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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업튼 싱클레어 지음, 채광석 옮김 / 페이퍼로드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제인 구달이 쓴 <희망의 밥상>을 비롯하여 <육식의 종말>, <죽음의 밥상>같은 육식의 폐해를 다룬 여러 책들을 읽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책이 있었는데 바로 업튼 싱클레어가 쓴 <정글>입니다.

육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책뿐만 아니라 음식 혹은 채식을 때로는 환경을 주제로 한 책들도 <정글>을 자주 인용하더군요.


수많은 책에 자주 등장하는 ‘고전’ <정글>을 꼭 한 번 읽어보려고 인터넷 서점을 여러 번 검색해 봤지만, 늘 ‘절판’으로 표시되더군요. 그런데, 얼마 전 출판사 페이퍼로드에서 업튼 싱클레어가 쓴 <정글> 완역판이 출간되었습니다.

오래 전, 미국작가 잭 런던이 쓴 <강철군화>를 읽으면서 치열했던 미국 노동운동 역사를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있는데, 업튼 싱클레어가 쓴 <정글> 역시 도살공장에서 일 하는 이주노동자 유르기스의 삶을 다룬 과격(?)하고 치열한 소설이더군요.

<정글>은 1906년 2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며 미국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고 합니다. 원래 이 책은 주인공인 리투아니아 출신 이주노동자 유르기스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와서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처절하게 무너지는 과정과 오랜 방랑 끝에 사회주의자로 깨어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에 묘사된 육가공 공장의 위상 상태에 분노한 미국인들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앞으로 무수한 항의 편지를 보내 육가공업의 개선을 촉구하였고, 지금과 같이 언론과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지만 당시 미국에서 소시지 판매는 절반으로 곤두박질 쳤다고 합니다.

루스벨트는 직접 조사관을 시카고로 파견하였고, 업튼 싱클레어를 백악관으로 초대하여 면담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책이 출간 된지 4개월 만에 식품의약품위생법과 육류검역법이 제정되었고 이어 유명한 미국식품의약국(FDA)가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식품과 의약품에 있어서 세계기준을 정하는 FDA가 <정글>이 불러일으킨 반향으로 설립된 것이지요.

한국 서점에 <정글>이 없었던 이유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은 미국문학사에서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이후 미국 사회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고 합니다. 훗날 싱클레어는 “나는 사람들의 심장을 겨냥했는데, 어쩌다보니 위에 명중하고 말았다”고 표현한 적이 있답니다.

도축 공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비극적인 삶을 조명하기 위한 자신의 노력이 더럽고 비위생적 현실에 대한 대중적 관심으로 폭발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이지요. 실제로 정치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회운동가였던 싱클레어는 <정글>의 주인공 ‘유르기스’가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으로 자신의 이념적 지향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정글>은 1979년 이래 여러 번 출간되었지만, 많은 독자들을 만날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1979년, 광민사에서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이었던 채광석의 번역으로 처음 <정글>을 출간하였는데, 이내 판매금지 도서가 되어 아름아름 몰래 읽히는 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우여곡절을 거쳐 1982년 동녘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고, 1991년 같은 출판사에서 다시 완역본을 출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정글>이라는 책에 관심을 갖게 된 2000년 이후에도 서점에서는 물론이고, 가까운 도서관에서도 이 책을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1906년 업튼 싱클레어가 미국에서 책을 출간 한 후 100여 년을 훌쩍 넘기고,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채광석이 1979년 우리말로 처음 번역한 후 30여 년 만에 자유롭게 독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도축공장, 100년 동안 얼마나 달라졌나?

“도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새끼를 낳으려고 하거나 갓 새끼를 낳은 암소의 고기는 식용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매일 이런 암소들이 상당수 도살장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송아지나 다른 소들 또 숨겨 두었던 조산된 송아지를 도살해서 식용육으로 만들었고, 게다가 그 송아지의 가죽까지도 이용했다.” (본문중에서)

“다리가 부러지거나 배가 찢어진 소는 물론 이미 죽은 소들도 섞여 있었다.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소들이 이 어둠과 고요 속에서 처리되었던 것이다. 상처입거나 죽은 소들을 처리하는 사람들은 그런 소들을 ‘다우너’라고 불렀다.......유르기스는 그것들이 냉동실로 옮겨져 다른 고기들과 구별되지 않도록 이곳저곳으로 분산되어 매달리는 것을 보았다.”(본문 중에서)

“마치 요원들을 일부러 전국에 파견해서 절뚝거리고 늙고 병든 소들만을 통조림용으로 끌고 오는 것 같다는 얘기였다. 양조장에서 나오는 술찌꺼기로 사육되는 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황소 비슷한 놈’이라고 불렀다. 온통 종기로 뒤덮여 차마 황소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도살하는 일은 아주 지겨운 일이었다. 칼로 그런 소를 찌르면 얼굴에 온통 더러운 고름이 튀었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이런 현실은 100년이 지난 뒤에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TV 프로그램과 책에 나온 자료를 보면 미국 도축공장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다우너’소가 섞여서 도살되어 판매되고 있습니다. 또한 술찌꺼기 보다 더 해로운 골육분 사료를 먹은 광우병 위험이 있는 소들을 24개월 이전에 도살하여 ‘안전한’ 쇠고기로 판매하는 일이 버젓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료를 살펴보면 <정글> 출간 후 10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미국에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람에게 투여하는 항생제의 양은 연간 300만 파운드, 가축에게 투여하는 항생제의 양은 연간 2460만 파운드에 달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사육하는 닭이 캄필로박터균에 감염되는 비율은 70%이고, 살모넬라균에 감염된 달걀을 먹고 질병에 걸리는 사람은 연간 65만 명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 도살당할 때 폐렴에 걸려 있는 돼지의 비율은 70%이라고 합니다. 100년 후에 존 로빈슨이 쓴 <음식혁명>에 인용된 자료들입니다.

썩은 고기가 햄과 소시지로 만들어지는 기적(?)

