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가방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읽은 일본식 순애보였다.

차고 적적한 겨울에 읽기 안성맞춤인 소설이랄까.

부드러운 달걀 지단을 고명으로 얹은 어묵국이나 상큼한 쑥갓을 살짝 얹은 대구탕, 산버섯으로 국물을 낸 향기로운 샤브샤브, 그런 따듯하고 담백한 음식들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었다.

우연히 선술집에서 학창 시절의 국어 선생님과 재회하게 된 쓰키코.

서로에 대해 그다지 특별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았던 두 사람은 그저 물처럼 담담한 데이트를 즐긴다.

떠나버린 아내의 무덤을 찾아 돌보며 말년을 보내고 있는 선생님과 서른이 훨씬 넘도록 변변한 애인 하나 없이 인생을 물 흐르듯 살아왔던 쓰키코는 이러한 심심한듯 담백한 만남들 속에서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여전히 자신을 어린아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쓰키코는 자기 또래의 남자들이 지닌 평범한 매력들 보다는 선생님이라는 존재 곁에서 느낄 수 있는 따듯함과 공평함에 한없이 편안해 한다.  

그리고 연애를 했던 두 사람. 선생님은 떠나고 선생님의 가방은 쓰키코에게 전해진다.

마지막에 쓰키코가 텅 빈 가방을 열어보는 대목에서는 소설을 읽는 내내 적당히 덥힌 정종이라도 한 잔 한 것처럼 따끈하게 달아올랐던 가슴 한 켠이 찡하고 싸해지는 느낌이었다.

불같이 타오르는 사랑, 언제 끝나버릴까 불안해 마지 않는 연애 말고 선생님과 쓰키코처럼, 마치 샤브샤브를 먹는 일같은 사랑. 차분차분 은근하고 향기롭게 즐길 수 있는 담백한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스하고 조용한 가운데 남다른 깊이를 갖춘 격조 높은 순애보라고 생각한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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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1-04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근사한 제목이군요. 샤브샤브 순애보.
카와카미 히로미의 순애보라니, 참 궁금해요.
이 사람의 서사는 현실로부터 붕 떠올라 있어서 말이죠.
초면에 댓글부터 달아봅니다. 인사드려요.
namu라고 합니다.

깐따삐야 2006-01-04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namu님.
이 사람 책은 처음 읽어보는 건데 전 좋았답니다.
아직 초짜 알라디너에요. 첫인사 고맙습니다. ^^

알맹이 2007-02-25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근사한 리뷰네요~ 딱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