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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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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연말에는 이 책이 가장 핫했던 걸로 기억한다. 장강명의 작품 중 '가장 빠르고 가장 독'하다던 소설. 2012년 대선 국정원 개입 사건에 충격을 받은 작가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비슷한 일을 하는 댓글부대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에서 착안했다는 이야기는 정말로 빨랐고 그보다 더 독했다.

   팀-알렙의 구성원은 지방대를 나와 제대로 된 취업자리를 얻지 못한, 하루의 대부분을 온라인 게임을 하거나 일베 게시물을 훑어보며 낄낄거리는 데에 쓰는 남자 셋이다. 그들은 뛰어난 학벌을 갖추지도 못했고, 어디에 크게 내세울 만한 스펙을 쌓지도 않았으며, 다소 번지르르하게 생긴 삼궁을 제외하면 외모가 뛰어나지도 않고, 더구나 세상 사람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내젓는 일베 유저들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닥 잘난 인간들이 아니다. 그러나 팀-알렙은 국정원인지, 대기업인지, 정부기관인지 종잡을 수 없는 미지의 권력과 손을 잡고 억대 보수를 받으며 인터넷을 뒤에서 움직이는 검은 손 역할을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건 오로지 그들의 상상력, 그리고 인터넷 커뮤니티와 그 유저들의 심리에 대한 그들의 경험과 지식이다. 그 경험을 배양토로 삼아 그들은 최고의 댓글부대가 된다.

   '댓글부대'는 팀-알렙이 합포회라 불리는 조직의 의뢰를 받아 인터넷 커뮤니티의 판도를 바꾸고 여론을 조작하며 네티즌 전체를 움직이는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작가가 책 말미에서 모든 인물과 단체는 허구이며 사건들 역시 픽션에 불과하다 언급하지만 이야기 곳곳에 익숙한 커뮤니티의 이름이나 실제 있었던 사건들이 등장하여 실제감을 더한다. 무엇보다 이건 정말 가능할 법한 이야기다. 누군가 저런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충분히 한 커뮤니티를 몰락시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저런 전략을 쓰면 동영상 하나로 저런 행위를 유행시킬 수도 있겠다 싶고, 실제 돈과 권력을 쥔 인물들이 이렇게 젊은 애들 몇몇 고용하여 여론을 움직이지 말라는 법이 있나 싶어진다. 그게 '댓글부대'의 힘이다. 작가가 아무리 이건 소설일 뿐이라고, 픽션이라고 말해도 독자 스스로 '이거 진짜같은데?'라고 되묻게 하는 것. 그리고 '댓글부대'를 진짜처럼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그들과 똑 닮아있는 우리 주변의 얼굴들, 소설을 움직이는 사건들과 맥을 나란히 하는 우리 사회의 사건들. 우리가 겪은 어두움. 우리가 견딘 분노의 시간들.

   빠르고 독하게 썼다는 작가의 말처럼 '댓글부대'는 빠르게 읽힌다. 문체를 다듬고 단어를 고심해서 골라가며 썼다기 보다는 떠오르는대로,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 짓는 걸 목표로 그저 적어내려갔다는 느낌이 더 크다. 우리가 인터넷에 글을 쓸 때 보통 그러하듯. 인터넷 커뮤니티를 묘사하는 문장들에는 이모티콘도 등장하고, 비속어도 난무한다. 정갈하게 다듬어지기보다는 거칠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서 더 와닿는다. 이런 이야기를, 아주 깔끔하고 세련되게 했다면 아마 어딘지 모르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이거 뭔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을 것 같다.

   '댓글부대'는 편한 책이 아니다. 읽고 나서 마음이 따뜻해지지도, 속이 시원해지지도 않는다. 읽다 보면 계속 찝찝하고 때로는 역겹고 자주 화가 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 잔챙이들은 남몰래 죽임을 당하고 바다에 버려지고, 조금 더 큰 앞잡이들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며 눈치를 보지만, 정작 실세는 흔들림이 없다. 그들은 아랫사람 손에 피를 묻히게 하고는 본인들은 최고급 양주를 마시고 손녀뻘 되는 여자애 몸을 주무르며 편안하게 살아간다. 아마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대부분은 그런 사람들에게서 나올거다. 죽어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들. 두려울 게 없는 사람들. 그래서 남들의 두려움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 책을 덮고 나서 내내 그들이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댓글부대가 활동하는 전쟁 같은 사회에서, 나는 또 그렇게 작고 약했다. 