“화학적인 기적은 어떤 종류의 고기라도 즉, 신선한 고기나 소금에 절인 고기나, 큰 덩어리나, 잘게 썬 것이나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원하는 색깔과 향기 그리고 맛을 낼 수 있다.고 했다.......가끔 상한 햄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는 냄새가 하도 고약해서 도저히 방안에 둘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그럴 때는 더 강한 화학 약품을 푼 물통에 집어넣어 냄새를 제거시키면 그만이었다.” (본문 중에서)

“소시지용으로 어떤 고기가 사용되는가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불합격품과 오래 되어 허옇게 곰팡이가 슨 소시지가 유럽에서부터 모두 되돌려져 왔는데, 거기에 붕사나 글리세린을 섞어 넣은 후 다른 소시지와 함께 다시 국내시장으로 내보냈다.”(본문 중에서)

“고기가 마룻바닥에 굴러 떨어져 먼지나 톱밥이 묻기도 했다. 그 바닥은 일꾼들이 쿵쿵거리며 밟고 다니고 침을 뱉어내고 하여 병균이 우글거렸다. 몇몇 방에는 고기를 산더미같이 쌓아놓았다. 그러나 말이 창고지 늘 지붕이 새어 빗물이 떨어지고 쥐들이 들락날락거리는 그런 곳이었다........손으로 고기더미를 휙 쓸어 보면 마른 쥐똥이 한 줌씩 묻어 나왔다. 쥐들이 하도 귀찮게 굴어 쥐약을 놓곤 했는데 죽은 쥐와 쥐약 묻은 빵이 고기와 함께 깔때기 속으로 들어갔다.” (본문 중에서)

화학약품을 사용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가공식품 산업은 점점 더 발달하고 있습니다. 소시지와 햄을 만드는 작업장은 깨끗하게 위생 처리되는 공장으로 바뀌었지만, 햄과 소시지의 빛깔을 좋게 하고 식감과 맛, 향을 더하기 위하여 100년 전보다 더 많은 식품첨가물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햄과 소시지의 원재료가 되는 가축들은 100년 전보다 훨씬 더 열악한 공장식 사육장에서 길러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축공장 자본가들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하여  100년 전보다 더 빨리 자랄 수 있도록 품종을 개량하고 성장을 촉진하는 사료와 약품을 함께 먹이고 있습니다.

100년 전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이 미국사회를 뒤흔들어 놓았지만, 100년이 지난 후에도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공장식 사육으로 인하여 O157, 광우병, 조류독감, 구제역 같은 가축질병이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더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축을 위한 새로운 약품이 개발되고 의료 기술이 발전 하는데도 불구하고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업튼 싱클레어는 모든 원인이 바로 자본의 끊임없는 욕망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글> 이후 100년, 시간이 세상을 바꾸어주지 않는다.

“그 세계는 바로 가지지 못한 자들을 예속시키기 위해 가진 자들이 만든 야만적 질서만이 중요시되는 세계였다. 그는 가지지 못한 자였다. 그에게는 모든 바깥세상과 모든 인생이 하나의 커다란 감옥이었다.” (본문 중에서)

아울러 업튼 싱클레어는 주인공 유르기스와 그 가족들의 삶을 통해 노동자가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 결코 조금도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 패킹타운에 도착하여 건장한 몸으로 누구보다도 부지런했던 유르기스는 자신감에 충만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자신과 가족들은 조금씩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들은 철저하게 하나도 남김없이 유르기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열심히 일을 하는 만큼 몸이 병들어 가기 때문에 늙은 아버지도, 젊고 아름다웠던 아내도, 가족들도 그리고 마침내 어린 아들마저도 잃게 됩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온 가족을 이끌고 미국 땅을 밟은 이주노동자는 불과 몇 년 사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자본가들에게 빼앗기는 처절한 고통과 절망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리고,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이 강자만이 살아남는 ‘정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패킹타운에 도착한 첫날에 구경한 거대한 오물 처리장도 바로 스컬리의 것이었다. 그는 오물처리장뿐만 아니라 벽돌 공장도 소유하고 있었는데......벽돌 공장에서는 진흙을 파내 벽돌을 만든 다음 쓰레기를 가져다 진흙 파낸 자리를 메우게 하고 그 위에 집을 지어 팔아먹었다....... 그는 또 썩은 물이 고여 있는 깊게 파인 공터도 소유했는데 겨울에 그 썩은 물이 얼어붙으면 이를 베어다 팔아먹었으며... ” (본문 중에서)

가축공장과 소시지공장 뿐만 아니라 오물처리장과 벽돌공장 그리고 오물 처리장 위에 지어진 집들까지 모든 것이 자본가들의 몫이었던 것입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유르기스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야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업튼 싱클레어는 사회주의자가 된 유르기스와 그 동지들을 통해 ‘노동이 자유로운 세상’의 단초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학이 발전하는 것 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의학지식을 버려진 사람들에게 적용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입니다.

소설가 방현석은 이 책에 실린 ‘작품해설’에서 “시간이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것을 강조합니다. 업튼 싱클레어가 쓴 <정글>이 100년이 훌쩍 지나서야 겨우 자유롭게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일들이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말한 대로 ‘야만적인 실업’과 ‘생명을 담보로 하는 탐욕’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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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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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 <특강>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역주행의 시대에 가장 주목 받는 역사학자 중 한 명이 바로 한홍구 교수입니다. 한겨레신문과 오마이뉴스에서 자주 그가 쓴 글과 인터뷰 기사를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역주행의 시대가 언제까지 갈 것인지 불안해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답을 구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이명박 정부가 노무현, 김대중 정부 10년을 거꾸로 돌려놓으려는 줄 알았더니, 김영삼 정부 5년까지 포함하여 문민정부 이전 군사정부 시절로 되돌아가려고 광란하는 듯합니다.

여론을 장악하기 위한 날치기 악법을 일사부재리의 원칙마저 짓밟으며 통과시키고, 파업노동자들의 목을 죄고,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잡아가두는 일을 마구잡이로 일삼고 있습니다.


한국현대사에 대한 흥미진진하고 날카로운 해석을 담은 책 <대한민국사 4권>을 썼던 한홍구 교수의 <특강>은 바로 이 험난한 시대를 명쾌하게 해석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길잡이를 자처하는 책 입니다.

<특강>은 한겨레교육문화센터가 주최하여 모두 8강좌로 진행된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강좌’를 다듬어 엮은 책 입니다. ‘대한민국사 강좌’는 2008년 5월 촛불정국 이후 눈앞에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근현대사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재해석하기 위한 기획 강의였다고 합니다.

2008년 10월 13일부터 12월 1일까지 진행된 ‘대한민국사 강좌’는 뉴라이트와 역사 교과서, 조작 간첩 사건, 토건국가의 역사, 제헌헌법, 괴담의 생산과 유통 소비, 친일경찰의 뿌리를 이어받은 한국경찰, 교육문제, 촛불의 역사성과 의미 등을 주제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이명박, 괴담, 밥솥 시리즈

<특강> 제 1강의 주제는 ‘역사의 내전, 뉴라이트와 건국절 논란’입니다. 제 1강에서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밥솥시리즈입니다.

