하게 된 것도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이런 사실을 깨닫고 느낄 수 있게 돕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합니다. 아울러 학생들의 마음에 평생 남을 수 있는 살아있는 수업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시작하였다고 하더군요.


"저는 교과서를 완전히 버리기로 했습니다. 소설을 읽으면 폭넓은 지식을 쌓을 수 있습니다. 지식이 쌓여가는 즐거움을 통해 국어에 대한 흥미를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 본문 중에서


그가 은수저를 선택한 것은 여러 가지 폭넓은 지식을 얻을 수 있고, 그 과정을 통해 국어과목에 대한 학문적 흥미를 높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랍니다. 그의 은수저 학습노트를 보면 <슬로리딩>의 핵심은 샛길로 빠지기입니다.


"예를 들어 <은수저>에 쥐 계산법이 등장하면 해설문을 1월에 암컷과 수컷 2마리가 12마리의 새끼를 낳고, 2월에 어미와 새끼 모두 12마리씩 새끼를 낳으면, 12월에 쥐의 수는 276억 8257만 4402마리가 된다"는 식으로 단어 자체의 의미를 굳이 설명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요" - 본문 중에서


예컨대 은수저 수업은 수학 수업으로도 확장되며 소설 내용에 '막과자'가 등장하면 막과자를 직접 먹어보는 식으로 아이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샛길'을 많이 만들어 수업을 확장하였다는 것입니다.


샛길이 많을수록 인생도 풍요롭다


그는 수업 뿐만아니라 인생에서도 샛길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샛길이 많을수록 인생이 풍요로워지고 지식의 폭도 넓어진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앞만보고 달려가는 인생은 단조롭고 재미 없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샛길이라는 것은 결국 새롭게 생각하는 계기를 말합니다. 이 샛길은 실로 일상생활의 다양한 부분에 감춰져 있어요. 중요한 것은 그 점을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 그것 뿐입니다." - 본문 중에서


말하자면 국어수업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도 <슬로리딩>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삶이 풍요롭게 된다는 것이지요. 무엇이든 의문을 품고 자기 나름대로 주체적인 사고를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고안한 <은수저> 샛길 수업 중에는 시를 암송하는 수업도 있고 학생들에게 시를 짓게 하는 수업도 있더군요. 그가 아이들의 시를 평가하는 방식은 남달랐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시를 잘 지었는지 아닌지는 따지지 않겠다. 글쓴이의 노력자체를 평가할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시의 완성도는 일절 따지지 않았습니다.......또한 한 편밖에 쓰지 못한 아이도, 10편 이상 완성한 아이도 점수 차이는 두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한 편밖에 못 썼지만 게으름을 피웠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시를 쓰는 동안 더 많이 고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 본문 중에서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남들이 시 10편을 쓸 동안 1편 밖에 쓰지 못한 아이가 격었을지도 모를 힘듦을 이해하는 교사였기 때문에 그의 <은수저> 수업이 성공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좋은 문장을 위해서는 많이 써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백론이 불여일작'이라고 말합니다.


"쓰고 쓰고 또 쓰면서 쓴다는 행위에 대한 절대적 반감을 제거했을 때 비로소 문장 작법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되는 것이지요." - 본문 중에서


잘 쓰고 못 쓰는 것을 따지지 말고 가능한 많이 쓰고 가급적 손으로 쓰는 것이 좋다고 강조합니다. 이해하지 못해도 읽어보고, 해석하려고 노력하기 전에 읽는 것을 즐기라고도 충고합니다.


시 10편 쓴 아이보다 1편 밖에 못쓴 아이가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국어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에는 영어교육에 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일본도 우리나라 만큼 영어 교육 열풍이 있었는지, "영어를 배우기 전에 국어 실력을 키우라"고 강조합니다. 자신의 경험으로봐도 국어 성적이 좋은 학생이 영어성적도 좋았다고 합니다.


한편 이 책에는 100세를 앞둔 늙은 교사의 지혜가 담긴 교사론도 나옵니다. 그는 교사로서 자신을 연마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교사의 일이란 자신의 인간성을 학생들과 직접 부딪치고 공유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교사가 교사로서 자기 자신을 열심히 연마해 나가면 그 진심은 반드시 아이들의 가슴속에 전달됩니다." 


또 자신이 만약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공립학교 교사로 갔다면 <은수저>수업과 같은 자유롭고 창의적인 수업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고백 합니다. 예컨대 입학과 취직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인생에서 어떤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때가 되지 않으면 알수 없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99세에 <슬로리딩>을 쓰면서 두 가지 인생 목표를 밝힙니다. 하나는 남은 생애데 대한 목표인데 100세를 넘기는 것은 물론이고 108세 차수, 111세 황수를 누리고 120세 대환력을 목표로 살겠다고 하였습니다만 안타깝게도 2년 후인 10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른 목표는 다시 태어나도 은수저 수업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었습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혹은 다른 누구라도) 은수저 수업을 잘 할 수 있도록 <은수저 연구노트>를 새로 만들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에게 배움의 즐거움은 100세를 넘어서도 계속되었더군요.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대로 해냈다"는 의미에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자신의 삶을 평가하였습니다. 외길로 쭉 가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샛길이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한다는 말이 오랫 동안 여운으로 남는 멋진 책입니다.

"1962년에는 은수저 2기생들이 나다학교 최초로 교토대 합격자수 일본 내 1위를, 1968년에는 사립고 최초로 도쿄대 합격자수 일본 내 1위를 기록했다."