인터넷을 소설로 배웠다

 

   개인적으로는 '댓글부대'를 읽으며 내가 몰랐던 일들이 참 많았다는 걸 재확인했다. 그러니까 일종의 역사공부를 한 기분이었달까. 인터넷판 역사공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내 시간이 소중하고, 어느 선 이상으로 타인이 침범하는 걸 싫어하고, 인간관계에 쏟을 에너지를 최소의 사람들에게 최대로 나누어주는 타입이어서 실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작은 모임을 선호했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데에는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내 주변 친구들 챙기기도 버거운데 어떻게 얼굴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랜선 너머의 누군가와까지 잘 지낸단 말인가. 오유도, 일베도 내게는 뉴스를 통해서나 접하는 이름들이었다. 그보다 소규모의 카페들에 대해서는 아예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댓글부대'는 (비록 모티프만 따오고 새로운 이름을 붙이기는 했어도) 그런 작은 커뮤니티의 생리를 아주 세세하게 다뤘다. 뿐만 아니라 그런 특성을 지닌 커뮤니티의 개개인이 어떤 심리를 지니는지, 그런 상황에서 작은 불씨를 던지면 어떤 갈등으로 번지는지, 그런 갈등이 어떻게 해결되고 또 어떻게 커뮤니티의 붕괴로 이어지는지를 무척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 그래서 삼국시대 한 왕조의 몰락을 그리는 역사책을 읽듯 '댓글부대'에서 팀-알렙이 펼치는 공작들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진심으로 신기해하면서 말이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 인터넷에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 책이 떠오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이 댓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일까, 무슨 목적일까, 이 사람의 뒤에도 누군가가 있을까, 그 사람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인터넷 뉴스의 댓글을, 어느 커뮤니티 이용자들의 시덥잖은 우스갯소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터넷 상의 공격들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또다른 댓글부대의 존재를 상상하면서.


인상깊은 구절들

 

   괴벨스가 이런 말을 했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국민들에게 낙관적 전망을 심어줘야 한다고. 우리는 전쟁 중이었어.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싸우고 있었어.

   일자무식의 농촌 출신 병사들이라도 말이야, 저기가 고지라고, 저기만 넘으면 된다고, 저걸 넘으면 넌 위대한 전사가 되는 거라고 북돋워주면 다 그걸 넘어. 자기들끼리 군가를 부르고 '조금만 참자, 버티자'고 외치면서. 그런 때 사람들은 애를 낳아. 여자들은 짧은 치마를 입고 남자들을 유혹해. 자기 미래를 낙관하니까. 하루에 열두 시간을 일하고 돌아와도 몇 년 뒤에 보답이 더 크게 돌아올 걸 확신하면 피로가 금방 가시지. 그런 흥분이 경제도 움직이는 거야.

   그런데 멍청한 놈들이 그런 열광을 불러일으킬 생각은 않고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다느니, 뭘 포기한 세대라느니 하면서 오히려 기를 꺾어놔. 아주 악질적인 사고밥ㅇ식이야. 조금만 부추겨주면 에베레스트도 오를 수 있는 애들한테 '동네 뒷산 오르는 주제에 무슨 엄살이냐'라고 비아냥거리고, '힘드니까 등산이다'라며 멸시하고. 자기들 인생 하나 성공하지 못한 종자들이, 자라나는 애들 미래를 발목 잡고 있어. 다 붙잡아서 감옥에 처넣어야 해.

- pp. 147-148


   "뭘 해도 상황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만큼 사람 정신을 좀먹는 것도 없어. 사람들도 그걸 알아. 어떻게든 그런 의심을 떨쳐버리려 필사적으로 애쓰지. 아주 발악들을 해. 취미에 몰두해서 걱정을 떨쳐버리려 하기도 하고, 계산기를 다시 두드려보면 혹시 없던 희망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 몇 번씩이나 두드려보고, 하나님 아버지를 찾고, 술을 퍼마시고.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끝내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다 화를 내게 돼. 자기가 잘못한 게 없잖아. 그런 때 화가 안 나면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야. 사람들은 분노하고, 희생양을 찾기 시작해. 지금 내가 돈을 얼마나 버는지, 무상복지가 얼마나 이뤄지는지 같은 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미래고 희망이야.

