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좋은 일도 그걸 못이박힌 가슴으로 느껴야 할 때 어떠하다는 걸 네가 알 리가 없지. 또 알아서도 안되고. 그러나 너도 손가락에 가시 같은 게 박혀본 적은 아마 있을 것이다. 가시 박힌 손가락은 건드리지 않는게 수잖니? 이물질이 닿기만 하면 통증이 더해지니까. 에미에게 너무 잘해주려고 애쓰지 말아라.
만약 손가락 끝에 가시라도 박힌 경험이 있다면 그 손가락으로는 아무리 좋은 거라도, 설사 아기의 보드라운 뺨이라도 아픔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만져볼 수 없다는 걸 알 테지. 그런 손가락은 안 다치려고 할수록 더욱 걸치적거린다는 것도. 못박힌 가슴도 마찬가지란다. 오오 제발 무관심해다오. 스스로 견딜 수 있을 때까지. -86쪽
내가 이 나이까지 겪어본 울음에는, 그 울음이 설사 일생의 반려를 잃은 울음이라 할지라도, 지내놓고 보면 약간이나마 감미로움이 섞여 있게 마련이었다. 응석이라 해도 좋았다. 아무리 미량이라 해도 그 감미로움에는 고통을 견딜 만하게 해주는 진통제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오직 참척의 고통에만 전혀 감미로움이 섞여있지 않았다.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었다. 끔찍한 일이었다.-130쪽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이런 끔찍한 극형에 당해서는 그 영문을 물을 권리가 있다. 신의 권위가 장난질칠 권리가 아닌 바에야 의당 그 극형이 무슨 잘못에서 연유했는지 밝혀줘야 한다. 신, 당신의 존재의 가장 참을 수 없음은 그 대답 없음이다.-130쪽
<법구경>의 한 구절
어리석은 이는 한평생을 두고 어진 이를 가까이 섬길지라도 참다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마치 숟가락이 국맛을 모르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잠깐이라도 어진 이를 가까이 섬기면 곧 진리를 깨닫는다. 혀가 국맛을 알듯이.-131쪽
나에겐 죽음보다 무서운 고통이 타인에겐 단지 흥미나 위안거리밖에 안되는 인간관계가 무서워서 떨고 있었다.-138쪽
그때 계시처럼 떠오른 나의 죄는 이러했다. 나는 남에게 뭘 준 적이 없었다. 물질도 사랑도. 내가 아낌없이 물질과 사랑을 나눈 범위는 가족과 친척 중의 극히 일부와 소수의 친구에 국한돼 있었다. 그 밖에 이웃이라 부를 수 있는 타인에게 나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위선으로 사랑한 척한 적조차 없었다. 물론 남을 해친적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모르고 잘못한 적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의식하고 남에게 악을 행한 적이 없다는 자신감이 내가 신에게도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대들 수 있는 유일한 도덕적 근거였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은,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야말로 크나큰 죄라 하는 것을, 그리하여 그 벌로 나누어도 나누어도 다함이 없는 태산 같은 고통을 받았음을, 나는 명료하게 깨달았다. 하필 변기 앞에 무릎 꿇은 자세로. 나는 그 정답에 머리 숙여 승복했다. 나중에 나의 간지가 또다시 빠져나갈 구멍을 찾게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순간 만은 그건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정답이었다. 그리고 구원이었다. 고통도 나눌 가치가 있는 거라면 나누리라.-142쪽
역설적인 얘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나의 홀로서기는 내가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가까이서 멀리서 나를 염려해준 여러 고마운 분들을 비롯해서 착한 딸과 사위들, 사랑스러운 손자들 덕분이다. 나만이 알고 느끼는 크나큰 도움이 또 있다. 먼저 간 남편과 아들과 서로 깊이 사랑하고 믿었던 그 좋은 추억의 도움이 없었다면 내가 설사 홀로 섰다고 해도 그건 허세에 불과했을 것이다. 나는 요즈음 들어 어렴풋하고도 분명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이런 도움이야말로 신의 자비하신 숨결이라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주여, 저에게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여 너무 집착하게는 마옵소서." -174쪽
내 육신이 밥을 먹지 않고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것처럼 내 마음 또한 좋은 추억의 도움 없이는 최소한의 인간다움도 지킬 자신이 없었기에. 가장 어려울 때 신세진 이곳에서 얻어가진 좋은 추억의 힘을 믿을 수 있어서 한결 마음이 가라앉았다.-156쪽
남동생이 어찌나 고약하게 구는지 집안이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왜 하필 내 동생이 저래야 되나? 비관도 되고 원망스럽기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세상엔 속썩이는 젊은이가 얼마든지 있다. 내 동생이라고 해서 그래서는 안되란 법이 어디 있나?' '내가 뭐관대...' 라고 생각을 고쳐먹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동생과의 관계도 호전이 되더라고 했다.-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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