"예를 들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연놀이나, 100가지 일본 시를 카드로 만들어 맞추는 놀이를 실제로 수업 시간에 해 보는 수업법이죠. 이렇게 `샛길`로 빠지는 사이, 아이들이 배우는 즐거움과 재미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고안해 낸 수업법입니다."

"국어실력 = 생활능력인 것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자신의 입장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는 인관관계의 기본적이고 중요한 국면에서 국어실력과 독해력은 원하든 원치 않든 시험을 받게 됩니다."

"저는 교과서를 완전히 버리기로 했습니다. 소설을 읽으면 폭넓은 지식을 쌓을 수 있습니다. 지식이 쌓여가는 즐거움을 통해 국어에 대한 흥미를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샛길이라는 것은 결국 새롭게 생각하는 계기를 말합니다. 이 샛길은 실로 일상생활의 다양한 부분에 감춰져 있어요. 중요한 것은 그 점을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 그것 뿐입니다."

"시의 완성도는 일절 따지지 않았습니다.......또한 한 편밖에 쓰지 못한 아이도, 10편 이상 완성한 아이도 점수 차이는 두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한 편밖에 못 썼지만 게으름을 피웠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시를 쓰는 동안 더 많이 고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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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채현국
김주완 지음 / 피플파워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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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작년 연초에 <한겨레>에 실린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걸 잘 봐 두어라" 인터뷰 기사 덕분입니다. 


<분노하라>를 써서 전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프랑스 노인 스테판 에셀에 감동 받으며, 우리나라엔 왜 저런 분이 없을까 하던 차였습니다. 그런 때에 국내언론을 통해 채현국이라는 뉴 페이스(?)가 등장한 것입니다.  


일찍부터 익히 채현국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던 지인들과 동지들도 적지 않았겠지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계기는 <한겨레> 인터뷰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해방 이후 줄곧 친일파 후손과 독재자들이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동안,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은 곳 모두에서 많은 사람들이 맞서 싸웠습니다. 


그 중에는 백기완 선생이나 리영희 선생 혹은 젊은 시절의 김근태, 이부영, 황석영처럼 널리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고수'(?)도 여럿 있었던 모양입니다. 


채현국 선생 역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강호의 고수들 사이에서는 알아주는 이 중 한 명이었더군요. 채현국 선생의 이력이 알려진 후에 여러 매체를 통해 그 분의 인맥이 드러나는 걸 지켜보니, 소위 민주화 운동의 고수들과 '유유상종'하는 분이었습니다.


채현국 선생은 그 중에서도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호기심 때문에 김주완 <피플파워> 기자가 기록한 <풍운아 채현국>을 읽게 되었습니다. 책을 사놓고 다 읽기 전에 창원대학에서 열린 '풍운아 채현국 북 콘서트'에 가서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듣기도 했습니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


채현국 선생은 남부럽지 않을 만큼 많은 재산을 모았으면서도, 노동자의 고혈을 빠는 재벌기업이 되는 길을 버리고, 사람답게 사는 삶을 선택한 분입니다. 


"한때 24개 기업을 경영하며 개인 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거부였으나, 지금은 특별한 소득이 없는 신용불량자"로 살아간다고 하더군요.


"그는 맘에 맞는 친구들에게 밥과 술을 사주며 헤어질 때 차비를 쥐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셋방살이를 하는 친구들에게는 조그마한 집을 한 채씩 사주는 파격의 인간이다." - 본문 중에서


"서울대 철학과 출신 채현국은 그 당시 표면에는 일절 나서지 않으면서 군사정권의 지명수배를 받거나 도망 다니는 사람들을 그 탄광에 받아서 그들에게 호신처를 제공하고, 또 음양으로 반독재의 노선을 추구하는 지식인들과 학생들 그리고 문인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준 훌륭한 분이오." - 본문 중에서


채기엽, 채현국 부자는 1952년 서울에서 시작한 연탄 공장을 필두로 삼척과 저성선 일대의 탄맥을 개발하여 흥국탄광을 설립했습니다. 이어 흥국화학, 흥국해운, 흥국조선 등의 여러 회사를 운영하였다고 합니다. 장항에 있던 흥국조선은 우리나라 최초로 1000톤이 넘는 컨테이너 전용선을 두 척이나 건조했답니다.


하지만 1973년 즈음에 잘 나가던 회사들을 모두 정리하여 그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에게 나눠주고 사업을 정리해 버립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하기 어려운 큰 결단을 한 것이지요. 사람은 흔히 돈을 벌면 더 많은 돈을 벌려다 돈의 노예가 되기 십상인데, 채현국 선생은 그 때까지 모은 재산을 조건 없이 나눠줘 버리면서 노예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재벌 부럽지 않은 부자에서 신용불량자가 되기까지 


그는 광부들과 노동자들에게 나눠 준 것이 아니라, 원래 주인에게 돌려줬다고 하는 표현이 더 맞다고 강조했습니다. 농장까지 팔아서 광부들에게 돌려 준 것도, 탄광에서 생긴 이익금으로 농장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그 돈까지 돌려주는 게 바람직한 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아무튼 그 때 회사를 모두 나눠주고도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었던 탓에, 1980년 즈음 회사가 부도난 이후로 지금까지 신용불량자로 살고 있다 했습니다. 젊은 시절 대부호로 살았다가 중년 이후에는 신용불량자로 살고 있는 것이지요.


채현국 선생은 김일성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아울러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벽초 홍명희가 북한에 가서 부수상을 하지 않았느냐는 말에 단호하게 반박합니다. 


