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이는 칼날들을 보고 있으려니 선생님이 보고 싶어졌다. 살이 닿았다 하면 스윽 베어져 시뻘건 피가 스며 나올 것 같은 날카로운 날들을 보고 있자니까,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졌다. 칼날의 빛이 어째서 그런 기분이 들게 했는지 그 까닭은 분명치 않다. 하지만 어쨌든 선생님이 너무 보고 싶었다. - p. 43
"학교에서는 진짜로 중요한 건 별로 안 가르치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다. 선생님은 자세를 바로 하고 도오루 상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다가 "인간은 마음만 먹으면 어떤 곳에서나 많은 것을 배우게 마련이죠" 하고 조용히 말했다. - p. 60
아내는 좀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 역시 별로 다를 게 없었지요. '깨진 냄비에 얽은 뚜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내에게 있어 저는 얽은 뚜껑조차 될 수 없었던 걸까요? - p. 73
거울 속의, 필요 이상으로 중력에 대해 솔직한 자신의 벗은 몸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보이는 자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자신, 방을 떠다니는 자잘한 자신의 기척 같은 것과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다. - p. 94
다카시의 턱 아래 부분은 고등학생이었던 그 무렵에 비하면 상당히 두툼해져 있었다. 쌓이는 세월. 하지만 그 두께는 결코 혐오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두께를 좋아한다. 동시에 나는 선생님의 턱 선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나 다카시와 같은 나이일 무렵에는 선생님의 아래턱도 나름의 두께를 지니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시간이 쌓이는 만큼 거꾸로 선생님의 아래턱의 두께는 깎여 나갔을 것이다. - p. 131
어째서 선생님이랑 이야기를 하면 나는 금세 뾰로통해지거나 분개하거나 괜스리 눈물이 헤퍼지는 것일까? 원래 나는 감정을 드러내는 편도 아니건만. - p. 141
나? 나는 아마도 아직까지 제대로 된 '어른'이 되지 못했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제법 어른스러웠다. 하지만 중학교, 고등학교...... 시간이 흘러가면서 거꾸로 어른스럽지 못하게 되어 갔다. 더욱더 시간이 흐르면서 완전히 어린애같은 인간이 되어 버렸다. 시간과 사이좋게 갈 수 없는 체질인지도 모른다. - p. 151
해변에도 길에도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쓸쓸하다. 개똥 같은 선생님이 내 뒤를 안 좇아오니 얄밉다. ... 어차피 인생이란 것이 이런 거지. 이렇게 낯선 섬에서,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저 선생님과 어긋나서 낯선 길을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간다. - p. 176
소중한 사람이라면 나무와 마찬가지로 퇴비를 주고 가지를 치고 손질할 것을 명심. ... 그렇지 않은 연애라면 적당히 내버려 두어 그대로 말라죽게 만들면 안심. ... 큰 숙모는 말장난이라도 하듯 그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오래 안 만나다 보면 선생님을 향한 감정도 말라죽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 p. 209
그건 그렇고 정말로 지금까지 혼자서 '즐겁게' 살아온 것일까? 즐겁다. 괴롭다. 편하다. 달콤하다. 씁쓸하다. 짜다. 간지럽다. 가렵다. 춥다. 덥다. 미지근하다. ... 대관절 나는 어떤 식으로 살아온 걸까? - p. 211
선생님의 경우, 상냥함이란 것은 공평하고자 하는 정신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나에게 상냥하게 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견에도 선입견 없이 귀를 기울이겠다는 교사다운 태도에서 상냥함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냥 상냥한 것보다 이쪽이 몇배나 더 기분 좋았다. ... 꽤나 큰 발견이었다. 이유 없이 상냥하게 대해주는 것은 편치가 않다. 하지만 공평한 대우를 받는 것은 기분이 좋다. - p. 239
우리는 언제나 진지했다. 장난을 치고 있을 때조차 진지했다. 그러고 보면 다랑어도 진지하다. 가다랭이도 진지하고, 살아 있는 것들은 대부분 진지한 것이다. - p. 246
나그네 길 멀리 헤매다 보니 / 헤어진 옷에 한기 스미고 / 오늘 저녁 맑은 하늘 탓인지 / 하염없이 마음만 아파오누나 - p. 250
가와카미 히로미 / 선생님의 가방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