“박정희가 열심히 일해서 밥솥을 하나 장만했어요. 그리고 밥을 지어놓고 죽었습니다. 전두환이 들어서서 퍼 먹었죠. 그 다음에 노태우가 보니까 밥은 전두환이 다 퍼 먹어서 누룽지를 긁어 먹었습니다. 김영삼이 밥솥을 열었는데 아무것도 없거든요. 박박 긁다가 솥단지를 깨먹었어요. 김대중이 들어서서 외국 돈도 빌리고 카드빚도 내서 전기밥솥을 하나 장만했습니다. 그랬더니 노무현은 110V냐, 220V냐 코드만 만지작거리다가 밥을 못 지었어요. 국민들이 배고파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니까 이명박이 나타나서 ‘밥은 내가 해줄게. 내가 금방 지을 수 있어’하고 그 전기밥솥을 장작불 위에 딱 올려놓았다는 거 아닙니까.” (본문 중에서)

한홍구는 보수 세력의 놀랄만한 무능력을 밥솥시리즈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쇠고기협상, 환율문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과거사위원회’에서 일 하다보니 보수 세력들이 ‘말 안 들으면 잡아다가 줘 패면서 국정을 운영하고 정권을 유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무능한 보수는 정권을 잡자마자 과거로 회귀하고 싶어 하고 그 첫 번째 단계가 바로 학교와 방송을 장악하기 위한 시도라는 것 입니다.

“민주화되면서 방송이 정권의 손아귀를 벗어나 독립성을 회복하고, 교육도 전교조가 생기면서 많이 달라졌죠. 주먹으로 팰 수 도 없고 정권 유지의 버팀목이었던 방송과 교육을 놓쳐버리니까 정권을 유지하기 힘들었던 겁니다.”(본문 중에서)

지금 이명박 정부가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 떠난 교사,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사들을 처벌하겠다고 난리를 치는 일이나 세계적인 망신에도 불구하고 엉터리 표결로 미디어법 통과시키는 것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 입니다.

말하자면, 교육과 방송을 장악하지 못하면 유지할 수 없는 정권이라는 것 입니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한 장비를 확충하고, 서울광장에 차벽을 설치하고, 법이 보장하고 있는 집회와 시위를 제한하는 과거로의 회귀를 통해 권력을 연장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과거청산 없는 민주화의 위기

그럼,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역사학자 한홍구는 ‘과거청산 없는 민주화’가 초래한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라고 진단합니다.

“우리가 민주화를 하긴 했는데 어떤 민주화입니까? 구시대와 폼 나게 단절한 것이 아니라, 구시대를 다 살려놓고 그 똥물이 가득 찬 통에다 계속 새 물을 부었습니다. 언젠가는 맑아지겠지 하면서요. 그러나 보니 구체제의 오물은 그대로 남겨둔 체 절차적 민주화만 이루어졌어요.” (본문 중에서)

그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가 과거청산 없는 민주화가 초래한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말 합니다. 탄핵 자체는 반민주적 해위였는데, 과거청산 없는 민주화, 절차만 남은 허울뿐인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왔었다는 것이지요.

위기를 맡은 국민들을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에 과반수 의석을 안겨줌으로써 민주화의 위기에서 벗어나오지만, 양심적 병역거부, 국가보안법, 행정수도 문제로 부딪히지만 대개혁에는 실패하고 맙니다.

결국 수구세력들에게 2007년 대선으로 이어지는 대반격의 기회를 내주게 되는데, 한홍구 교수는 그 첫 번째 사건이 바로 ‘뉴라이트’의 등장이라고 합니다. 그는 뉴라이트를 수구세력의 ‘구원투수’라고 비유하였더군요.

뉴라이트의 면면을 보면 과거 운동권에 있던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과거에도 류근일, 이재오, 김문수, 차명진, 송복, 심재철, 김진홍, 서경석 등과 같이 운동권 출신이 권력에 안긴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모두 개별적으로 포섭된 경우라고 합니다.

친일파, 건국공신 그리고 뉴라이트

그런데, 뉴라이트의 경우는 새로운 간판아래 몸값을 불리면서 집단적으로 등장하였다는 것이 크게 다른 점이라고 합니다. 그는, 뉴라이트의 등장을 과거사 청산 작업에 대한 위기의식의 발로라고 진단합니다.

뉴라이트가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정통성이 집권세력에 의해 의문시되면서 국가정체성이 손상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바로 친일 역사청산에 대한 위기의식을 표현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실제로 뉴라이트가 벌인 가장 적극적인 활동이 바로 ‘과거 청산’과 ‘교과서 문제’라는 것 입니다.

이른바 ‘건국절’ 논란의 핵심은 바로 과거 친일파가 애국자로 ‘변신’에 성공한 역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집단과 친일파를 애국자로 인정하자는 집단이 부딪힌 역사적 사건입니다. 불과 60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분명해집니다.

1948년 8월 정부수립 당시만 하더라도 ‘친일청산’은 약속되어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1949년에 일어난 ‘남로당 프락치 사건’, ‘반민특위 습격’, ‘백범 김구 암살’ 등을 통해 친일파의 반격이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대한민국이 이승만과 친일파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는 것 입니다.

결국 뉴라이트의 역사 왜곡과 교과서문제는 이런 역사를 미화하기 위한 작업인것이지요. 그들은 친일의 흔적이 선명한 ‘광복절’은 국민들의 기억에서 지우고, ‘건국’을 내세우고 싶어 한다는 것 입니다. 이런 뉴라이트가 국가 정체성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바로 ‘국가보안법 정체성’이라는 것이 한홍구의 주장입니다.

“이명박이 중국에 다녀오자마자 비서를 붙잡고 물어봤죠. 촛불집회의 배후를 물었죠.......거기에는 반드시 배후가 있다고 생각하죠....... 내 마음에 안 드는 모든 나쁜 것은 다 배후가 있죠. 이게 바로 국가보안법 정체성입니다.” (본문 중에서)

국가보안법 정체성과 조작 간첩 사건

국가보안법 정체성에 의해서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조작 간첩 사건’이라는 것 입니다. 실력 없는 수구세력들이 이른바 ‘간첩 전성시대’를 만들어 ‘배후’를 조작하여 정권을 지탱해온 것이 한국현대사라는 주장입니다.

역설적이게도 1970년대 이후 북한에서 보내는 간첩이 줄어드는 동안 남한에서는 새로운 간첩전성시대가 열렸다는 겁니다. 북한에서 간첩이 내려오지 않으니, 이른바 공안기구에 의해 남한에서 간첩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결국, 1970년대, 80년대에는 억울한 간첩들로 ‘간첩 전성시대’가 열렸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어부간첩과 재일동포 간첩 사건들이 “간첩의 간자 하고도 상관없는” 억울한 간첩 사건이라는 것 입니다.