"부수상이란 자리. 김일성 그 자식이 딸년 데리고 살았어요. 그놈 개자식이요. 독립운동한 건 사실이지만, 이 나라에서 나처럼 그놈을 개새끼라고 부르는 사람도 별로 없을거요." - 본문 중에서


"내가 알기론 북한에선 이미 마르크시즘이 금서가 되어 있다. 저 자들은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지금 독재 권력을 행사하는 자이지, 그럴싸한 수작만 하는 자이지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 본문 중에서


창원대학교에서 개최된 북 콘서트 때도 북한의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으로 평가하였습니다. 동시에 남한에서 진보 세력을 종북좌파 빨갱이로 덧칠하는 것에 대해서도 단호히 반대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빨갱이 개념은 북조선에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김일성 그 일당으로 제한시켜야한다. 실직적인 권력, 무력을 가지고 북조선의 그 세력을 지지하고 추장하는 자들에게만 빨갱이라는 단어를 써야지, 전 세계가 사상의 자유가 있는데 그러지 않으면 우리만 바보 된다." - 본문 중에서


따라서 이런 기준을 놓고 보면, 인혁당이나 남민전 같은 조직에 속한 사람들은 절대 북한 추종자들이 모인 게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그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분들도 있겠지만, 그의 북한관이나 남한의 진보세력에 대한 이념적 규정은 공감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한반도에 빨갱이는 김일성과 그 일당뿐이다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을 묻는 질문에 거침없고 단호하게 '권정생'이라고 말합니다. 권정생은 대한민국 대표 동화 <강아지똥>과 소설 <몽실언니> 수필 <우리들의 하느님> 등 많은 동화와 시, 수필을 남긴 작가입니다. 


후배들과 학습 모임을 하면서 권정생 선생님이 쓴 <우리들의 하느님>을 다시 함께 읽고 있기도 하고, 최근 서울도서관에서 개최하고 있는 이오덕, 권정생, 하이타니 겐지로 전시회 <아이처럼 살다>에서 권정생 선생님의 작품과 유품을 보고 온 때문인지 더 많이 공감 되더군요. 


채현국 선생은 권정생 선생님과 더불어 소설가 박완서의 여러 작품들과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추천해 주었습니다. 문학작품이 아닌 책들로 임락경 목사가 쓴 <우리 영성가 이야기> 그리고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같은 책들도 추천해주었는데, 모두 읽지 않은 책들이라 도서구입 목록에 추가해 두었습니다. 


여러 인물에 대한 평가도 있었는데 앞서 소개하였듯이 김일성에 대한 평가가 매우 단호하였고,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에 대한 평가도 과격(?)하였습니다. 그는 스필버그를 가장 악랄한 지적 범죄자라고 단정 짓습니다. 


"빌 게이츠가 자본주의를 강화시키고 있는 면도 있지만, 스필버그 같은 사람이 정말로 인간의 마음속까지 썩게 하면서 자본주의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돈 버는 능력, 그게 최고의 정의입니다." - 본문 중에서


"그렇죠. 그 몰랐던 새로운 사실(영화 <쉰들러 리스트>)을 그렇게 재미있게 만들어가지고 돈을 빨아먹은 겁니다. (중략)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는 계획적으로 계산 대어가지고 자기 전체 제작 영화를 정의로운 걸로 믿고 방심하게 만든 겁니다. 그래서 돈 버는 능력이 정의가 된 겁니다." - 본문 중에서


예컨대 스필버그 감독은 '정의'마저도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이며, 재미있는 것이 곧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것으로 믿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돈 버는 능력이 곧 '정의'가 되는 문화와 풍토를 확장시킨 주범이기도 하다는 주장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지적 범죄자다?


요약하자면, 그가 만든 영화를 흥행시키는 과정에서 돈 잘 버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게끔 만든 것이 그가 저지른 '지적 범죄'라는 것입니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소개하였다시피, 채현국 선생은 그 자신이 나이든 사람이면서도 나이든 사람들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입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나이든 사람들이 존경받기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나이 먹을수록 지혜로워지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혜보다는 노욕의 덩어리가 될 염려가 더 크다는 겁니다." - 본문 중에서


농경사회까지만 하더라도 노인의 경험이 지혜처럼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자본주의 사회 혹은 요즘과 같은 정보화 사회에서는 그런 경험이 다 고정관념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알던 것은 모두 오류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나이 먹은 사람들은 점점 지혜롭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풍운아 채현국>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이고 놀라웠던 사실은, 채현국 선생과 같은 지식인도 일제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은 '일본이 조국이라고 굳게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이 조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어. 그걸 아는 놈은 아주 뛰어난 상류층 지식인 집안이거나 아니면 지식 있는 중상류층에서 아이가 가서 말 하지 않을 확신이 있었던 집에서만 일본이 우리나라가 아니라는 말을 해줄 수 있었지." - 본문 중에서


그의 말에 따르면 3.1운동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은 일본이 조국이 아니라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답니다. 일본 사람을 잘난 체 하는 사람 정도로 알았지, 딴 나라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해방 전까지... 일본이 조국이라고 굳게 믿었다


또 그랬기 때문에 해방이 되고 나서 엄청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채현국 선생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동년배, 동시대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혼란을 겪었겠더군요.


