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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얼굴들 ㅣ 지앤유 로컬북스 4
허정도 지음 / 지앤유 / 2018년 11월
평점 :
지금은 통합 창원시가 되어 그 이름조차 잃어버린 근대도시 마산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저자 허정도가 쓴 <도시의 얼굴들>에 나오는 첫 문장은 매우 강렬합니다.
"장소를 피해가는 삶은 없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생의 한 순간도 장소를 벗어날 수는 없다."(본문 중에서)
<도시의 얼굴들>은 바로 장소에 새겨진 사람들의 삶을 담은 책이고, 사람들이 장소에 새겨 놓은 흐릿한 기억들의 재발견입니다.
저자는 건축과 도시전문가로 오랫동안 '도시의 공간 변천'을 연구하고 기록해 왔는데, 이번엔 도시와 건축에 관한 이야기대신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에 주목하였고 그들의 발자취와 그들이 걸었던 길을 쫓아 이 책에 담았습니다.
"20세기 전반 60여 년, 마산이라는 한 도시에 남긴 16인의 흔적"을 도시와 건축에 탁견을 가진 저자가 여러 자료와 문헌들을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질문하는 방식'의 상상력을 보태는 것으로 입체감을 높여놓은 새로운 형식의 도시스토리텔링입니다.
등장인물은 모두 16명. 마산 사람들도 모르는 이가 많지만 잊지 않아야 할 사람들로 옥기환, 명도석, 김해랑, 독립운동가 김명시, 시인 백석, 마지막 왕 순종, 국어학자 이극로, 김수환 추기경 그리고 이원수, 김춘수, 천상병, 나도향, 임화와 지하련 같은 문학가들 그리고 이름 모를 산장의 여인이 그들입니다.
민족해방운동사에서 마산을 대표하는 단 한 명을 꼽으라면, 김명시
열여섯 명의 주인공들 중 독자들에게 가장 소개하고 싶은 이는 김명시 장군입니다. 마산에서 태어나 열여덟까지 살았으며 러시아를 거쳐 중국 대륙과 만주벌판을 무대로 민족 해방을 위해 싸웠던 독립 운동가이자 사회주의혁명가입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고, 3.1만세운동 때 얻은 부상 후유증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사회주의 계열 항일투쟁에 뛰어들어 무려 12년이나 일제의 감옥에 갇혔던 김형선이 오빠였고, 1930년대 부산과 진해에서 적색노조운동을 이끈 김형윤이 남동생이었다."(본문 중에서)
고향을 떠나 항일 투쟁에 뛰어들었고, 스물여섯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7년간 신의주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나와 1939년부터 팔로군에 입대하여 대륙을 누볐답니다. 조선의용군에 합류하여 김무정 장군과 함께 해방이 될 때까지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볐다고 합니다.
흔히 여성독립운동가라고 하면 남자들을 뒷바라지 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김명시 장군은 남자와 꼭 같이 총을 쏘고 훈련 받고 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여성부대를 따로 조직하여 지휘한 여장군이었다는 겁니다.
영화 <암살>을 통해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전설 같은 투쟁이 꽤 많이 알려졌지만 여전히 흔한 이야기는 아니지요. 최근에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소개한 여러 책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도시의 사람들>이 가진 특별함은 바로 아래와 같은 인용문에 있습니다.
"김명시는 1907년 동성리 189번지(오동동 문화광장 무대 자리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중략) 김명시가 살았던 때의 동성동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예전에 그 많았다는 요정도 지금의 아구찜 식당도 당시에는 없었다. 다닥다닥 붙은 나지막한 초가 사이로 거미줄처럼 얽힌 좁고 굽은 흙투성이 길뿐이었다. (중략) 소녀 김명시가 책보자기를 등에 둥치고 집과 학교를 오갔던 길은 어디였을까? 김명시의 집에서 학교까지는 대략 700여 미터, 소녀 걸음으로 15분 정도의 거리였다."(본문 중에서)
저자는 김명시가 살았던 동네와 흔적에 주목합니다. 어떤 역사학자도 '소녀 김명시의 등굣길'을 상상해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독자들은 100여 년 전 김명시의 등굣길을 따라가면서 당시 마산의 모습을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다섯 쪽 가까이 이어지는 김명시의 등굣길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100여 년 전 마산 도심의 입체적인 모습과 만나게 됩니다.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 가다보면 마산공립보통학교의 만세운동 역사에까지 닿습니다.