- p. 149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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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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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자기계발서다. 소설 속에는 책을 읽는 사람이 알아채고, 흡수하고, 그를 통해 자기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그건 말 그대로의 자기계발이다. 결국 자기가 아닌 타인에게서 답을 구하게 하는 흔해빠진 '자기계발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신흥 아시아 국가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이 책은 그 방법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라는 게, 사실 개인이 바꿀 수 있는 선택지만을 아우르지는 않는다. 개인의 힘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일들도 있다. 가령 이 책에서 더럽게 부자가 되는 첫번째 방법은 도시로의 이주인데, 그건 주인공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E형 간염을 앓았다는 것, 그 와중에도 괜찮겠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괜찮다고 답한 것. 그가 한 것은 이것뿐이다. 도시 한복판에 그를 내려준 것은 운명일 따름이다.
   교육의 기회도 그렇다. 작가는 짐짓 진지하게 셋째로 태어나는 게 중요하다 말한다. 주인공의 형은 바로 일자리를 구했고, 누나는 먼 친척의 두번째로 시집을 가야 한다. 오직 막내만이 온전히 학교를 누린다. 그저 셋째라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태어나는 순서를 우리 손으로 정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면 이 자기계발서가 가르치고자 하는 원칙은 인생은 운명의 장난이니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자는 걸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는 주인공의 삶이 주어진 운명과 너무 다르지 않은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 도와준다던 '연금술사' 속 이야기처럼, 이 책도 결국 성공의 열쇠는 간절함과 노력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이 곳은 신흥 아시아 국가라고 하기엔 너무 익숙한 모습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 시대의 사람들도 고민하고 절망하며 살아간다. 미치도록 힘든 순간, 이 책을 읽어보는 게 어떨까? 그 속에서 답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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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내성적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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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으며 내내 불편했다. 왜 불편한지도 모르면서 계속 그랬다. 읽기에 부담 없는 분량의 단편들인데도 한 장씩 페이지를 넘기는 게 어려워 자꾸만 망설였다. 이 얘기를 더는 알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제발 이 말은 하지 말았으면, 하는 말을 인물들은 여지없이 뱉어놓았고 이야기는 저것만은 아니었으면, 하는 결말으로 치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지는 못했다. 불편해 자꾸 몸을 뒤척이면서도 끝끝내 다 읽어냈다.

   무엇이 그리도 불편했을까? 각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결함이 있다. 문학에 있어 주인공의 결핍은 드물지 않은 요소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의 모습이 때로는 플롯을 훌륭하게 완성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다르다. 그들의 결함은 도무지 극복될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다. 그것들은 때로는 그들 자신을, 그리고 그들 주변의 사람들을 좀먹고 이야기를 접하는 독자에게마저 편치 않은 기운을 내뿜는다. 무엇보다 '지극히 내성적인'의 인물들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플롯 속에 그들의 결함은 오롯이 존재할 뿐, 어떤 방향성도 띄지 않는다. 그 결함은 때로는 신경증적 강박으로 나타나고, 이따금씩 망상의 모습을 하며, 가끔은 정신병적 경계까지 침범하는 듯하다. 그런데도 작중 인물들은 태연하다. 다른 소설 속 인물들이 작가가 부여한 '정상적인' 인격의 틀 안에서 태연하듯이, 그들도 그렇게 살아간다.

   책을 덮으며 생각해본다. 정말 불편한 게 무엇이었을까. 이 소설이 가져오는 느낌을 단순히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이라던가 사회적 규범을 비껴간 인물에 대한 소외로 환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건 꽤나 정당한 기분이기 때문이다. '지극히 내성적인'의 인물 중 한 명이 내 가족, 내 친구라고 상상해보라. 지나친 결벽과 한번 눈에 들어온 대상에 대한 끝없는 집착, 상대에 대한 망상과 거기서 기원한 원망, 진짜라고 믿게 된 거짓말, 자기 세계에 대한 과도한 몰입과 현실감각의 상실. 모두 작중 인물들에게 조금씩 나누어준 일면들이다. 그런 인물의 곁에서 행복하기란 쉽지 않다. '오가닉 코튼 베이브'의 남편이 식탁 앞에 앉을 때마다 느꼈을 숨이 막히는 기분을, 한 손에는 종이칼을,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나타난 과거의 집주인을 마주한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 속 여류작가의 당혹감을 독자는 누구보다도 깊게 공감할 수 있다.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성향의 인물을 우리도 주변에서 만난 적이 있고, 그 경험은 무척이나 불편했기 때문에. 그제서야 생각한다. 이 이야기들이 불편했던 건, 이 불편함이 실재하는 것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고.

