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잔의 칼럼 - 남무성, 볼륨 줄이고 세상과 소통하기
남무성 글.그림 / 북폴리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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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걸 놔두고 하기 싫은 걸 열심히 하는 거야말로 정말 지리멸렬한 인생살이지."


책을 덮고 보니 작가가 내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이거였구나, 싶었다. 제각기 다른 시기에 쓰여진 서로 다른 주제의 짤막한 글들은 얼핏 보면 아무런 방향성도 없어 보인다. 그저 같은 사람이 썼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그닥 없어 보이는 칼럼과 만화들. 어떤 글은 아는 사람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고, 어떤 글은 재즈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떤 글은 제법 사회비판적 성격을 갖추기도 한다. 그렇게 읽어가다 보면 쉽게 읽히는 글에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뭐가 남는 게 있으려나, 싶었다. 그러다 마지막 만화에 이르러 저 문장을 발견하고는 그렇구나, 했다. 이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거구나.


재주 많은 사람


바로 그 마지막 만화에서 작가는 '재주 많은 조영남이 부럽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남무성 역시 그 못지 않게 가진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재즈평론가라는 직함을 달고 있지만 그는 글도 쓰고, 책도 내고, 잡지도 만들고,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영화도 만들고 강연도 다닌다. 그냥 이것저것 건들기만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각 분야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뭐하나 빠짐없이 잘 해내고 있다. 에세이집을 읽어 보니 겪은 일을 풀어내는 글솜씨도 재밌다. 그게 다 하고 싶은 일을 그때마다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재주가 많다고 했지만, 곰곰히 들여다 보면 그가 하는 모든 일에는 음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그가 아주 어린시절부터 들어왔던 바로 그 음악 말이다. 수능 준비를 하면서도 몰래 LP판을 사모았던 소년은 그렇게 성장하고 나이를 먹도록 음악에 대한 애정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아낌없이 퍼부었던 애정이 그에게로 돌아와 그의 직업이, '먹고 살 수 있는 일'이 되어주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그는 타고나길 재주가 많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여심히 노력한 사람이기도 하다.


쉽게 읽는 음악 이야기


비틀즈 정도는 알지만 나는 음악에 거의 문외한이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으며 새로 알아가는 내용들이 많아 즐거웠다. 노래도 모르는 밴드의 뒷이야기가 뭐가 재밌을까 싶지만 음악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듬뿍 담겨 있어서인지 나까지 애정어린 시선으로 글을 훑게 되었다. 그러다 하루키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반가운 아는 사람 이야기에 또 눈을 반짝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용이 어려워지지 않도록 군데군데 작가 자신이 직접 겪었던 일들, 함께 음악을 듣는 주변 사람들의 재미있는 에피소드, 그리고 음악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의 소소한 단면을 보여준 덕분에 지루해질 틈이 없었다. LP판 세대도 아니고, 재즈를 즐겨 듣지도 않는 나에게 이 정도인데 음악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에게 남무성이라는 평론가가 어떤 존재일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물론 모든 부분들이 쉽게 읽혔던 건 아니다. 어떤 칼럼들은 읽기에 다소 불편하기도 했고, 민감한 주제를 너무 단순하게 풀어썼다고 여겨지는 순간도 있었다. '오타쿠와 마니아'가 그랬고, 비틀즈 마니아들이 정확한 팩트에 대한 검증을 요구하는 것을 잘못된 일처럼 다룬 부분이 그랬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 책은 그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 삶의 편린들을 담은 것일 뿐이다. 그 중 나와 맞아 공명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파장이 어긋나는 글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 모두 그렇듯이.


심야식당


'글에서 전하려는 생각의 크기도 딱 소주잔만 한 정도'라며 에세이집의 이름을 '한잔의 칼럼'으로 정했다던 작가는, 지금 이 시각에도 양평의 심야식당에서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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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스토리콜렉터 46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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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내가 사는 동네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 처음 이사 간 동네가 어쩐지 너무도 익숙하다. 새집에 들어가며 다녀왔습니다,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다. 그런데 그 기시감이 결코 반갑지가 않다. 어쩐지 찝찝하고 불길하고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다. 다음 학기에 중학생이 되는 어린 소년에게, 그것은 버거운 새출발이다.


