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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 일레븐 ㅣ 스토리콜렉터 45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처음 모니터링을 위해 도착한 가제본을 받아들었을 때, 우주에 관한 SF물일거라고 추측했던 기억이 난다. 언뜻 미래소설이라는 설명을 봤었는데, 제목이 이러니 아마 스테이션 일레븐은 우주정거장이나 새롭게 마련된 우주거주공간을 뜻할 거라고 짐작했었다. 아주 틀린 추측은 아니었다. 실제 작품의 제목인 '스테이션 일레븐'은 우주와 관련이 있으니까 말이다.
'세기말을 그린 소설 중 이토록 아름다운 소설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우주 이야기를 기대하며 책을 펼쳤는데 첫장면이 무대 위 리어왕 공연이어서 당황했고, 공연 이야기인가 하는데 갑자기 주연배우가 쓰러져 숨을 거두면서 자세를 다시 잡고 읽기 시작했는데, 살인사건 얘기구나! 하는 순간 갑자기 스페인 독감에 비견할 전염병이 지구를 휩쓸었다. 그 모든 게 첫 50페이지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서,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책의 전개속도에 내가 밀려 잠깐 머릿속을 정리해야 했다.
그러니까 이건 저 추천사처럼 세기말을 그린 소설이다. 전염병이 지구를 휩쓴 이유, 황폐해진 땅에서 살아가는 생존자들의 이야기.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사라진 세상에서 그래도 생존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의 고군분투. 그 몸부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랑악단을 통해 다시 묻는 인간 존재의 의미.
전염병 이전의 세상, 그러니까 지금의 우리가 아는 것 같은 세상에는 선택지가 많았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철학적인 영역의 것이었고 깊은 사유를 동반했다. 삶의 의미, 라는 것에 대해 떠올리면 끝도 없이 많은 것들이 생각났다. 끝도 없이 많은 것들이 가능했다.
전염병 이후의 세상은 그렇지 않다. 음식이 귀하고 물이 귀한 세상, 백골 시신이 누워있는 안방 옷장에서 옷을 끄집어내어 꿰어입어야 하는 세상, 그 와중에도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아 독재와 폭정과 광신이 혼재한 세상. 그 곳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물으면 돌아오는 가장 간단한 답은 생존이다.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지랄맞은 하루하루를 어떻게든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스위치 하나 누르면 전구라는 게 켜지던 시절이 있었음을 어렴풋이 떠올리면서, 때로는 이것을 기억하는 게 더 괴로운 일은 아닐까 곰곰히 생각하면서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것. 살해당하지도, 강간당하지도, 팔려가지도, 매를 맞지도 않은 채 다음날을 맞이하는 것. 그런 게 살아가는 의미가 되는 세상에서, 커스틴은 여전히 문명의 조각들을 모으며 살아간다. 소중한 스크랩을 품에 안고 시신이 된 낯선 이들의 눈을 감겨준다. 그리고 무대에 선다. 햄릿을, 한여름밤의 꿈을, 리어왕을 연기한다.
'내가 오랫동안 기억할, 그리고 끊임없이 되돌아갈 책'
이 책의 가장 첫장면, 리어왕을 연기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한 할리우드 배우 아서 리앤더의 전처인 미란다는 그래픽노블을 그린다. 어쩌면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지도 모르는 책이지만, 그 책을 완성하는 것이 그녀의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릴적부터 늘 마음 속에 있던 이야기, 너무 선명하게 알고 있어서 오히려 그리기 어려운 이야기를 그녀는 마침내 책으로 세상에 내보인다. 그 책을, 세번째 아내를 만나며 미란다를 버린 아서가 아역배우이던 커스틴에게 선물한다. 그렇게 '스테이션 일레븐'은 전염병 이전의 세상과 이후의 세상, 아서와 미란다, 그리고 커스틴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소설의 현재는 분명 종말 후의 세상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끊임없이 뒤로 돌아가 종말 이전의 세상을 비춘다. 화려했던 할리우드를, 한때 파파라치였던 남자와 화려한 삶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던 여자의 짧은 만남을, 종말 전 마지막 날의 사투를. 그렇게 묻는다. 어떤 것에 의미가 있냐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살고 있었냐고.
'예언자'에게 극단의 어린 여자아이를 넘겨주는 걸 거부한 유랑악단은 결국 쫓기는 신세가 되고, 뿔뿔이 흩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흩어진 상태로 점차 한때 공항이었던 '문명 박물관'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그들과 어떤 기억을 공유했던 사람들, 그리고 이제 모든 문명이 잠든 이 곳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함께 망원경으로 전기가 들어오는 마을을 바라보며 커스틴과 지반의 모습은 또렷하게 유랑악단의 마차 뒤에 써있던 메시지와 겹친다.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