"해방되자 마자였죠. 놀랐죠. 이 놀라움이라는 것은 세상이 옳다고 가르쳐준 게 전부 거짓말인거야. 영국 놈, 미국 놈은 다 죽여야 할 짐승 같은 놈이라고 얘길 했는데, 학교 칠판 옆에 루즈벨트 하고 처칠 얼굴 붙여놓고 거기에 사무라이가 칼로 이마빡을 쑤셔놓은 그림이 커다랗게 걸려있었어요. (중략) '아, 어른들이 옳다 하던 건 전부 거짓말이네' 하는 것을 그 때 알았어요." - 본문 중에서


요새 하는 말로 '멘붕'을 경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3.1운동 때까지만 해도 독립운동가 대열에 이름을 올렸던 사람들이 1930년대, 1940년대에 줄줄이 친일파로 돌아서게 된 것도 더 이상 독립에 희망을 걸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한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묻는 질문에는 기대보다는 평범한 답을 합니다. 그래서 좀 안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좀 덜 치사하고, 덜 비겁하고, 정말 남 기죽이거나 남 깔아뭉개는 짓 안 하고, 남 해코지 안 하고... 그것만하고 살아도 인생은 살 만 하지." - 본문 중에서


뭔가 엄청나게 대단한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덜 치사하고 덜 비겁하고 남 깔아뭉개는 짓 안 하고 남 해코지 안하고 살면 된다고 합니다. 쉬워보였습니다만, 가만히 그리고 좀 더 깊이 생각해보니 그리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더군요. 나이든 지식인의 외침은 '고정관념'을 깨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수상이란 자리. 김일성 그 자식이 딸년 데리고 살았어요. 그놈 개자식이요. 독립운동한 건 사실이지만, 이 나라에서 나처럼 그놈을 개새끼라고 부르는 사람도 별로 없을거요."

"내가 알기론 북한에선 이미 마르크시즘이 금서가 되어 있다. 저 자들은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지금 독재 권력을 행사하는 자이지, 그럴싸한 수작만 하는 자이지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빌 게이츠가 자본주의를 강화시키고 있는 면도 있지만, 스필버그 같은 사람이 정말로 인간의 마음속까지 썩게 하면서 자본주의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돈 버는 능력, 그게 최고의 정의입니다."

"그렇죠. 그 몰랐던 새로운 사실(영화 <쉰들러 리스트>)을 그렇게 재미있게 만들어가지고 돈을 빨아먹은 겁니다. (중략)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는 계획적으로 계산 대어가지고 자기 전체 제작 영화를 정의로운 걸로 믿고 방심하게 만든 겁니다. 그래서 돈 버는 능력이 정의가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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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미즘이라는 희망 - 삼라만상에게 길을 묻다
야마오 산세이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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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0년 된 삼나무를 보러 야쿠시마에 다녀오면서 야마오 산세이라고 하는 구도자이자, 시인이며 농부로 살다간 그의 삶과 철학에 매료 되었습니다. 짧은 야쿠시마 여행을 다녀 온 후에도 야마오 산세이 읽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하였던 <여기에 사는 즐거움> <어제를 향해 걷다> <더 바랄게 없는 삶>에 이어 오늘은 <애니미즘니라는 희망>을 소개합니다. 이 책은 1999년 7월 12일부터 16일까지 닷새 동안 오키나와의 류큐대학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아마도 국내에 번역된 책 중에서는 가장 최근 작인데, 일본에서는 저자가 생을 마감하기 약 2년쯤 전(2000년 무렵)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저자가 지구별을 떠난지 10년 쯤 지난 2012년에 출간 되었더군요.


앞서 소개하였던 다른 세 권의 책은 대체로 일기 형식으로 씌어진 짧은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었는데, <에니미즘이라는 희망>은 자신의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철학, 역사, 문화, 종교, 자연에 관한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풀어내는 인문학 강의 같은 책입니다.


애니미즘....삼라만상에는 신이 깃들어 있다


첫 번째 이야기 주제이자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바로 '애니미즘'입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데요. 자급자족을 꿈꾸며 도쿄에서 야쿠시마로 귀농한 농부이자, 시인이며 또한 철학자이자 구도자의 삶을 살아온 저자는 말년에 자신의 철학적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에니미즘'을 주창하였던 모양입니다.


"아니마(anima)라는 라틴어의 의미는 생명이나 정령, 혹은 영혼인데 이 중 영혼이라는 의미가 가장 강할지 모르겠어요. 자연만물이에는 아니마가 깃들어 있다, 정령 혹은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사고 방식이 곧 애니미즘입니다." - 본문 중에서



애니미즘은 아니마라고 하는 라틴어가 어원이며 요약하자면 자연만물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사상이 바로 에니미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종교사적으로 이해하자면 에니미즘은 샤머니즘보다 전 단계에 해당한다고 하였더군요.


"삼라만상 안에는 생명이고 정령이며 영혼인 아니마가 깃들어 있지요. 그런 원초적 심성을 애니미즘이라고 합니다. 즉 삼라만상에는 아니마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 사고방식이 바로 애니미즘이지요." - 본문 중에서


저자가 다시 한 번 요약해놓은 애니미즘의 정의입니다. 한편 애니미즘의 어원인 아니마라는 말에는 심리학자 융이 고안한 "남성의 잠재의식 속에 깃들어있는 여성적인 것에 대한 동경의 원리"를 말하는 개념이기도 하고, 애니메이션이라는 말도 '아니마'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에니메이션 "수 많은 그림 한 장 한 장을 이어서 살아있는 것처럼 화상을 구성하는 거니까, 애니메이션이란 생명 또는 영혼을 부여받은 화면"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에 재생된 아니마의 세계가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로 상징되는 에니메이션이라는 방법론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저자는 시를 함게 읽고 그 시들을 설명하고 배경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애니미즘'에 관한 이야기를 닷새 동안 풀어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야마오 산세이의 자연철학을 총정리한 책이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신에게 간구하던 것이 노래와 시의 기원


애니미즘에 관한 저자는 시가의 기원, 노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일본의 권위있는 한자 기원학자인 시라카와 시즈카 교수의 글을 인용하면서 "신에게 무엇무엇을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바로 노래의 기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예컨대 저자의 경우 자기안의 절절한 외침을 절제되고 정갈한 언어로 정착시키는 것이 바로 시(詩)를 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그는 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기 위하여 독일 작가 노발리스라는 시인이 쓴 단편소설 <파란꽃>의 서문을 소개합니다.