돌아온 '집 시리즈'


   미쓰다 신조의 '집 시리즈'가 두번째 작품으로 한국의 독자들을 찾아왔다. 두번째라고 하지만 사실 시리즈 상에서는 '화가'가 '흉가'에 앞선다고 한다. 그러니 이 작품은 '집 시리즈'의 첫 시작인 셈이다. '집 시리즈'의 전매특허인 어린 주인공과 새로 이사 온 수상한 집, 그리고 거기서 맞닥뜨리는 충격적인 진실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설정이 같으니 뻔한 내용이 아닐까 싶은데도 어김없이 이야기의 전개는 다른 방향으로 치닫고 새로운 공포가 스멀스멀 정체를 드러낸다. 그것이 미쓰다 월드의 힘인가 싶다.

   그렇다. 사실상 '집 시리즈'가 차용하는 공포 공식은 진부하다. '귀신 들린 집'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먹히는 소재다. 뱀파이어의 본고장이라는 루마니아부터 '주온'과 '그루지'가 연이어 히트를 친 일본까지 지구 곳곳에서 소위 호러 마니아들은 폐가 체험을 하러 떠나고, 어느 동네에나 떠도는 흉흉한 소문으로 터무니없이 싼 집값에도 아무도 입주하지 않는 집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그러니 '집 시리즈'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 아니, 특별할 게 없어야 한다. 그런데 그 진부한 소재가 미쓰다 신조의 상상력과 필력을 만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탄생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오싹한 밤을 선사한다.


가장 일본적인 것


   이 책의 주인공 코타로는 이사 온 첫날부터 신당을 품은 기묘한 숲을, 그 숲 바로 옆집에 사는 요괴 같은 노인을, 그리고 노인이 읊조리는 불길한 말들을 맞닥뜨린다. 홀리듯 들어간 숲에서 그는 옛날 이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이 신을 모셨던 신당이 처참히 망가졌음을, 거기서 무언가가 기어나오고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안개를 앞세워 자신을 쫓기 시작했음을 알아챈다. 이사한 새 집에서는 해질녘 어둠이 내리면 미닫이문을 열고 뻗어나오는 노인의 팔, 시꺼먼 욕조 안에서 울리는 갓난아기 울음소리, 나무 복도를 따라 쫓아오는 질척한 발소리 등 온갖 괴현상이 코타로를 괴롭힌다.

   이 책에 등장하는 호러의 요소들은 하나같이 소름끼치도록 무섭다. 동시에 누가 봐도 일본소설인 걸 느낄 수 있을 만큼 토속적이기도 하다. 뱀신을 다뤘던 '흉가'와 마찬가지로, '화가' 역시 집이라는 요소에 가장 일본적인 색채를 입힌다. 그렇게 탄생한 공포의 무대는 기묘한 매력으로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쯤 되면 미쓰다 신조의 호러소설은 그냥 귀신 이야기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실제 작가는 어린 소년의 눈에 비치는 끔찍한 형상들, 그들에게 쫓기는 소년의 공포를 생생히 묘사하며 독자를 귀신 들린 집의 한가운데로 깊숙이 끌고 들어온다. 진한 공포체험 속에 부적과 영매까지 등장하며 이야기는 점점 오컬트적인 요소를 띄어가는 듯하다. 바로 그 때, 현실의 살인사건이 끼어든다. 신문에 실리고 사람들에게 목격되는, 사람에 의한 사건이. 그리고 귀신이 매개하는 괴현상과 인간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 사이의 연결고리가 드러나면서 이 소설은 더 이상 단순한 호러물이 아니게 된다.

   '미쓰다 월드'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내내 에이, 이런 게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지, 하며 애써 현실과 분리하려 노력했던 공포가 지극히 인간적인 사건과 얽히며 어느 순간 피부에 달라붙기 때문이다. 실제 봉인이 풀린 어떤 사악한 신이 숲에서 나온 길 그대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화를 입힌다는 건 '나에게는 생길 리 없는 일'일 수 있지만, 다음 차례가 자기 가족일거라고 굳게 믿은 어느 미치광이가 그 순서를 바꾸기 위해 다음 집 사람들을 잔인하게 몰살한다는 건 이 세상 어딘가에서 분명 일어날 법한 일인 것이다. 그렇게 귀신은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온갖 소행을 벌여도 늘 저 멀리 어느 곳에 머물러 있는 반면, 사람의 추한 욕망과 잔인함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중요한 건 모든 사건이 해결되었다고 믿게 되었을 때,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흉가'의 마지막 장면에서 힘들었던 과거를 잊고 새출발을 하려는 쇼타와 여동생 앞에 새로운 '친구'가 나타나듯, 이 책의 마지막에도 대를 잇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광기는 계속되고, 코타로는 아직도 안전하지 못하다. 그렇게 '화가'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올 여름, 코타로를 따라 어둑한 복도를 걸으며 뒤따라 오는 정체 모를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이 무더위도 아무 것도 아니게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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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는 자라고 있어요 워크북 - 육아 궁금증을 해결하고 아이 개성을 발견하는 체크리스트 가득 엄마, 나는 자라고 있어요
프란스 X. 프로에이 지음, 유영미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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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발달심리학자가 들려주는 육아 이야기


