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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솔직하게, 올핸 정말 책을 많이 읽지를 못하고 있었다. 뭐, 핑계를 대자면 공부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야구를 보다보니 그렇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책사랑 떠나고 나니까 누구하나 책 얘기 하는 사람도 없고,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때 내 앞에 나타난게 S다.
여태까지 만나본 그 많디 많은 책읽는 자들은 모두 S앞에 무릎을 꿇어도 좋다. 경배하라 S를!!! 진짜 다양한 방면으로 책을 읽는데, 나는 그렇게 책을 많이 읽으면서도, 똑똑하면서도, 재치있고,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유머러스한 사람은 처음봤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한 마디로 반.했.다.
나도 이 책에서 등장하는 에미처럼. 정신없이 그에게 빠져들었던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역시도 레오가 에미를 대하듯 나를 대했던것도 사실이다. 언제나 그가 내게 전하는 이야기들이 좋았고, 그 행간, 그 낱말들 속에서 나는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내가 하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귀엽게 또 어여쁘게 여겨줬고, 왜 내가 연애를 못하는지, 진짜 인기 많을 법한 여자아이의 행동을 하는데 왜 남자를 만나지 못하는지에 대해 본인이 더 답답해 했었다. 그런 그가 이 책을 권한 이유는 뭘까?!
역시 우리 둘의 사이도 무언의 말. 공허한 말들일뿐이었을까?! 책에서처럼, 내가 원하는 어떤 이성의 모습을 그에게 투영시켜, 그를 내가 원하는 그처럼 보이도록 만든걸까?! 항상 내게 귀엽다, 착하다라는 말을 전하는건, 그 역시 그가 원하는 어떤 이성의 모습을 내게 투영시켜 상상속의 인물을 만들어 낸게 아닐까?! 그렇다면, 역시 책에서의 레오처럼 브레이크를 걸고 싶은걸까?! 우리에게도 끝내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걸까?!
오늘, 문자를 주고받는데 S가 R을 감싸는데, 나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 순간 나도 느꼈다. 아, 더 이상은 안된다. 이런 감정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어느날 내가 내 마음을 한껏담아 S에게 연락을 했는데, 변경된 이메일 주소를 알리는것처럼 그렇게 찾을 수 없는 저 먼곳으로 떠나버린다면, 나는 마음이 아플꺼야. 그리고 나는 또 시를 떠올리겠지. 관계 혹은 사랑. 내 너를 몰랐으면 몰랐지, 알고 난 이상 내 가슴에 박힌 못 빼내고 난 그 자리를 다시 메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메우지 못하고 한 동안 녹물만 질질 흐르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게 사랑이었든 우정이었든 그냥 장난질이었든 말이지. 그렇지만 나도 알아. 나와 내 이성이 그러지 말것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실은 너도 알고 있겠지.
- 에미, 우리가 더는 할 말이 없다는 게 슬퍼요.
- 어쩜 할 말이 있었던 적이 없었는지도 몰라요.
- 그렇다고 하기에는 우린 그동안 너무 많은 얘기를 했어요.
- 우리가 한 건 무언의 말이었죠. 모두 공허한 말들이었어요. (262p)
그런데 에미, 당신과 나, 우리 경우는 달라요. 우린 골라인에서 출발하는 셈이에요. 따라서 나아갈 방향은 하나밖에 없죠. 되돌아가는 것. 우린 미몽에서 깨어나는 지난한 과정을 밟아야 해요. 우리가 쓰는 글이 우리의 실제 모습, 실제 삶일 수는 없어요.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며 그렸던 많은 이미지들을 우리의 실제 모습이 대신 할 수는 없어요. 당신이 내가 아는 에미보다 못하다면 실망스러울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내가 아는 에미보다 못할겁니다! 내가 당신이 아는 레오보다 못하다면 당신도 우울하겠지요. 그리고 나 역시 당신이 아는 레오보다 못할 겁니다! 우린 만나면 미몽에서 깨어나 헤어질 테고, 일 년 동안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애타게 기다리면서 몇 달씩 지지고 볶았으나 막상 먹어보니 입에 맞지 않는 기름진 식사를 하고 났을 때처럼 속이 거북하겠지요. 그 다음엔 어떻게 될까요? 끝나는 겁니다. 끝. 우리의 첫 만남은 곧 마지막 만남이 되겠지요. 그러고 나서 아무일도 없었던 척할까요? 에미, 우린 영원히 신비감이 사라진, 마법이 풀려버린, 실망스럽고 생뚱맞은 상대의 영상을 갖게 되겠죠. 우린 서로에게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게 될 겁니다. 무엇을 위해 메일을 써야 하는지도 모르게 될 테고요. 그리고 훗날 언젠가 카페나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서로 모른 척하거나 못 본척하고 황급히 자리를 피해버릴 겁니다. 우린 '우리'의 변한 모습, '우리'가 남긴 것을 부끄러워하게 될 거예요. '우리'에게서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공동의 거짓과거를 지닌, 서로 낯선 두 사람만이 남게 되겠지요.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자기기만에 빠져 있던 두 사람만이.(27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