   작가의 말에서 최정화는 자신의 소설을 읽은 후 무언가 하나라도 변화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앞서 걸어가는 사람의 걸음걸이라도 달라 보였으면 좋겠다고. 책을 덮은 후 내일 집을 나서 지하철을 타고 맞은편에 앉은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길을 걷는 사람들을 보면, 무심코 스쳐간 사람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를 상상해 보았다. 흥겨운 멜로디임에도 우연히 들은 모르는 누군가의 휘파람 소리가 소름끼쳤다던 작가처럼, 나도 그런 느낌을 받게 될 것만 같았다. 


누가 누구에게 완벽한가의 문제

 

   한편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지극히 내성적인'의 인물들은 분명 범상치 않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제각각의 이유가 있다. '구두'의 주인공은 실제 꺼림칙하게 여기던 가사도우미가 신발을 바꿔 신고 간 것을 발견한다. 실수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 일을 기분 나쁘게 여긴다 해서 지나치게 예민한 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틀니'의 아내나 '홍로'의 가짜 아내 모두 그렇게 행동하게 된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오랜 시간 지속된 불합리한 관계에서 기인한다. 그들의 속에 있는 어긋난 톱니는 어쩌면 아주 사소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소함을 수면 밖으로 끄집어낸 건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이 이야기 속 누구도 결코 완벽하게 떳떳하지 못하다.

   그 사실 또한 불편하다. 소설 속 인물들처럼 완벽하지 못하고 때로는 모나게, 때로는 못나게 구는 나도 누군가에게서 저런 면모를 끄집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쩌면 나를 힘들게 하는 누군가에게 나도 불편한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 그러다가 또 마음을 고쳐 먹는다. 어차피 함께 살아가는 건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우리는 모두 서로의 불편함을 껴안아주며 함께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안도한다.


지극히 내성적인 그들

 

   감자를 포대에 담아주며 승재 어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감자 썩는 건 순식간이니까 보관 잘해. 하나가 썩으면 그 옆 감자가 썩고 또 그 옆의 감자가 따라 썩는 식으로, 그렇게 감자 한포대가 모조리 썩어들어가는 게 한순간이라니까. 그러니 썩은 놈을 발견하면 얼른 골라내야 한다는 말이었지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처음에는 겨우 단 한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전체가 끔찍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는 거지요.

   장난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마음이 단 한알의 썩은 감자처럼 순식간에 퍼지고 말아, 나는 선생님에게 그런 말들을 내뱉어버리고 말았던 겁니다.

- p. 146


   벼랑 앞에 서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성실하게 생활을 꾸려가고 순간의 쾌락 대신 인내를 추구한 이들조차 이토록 고단하고 외로운 미래를 맞아야 한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 p. 189


   원래 나는 아내가 임신했을 때조차도 안방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던 사람이었다. 순간 전처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전처에게 프러포즈를 했던 순간도 떠올랐다. 그때는 그 여자만 내 곁에 있으면 세상이 다 내 것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 끔찍해졌다. 해서는 안될 말들이 오갔고 천적을 잡아먹으려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내게 악다구니를 퍼붓던 전처의 얼굴이 떠오르자, 어이없게도 그 얼굴이 너무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 p. 201


   이런 문제에는 강했다. 계산할 것도 없이 바로 답이 나왔다. 특히 지문의 내용에 진심으로 공감할 경우 오차는 제로에 가까웠다. 다른 친구들이 지문의 내용을 수식으로 바꾸어 방정식을 풀고 있을 때, 연필이 싫다고 외친 한 친구는 대체 연필로 인한 어떤 상처를 받았기에 선물을 거절했을까 안타까워하면서 그를 위해 무얼 선물하면 좋았을지를 고민했다.

   '샤프일까?'