모든 시적인 것은 동화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전한 동화 작가는 미래의 예언자다. 

모든 동화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저 고향세계의 꿈이다.


저자는 수강생들에게 이 문장은 꼭 기록해두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문장이 갖고 싶어 헌책방에서 2천엔이나 주고 절판된 이 책을 샀다고 하더군요.


"말이라는 것이, 자기 가슴으로, 영혼으로 깊이 파고드는 말이 단 한줄이라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평생의 보물이 될 수 있는 것이죠." - 본문 중에서


영혼을 파고드는 단 한줄의 말을 보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니 그는 시인이 분명합니다. 말을 평생의 보물로 삼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겠지요. 저자는 노발리스의 글을 설명하면서 사람은 "누구라도 한 줄 정도는 진실의 말을 쓸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말하자면 동화처럼 가슴에 닿고, 영혼에 닿는 진실하고 소박한 말이 바로 시라는 것입니다. 특히 바로 자신의 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강의는 <야자잎 모자 아래서>라는 시집에 실린 시들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그 강연을 글로 읽는 것이구요.


첫 번째 시는 <저문 강변의 노래>라는 시인데, 이 시에는 "신을 구하여 울어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인생은 바로 이 말에 이끌려 살아온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신은 영어 대문자로 표기하는 'GOD'가 아니라 소문자로 표기하는 'god'라고 강조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소문자 'god'는 사실 영어표기로는 존재하지 않는데 제가 만들어낸 겁니다. 저는 인생을 살면서 위안을 주는 것이 소문자 'god=신'이고 나한테 좋은 것이면 무엇이든  'god=신'이다 ! 아름다운 것은 모두 신이고, 기쁨을 주는 것도 무엇이든 신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 본문 중에서


이런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천지만물 삼라만상에는 모두 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저자의 이야기는 바로 그 신이 깃들어 있는 자연만물의 기초는 물이고 흙이라는 말로 이어집니다. 그러니 인류가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우주 공간에 새로운 지구를 만들려는 무모한 짓을 그만두고 지구를 소중히 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을 바꾼 나무 한 그루 '조몬스기'


이 책은 모두 15개 장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겨우 첫 장에 대해 소개하였는데 글이 이렇게 길이졌네요. 두 번째 장의 제목은 '내 인생의 나무 한 그루'입니다. 최근에 제가 쓴 여행기나 서평을 읽은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내 인생의 나무 한 그루'는 바로 '조몬스기'입니다.


저자는 조몬스기에 대한 시를 쓸 때 당시 116세로 최장수 인물이었던, 이즈미 시게치요라는 분을 생각하며 '성스러운 노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합니다. 그는 100세 혹은 90세를 넘긴 노인들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성스러운 노인'이라고 말합니다.


성스러운 노인


야쿠시마 산 속에 한 성스러운 노인이 서 있다

그 나이 어림잡아 7천 2백 년이라네

딱딱한 껍질에 손을 대면

멀고 깊은 신성한 기운이 스며든다

성스러운 노인

당신은 이 지상에 삶을 부여받은 이래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단 한 발짝도 내딛지 않고 그곳에 서 있다

그것은 고행신 시바의 천년지복의 명상과 닮았지만

고행과도 지복과도 무관한 존재로 거기 서 있다


야쿠시마 여행기나 조몬스기를 소개하는 글에 자주 인용되는 야마오 산세이의 시 '성스러운 노인'의 일부입니다. 야마오 산세이는 여러 글에서 '조몬스기'에 이끌려 야쿠시마를 '본향'으로 삼아 살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이 책 13장에는 조문스기로 가는 길을 시로 쓴 연작시 '야자잎 모자 아래서 24'라는 제목의 긴 시가 있습니다. 이 시는 15쪽 분량으로 읽는데만 25 ~ 30분이나 걸리는 장편시입니다.


워낙 긴 시라 옮길 수 없지만 조몬스기까지 올라가는 시인의 심상과 풍경이 잘 담겨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 길을 따라 조몬스기까지 다녀 온 후에 이 시를 읽었더니 눈으로 봤더 그 숲과 길들이 심상에 맺혀 에니메이션처럼 펼쳐지더군요.


앞서 저자 야마오 산세이가 딱 세줄이 문장을 얻기 위해 독일작가 노발리스의 <파란꽃>을 샀던 이야기에 견주어 말하자면, <애니미즘이라는 희망>이라는 책은 '성스러운 노인'과 '야자잎 모자라아래서24>라는 시 두 편만으로도 책값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책입니다.


아니 책 값으로 이 책들의 값어치를 말하는 것이 불경(?)스럽기까지 합니다만 아무튼 조몬스기 오랫 동안 마음에 새길 수 있는 두 편의 시(詩)라고 생각합니다. 야쿠시마 여행을 떠나기 전 날 30여 분동안 이 시를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조몬스기가 살고 있는 야쿠시마의 숲은 수 천년 된 삼나무들이 수천 그루나 살고 있는, 삼나무 나이테 속에 지구의 시간이 압축되어 있는 숲입니다.


