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뻬 씨의 행복 여행
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오유란 옮김, 베아트리체 리 그림 / 오래된미래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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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voyage d'Hector or la recherche du bonheur.

정신과 의사 꾸뻬씨는 어느 날 자신의 찾는 환자들이 왜 그리도 행복하지 않은 지. 또 왜 자신은 행복하지 않은 지의 의문을 가지고 여행을 떠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꾸뻬씨 같은 여행을 떠나지만 많은 것을 얻어서 돌아오지는 못한다.
하지만 꾸뻬씨는 나름 완벽하지는 않지만 다소간의 배움을 얻고 돌아온다.

그 배움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마도 꾸뻬씨가 열심히 배움을 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원하면 얻으리라.' 

어떤 것들은 너무나 잘 알려진 것들이고, 어떤것들은 책을 읽으면서 그 자신의 경험을 함께 하지 않으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있다. 그리고 다분히 많은 것들은 중복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누구나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가?" 또는 "무엇이 그를(그녀를) 행복하게 하는 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본다면 굳이 여행을 떠나지 않아고 꾸뻬씨 만큼의 목록은 작성할수 있을 것이다.

꾸뻬씨과 공통되는 사항도 많을 것이며, 꾸뻬씨가 보고 느끼지 못한 것을 내가 느낄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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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지옥 1
권지예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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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권지예의 자전적 소설같은 아름다운 지옥.
작가 자신의 프로필을 보면 거의 작가와 동일시 되는 인물의 성장기이다.

학령기의 대부분을 보낸 전농동의 한 한옥주택. 아마도 작가가 지칭한 아름다운 지옥은 바로 이집이었던 것 같다.

한 여자가 성숙되 가는 과정을 그린 장편이다.
역시 내가 비호감하는 성장소설.

권지예라는 작가의 책들을 보면 단편으로 많이 주목을 받았으나 이렇다할 장편이 없다.
작가 자신이 호흡이 짦은 가 보군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 데. 장편을 발견하고는 읽어보았는 데.

작가 자신의 창작능력에 대한 의심은 여전히 남는 다.
왜냐면 앞서 말했다 시피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픽션의 형태로 다듬었을 뿐이므로.

책 후반에 평론가가 말하기를 "권지예는 착월한 표현 기법을 완성했다." 라고 했다.
소설의 주제나 내용은 본인의 경험에서 가지고 왔다고 해도 그 내용을 적절히 표현해 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런 면서에 내가 찾지 못한 작가의 탁월한 표현 기법이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용인 탄탄히(실화에 바탕을 했을 것이므로) 받혀주는 데 표현을 잘 해내지 못한것은 아니다. 적어도 막힘없이 두권으로 이루어진 책을 읽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므로...

그러나 수많은 창작물속에서 빛을 발하기는 어려울듯하다는 개인적인 촌평을 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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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백만장자 아저씨
리처드 폴 에반스 지음, 김승욱 옮김 / 경영정신(작가정신)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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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ve Lessons a Millionaire taught me about life and wealth

1. 부자가 되기로 결심하다
2. 종잣돈을 모아라
3. 여윳돈을 늘려라
4. 세세한 곳에서 부터 절약해라
5. 나누어 주어라

특별한 방법론을 제시 하지는 않는다. 방법은 각자가 할일이고, 중요한것은 이 원칙들을 지켜라 이다.

이제까지 나온 여러가지 부자되기 기본론 책들과 다른것은 하나도 없다.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를 읽어보셨다면 한가지 추가된것은 '나누어 주어라 '하는 부분인데. 다소간 유타주에서 다섯명의 아이를 거느린 것만으로 보아도 다분히 저자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담겨 보인다.

그러나 남들과 같이 부를 나누는 것이 뭐가 나쁘랴.

앞의 이야기 너무 뻔하나데. 놀랍게도 주위에서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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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디 수녀의 나를 사로잡은 그림들
웬디 베케트 지음, 김현우 옮김 / 예담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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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디 수녀의 미술관 기행 프로그램을 이전에 우연히 봤다.
이 수녀님, 얼굴을 반이나 가리는 안경에 약간의 돌출된 앞니 그리고 작기 않아 보이는 키에 그리고 바닥 까지 치렁 치렁 내려오는 수녀복에 외모만으로도 범상치 않았고, 설명은 아주 자세하고 마음에 많이 들었으나 꾸준히 보지는 못했다.

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찾다가 우연히 보고는 집어 왔는데.
수녀님의 글들이 그림 공부가 아니라 인생공부다.

종교인으로써 삶에 대한 사색을 많이 하시기 때문인지, 깊이가 있는 성찰이 눈에 보인다.
때로는 이런 전문 종교인(?)을 통해서 우리 범인(凡人)들은 다시 한번 삶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가 된다.

왜냐면 일반인들은 삶에 대해서 가만히 앉아 생각할 만큼의 여유가 없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다. 혹자는 확연히 제한된 삶을 살고 있는 종교인들이 과연 삶의 전선()에 있는 일반인에 비해 삶에 대해 무엇을 아느냐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편이다.