프란스 X. 프로에이의 '엄마, 나는 자라고 있어요'는 이미 엄마들 사이에서는 소문난 베스트셀러다. 아이의 발달단계에 따라 전문적이면서도 부모의 눈높이에 맞는 조언을 해주는 뛰어난 육아 지침서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출간된 워크북은 그 동안 '엄마, 나는 자라고 있어요'를 읽으며 아이를 키웠던 엄마들이 가장 많이 품었던 의문들과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담았다. 나아가 '글로 배운 육아'에서 끝나지 않도록 책 하나만으로 곧바로 응용하여 내 아이의 발달을 체크하고 기록할 수 있는 육아일기 기능까지 하나로 엮었다. 이 책이 산후조리원 선물로도 각광받는 이유다.

이런 게 궁금해요

자라는 아기는 너무도 신비로운 존재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흡수하여 점차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그렇게 부모는 매일 아기의 눈을 들여다보며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다. 그러나 아기와 함께하는 하루가 매일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다. 육아는 리셋 버튼이 없는 게임이고, 그렇기에 어느 순간 모든 게 막막해지기도 한다. 결정의 순간, 내 작은 실수가 아이의 일생을 망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 때로 부모의 마음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럴 때, 부모에게도 선생님이 필요하다. 답이 없는 것 같은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내놓아줄 수 있는 선생님 말이다.
질문의 종류는 다양하다. '이유식은 언제쯤 시작할까?', '각 월령에 맞는 놀이는 어떤 것이 있을까?' 같은 육아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는 실용적인 질문부터 '엄마로서 때때로 화나는 것이 정상적일까?' 같은, 대부분의 엄마들이 스스로에게 던지지만 차마 누구에게도 의논하지 못했던 의문들까지. 더불어 '아기들도 악몽을 꿀까?' 같은, 부모가 아니라도 누구나 한번쯤 궁금해할 만한 것들도 있다. 이 책은 그런 질문들에 친절히 답을 해준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궁금한 게 생겼을 때 언제든지 찾아볼 수 있도록, 그렇게 꼼꼼한 답을 잘 분류하여 책에 담아두었다. 그게 바로 육아지침서의 진정한 기능이니까 말이다.

쉽게 쓰는 육아일기

육아일기는 일종의 로망이다. 내 아이의 하루하루를 소중히 기록하여 언젠가 훌쩍 커버려 그 지난날을 기억 못할 아이에게 물려주는 것,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예쁜 시간들을 담아두는 것, 부모로서의 경험을 오롯이 기록하는 것. 그러나 막상 부모가 되어보면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시간마다 우유 먹이고 기저귀 갈고 재우고 어르고 달래느라 24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는데, 그 와중에 기록까지 남기는 건 어떨 때는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중에 그토록 많은, 깔끔하게 정형화된 육아일기장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육아일기를 쓰고 싶은데 혼자 시작하기에는 막막한 모든 엄마 아빠들을 위해서.
이 책 역시 그 점에 착안한다. 그래서 아이의 발달단계를 확인하고 그에 맞는 육아를 하기 위해 책을 펼치는 부모들이 별다른 번거로움 없이 바로 자기 아이에 관한 내용을 기록할 수 있는 공간을 별도로 마련해두고 있다. 아이가 몇개월에 어떤 발달단계를 완수했는지 체크하는 것부터 아이의 모습을 실제 사진으로 기록하여 붙이는 것까지, 책의 지침대로 아이의 성장을 기록하다 보면 어느새 훌륭한 육아일기가 완성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에게

'엄마, 나는 자라고 있어요'는 전세계 15개국에 번역되어 10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언어도 문화도 관습도 모두 다르지만 육아의 고민은 어딜 가나 똑같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다. 이 책은 세상의 모든 부모들에게 잔잔한 응원을 보낸다. 당신만 힘든 게 아니라고,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위대한 일이라고, 지금 당신의 품에서 자라는 건 또 하나의 세계라고. 그리고 가장 어려운 순간을 위해, 우리가 여기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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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럴센스 1 - 남들과는 '아주 조금' 다른 그와 그녀의 로맨스!
겨울 지음 / 북폴리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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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정지후


반듯한 겉모습도, 깔끔한 일처리도 무엇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모범사원 정지후에게는 비밀이 있다. 바로 그의 성적 취향. 지후는 명령을 받거나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매저키스트이다.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가던 그가 처음으로 큰 맘 먹고 구입한 SM 도구, 사람에게 채울 수 있는 개목걸이. 그런데 집에서 받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회사로 주문한 택배가 택배기사의 사고로 동료인 정지우의 손에 들어가면서, 그는 처음으로 취향을 들켜버리고 만다.