<특강>에서 한홍구 교수가 소개하는 어이없는 조작 간첩사건을 정말 황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자장면이 맛있다. 경부고속도로가 4차선이다. 예비군 훈련을 다녀온 일, 군대생활에 대한 기억, 자신이 복무했던 부대위치, 어부가 기억하고 있는 바다의 물 때, 마을 파출소 위치 이런 것들이 다 군사기밀 수집, 탐지에 해당된다는 것 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하여 ‘고문’이 자행되었고, 악명 높은 이근안은 간첩(?)을 세 명이나 잡았다고 합니다. 모두 고문으로 간첩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조국이 분단 된 것 때문에 동포사회가 총련과 민단으로 나뉘어졌고, 총련에 속한 동포들과 만나면 간첩이 되었다는 겁니다. 한홍구 교수는 국가보안법을 없애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 합니다.

국가보안법이 잡을 수 있는 간첩은 북과 관련된 간첩이나 조작 간첩, 반국가단체의 지령을 받아야 하는 간첩뿐이기 때문에 일본이나 중국, 미국이 보내는 간첩은 처벌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국가보안법은 하루 빨리 없어지고, 진짜 간첩을 잡을 수 있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한편, <특강>은 촛불 이후의 한국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여러 키워드를 현대사의 관점에서 치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 키워드 중 하나는 ‘토건국가’입니다. 일본을 제외하고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토건국가가 된 과정, 부동산 투기의 역사, 강남개발의 신화, 개발독재의 역사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의 경제위기는 마인드가 골수에 박힌, 토건국가 시대의 행동대장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토건국가 ‘마인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임시정부 강령, 제헌헌법에 민주주의의 ‘길’이 있었다

또 다른 키워드는 ‘헌법’입니다. 촛불 시민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것을 수 없이, 수 없이 강조하였습니다. 한홍구 교수는 <특강>에서 헌법정신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임시정부 건국강령과 제헌헌법에 담긴 사회 공공성을 우리 앞에 다시 내놓습니다. 이 나라가 원래부터 엉망이 아니었다는 것 입니다.

친일파들이 건국공신으로 둔갑하기 전만 하여도 온전하게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헌법적 토대가 충분하였다는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아울러, 그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공기업 민영화는 제헌헌법에 담긴 사회 공공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사영화’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가늠하는 기준은 ‘임시정부’와 ‘제헌헌법’이라고 단언합니다. 아울러 임시정부의 법통과 제헌헌법에 기초한 국가 정체성을 짓밟은 것이 바로 친일파 건국세력이라는 것 입니다.

또 다른 키워드는 ‘민주주의와 촛불’입니다. 그는 촛불을 통해 ‘민주주의를 직접 살아 본 세대’의 역동성을 이야기 합니다. 그는, 전쟁 끝나고 7년 만에 4.19가 일어났으며, 암흑과 같았던 유신 후에 불과 7년 박정희가 죽었고, 광주 학살 이후 7년 만에 6월 항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그는, “민주주의는 절대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고 말 합니다. 미래의 변화와 희망을 만들어내는 지금,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 시킵니다. 인물보다 원칙과 정책을 중심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국정원과 검찰을 개혁하고 과거사 청산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원칙을 가진 사람, 법을 가지고 장난치는 놈들을 소탕하고 거기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따라 그 역할을 하는데 제 몸을 던지겠습니다.” (본문 중에서)

바로 한홍구 교수의 원칙과 정책입니다. 그는 각자가 생각하는 원칙과 정책을 내걸고 여기에 만족하는 후보를 만들어 모든 것을 바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간이 많지 않다고 말 합니다. 시간이 없어 그를 직접 만날 수 없었던 독자들과 함께 한홍구 교수의 <특강>을 통해 희망의 씨줄, 날줄을 함께 엮어나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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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외로운 전쟁
김용한 지음 / 포북(for book)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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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100만 명 추모인파가 봉하마을을 다녀가고 49재와 안장식 이후에도 추모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추모 콘서트 제목 그대로 다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서점가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 신드롬이 일어나 여러 권의 추모시집과 인터뷰집, 어린이 책을 비롯하여 서거 이후에만 20여권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김용한이 쓴 <노무현의 외로운 전쟁>(FOR BOOK 펴냄)은 2000년 총선을 전후한 특정한 시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선거 기획 전문가인 정치컨설팅 그룹 MIN 대표인 박성민씨는 그가 쓴 책에서 정치를 일컬어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기는 게임"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은 "옳은 것이 강한 것에 이겨야 한다"는 신념을 펼치는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용한이 쓴 <노무현의 외로운 전쟁>은 옳은 것이 이기는 세상,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위하여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을 걸어온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큰 분수령이 된 2000년 총선 당시의 현장을 담고 있습니다. 

집권당의 부총재이며 정치 1번지 종로구 국회의원이라는 기득권과 탄탄대로를 버리고 '화합과 통합의 정치'라는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신념, 이상을 펼치기 위해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하는 '바보 노무현'의 가장 치열했던 순간을 담은 기록입니다. \ 

아울러, 그 순간 험난한 가시밭길에 동행했던 참모인 이른바 '땅개'들의 고군분투, 그리고 유권자들 사이에 팽배해 있는 지역감정과의 대결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바보' 노무현은 바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열두 척의 배로 일천여 척의 일본 수군에 맞서면서 "必生卽死 必死卽生"라는 말로 군사들을 독려하였다고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스스로 죽어서(선거에 떨어져야) 다시 사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저자 김용한은, 2000년 총선이라고 하는 특정 사건을 중심에 둔 기록을 책으로 엮어낸 이유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절규해왔던 지역 통합의 정치이념인 '노무현 정신'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부산에서 출마, 다시 가시밭길을 가다

그리하여, <노무현의 외로운 전쟁>은 그가 모든 기득권을 훌훌 벗어던지고, '새로운 도전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앞으로 지역구를 부산이나 경남 지역 중 한 곳을 정해 출마하겠다."

1999년 2월, 노무현 의원은 청와대를 다녀오고 나서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발표를 한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부산 출마에 대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부산에 내려온 것은 우리 역사에서 대립과 반목, 그것을 한번 극복해보자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지역 갈등 상황은 위험 수위에 달해 있으며 그러한 적대감과 대결을 부추기는 정치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분리가 곧 불평등을 의미'하듯 지역분할구도가 지역의 상대적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본문 중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선거를 통하여 지역을 뛰어넘는 통합의 정치를 실현하고, 화해와 용서·사람이 넘치는 감동의 정치를 이루어내겠다는 목표를 세웠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역 통합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그를 바보라고 불렀던 것이구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붙여 준 별명 중에서 '바보'라는 별명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하였습니다. 2000년 총선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바보 노무현'으로 불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말하자면, 2000년 총선 부산 출마는 정치를 안 했으면 안 했지 명분과 원칙에 어긋나는 구차한 기회주의식 정치는 않겠다는 정치인 노무현의 굳은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였습니다. 