읽는데만 30분이 장편 시...조몬스기를 노래하다


이런 곳에 살았던 야마오 산세이는 시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애니미즘이라는 희망>에도 다른 책들에서 강조하였던 시간에 대한 성찰적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현대인들을 '진보하는 시간에 자신을 빼앗기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합니다.


"진보하는 문명의 시간이란 과거에서 미래로 상승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일직선으로 진행하지 결코 물러서진 않습니다." - 본문 중에서


현대라는 시간을 사는 사람들, 특히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조몬시대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불가역성을 신뢰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삶을 규정하는데 직선의 시간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 합니다.


"태양계의 행성들은 자전하고 자전하면서 조금씩 태양주위를 공전하죠. 지구도 하루에 한 번 자전을 하면서 태양 주변을 일년에 걸쳐 한 바퀴 돕니다. 태양계 시스템은 태양계가 우주에 생겨난 46억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눈곱만큼도 진보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같은 길을 회귀할 뿐이고 순환할 뿐이죠" - 본문 중에서 


또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어가는 생노생사의 흐름도 결코 진보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모든 생명은 1만년 전에도 태어나면 죽었고, 1만 년 후에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사람의 육체와 의식은 회귀하고 순환하는 자연의 시간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야마오 산세이는 우리시대의 사회불안과 사회병리는 이 두시간의 상극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순환의 흐름속에 있으면서 순환하지 않고 진보하는 시간에 예속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상극'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표중 하나가 바로 자살률이라고 강조합니다. 진보하는 시간에게 자신을 빼앗긴 나머지 자신의 인생과 문명과의 상극속에 죽음을 택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순환하는 시간, 회귀하는 시간에 주목하라 !


저자는 직선의 시간, 진보하는 시간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는 시간', '회귀하는 시간'을 지금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살우리를 둘러 싼 세계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하루하루 다음 사회, 다음 시대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것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거기에 쏟아붓기를 바랍니다." - 본문 중에서 


이 인용문은 닷새 동안의 긴 강의 결론에 해당하는 마지막 문장입니다. 우리의 삶은 삼라만상 즉 자연에 속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애니미즘이라는 희망>은 말년의 야마오 산세이가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강연하였던 내용을 담은 책입니다.


오늘까지 소개한 4권의 책 모두 좋은 책들입니다만, 딱 1권만 읽겠다고 하면 <애니미즘이라는 희망>을 추천합니다. 제게 야쿠시마는 앞으로도 영원히 '조몬스기'와 '야마오 산세이'의 섬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아니마(anima)라는 라틴어의 의미는 생명이나 정령, 혹은 영혼인데 이 중 영혼이라는 의미가 가장 강할지 모르겠어요. 자연만물이에는 아니마가 깃들어 있다, 정령 혹은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사고 방식이 곧 애니미즘입니다." - 본문 중에서

"삼라만상 안에는 생명이고 정령이며 영혼인 아니마가 깃들어 있지요. 그런 원초적 심성을 애니미즘이라고 합니다. 즉 삼라만상에는 아니마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 사고방식이 바로 애니미즘이지요."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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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를 향해 걷다
야마오 산세이 지음, 최성현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야쿠시마 여행을 다녀오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게 된 사람은 25년 간 그 섬에 살다 세상을 떠난 야마오 산세이입니다. 그는 일찍이 가족과 함게 7200년 된 삼나무 조몬스기가 있는 야쿠시마로 이주하여 날 마다 조몬스기를 생각하며 살다가 별이 되어 지구를 떠났습니다.


사회운동가이자 시인이었으며 농부이자 구도자로서 조몬스기와 함께 야쿠시마에 살았던 야마오 산세이의 삶은 지구 환경, 생태, 생명, 평화 등의 가치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자연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하였더군요.


그를 더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한국어로 번역된 책 네 권을 모두 찾아 읽었는데, 앞서 <더 바랄게 없는 삶>과 <여기에 사는 즐거움>을 소개하였으며 오늘은 <어제를 향해 걷다>를 소개합니다. 먼저 소개하였던 <여기에 사는 즐거움>과 오늘 소개하는 <어제를 향해 걷다>는 모두 절판된 책을 헌책방에서 구입하였습니다.


도서관에서도 빌릴 수 있는 책이었지만, 도서관에서 빌려 있는 책은 마음대로 책장을 접을 수도 없고, 밑줄을 그을 수도 없어 제 적성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웬만하면 책은 사서 읽는 편입니다.  


이 책들은 헌책방에서 샀지만 출판 당시 책에 표시된 정가보다 더 비싼 값을 주고 샀습니다. 헌책방 하시는 분들의 안목이 높은 때문인지 절판된지 오래되어 구하기 어려운 책이 아닌데도, 원래 가격보다 비싸게 팔고 있더군요.


새 책보다 비싼 헌 책...헌 책방 사장님의 안목일까?


2006년에 번역 초판이 나왔던 <어제를 향해 걷다>는 야마오 산세이의 일본어 판 책 <조몬 삼나무의 그늘 아래서>와 <회귀하는 날들의 일기> 중 일부를 우리말로 옮겨 <어제를 향해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고 합니다.


택배로 받은 책을 펼쳐보면서 일기처럼 짧은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과연 책의 일부는 원래 일본에서는 <회귀하는 날들의 일기>로 출판되었더군요. 이 책은 고향에 관한 이야기, 자연의 시간에 관한 이야기, 자급자족하는 생활 이야기, 예배와 기도 명상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이야기로 나뉘어 있습니다.


