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주, 태희, 지영

"내가 너를 떠난다고 해서 너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냐." 영화 속에서 태희(배두나 분)가 봉사활동에서 만났던 뇌성마비 시인에게 건네는 말이다. 나는 이 영화를 떠올일 때마다 가장 먼저 배두나의 그 대사가 생각난다. 스무살은 어쩐지 막막하고 부담스럽다. 하지만 스무살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고 해서 그 시절을 좋아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이 영화는 그런 '스무살'에 관한 영화이다.

여상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 다섯 명의 친구들. 혜주(이요원 분), 태희(배두나 분), 지영(서지영 분), 비류+온조. 증권회사에 입사한 깍쟁이 혜주, 미술 디자인을 꿈꾸는 차분한 지영, 뇌성마비 시인을 도와주며 봉사활동을 하는 무던한 태희, 악세서리를 만들어 팔며 그들의 우정에 즐거운 감미료가 되어주는 비류+온조. 아직 완전한 어른이랄수도, 그렇다고 아이랄수도 없는 어정쩡한 나이의 경계에 서서 이렇듯 각자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다섯명의 친구들 앞에 어느 날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등장하고 그들은 이 처치 곤란의 고양이를 돌려가면서 맡게 된다. 아직 자기 스스로를 감당하기에도 벅찬 그녀들은 맡겨진 고양이를 어쩔 줄 몰라한다.

스무살은 그렇다. 갑작스레 덜컥 맡겨진 고양이 같기도 하고 속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잔뜩 웅크린 채 조심조심 집안을 기웃거리는 불안한 고양이 같기도 하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19세 미만의 모든 금칙어가 사라지며 일견 굉장한 자유가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빗나간 내 인생'의 주인공 발퇴르가 지적하듯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일 뿐이다. 일정한 룰과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는 사회 속에서 진실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이미 출발선부터 공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사정을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공을 위해 자존심은 접어둔 채 더욱 싹싹하게 굴고 코끝을 좀 세웠으면 하고 바라는 혜주나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점점 더 폐쇄적으로 자신의 내면 속으로 파고드는 지영이나 외양의 차이일 뿐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힘겨운 스무살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정말 학창 시절엔 스무살만 되면 무엇이든지 가능할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막상 스무살이 되고 보면 현실의 견고한 벽에 부딪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랬다. 현실에 부딪쳐 이리저리 나가 떨어지다가는 소박함의 미덕을 떠올리며 현재에 만족하면서 겸손하게 살길 바랬지만 기대와 꿈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고, 그 기대와 꿈을 충족시키기엔 완벽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어리고 볼품 없는 나 자신 때문에 화가 나고 속상했다.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현실을 피하거나 현실에 천착하거나 어차피 비겁해지기는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이는 자꾸 먹어가고 삶에서 중요한 결단의 순간이 왔을 때 나는 조금씩 현실과 타협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한 때는 이런 나 자신을 비롯한 인간 전반에 대해 절망한 적도 있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세상사의 '대단치 않음'을 자연스레 인정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다들 조금씩 어리석고 다들 조금씩 불만에 차 있고 다들 조금씩 불행하다.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우스꽝스런 헤프닝 천지인 세상은 어쨌거나 잘만 돌아간다. 나만 몰랐지 원래 이런 것이었다. 

스무살 무렵엔 세상이 아주 희극적으로 보이거나 또는 아주 비극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무엇을 보든 극단에 극단을 내달리던 시기였다. 그만큼 사는 데 눈물이나 과장이 많았다는 얘기다. 삶을 묘사하거나 비유하는 데만 치중했지 실제로 살아 볼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던 그런 시기. 이제 나는 이십대 중반의 경계를 조금 벗어나 있다. 과거에 비해 훨씬 편안해졌고 나를 사로잡았던 수많은 형이상학적 의제들로부터 멀어져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봉급과 아침 밥상 위에 뽀글거리는 달래 된장찌개에 행복해하는 단순한 사람이 되어 있다. 그런 반면에 방안에만 틀어박히면 또 다시 스무살 적의 나로 돌아가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스무살로부터 벗어났다고 해서 스무살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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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1-05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수건 위에 꼼꼼하게 수놓은 자수 같은 리뷰예요. 사랑스러워요.

깐따삐야 2006-01-05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리뷰에 대한 namu님의 리뷰가 더 사랑스럽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