- p. 244


   이사하기 전날 나는 아주 가느다랗게 숨 쉬고 있었다. 여기서 딱 일인분의 고통만 더 공감한다고 해도 그대로 그만 죽어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 p. 246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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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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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 제목을 접했을 때 주인공 이름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일본 소설에는 가끔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있으니까. 책을 받아 보고서야 이 책이 오에 겐자부로라는 일본 작가의 단편집임을 알았다. 그때서야 내 무지가 새삼 부끄러워졌다. 일본인으로서는 '설국'의 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이어 두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작가인데 내게는 너무도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래도 일본 소설을 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독서력은 여전히 한참 부족한 모양이었다.

작품을 읽고 나서야 작가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다. 괜한 편견을 갖기 싫어서였다. 작품을 보며 아마 2차 세계대전을 직접 겪은 사람이겠구나 짐작했었는데, 찾아보니 역시 1935년생이었다. 어린시절 형들이 전쟁터에 불려가는 걸, 일본 본토가 점차 피폐해져가는 걸, 어느 날인가 두 곳이나 원자폭탄이 떨어져 수없이 많은 민간인이 죽어가는 걸 지켜보며 자랐을 것이었다. 아주 어린시절이라 세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해도 그 충격은 분명 그의 남은 삶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그의 작품세계를 형성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세계에서 보다 큰 축을 담당하는 건 전후 일본의 사회상인 듯 했다. 패전국이 된 일본을 지배하는 절망, 경제적 어려움과 불안한 미래를 앞에 두고 흔들리는 청춘, 분노와 증오,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전쟁에 대한 열망, 일본 사회 내에서 자행되었던 약자에 대한 폭력. 그의 작품은 그런 어두운 그늘을 하나씩 그러모아 묶어낸 느낌을 준다. 그래서 어느 하나 티없이 밝은 작품이 없지만, 그만큼 보다 깊은 울림을 가진다.

그에게 아쿠타가와상 최연소 수상의 영예를 안겼던 '사육'은 긴 여운을 남기는 단편이었다. 어린 시절 가난한 산골 마을에서 자라며 종전을 맞이했던 그의 개인적 경험을 기초로 하되 그 나이 또래의 어린아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을 담아낸 작품이었다. 지하실에서 '기르던' 포로와 자신의 왼손을 한꺼번에 잃은 후 '나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화자를 통해 작가는 어쩌면 전쟁이 일본에 남긴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말하려 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죽은 사람을 보는 것에 익숙해지는 어린아이란 얼마나 슬픈 것인지, '사육'의 마지막 작면에서 잠깐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을 다잡으며 문득 생각했다.

오에 겐자부로는 작품보다도 사회활동으로 한국에 잘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다. 실제 작가는 종전 이후의 일본에서 꾸준히 군국주의, 우경화, 핵무기 등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1970년대에는 김지하 시인의 구명을 위해 단식투쟁을 하고,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을 때 고이즈미가 물러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으며, 최근에는 독도 분쟁에 대해 독도는 일본 침략의 증거라고 비판하기도 하는 등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실제 그를 일본 정부의 잘못된 역사관과 외교정책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대표적인 일본 지식인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그의 작품들이 대부분 일본인이 겪은 전쟁의 상처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침략에 대한 미화나 철저한 자기중심성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그가 이토록 모든 폭력에 반대하며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똑같은 눈높이로 성찰하기 때문일 것이다.

단편집을 읽으며 처음 알게 된 사실은, 그의 큰아들이 지적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실제 그 영향으로 오에 겐자부로는 아들과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작품을 연달아 집필하기도 한다. 아들의 장애를 부끄럽게 여겨 숨기려 하거나 그에 대해 이유없는 죄책감을 느끼며 실의에 빠져있기보다는 아들의 삶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도우려 노력하는 아버지로서의 그의 모습이 작가로서의 그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오에 겐자부로의 큰아들 오에 히카리는 장애인 작곡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그의 삶을 이끌어준 것은 늘 지극정성을 다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아마 아들 역시 아버지의 인생에 이름처럼 늘 빛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올해 여든한살이 된 작가는 아직 생존해 있다. 언젠가 꼭 오에 겐자부로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무라카미 하루키에 이어 두번째로 작가와의 만남을 버킷 리스트에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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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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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카고의 애칭은 윈디 시티, 바람의 도시다. 그래서일까.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막연하고도 확신에 찬 꿈을 안고 시카고로 온 캐리를 맞이하는 것은 바람이다.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차갑게, 때로는 허황된 꿈의 한 자락을 놓치 않도록 따스하게 불어오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다 줄 지 알 수 없는 바람. 그 속에서 캐리는 정처없이 흔들리다, 자신이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방향의 미래를 맞닥뜨린다.