혹시 다른 책을 읽은 독자들이나 야쿠시마나 조몬스기와 관련된 TV 다큐에서 지금도 야마오 산세이의 아내 하루미씨가  옛집에서 살고 있는 것을 보신 분들도 있을텐데요. 그 때문에 저도 이 책에 나오는 '아내의 뼈를 먹다'라는 글을 읽을 때 조금 헷갈렸습니다.


제가 읽은 네 권의 책을 통해 발견한 단서들을 모아보면 야마오 산세이의 첫 번째 아내는 '준코'였던 모양입니다. <어제를 향해 걷다>에는 준코 여사의 갑작스런 죽음과 이별의 슬픔을 견디어 가는 야마오 산세이의 심경이 자세히 고백되어 있습니다. 


야마오 산세이와 함께 야쿠시마에서 살았던 준코 여사는 '지주막하출혈'이라는 흔하지 않은 증상으로 1987년 47세를 일기로 급작스런 죽음을 맞았습니다.


"의식 불명인 아내의 간호, 밤샘, 장례식, 화장, 그뒤의 초칠일까지 상주 및 승려로서의 임무를 다해 오며 그동안 거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죽고 싶을 만큼 잠을 자고 싶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마침내 몇 시간이나마 숙면을 취할 수 있었던 하룻밤을 지내고 맞은 열흘째 날의 아침, 맑은 하늘 아래 죽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 없는, 그런 가운데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내가 있었다." - 본문 중에서




아내 장례 치르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똥 푸는 일


급작스런 아내의 죽음 이후에 다가온 슬픔과 절망적인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내 생각이 간절한 어느 밤 야마오 산세이는 '아내의 유골'을 먹으며 그리움을 달래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깊은 슬픔에 빠져 열흘을 보낸 그가 몇 시간이나마 숙면을 취한 다음날 맨 처음 한 일이 '변소의 똥오줌을 치우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이 떠오르더군요.


물론 그는 평소에도 변소 치우는 일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쓴 다른 글을 보아도 변소 치우는 일을 '명상' 하듯이 기꺼운 마음으로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똥오줌을 퍼다가 나무에 주는 일을 생명을 순환시키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작은 일상에서도 아내의 부재를 실감하게 됩니다.


"문득 이렇게 똥을 퍼서 똥통이 깨끗하게 비더라도 더 이상 기뻐해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내가 변소 치기를 좋아하는 것은 똥을 퍼내는 그 자체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아내가 그 결과를 대단히 좋아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갑자기 알게 되었다." - 본문 중에서


그는 오열어 터져나올 것 같은 충동을 이를 악물고 참고 비틀거리면서 60킬로그램쯤 되는 똥통을 메고 다리 건너 배나무 아래로 가서 변소치기를 마칩니다. 그에게 일상의 모든 일은 아내가 살아 있을 때와 아내가 죽은 후로 나뉘졌다고 하더군요. 특히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것들은 아내의 영혼이 머무는 장소들입니다.


"아내가 숨을 거둘 때 나는 분명히 보았다. 아내의 영혼은 이 섬의 최고봉인 미야노우라 산으로 날아갔다.......그때처럼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내는 갑자기 메시모리 산에서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해거름 녘의 맑은 공기 속에서 메시모리 산은 자신의 푸른 모습을 뚜렷하게 내보이고 있었고, 그 산에는 미야노우라 산에서처럼 이미 아내의 영혼이 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본문 중에서


그는 처음 야쿠시마의 최고봉인 미야노우라 산으로 갔던 아내의 영혼이 자신의 일상을 지켜볼 수 있는 집 가까운 산 메시모리로 옮겨왔다고 느낍니다. 아내가 기뻐할 만한 일을 할 때마다 자신만이 아는 표식으로 위로해줄 것이라고 믿더군요. 


이 책에는 아내가 그리워 잠못 이루던 어느 날 밤 아내의 유골을 먹은 사연, 서둘러 무덤을 만들지 않고 서재에 아내의 유골을 두고 함께 지내는 사연, 집 가까운 산비탈에 아내의 무덤을 만드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아내의 영혼은 야쿠시마 최고봉 미노우라산으로 갔다


한편 2002년에 국내에 번역 된 <여기에 사는 즐거움>에는 지금도 야쿠시마의 옛집에 살고 있는 아내 '야마오 하루미' 여사가 쓴 감사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아마 1987년에 준코 여사와 사별한 후에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하루미 여사와 재혼 한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어제를 향해 걷다>에 실린 준코 여사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짧은 글 4~5편에 불과하지만 깊은 슬픔이 담긴 글이라 마음을 무겁게하더군요. 일기 형식으로 씌어진 이 책에는 저자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야마오 산세이가 야쿠시마를 고향으로 삼게 된 까닭도 씌어 있습니다.


"하지만 천명은 이미 정해져 있어 우리는 이미 이 섬에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천명이란 조몬삼나무라 불리는 칠천이백 년의 할아버지 삼나무의 부름이었다. 그것이 가장 큰 힘이었다. 이 섬에서 두세 해 사는 사이 나는 그 삼나무를 어느새 '성스러운 노인'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안심을 주는 스승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 본문 중에서


야마오 산세이는 25년을 야쿠시마에 살다가 죽는 날까지 조몬스기를 스승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인간이 아닌 한 그루 나무를 스승으로 둔 것을 천명으로 여긴다고 하더군요. 그가 남긴 많은 글을 읽어보면 나무 한 그루 역시 사람만큼 귀한 생명이라는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중요한 것으로 땅, 물, 바람, 나무, 불 이 다섯 가지를 듭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책을 읽어보면 이 책에 있는 글들은 모두 이 다섯가지 중요한 것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기도 합니다.


