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발레교습소'를 봤다. 2004년작인데 못 보고 지나간 영화였다. 2004년도에 난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을까. 졸업을 하고 발령을 받고 오전에는 출근을 하고 오후에는 퇴근을 하며 지냈던 것 같다. 자주 감기에 걸렸고 가끔 몸살에 시달렸고 교감 선생님과 아이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었던 한 해였다. 눈물 젖은 밥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 했던가. 경험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먹는 일은 참 힘들다. 머리는 띵하니 아프고 입술은 뜨겁게 부어오르고 목구멍은 평소보다 좁아진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기 위해 밥을 밀어넣어야 한다. 무게감이 느껴질만큼 굵다란 눈물방울이 밥 속으로 뚝뚝 떨어지고 입술과 함께 부어오르는 콧 속으로 찌걱대는 콧물. 된장! 2004년에 난 가끔 그 짓을 했다. 싸나이 마인드를 지니고 사는 사람답게 우는 게 창피해서 아무도 안 볼 때 몰래. 겉으로 보기엔 발랄하고 씩씩했지만 내면의 삶은 신파 그 자체였다.

2004년.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대개 남자친구와 같이 보았을 것이고 남자친구는 미묘하게 감정의 결을 건드리는 영화를 함께 보길 원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건 나도 그랬다. 이 영화는 코메디도 아니고 액션도 아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보고 싶은 영화 목록에서 제외당했다. 사실 나는 이런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고 있지만 말이다. 앞으로 나는 이런 영화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과 사귀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 나 흔들렸어. 그래, 나 눈물도 난다. 그래, 나 지금은 웃기 싫고 진지하고 싶거든. 그래도 뻘쭘하지 않을 사람. 그러나 오늘은 2004년도에 대한 이야기나 발레교습소란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청춘에 대해 끄적이고 싶었다. 내 주변의 청춘들. 아름답지만 가엾은 그대들. 그리고 이제 점점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진 채 아둥바둥 돈 좋아, 명예 좋아, 하면서 살고 있는 청춘 언저리의 아무개들.

친척 동생인 Y는 이번에 수능을 쳤다. 내가 학부생 때 부모들마저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린 그녀를 반 년 정도 가르쳤었다. 난 좀 이상한 게 그런 종류의 얼라들이 참 좋다. 마구 끌려버린다. 부모 말 드럽게 안 듣고 자기 세계가 너무 뚜렷해서 난 아무하고도 말이 통하지 않아, 라는 식의 시니컬한 표정을 하고 있는 얼라들 말이다. 가까운 거리에서 본 Y는 재미있는 아이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포청천 눈썹에 안경을 벗고 대충 보면 언뜻 신민아처럼 보이기도 하는 집안의 왕싸가지였던 그녀. 공부를 봐주러 가면 비스켓을 아삭아삭 씹으며 학교의 이상한 쌤들을 비판하고 그녀만큼이나 별나 보이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쏟아내다가 고작 두 문제 풀고 오늘 공부는 그만~ 하고 외치던. 그리고는 "언니는 나중에 분명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하고 말거야, 순진해 가지고는~" 이 따위 언사를 과감하게 내뱉던. 나는 그런 그녀가 귀여웠고 당차고 똑똑한만큼 제 앞가림은 하고 살테니 크게 걱정하지 마시라고 부모를 안심시켰다. 그랬던 그녀도 대학 입시 앞에서는 예민해졌다. 수능 100일전에 불안하다는 메시지를 송신해왔던 그녀가 요즘은 제 방에 꽁꽁 틀어박혀 두문불출이란다. 그 소식을 듣고 난 또 우리나라가 싫어졌다. 정말 비호감이야. 귀여운 그녀를 우울하게 하다니. 썩을, 망할, 오 쉣!

(감정 자제하고 이어서 쓰자......)