2000년 총선, 부산에선 어떤 일이 있었나? 

지역을 뛰어 넘는 통합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종로 선거구를 버리고 부산으로 내려 온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노무현의 외로운 전쟁>에서는 가수 방실이를 닮은 '선동대장 방실이 아줌마'의 입을 빌어 말해주고 있습니다. 선동대장 방실이 아줌마는 왜 노무현을 지지하였을까요? 그녀는 살기가 힘들어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지는 지난번 부산시장 선거 때부터 노무현 후보님을 지지해 왔심더.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면 우리 같은 서민이 잘살 수 있을 것 같애서........ 세상이 왜 이렇게 힘듭니까? 열심히 열심히 해도 생활이 안 나아지니까 그래서예......." (본문 중에서)

그렇다면, 노무현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맞심더, 인물이야 좋지예, 내도 노 후보를 좋아한다 안캅니꺼. 그런데 대중이 밑에 들어가 그게 꼴 뵈기 싫어지지 안할랍니다. 민주당이라 카마 호남당 아인교? 호남당. 그라마 차라리 무소속으로 나오라 카이소. 팍 찍어준다 카끼네." (본문 중에서) 

2000년 총선 당시 많은 부산 사람들은 노무현은 좋은데, 그가 민주당이라서, 호남당, 김대중당이라서 찍어줄 수 없다고 드러내놓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노무현의 입장은 분명하였습니다. 그는 지역감정 앞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벽을 허물기 위하여 출마하였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밝힙니다.

"부산에서 콩이면 광주에서도 콩이고, 광주에서 콩이면 충청도도 콩인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본문 중에서)

지역을 뛰어넘는 통합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정치 1번지 종로구를 버리고 부산으로 내려 온 노무현은 초반 여론조사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지역감정의 높은 벽에 부딪쳐 패배하고 맙니다. 2000년 4월 13일, 부산 북 강서을 유권자들은 지역감정의 높은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노무현에게 패배의 쓴 잔을 안기지만 그날 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必生卽死 必死卽生"

노무현의 패배가 알려진 그날 밤, 6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노무현의 패배에 안타까워하는 글을 올렸고, 하룻밤 사이에 약 18만 명의 누리꾼들이 그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는 한국 정치사상 초유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정치인 노무현이 한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충격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뜬눈으로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있던 그때, 사이버 공간에서는 수많은 네티즌들이 역설적으로 한국 정치의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한국 정치의 내일과 희생을 애절하고도 뜨겁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홈페이지에는 "아름다운 바보 한국인! 힘내세요!!" 같은 글이 끝도 없이 올라오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노무현 후보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투표장에 들어가니 붓두껍을 든 손이 1번으로 가더라. 그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노무현은 바보다. 그러나 아름다운 바보다. 우리나라가 잘되려면 그런 아름다운 바보가 더 늘어나야 한다."

"우리 정치 현실을 보며 어느 부모도 제 자식에게 정치가가 되라고 말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의원을 보면서 나는 다섯 살 난 아들이 자라면 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노 의원 같은 정치가가 되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4.13 총선에 기권했지만 노무현 의원이 낙선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 같은 방관자적 자세가 그를 떨어뜨렸다고 생각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서지 않으면 노 의원이 지역감정 타파 실험을 중지할까 걱정되어서 적극 참여하고 있다."

2000년 5월 7일 대전 고속버스터미널 앞 카페에서 처음 만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이라고 합니다. 이 모임은 한 달 후 그들은 정식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몇 개월 만에 200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거대한 조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새로운 바람은 온라인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불기 시작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낙선 후에 '지역감정 해소책'을 주제로 강연을 하러 광주에 갔을 때는 밀려드는 시민들의 사인 공세 때문에 강연이 끝나고 30분 가까이 행사장을 떠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인기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한테서나 볼 수 있는 일이 정치인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상향적인 민심의 지지를 받는 열성적인 고정 팬을 둔 최초의 정치인이 된 것입니다. 이윽고 노무현의 정치노선과 철학에 공감하는 사람들, 혹은 그냥 서민들이 잘 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혹은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나라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불과 2년 후에 노무현을 제 16대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기적'을 이루어냅니다.

실속도 없이 노무현을 도운 이유

저자 김용한은 사람들이 "너는 왜 실속도 없이 노무현을 돕느냐"고 묻는다면 서슴치 않고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돕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는 것으로, 상식과 원칙이 승리하는 사회가 되기를 조금이라도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저자뿐만 아니라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을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은 노사모를 비롯한 지지자들, 그리고 탄핵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국민들 모두 원칙과 상식이 승리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그와 함께 하였을 것입니다. 

아울러,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 봉하마을과 전국 곳곳의 분향소를 찾은 이들도 역시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도운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자신들의 꿈을 함께 이루어왔던 것이지요.

때문에 노무현 지지자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은 순수한 자원봉사자들이 대부분이었고, 노무현의 정치철학과 명분에 공감을 느껴 따르는 사람들이었으며 노무현과 같은 서민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노무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무현과 함께 원칙과 상식이 승리하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뛰어든 불나비들이었던 것입니다.

김용한이 쓴 <노무현의 외로운 전쟁>은 2009년 5월 23일, 그 불행한 사건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책으로 나오지 않고 묻혀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무모하리만치 숭고한 도전, 슬프도록 아름다운 도전 기록을 담은 이 책은 "必生卽死 必死卽生"의 기적 같은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끝으로 독자들에게, <노무현의 외로운 전쟁>을 읽다 예전에 프레시안에 연재되었던 글을 모아 엮은 <지구에서 인간으로 유쾌하게 살아가는 법>에서 읽은 '정치'라는 주제의 글이 생각나 소개합니다.

어쩌면 좀 괜찮은 사람인 척 하는 우리들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며, '정치에 참여하지 않은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치

좀 괜찮은 사람들은
정치하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며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좀 괜찮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권력을 내주고
그들로부터 지배받는 벌을 받는다.

- 막시무스가 쓴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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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무너졌다
자크 사피르 지음, 박수현 옮김, 김병권 한국판 보론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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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그리스펀은 작금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일컬어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한 위기'라고 말 하였다. 2006년 말 미국 주택가격 급락과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 부실로 시작된 미국발 금융 위기는 지난 2년간 전세계 신용 경색과 금융 공황으로 확산되었다.

금융 위기가 정점으로 치닫던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은 위기의 폭발을 일으켰고, 글로벌 경제는 실물경제 붕괴라는 더 위험한 위기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미국과 유럽,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까지도 순식간에 마이너스 성장국면으로 바뀌었고, 제조업 경기는 심각하게 위축되었다. 