<어제를 향해 걷다>라는 제목은 책에 담긴 60여 편의 글 중 한 편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야마오 산세이는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에 관하여 깊이 성찰 하였더군요. 책 제목이기도 한 '어제를 향해 걷다'라는 글은 '자연의 시간과 인간 의식'에서 만들어지는 시간에 관하여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실은 내일을 향해 걸을 수 있는 것처럼 어제를 향해서 걸을 수 있다. 우주 식민지를 향해 걷는 것도 가능하지만 석기 문화를 향해서 걸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 시대의 큰 착각이자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 본문 중에서


예컨대 우리는 항상 '지금'이라는 순간에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 문명은 미래를 향해서만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향해서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핵무기도 없고 핵발전소도 없는 과거로 가는 것이 더 나은 발전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는 한편 날마다 돌아오고, 봄여름가을겨울로 돌아오고, 한 세대에서 또 한 세대로 돌아와도 거기서 불편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 본문 중에서


'어제를 향해 걷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새로운 문명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오래된 미래'와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어제가 오늘로 오늘이 내일로 이어지는 직선의 시간, 시간의 불가역성에만 매달리면 회귀하는 시간, 순환하는 시간의 흐름을 놓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제를 향해 걷는 것이 새로운 문명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거슬러 살 수는 없다고 하지만, 야마오 산세이가 말하는 순환하는 시간, 회귀하는 시간에 주목해야 삶이 풍성해질 수 있을 겁니다. 야마오 산세이에게 회귀의 시간, 순환하는 시간에 주목하였기 때문에 나이많은 삼나무 조몬스기에 대해서는 특별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마오 산세이는 자신을 야쿠시마로 끌어들인 성스러운 노인 조몬스기에 대하여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그가 이 섬에 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수령 7200의 조몬스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일은 물론, 노자가 하늘나라도 올라간 것,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 못 박힌 일까지 모두 지켜보았을 것이 틀림없는 그 할아버지 삼나무는 어둠이 밀려오는 숲 속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 본문 중에서


"수령 칠천이백 년의 조몬 삼나무는 깊은 산속에 있어 쉽게 가서 뵙기 어렵다. 하지만 도쿄에서 이섬으로 옮겨와 산 십년 동안 나는 하루도 조몬 삼나무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또한 조몬 삼나무가 나를 생각하지 않은 날도 없으리라고도 생각한다. - 본문 중에서


그는 자연과 교감하고 자연과 공존하는 삶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더군요. 특히 '산에서 사는 즐거움' 이라는 글에는 자연과 하나되는 경험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정말 자연을 이해하려면 노동을 통해 자연을 만나고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기 합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낫으로 풀을 베다 보면 차츰 자신이 인간이기 보다는 식물과 비슷한 존재라는 걸 느끼게 된다. 비를 피하지 않고 그냥 맞는 식물들의 고요와 기쁨이 가슴속에 분명하게 전해지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그에게 노동은 명상과 같은 구도 활동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자연과 공생하는 방식의 삶은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살지 않으면 경험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인간이면서 식물(농작물)과 일체감을 경험 하는 사람들은 흔치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자는 "산이 있고, 강이 있고, 바다가 있어 사람이 살 수 있다고 하는 이 소박한 진리'가 독자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고 합니다 자연이 주인이고 사람이 그들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는 삶을 위해 야마오 산세이는 ▲손수 농사지어 먹는다, ▲되도록 기계에 의존하지 않는다, ▲기도와 명상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고 집중한다 등의 생활 원칙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의 삶과 글이 생명이 서로 공존하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울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의식 불명인 아내의 간호, 밤샘, 장례식, 화장, 그뒤의 초칠일까지 상주 및 승려로서의 임무를 다해 오며 그동안 거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죽고 싶을 만큼 잠을 자고 싶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마침내 몇 시간이나마 숙면을 취할 수 있었던 하룻밤을 지내고 맞은 열흘째 날의 아침, 맑은 하늘 아래 죽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 없는, 그런 가운데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내가 있었다." - 본문 중에서

"문득 이렇게 똥을 퍼서 똥통이 깨끗하게 비더라도 더 이상 기뻐해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내가 변소 치기를 좋아하는 것은 똥을 퍼내는 그 자체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아내가 그 결과를 대단히 좋아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갑자기 알게 되었다." - 본문 중에서

"아내가 숨을 거둘 때 나는 분명히 보았다. 아내의 영혼은 이 섬의 최고봉인 미야노우라 산으로 날아갔다.......그때처럼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내는 갑자기 메시모리 산에서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해거름 녘의 맑은 공기 속에서 메시모리 산은 자신의 푸른 모습을 뚜렷하게 내보이고 있었고, 그 산에는 미야노우라 산에서처럼 이미 아내의 영혼이 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본문 중에서

"하지만 천명은 이미 정해져 있어 우리는 이미 이 섬에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천명이란 조몬삼나무라 불리는 칠천이백 년의 할아버지 삼나무의 부름이었다. 그것이 가장 큰 힘이었다. 이 섬에서 두세 해 사는 사이 나는 그 삼나무를 어느새 `성스러운 노인`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안심을 주는 스승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 본문 중에서

"우리는 실은 내일을 향해 걸을 수 있는 것처럼 어제를 향해서 걸을 수 있다. 우주 식민지를 향해 걷는 것도 가능하지만 석기 문화를 향해서 걸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 시대의 큰 착각이자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 본문 중에서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는 한편 날마다 돌아오고, 봄여름가을겨울로 돌아오고, 한 세대에서 또 한 세대로 돌아와도 거기서 불편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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