 책을 읽는 현대의 독자라면 캐리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허영에 질릴지도 모르고, 그저 멍청하고 예쁜 트로피 와이프처럼 비춰지는 그녀의 모습이 안타까울 수도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소설의 배경이 1889년의 미국이고, 캐리가 그 중에서도 가난한 집에 태어나 농촌에서 자란 처녀라는 사실이다. 그녀에게는 집안의 든든한 지원도, 인생의 방향에 대해 조언할 수 있을 만큼 사회 경험이 많은 부모도, 교육의 기회도 없다. 심지어 근무 경험도 없어 대도시 시카고에서 얻을 수 있는 일자리가 신발공장에서 신발끈 구멍을 뚫는 여공으로 일하는 것밖에 없을 정도이다. 더구나 대도시에서 들뜬 그녀에게 그녀를 맡아준 언니와 형부가 보내는 시선은 냉대에 가깝다. 극장에 가자는 그녀의 제안은 철없는 생각으로 치부되고, 형부는 돈을 벌어보기도 전에 놀 생각부터 하는 처제가 미래에 짐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그 모든 상황 속에서 드루에가 캐리에게 손을 내민다. 소녀 시절부터 꿈꾸던 좋은 옷을 사서 입히고 언니네 집에서 한번도 먹어볼 수 없었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한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상심한 그녀에게 살 곳을 구해주겠다고 따뜻한 말을 건넨다. 그 순간 캐리가 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오직 드루에만의 그녀의 길일 뿐이다.

 물론 캐리는 그런 드루에를 금방 꿰뚫어본다. 그녀에게 새로 접근하는 허스트우드가 더 나은 남자라는 사실도 바로 알아챈다. 그것이 캐리가 타고난 가장 뛰어난 능력이다. 깊은 감성과 거기에 기반한 타인에 대한 예리한 통찰. 많이 배우지도, 많이 경험하지도 못한 어린 그녀는 그 감에 의지해 삶을 헤쳐간다. 물론 그녀가 고른 길이 늘 옳지는 않다. 그래서 가족들이 애정을 듬뿍 담아 '시스터 캐리'라 부르던 젊은 처녀의 미래는 결코 순수하고 아름답게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그렇다 해도, 그것이 캐리의 인생이다. 19세기의 시카고에서, 그녀에게 주어진 것이 그런 것밖에 없을 뿐이다.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이 소설은 출간 당시 인간의 욕망을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했다는 이유로 보수적이던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기고 또한 많은 비난에 직면했다고 한다. 그가 소설 속에 구축한 욕망의 세계는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여전히 우리는 돈과 명예와 여자가 있는 세계, 탐욕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세계에 조금씩은 발을 딛고 살아간다. 우리 사회에도 '시스터 캐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비록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었다 해도, 사회적 지지기반이 마련되었다 해도, 법적 보호장치가 존재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여전히 살기 위해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욕망에 몸을 맡기고, 또 그 선택에 의지하여 정점에 오른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삶의 이면에는 여전히 고뇌와 갈등이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고 때때로 삶은 그 어떤 죽음보다도 추악하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간다. 과거의 그들이 그랬듯.

인간은 바람 속의 나뭇잎처럼 한때는 자기 의지에 따라, 한때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식으로 열정의 숨길에 따라 그때그때 움직인다. 자유의지에 따라 실수를 저질렀다가 본능으로 회복하기도 하고 본능으로 인해 쓰러졌다가 자유의지로 일어나기도 하는, 예츨할 수 없을 만큼 변동이 심한 존재이다. 어쨌든 진화는 계속되며 이상은 결코 꺼지지 않는 불빛이라는 사실로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인간은 이처럼 영원히 선과 악 사이에서 헤매지는 않을 것이다. 자유의지와 본능 간의 다툼이 조정되고, 완전한 깨달음이 자유의지에 본능을 온전히 대체할 힘을 부여하게 되면 비로소 인간은 더이상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이성의 지침이 진실이라는 머나먼 극점을 확실하고 변함없이 가리킬 것이다.

- 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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