그런데, 글로벌 금융위기 대책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확산되어가는 글로벌 금융 위기가 도저히 '시장의 자기 치유력'으로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2008년 9월, 미국의 7000억 달러 구제금융법안 발의를 기점으로 각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시장의 실패'를 대신하여 국가가 해결사로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국가의 귀환'이 공식화되기에 이르렀다." (한국판 보론, 김병권)

이것은 IMF가 1990년대 남미와 아시아 외환 위기시에 강요했던 처방책과는 전혀 다른 해결책이다. 남미와 아시아에서 IMF가 요구했던 정책은 초긴축 정책과 재정 건전성 강화, 초고금리, 그리고 민영화와 고용 유연화, 작은 정부와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이었다.  

그런데, 선진국들은 자국에 위기가 닥치자 재정지출 확대, 제로금리, 국유화, 고용보장과 실업 대책 확대 등 신자유주의에 반대되는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과거 한국 등이 겪은 외환 위기 과정에서 재정 적자 감축, 금융기관 민영화, 금융 긴축과 고이자율, (금융)규제 완화와 개방(자유화) 등을 주문한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구조 개혁 프로그램과는 달리, 현 금융 위기 상황에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정확히 반대로 재정팽창, 저이자율, 금융규제로 나아가고 있다."(한국판 보론, 김병권) 

그렇지만, 현재 추진하고 있는 통화정책과 재정확대 정책으로 경제의 금융화와 금융의 세계화가 낳은 신자유주의의 최대 위기가 극복될 수 있다는 확신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현재의 글로벌 경제 위기는 단순한 경기 순환 국면상의 하강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30년간 구축되어온 신자유주의 시스템, 신종 금융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구조적 결함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시스템의 위기이며, 자본주의 시스템의 구조적 한계로부터 발생한 위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글로벌 경제 위기, 단순한 경기 침체가 아니다. 

<제국은 무너졌다>를 쓴 자크 사피르는 이러한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위기는 어느 날 갑자기 닥친 것이 아니라고 말 한다. 그는 현재의 위기는 1997~1999년 국제금융위기가 시작될 때부터 잉태되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위기는 바로 제국의 위기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아시아 금융위기 사태로 인하여 미국이 주도하여 다른 많은 국가에 강요했던 국제금융 자유화를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미국의 정책은 실패하거나 거부당하였고, 신흥국가들은 금융자유화를 줄이고, 부채를 축소하거나 규제를 도입함으로써 금융위기와 미국의 정책에 대응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1990년대와 21세기 초에 경험했던 미국의 경제성장은 상당 부분 허상이었으며, 경제는 성장하였지만 유례없는 소득 불평등의 심화로 위기를 키워왔다는 것이다. 자크 사피르는 "2006~2007년 겨울에 발생한 후 점차 금융 위기로 확대된 미국 주택담보대출 시스템 위기는 어떻게 보면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 한다. 

오히려 더 심각한 일은 제국이 가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군사주의 같은 상황으로 치달은 것이라고 한다. 신군사주의는 정치적, 외교적 실패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똑똑히 볼 수 있는 군사적 재앙을 낳았다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 외교, 군사적 실패는 러시아, 중국,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관계가 탈냉전 시대 최초의 국제안보기구인 '상하이 안보기구'로 견고해지는 촉매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제국은 세계를 지배해보지도 못한 채 추락하기 시작하였다는 주장이다. 러시아 같은 구강대국들이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중국과 인도 같은 신흥강국들이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크 사피르는 지난 몇 년 사이에 미국은 전반적으로 약화되어 왔다고 한다. 이 말은 미국이 더 이상 강대국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미국이 제국의 권위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1991년 12월 구소련이 해체를 결정했을 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미국의 세기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였지만, 10여 년도 지나지 않아 제국의 위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세기'의 위기는 1997년 금융 위기 시작과 2005년 미국이 겪은 이라크 개입의 참담한 실패 사이에 발생했다. 즉 1997년부터 2005년까지 8년이야말로 결정적인 시기였던 셈이다. 이 같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상적 실패에 따른 결과는 엄청나다."(본문 중에서)

저자는 미국의 참담한 실패 원인을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

①1997년 금융 위기 당시 미국은 자신이 원하던 방식으로 세계 경제를 통제하는 데 실패하였다.
②세계 지배 이데올로기의 위기가 도래하는데, 바로 시애틀과 제네바에서 열린 반 WTO시위와 지지부진한 도하 아젠다 협상은 상징적 사례다.
③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군사전략 역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정치적 고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④러시아를 약화시키고 자국의 세계 정책에 편입시키는 계획에 실패하였다.
⑤중국의 급부상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였고, 재군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실패는 미국의 무능을 뛰어 넘는 더 근본적인 이유로부터 기인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세계화의 위기라는 것이다. 예컨대 IMF와 같은 국제기구가 미국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결국은 신뢰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WTO의 침체 역시 미국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위기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위기 

정치,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미국의 선택은 재군사화였지만, 코소보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라크에서 잇따라 실패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라크 전쟁은 온갖 거짓말을 바탕으로 시작되었고, 아울러 애국자법과 같은 공적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짐으로써, 결국은 보편적 가치에서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라크 개입은 미국의 헤게모니에 위기를 초해하였고, 전세계에서 미국의 신뢰를 더욱 약화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실패가 아니어도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의 성장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약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세계는 다극적 질서 체제로 변화하는 이행기에 있다고 한다. 예컨대 국제 통화질서의 분할과 다극성은 지역통화제도의 설립을 암시하는 일이라고 한다. 아울러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반드시 과도한 자산 유동화, 위험과 불확실성 심화를 유발하는 새로운 금융수단의 확산, 너무 자유로운 단기 자본이동에 대한 재검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제국과 함께 몰락하는 신자유주의 위기는 경제에 자리를 내주었던 국가와 정치가 복귀함으로써, 근본적 의미에서 정치적인 중재를 통해서 바람직한 세계질서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쓴 자크 사피르는 프랑스에서 처음 싹을 틔운 조절이론 전통을 이어받아 사회변동과 제도, 규칙의 역할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특히 체제 전환기 국가의 금융시장 분석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2001년 금융 경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연구자에 수여하는 틔르고상을 수상했고, 프랑스 정부와 주요기업, 각종 국제기구의 동유럽 지원프로그램 자문관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또한 러시아 중앙은행 금융 시스템에 대한 전문가 그룹에 참여하고 있으며, 러시아 에너지 산업에 대한 연구프로젝트도 이끌고 있다고 한다.   

저자인 자크 사피르는 경제학자지만, 그가 쓴 <제국은 무너졌다>를 읽어보면 전쟁, 국제정치, 그리고 역사와 사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독특한 지식인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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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가능한 세상을 향한 발돋움 : 환경갈등이라는 복잡한 숙제 풀기 희망제작소 프로젝트 우리시대 희망찾기 6
박진섭.소병천 지음 / 창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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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민주화 이후 권리의식이 향상되면서 환경문제를 둘러싼 갈등도 점점 더 늘어난다.