S, 정지우


차갑고 도회적인 겉모습, 늘 무표정하고 시크한 태도. 정지우는 겉보기에는 전형적인 차도녀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저 언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늘 타이밍을 놓치고 마는 소심쟁이에 불과하다. 그런 그녀에게 같은 회사의 정지후는 우상이자 완벽한 이상형이고 가슴 속에만 담아둔 짝사랑이다. 그리고 어느 날, 택배 하나로 원치 않게 그 짝사랑의 치명적인 비밀을 알아버렸다.


사람이 사람을 만났을 때


그렇게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서로 접점이 없었던, 그래서 서로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각자 상대방에 대한 자기만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던 그들은 점차 서로를 알아가고, 진실한 모습의 서로에게 좀 더 다가서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그들 사이에 희미하게 존재하던 감정 역시 좀 더 진실되게 만든다.

누군가의 명령을 받을 때 진심으로 기뻐하는 지후의 모습은, 어쩌면 지우가 짝사랑 속에서 그려왔던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지후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 지우의 감정 역시 올곧게 홀로 서게 된다. 그 이전에 존재했던, 혼자 삭이던 마음은 어쩌면 정지후라는 사람이 아닌 정지후라는 사람에 대한 환상을 바라보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지우를 보는 지후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다. 차갑고 도도한 이미지의 지우는 지후가 꿈꿀 수 있는 완벽한 S였다. 그러나 정작 직접 만나 부딪히며 알게 된 정지우라는 여자는 한없이 소심하고 여리며 착하다. 차갑게 명령을 내리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렇게 지우 역시 지후의 이상형에서 벗어나고 말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제대로 설 수 있게 된다.


유쾌하고 편안한 SM 이야기


웹툰 원작의 이 만화는 분명 로맨틱 코미디이고 오피스물이지만, 동시에 SM물이기도 하다. SM은 분명 마이너한 성적 취향이고, 어찌 보면 거부감을 줄 수도 있는 소재일 터. 그러나 작가는 주제를 지나치게 무겁지도, 지나치게 자극적이지도 않게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이야기에 녹여내며 이 'SM 만화'를 누구나 마음 편히 볼 수 있고 쉽게 다른 사람에게 추천해줄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이는 단순히 지후와 지우의 관계가 생각보다 건전하게 그려져서만은 아니다. '모럴센스' 전반에는 SM 역시 하나의 취향일 뿐, 누군가를 평가하고 비판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깔려있다. 그렇기에 작품의 제목인 '모럴센스'는 되려 누가 어떤 자격으로 다른 사람의 도덕성을 평가할 수 있냐고 독자 스스로 자문하게 만든다. 지후는 지배받는 걸 좋아한다. 자기 목 사이즈에 맞는 개목걸이를 주문하고 그 목걸이가 도착하기를 설레며 기다린다. 그런데 그게 뭐가 어쨌다는 말인가. 지후의 그 취향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SM이 생소할 수 있는 주제인 만큼 작품 곳곳에서 관련 용어에 대한 간단한 소개 역시 만나볼 수 있다. 이 역시 작가의 소소한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또한 SM을 그저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자극적 형태로만 보여주고자 하는 게 아니라, 디테일하고 섬세한 누군가의 '취향'으로 내보이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 만화를 보고 나서 SM에 흥미가 생기지는 않았다. 나는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지도, 누군가에게 지배 당하고 싶지도 않다는 마음 역시 변함이 없다. 그러나 '모럴센스' 덕분에 SM을 멀고 낯선 것에서 내 주변에 있을지도 모를 친숙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인정해야겠다. 그리고 내 주변에도 몰래 택배를 시키며 자기 취향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당신의 취향은 무척 멋진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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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 일레븐 스토리콜렉터 45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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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모니터링을 위해 도착한 가제본을 받아들었을 때, 우주에 관한 SF물일거라고 추측했던 기억이 난다. 언뜻 미래소설이라는 설명을 봤었는데, 제목이 이러니 아마 스테이션 일레븐은 우주정거장이나 새롭게 마련된 우주거주공간을 뜻할 거라고 짐작했었다. 아주 틀린 추측은 아니었다. 실제 작품의 제목인 '스테이션 일레븐'은 우주와 관련이 있으니까 말이다.