김명시가 6학년으로 편입했던 그 해 봄에 마산공립보통학교에는 이원수가 2학년으로 편입하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서로 얼굴이라도 익힌 사이였을까?"
허정도가 이끄는 김명시 이야기는 해방 후 동지들과 함께 봉천에서 서울까지 걸어온 귀국길도 쫓아갑니다. 그리고 4년 뒤 부천경찰서 유치장에서 "수도 파이프에 자신의 치마를 찢어서 걸어놓고 목을 걸고 앉은 채로 자살했다"는 비통하고 안타까운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집니다.
언론인 정운현도, 역사학자 강만길도, 일제강점기 민족 해방운동사에서 마산을 대표할 수 있는 단 한 명을 꼽으라면 바로 김명시 장군이라 했답니다. 하지만 지금 마산에서는 그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란'을 찾아가는 시인 백석의 마산 길
열여섯 명 중에 딱 한 명만 더 소개한다면 누구를 해야 할까 오래 고민한 끝에 마산까지 이어진 개화기 최고 모던보이 백석의 사랑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월북 문인들의 작품이 해금되면서 남한에서 가장 새롭게 조명 받는 작가는 바로 백석입니다.
그를 다룬 논문과 책이 1천여 편을 넘겼다는군요. 평북 정주가 고향이고 동경 유학을 다녀와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던 백석이 뜬금없이 마산을 세 번이나 다녀간 까닭은 무엇일까요? 한 편의 영화 같은 아릿한 짝사랑을 찾아가는 길에 마산을 거쳐 갔다고 합니다.
한 해 전 여름 친구의 결혼식 축하연에서 '란'을 처음 만난 후에 마음을 빼앗겼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1936년 1월, 2월, 12월 모두 세 번 마산을 거쳐 통영으로 갑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한 시절이 아니었기에 애끓는 그리움으로 먼 길을 다녀갔다는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겠지요.
"서울역에서 출발한 백석은 삼랑진에서 기차를 갈아탄 후 구마산역에 내렸다. 통영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하필 그날은 란이 서울로 가는 날이었다. 선창에서 내린 란이 구마산역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 백석은 배를 타기 위해 구마산역에서 선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불종거리에서 지나쳤다. 백석은 몰랐고 란은 알았다."(본문 중에서)
운명 같은 엇갈림이 마산 불종거리에서 있었고 백석과 란은 그후 다시 만나지 못합니다. 한편 통영에서 백석은 '란'을 그리워하며 '통영'이라는 시를 씁니다. 그날 쓴 시 '통영'에는 마산이 등장한답니다.
"구마산의 선창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중략)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본문 중에서)
저자는 1936년 구마산역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마산포를 향해 걷는 백석의 모습을 실감나게 재구성 해냈습니다.
"역에서 나와 불종거리에 들어선 백석의 헤어스타일은 여전했다. 올백으로 넘긴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중략) 백석이 왔던 1936년 1월 초, 이원수는 형무소 안 독방에서 1월말의 석방을 기다리며 떨고 있었다. 가던 발걸음을 잠깐 멈추고 담장 안으로 눈길을 돌려봤을까?"(본문 중에서)
한 해 동안 세 번이나 통영을 찾아갔지만 청혼은 거절당하고 끝내 그녀와는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와 인연이 어긋난 후에 쓴 여러 편의 작품에도 '란'의 잔영이 오래도록 스며있습니다. 백석이 다녀 간 마산에도 그의 발자국이 남아 있겠지요.
이 책은 열여섯 명의 주인공들과 얽힌 마산이야기를 이런 방식으로 서술합니다. "도시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 건축가, 사람 이야기를 놓치지 않는 지식인" 허정도가 풀어 낸 마산 이야기 입니다.
마산에 살고 있거나 백석처럼 잠시 마산을 거쳐 간 사람들, 그리고 마산과 아무 인연이 없지만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숨겨진 이야기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저자는 문화적 도시재생을 위한 거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마산을 재생하기 위한 "스토리텔링을 주장하는 이도 많았고 이용할 사람도 많았지만, 스토리를 발굴하고 엮어 낼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더 먼저 더 깊이 고민한 자신이 <도시의 얼굴들>을 썼습니다. 마산이 아닌 다른 <도시의 얼굴들>을 기록하는데도 널리 길잡이가 될 만한 책 입니다.
출처: http://www.ymca.pe.kr/2565 [세상 읽기, 책 읽기, 사람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