시민운동으로써 환경운동이 시작된 것을 시민단체 환경운동연합이 태동한 때라고 본다면, 1993년에 이 단체가 출범하였으니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역사는 대략 15년쯤 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환경운동연합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공해추방운동연합을 비롯한 환경운동이 있었으나 보다 더 대중적인 시민운동으로 출발한 것은 1990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5년 남짓한 환경운동 역사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대표적인 환경 갈등 사례였던 사건은 바로 새만금간척사업과 방폐장부지 선정사업이었다.

치열한 갈등을 겪은 두 사건은 현재는 이미 일정한 결론에 도달한 상태다. 방폐장 사업은 몇 군데 후보지역에서 주민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다가 우여곡절 끝에 경주에 건립되고 있고, 새만금간척사업은 대법원 소송을 거쳐서 계속추진 중이다.

환경운동가 박진섭과 환경법학자 소병천이 쓴 <지속가능한 세상을 향한 발돋움>은 2003년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되었던 환경문제인 새만금 사건과 부안 방패장 사건을 연구한 책이다. 한 사람은 '운동가'로서 다른 한 사람은 제도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서로 다른 방법으로 같은 사건에 대한 고민을 해나가는 과정에 같은 문제의식에 이르렀다고 한다.

▲ 이(새만금과 방폐장) 문제를 해결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가?

▲ 갈등을 예방하거나 갈등에 따르는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정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대중의 목소리를 충분히 담아내는 정책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책은 이런 고민을 풀어가기 위하여, "지역개발 과정에서의 환경 보전"을 주제로 새만금 간척사업과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사건이라는 구체적 사례에 접근하고 있다. 특히, 문헌연구 대신에 두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직접 관련된 사람, 지역 주민이나 사례 추진 담당 공무원들, 환경운동가와 학자들을 인터뷰하였다.

새만금 어떤 사업이었나?

새만금간척사업은 농지확보를 목적으로 1986년, 김제, 옥구, 부안지구를 통합한 종합개발계획으로 구상되었고, 1987년 대선에서 여야 후보 모두 선거공약으로 내세우면서 더욱 구체화 되어 1991년 공사를 시작하였다.

"새만금 간척사업은 부안군, 김제시, 군산시에 걸쳐 있는 바다와 갯벌 4만 100헥타르를 간척하는 사업으로, 방조제 길이가 무려 33킬로미터에 달하는 세계 최대 간척사업으로 꼽힌다. 이 간척사업의 애초 목적은 농지조성이었다. 갯벌을 농사지을 땅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본문 중에서)

새만금공사를 둘러싼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는 것은 1998년, 김대중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김영삼 정부의 3대 부실 사업 중 하나로 새만금 사업을 지목하면서부터이다. 같은 해 감사원 특별감사에서도 70여건의 문제점이 지적되었고, 시화호 수질오염 문제가 제기되면서 새만금 수질확보 문제가 본격 제기 되었다.

결국 1998년 7월, 새만금간척사업백지화를 위한 시민위원회가 결성되고, 민관공동조사를 거쳐서 2001년 정부는 친환경 사업진행, 순차적 개발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2001년 3월 200여 개 시민, 사회, 문화, 노동, 종교 조직이 모여 '새만금 갯벌 생명평화연대'를 결성하여 1000만인 서명운동을 비롯한 반대운동을 벌이며, 2003년 3월부터 5월까지의 '삼보일배'에서 절정에 이른다.

2003년 법정으로 옮겨간 새만금 논쟁은 서울행정법원, 고등법원을 거친 후 2006년 3월 대법원에서 원고 패소 결정이 내려지고, 2006년 4월 21일 최종물막이 공사가 완료되었다.

새만금 사업의 쟁점은 ① 경제성으로 보아 농지를 조성하는 것이 옳은가? ② 갯벌을 그대로 두는 것이 환경을 살리는 것이 아닌가? ③ 매립이 생태환경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대법원 판결 이후 2007년 11월 '새만금사업 촉진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당초 목적인 농지조성이 아닌 '외자와 외자기업 투자유치를 통해 국가경쟁력을 갖춘 성장거점 지역으로의 육성' 이라는 새 목적을 부여받게 되었다.

부안 방폐장은 어떤 사업이었나?

"2007년말 현재 우리나라 원자력발전소는 총 20기로 시설용량은 1978년에 비해 30.2배 증가했으며, 우리나라 전체 전력발전량의 36.5퍼센트를 차지한다."(본문 중에서)

원자력 발전소는 필연적으로 폐기물을 발생시키고, 1980년대 중반 이래 원자력발전으로 배출된 방사능폐기물의 안전한 처리가 국가적 과제가 되었다. 1988년 경북 영덕군을 비롯한 3개 지역을, 1990년에는 안면도를, 1994년에는 인천 굴업도를 방폐장 부지로 선정하였으나 주민 반대로 모두 실패하였다.

정부는 약 15년동안 방폐장 부지 선정에 실패하자 3000억 지원과 한수원 본사 이전을 약속하는 등 지원 확대 정책을 펼쳤다. 이른바 부안 방폐장 사태는 2003년 5월 부안군 위도에 '방폐장을 유치하면 대규모 특별지원금을 주민에게 지원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작되었다.

"위도주민들은 '위도주민방폐장유치위원회'를 구성하고, 2003년 5월 13일에 전체주민 73.5퍼센트의 서명을 받아 부안군의회에 방폐장 유치를 청원했다. 유치위원회의 활동과 정부의 방폐장부지 선정에 관한 설명회 개최 등 관련조치가 본격화되자, 7월 2일 '핵폐기장 백지화, 핵발전소 추방 범 부안대책위원회가 34개 부안군 종교,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발족되어 방폐장 유치 반대운동을 전개했다."(본문 중에서)

'부안사태'는 부안군의회에서의 방폐장 유치 청원이 부결되고, 다수 주민이 반대하는데도 부안군수가 일방적으로 방폐장 유치신청을 함으로써 촉발되었다. 군수의 독단적인 유치신청으로 1만 명이 참가하는 '핵폐기장 백지화와 군수퇴진 결의대회'가 열리고, 경찰과 주민이 충돌하여 100여 명이 부상, 50여 명이 중상을 입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부안 핵폐기장 백지화 사건은 국책사업 추진 과정에서 가장 큰 인적, 물적 피해를 낳은 사건이었다. (부안군 인구가 7만여 명인데) 2003년 7월 11일 이후 단 하루도 빠짐없이 180여회 지속된 핵폐기장 백지화 시위와 촛불집회(183)회)에 참석한 사람은 연인원 22만 명에 이른다."(본문 중에서)

해상시위, 차량 시위을 비롯한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운동, 정부와의 여러 차례 대화 무산 등 우여곡절 끝에 2004년 2월 14일 치러진 주민투표에서 72.4%가 투표에 참여하여, 91.8%가 반대하는 결과가 나오고, 마침내 그 해 9월 정부는 부안방폐장 백지화 선언을 내놓게 된다.