'세기말을 그린 소설 중 이토록 아름다운 소설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우주 이야기를 기대하며 책을 펼쳤는데 첫장면이 무대 위 리어왕 공연이어서 당황했고, 공연 이야기인가 하는데 갑자기 주연배우가 쓰러져 숨을 거두면서 자세를 다시 잡고 읽기 시작했는데, 살인사건 얘기구나! 하는 순간 갑자기 스페인 독감에 비견할 전염병이 지구를 휩쓸었다. 그 모든 게 첫 50페이지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서,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책의 전개속도에 내가 밀려 잠깐 머릿속을 정리해야 했다.

그러니까 이건 저 추천사처럼 세기말을 그린 소설이다. 전염병이 지구를 휩쓴 이유, 황폐해진 땅에서 살아가는 생존자들의 이야기.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사라진 세상에서 그래도 생존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의 고군분투. 그 몸부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랑악단을 통해 다시 묻는 인간 존재의 의미.

전염병 이전의 세상, 그러니까 지금의 우리가 아는 것 같은 세상에는 선택지가 많았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철학적인 영역의 것이었고 깊은 사유를 동반했다. 삶의 의미, 라는 것에 대해 떠올리면 끝도 없이 많은 것들이 생각났다. 끝도 없이 많은 것들이 가능했다.

전염병 이후의 세상은 그렇지 않다. 음식이 귀하고 물이 귀한 세상, 백골 시신이 누워있는 안방 옷장에서 옷을 끄집어내어 꿰어입어야 하는 세상, 그 와중에도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아 독재와 폭정과 광신이 혼재한 세상. 그 곳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물으면 돌아오는 가장 간단한 답은 생존이다.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지랄맞은 하루하루를 어떻게든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스위치 하나 누르면 전구라는 게 켜지던 시절이 있었음을 어렴풋이 떠올리면서, 때로는 이것을 기억하는 게 더 괴로운 일은 아닐까 곰곰히 생각하면서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것. 살해당하지도, 강간당하지도, 팔려가지도, 매를 맞지도 않은 채 다음날을 맞이하는 것. 그런 게 살아가는 의미가 되는 세상에서, 커스틴은 여전히 문명의 조각들을 모으며 살아간다. 소중한 스크랩을 품에 안고 시신이 된 낯선 이들의 눈을 감겨준다. 그리고 무대에 선다. 햄릿을, 한여름밤의 꿈을, 리어왕을 연기한다.


'내가 오랫동안 기억할, 그리고 끊임없이 되돌아갈 책'


이 책의 가장 첫장면, 리어왕을 연기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한 할리우드 배우 아서 리앤더의 전처인 미란다는 그래픽노블을 그린다. 어쩌면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지도 모르는 책이지만, 그 책을 완성하는 것이 그녀의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릴적부터 늘 마음 속에 있던 이야기, 너무 선명하게 알고 있어서 오히려 그리기 어려운 이야기를 그녀는 마침내 책으로 세상에 내보인다. 그 책을, 세번째 아내를 만나며 미란다를 버린 아서가 아역배우이던 커스틴에게 선물한다. 그렇게 '스테이션 일레븐'은 전염병 이전의 세상과 이후의 세상, 아서와 미란다, 그리고 커스틴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소설의 현재는 분명 종말 후의 세상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끊임없이 뒤로 돌아가 종말 이전의 세상을 비춘다. 화려했던 할리우드를, 한때 파파라치였던 남자와 화려한 삶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던 여자의 짧은 만남을, 종말 전 마지막 날의 사투를. 그렇게 묻는다. 어떤 것에 의미가 있냐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살고 있었냐고.

'예언자'에게 극단의 어린 여자아이를 넘겨주는 걸 거부한 유랑악단은 결국 쫓기는 신세가 되고, 뿔뿔이 흩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흩어진 상태로 점차 한때 공항이었던 '문명 박물관'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그들과 어떤 기억을 공유했던 사람들, 그리고 이제 모든 문명이 잠든 이 곳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함께 망원경으로 전기가 들어오는 마을을 바라보며 커스틴과 지반의 모습은 또렷하게 유랑악단의 마차 뒤에 써있던 메시지와 겹친다.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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