웬디 수녀가 하는 말씀중에 내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들을 옮겨본다.

"그렇다면 나는 16년동안 왜 그렇게 기도하는 삶이 오기를 학수고대 했을 까?

일반인들도 가끔은  고독한 생활을 동경하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회사 업무, 세금 청구서, 집안의 걱정거리, 복잡한 인간 관계, 성인으로서의 책임감 등 자질구레한 일상들을 훌훌 벗어 던지고 말이다. 하지만 이는 어찌 보면 일종의 도피를 위한 고독일수도 있다.

경건하고 성스러운 삶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삶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서 순결해지고, 사랑과 의무라는 이름 아래 이지기적이지 않은 삶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나 또한 원치 않았던 교사 생활을 해야 했지만, 막중한 책임감 속에서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한 배움의 과정을 마쳤다고 생각한다. "

"나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불편해 할까봐 좀처럼 드러내놓고 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는 않지만 예술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의 진실로 이끌어주는 아름다움이며 그 진실과 아름다운이 있는 곳에 신히 항상 함께 하신다.  예술은 종종 내가 보지 못하고 있던 나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구에르치노  Guercino, 감옥에 갖힌 세례요한을 방문한 살로메.
"이것이 이 작품의 깊은 의미이다. 진정한 자유는 어디에 있는 가? 돌벽이나 창살보다 더 지독하게 우리를 가두는 것은 바로 스스로가 부여한 욕망의 감옥이 아닐까? ......그래서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성자와 어리석은 젊은 여인 둘다에 대해서 슬픔을 느끼게 된다."

파올로 우첼로 Paolo Uccello, 숲속의 사냥
"이 작품은 중심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 안에 있는 고요한 중심, 눈으로 확인 하고 거기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는 그런 중심 말이다, 아마 우리 삶의 방향도 이런 소실점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 조직할 수 있다면 이상적일 것이다.

나는 우첼로에 대해서 일종의 경외감 까지 느낄뻔 했다. 그의 인생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한점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얀 호사르트 Jan Gossaert, 헤라클레스와 데이아네이라
"두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고 있지만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 서로 마음의 공간을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서로 얽혀 있는 다리와 팔은 그들의 일체감을 나타내지만, 그 사이에는 공간이 있어서 자신만의 자리를 가질수 있게 허락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상적인 결혼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각자의 본모습에 충실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도와주는 것 말이다. 이들은 자신의 짝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 다. 그저 서로를 받아들이고 사랑을 확신할 뿐이다."

엘 그레코 El Greco, 우화
"불꽃을 보고 혼자서 미소짓고 있는 넋이 나간 듯한 남자는 열정의 진중한 아름다움을 두려워하고 있고, 욕망에 푹빠져 있는 원숭이는 그 욕망을 현실에 맞게 조절할 줄을 모른다.

이 두가지 위험이 어둠속에서 위협적으로 버티고 있는 세상을 젊은이는 살아 할것이다. <우화>는 모든 인간들에게 중요하면서도 본능적인 열정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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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장정일 지음 / 미학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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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이라는 이름은 익히들어왔지만 뭐 좀 이슈가 되는 작가구나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작품의 발표년도가 1995년을 전후로 하고 있으니, 그당시에 나는 소설이라고는 손대지 않던 시절이니 어쩌면 당연하다.

장정일의 작품과 이력들을 읽고 어디부터 시작할까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제목이 가장 익숙한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부터 읽기로 했다.

난 사실 이 책의 제목을 "너희가 재즈를 아느냐?" 로 기억하고 있었다.

시작은 평범하다. 평범한 직장인의 직장과 가정 생활로 시작되는 듯하다.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반복이 이어지고, 반복은 조금씩 뒤틀려(?)진다.

아침에는 반지하방에서 나가서 저녁에는 3층으로 돌아가고, 커피를 시켰는 데 차를 마시고 있는 그런 식이다.

이런 소설의 형태는 어디서 많이 본듯하다.

반소설 Anti-roman 또는 신소설Nouveau Roman이라는 이름의 장르에서 보여주는 형식의 파괴, 따라서 가만히 졸듯이 느긋히 소설 보는 독자를 정신 번쩍 차리게 하는 그런 류이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는 것은 흔히 말하듯이 참신 발랄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Alert 하게 한다는 말이다.(음, 이 단어 또한 가장 적절한 한국어 단어를 찾지 못하는 말중에 하나임)

이렇게 잘나가다가 책의 표지에 나와 있는 것 처럼 왠 "뚱딴지" 같은 소리가 등장하는 데. 그게 바로 "재즈敎"의 등장이다.

이게 바로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라는 제목이 붙여진 이유를 알게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부터 소설은 나락으로 빠져서 그렇게 끝나고 만다.

1950년대에 프랑스에서 유행한 반소설의 형식이 1990년대의 한국에서 나타났다는 것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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