환경갈등이 일어나고 증폭되는 원인

"정부와 지역주민의 갈등구조를 보면 정부는 주민들이 합리적으로 판단할 것을 요구하고, 주민들은 정부가 신뢰성 있는 조치를 취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정부는 지역주민들이 합리적인 방안을 이해하거나 선택하지 않고 극단의 투쟁방법을 선택한다는 점에 부담을 느끼고, 지역주민들은 정부가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한다."(본문 중에서)

"정부는 주민들이 정부의 계획을 진지하게 듣지 않고 집회나 시위 등 힘의 논리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며 불신을 내비쳤다. 주민들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그저 정부정책에 저항한다고 본 것이다."(본문 중에서)

그렇다면, 이런 불신과 갈등의 원인, 그리고 갈등이 더 증폭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① 부정확한 정보를 부정직하게 흘리고, '카더라'식 소문이나 언론의 비공식 확인에 근거한 기사로 주민 반응을 알아보는 것은 갈등을 키우는 원인이다.

② 주민대상 사업 설명회나 공청회를 열지 않거나 요식행위로 거치면 갈등이 증폭된다.

③ 주민과 환경단체에 의해서 정부가 비밀에 부친 정보가 공개되면 불신이 증폭된다.

④ 지역주민의 의견을 듣지 않고, 전문가를 동원하여 설득하려는 공청회는 실패한다.

⑤ 지역주민에게 적극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최악의 행위이다.

⑥ 전문가보다 갈등의 당사자가 지긋지긋 하도록 심도 깊은 논의를 해야 한다.

⑦ 외국에선 30~40년이 넘는 숙의 과정을 통해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인다.

⑧ 객관적이고 과학적 결과만 있으면 주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⑨ 주민에게 설명을 들을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

⑩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 의논하자고 하는 것은 갈등만 더 증폭시킨다.

⑪ 정치적 계산이 개입하면 합리적 논쟁이 되지 않는다.

⑫ 객관적이고 순수하고 공정한 전문가는 없다.

⑬ 주민의 반대에 응답하지 않으면 갈등은 증폭되고 반대는 더 과격해진다.

갈등해결, 주민투표가 최선의 대안 아니다

<지속가능한 세상을 향한 발돋움>을 쓴 박진섭, 소병천은 합리적인 주민의사를 반영하는 수단으로 주민투표가 최선의 대안이 아닐 수도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국가 중대사안이나 지역의 운명을 결정하는 경우에 선출된 대표에게만 위임하지 않고, 주민의 의사를 직접 묻는 것이 타당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주민투표 역시 다음과 같은 구조적인 한계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는 부재자투표이고, 둘째는 주민투표 발의를 지역주민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에서도 요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주민투표에 참여하는 주민대상(주민투표 범위와 주체)의 문제이다."(본문 중에서)

환경 피해 예상 지역을 설정할 때는 매우 엄격한 규정을 두면서 투표 범위와 주체를 정할 때는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정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 특히, 선거가 승자 독식이듯 투표 역시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에 주민 투표 이전에 반드시 충분한 토의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찬성, 반대가 동수로 참여한 민관조사단의 한계

지은이들은 새만금민관공동조사단은 '대화를 통해 환경갈등 해결을 시도하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새로운 시도이기는 하였지만, 그 한계도 분명하였다고 평가한다. 1년 8개월 남짓한 공동조사단 활동은 결국 실패하였는데, "마치 두 사람이 같은 줄자를 들고 안방에서 거실까지 거리를 재는데 두 가지 서로 다른 수치가 나온 격"이었다고 한다.

민관공동조사단 활동으로 가치관에 따라서 과학적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 되었으며, 모델링 변수 차이, 과학기술에 대한 믿음 차이, 정부정책에 대한 믿음 차이 등으로 양쪽의 입장이 확연하게 달랐다는 것.

특히, 민관조사단에 참가한 전문가들은 자신을 추천한 단체에 대한 소속감을 넘어서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소속감 때문에,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신념의 문제이고 밥벌이의 문제였기 때문에 결코 객관적인 제 3자가 아닌 이해당사자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해 당사자 동수가 모여 앉아 갈등 해결은커녕 합의에도 이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만금과 부안 방패장 사건을 통해서 각각 찬성 혹은 반대 의견을 가졌던 우리들은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지은이들은 정부를 향하여 신뢰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

환경영향 평가는 사업계획이 확정되기 전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과 같은 법과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며, 누구를 위한 환경보전인지, 누구를 위한 개발인지를 분명히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문제는 피해를 입는 지역과 이익을 얻는 지역이 서로 다르면 정부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것.

절반의 성공, 절반이상의 실패

아울러, 지역을 바탕으로 지역민과 함께 할 수 있는 개발 방안을 모색해야 하며, 반대 측 주장의 장점을 살리는 지역 발전 정책을 세우는 데도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정부와 환경단체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그리고 정부와 환경 단체 모두 '도 아니면 모'가 아닌 개, 걸, 윷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새만금과 부안 방패장 사건을 연구한 지은이들은 이 두 사건을 '절반의 성공, 절반 이상의 실패'라고 규정하고 있다. 실패를 만회하는 대안은 소통에 있다는 것이 지은이들의 결론에 해당된다.

"자연과의 공존 사상, 지속가능한 개발과 보전, 인간의 현명한 이용을 관통하는 연결고리는 소통이다. 자연과의, 미래세대와의, 현세대간의 소통 목적은 자연 이용의 적정성에 합의하자는 것이다."(본문 중에서)

말하자면, 현세대와 미래세대의 소통, 현세대간의 소통 그리고 자연과의 소통을 통해 그리고 공존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통해 지속 가능한 보전과 개발의 방법론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박진섭, 소병천이 쓴 <지속가능한 세상을 향한 발돋움>은 환경 갈등, 정책 갈등으로 대립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찾는 이해 당사자 모두에게 유익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끝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우리 사회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여러 가지 정책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광우병쇠고기 수입, 한반도 대운하, 미디어관련법 개정 등이 모두 심각한 갈등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 책에 비춰 보면, 모두 국민과 소통하지 않는 지도자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그들이 '새만금'과 '방폐장' 사건에서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는건지, 아니면 애써 외면하고 있는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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