얼마전에 만난 후배 W는 한 마디로 골때리는 녀석이었다. 복학을 했던 나와 첫대면을 한 녀석은 시력이 안좋은 건지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내가 무슨 말만 하면 허옇게 야려보길 즐겼다. 저보다 백만스물두배는 잘난 현존 작가들의 작품을 싸그리 무시했으며 선배는 어떻게 그토록 뻔한 생각밖에 못하냐고 나의 걸출한 사고력을 단번에 짓밟곤 했다. 아무도 못 알아듣는 시를 써와가지고는 그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선배들을 답답해하며 천재인 척 하는 것도 심히 못마땅했다. 후배 품귀 현상을 겪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서 어떻게든 승질을 참아보려 했으나 그다지 오래 참는 것에 익숙치 않은 나는 번번히 볼썽사납게 폭발하기 일쑤였고 녀석은 뭐든지 익숙해지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나의 지랄을 의연하게 패스, 하고 있었다. 참으로 짜증나는 것은 역시 변태스러운 나의 취향 탓에 매일 싸가지를 집에다 쑤셔박고 오는 녀석을 속으로 많이 귀여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유 있는 반항은 신선했고 손해를 보더라도 미움을 받더라도 할 말은 하고야 말겠다는 고집이 앞만 보고 달리느라 밍숭맹숭해진 선배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아무튼 싸우면서 정든다는 말이 맞는 건지 졸업하고나서 학부 시절의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일이 뜸해지던 동안에도 녀석과는 용케도 꾸준히 연락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에 그 녀석을 만났다. 무사히 공근 생활을 마치고 복학을 했던 W는 여드름이 많이 가라앉고 그 사이 키도 자란 것 같았다. 므하핫. 얼라들의 성장을 보는 기쁨이 이런 것인지. 나한테 선생티가 좔좔 흐른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선뜻 악수하자고 손을 내미는 녀석은 이제 더 이상 그까짓 얼라가 아니었다.

우리가 간 술집 이름은 '체 게바라'였다. 가게 유리창에는 깜찍한 엽서로 화한 체 게바라가 인물 자랑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체 게바라 평전'을 읽었고 둘 다 그저 그랬다고 말하며 함께 웃었다. W는 요즘 취업이 어려워서인지 이제 교수들도 학점 가지고 횡포를 부리는 일이 줄어들었다면서 처음으로 4.0을 넘겼다고 말했다. 요즘은 다들 너무나 열심히 해서 그 학점으로도 장학금을 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방학 중에도 지인들을 모아 독서 클럽을 운영 중인데 마치 교수가 되어 지루한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 것처럼 모임 때마다 매번 혼자서만 열을 내는 것 같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W가 공들여 서평한다. 나머지 학생들은 듣는다. W가 묻는다. 아무개씨, 의견은 어떻습니까? 아무개 대답한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아무개에게 묻는다. 어떻게 읽으셨어요? 다른 아무개 대답한다. 어제 영어 학원 갔다 오느라 책을 못 읽었어요... 클클. 그래도 다들 모임에는 나온단다. 나 대신 누가 심각한 책 한 권을 열심히 읽어주고 요약, 정리, 서평까지 해주니 일단 출석해서 흡수할 건 흡수하자는 얘기다. 하도 사는 게 살벌하니 요즘 얼라들은 학부 때부터 참 겁나게 영악스럽다. 선배같은 사람 하나만 있어도 정말 재미날 거에요... 옹, 네가 드뎌 나란 사람이 내뿜는 독창적 에너지의 희소성에 대해 그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구나! 흐흐. 똑똑한 애들은 많아졌는데 너같은 미친놈들이 음써. 미친놈들이 있어줘야 대학이 대학스러운 건데.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마지막으로 건네고 온 충고는 앞으로를 대비해서 영어 공부를 좀 해두라는 것이었다. 또 선생 티 낸다고 할까봐 네눔이 좋아하는 레이먼드 카버 단편선을 원서로 읽어보고 싶지 않냐고 귀가 솔깃하게 꼬득였다. 시큰둥하고 자신없어 하던 표정에 잠시 뻐꾸기가 날았다. 어쨌거나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라. 그게 젤루 좋아. 대충 살고 있는 주제에 이런 시건방진 충고를 날리고 왔다. 옛날 같았음 나를 향해 지랄 마시라는 냉소를 날렸을 법한 녀석이 이런 충고를 해주는 사람은 선배밖에 없었다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뭐가 녀석의 오만을 꺾어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부드러워진 W의 눈빛에 잠시 속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W와 연루된 모든 사회적 조건과 상황들에 대하여 쌍시옷을 뱉었다. 세상을 다 엎어버린 다음 물 말아 먹고 싶었다.

내숭의 여왕이었던 S가 이것저것 다 내놓아도 무엇 하나 빠질 것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대학 다니던 동안 밥 얻어 먹고 옷 얻어 입고 차 얻어 타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그보다 더 학벌도 좋고 여러모로 조건 좋은 남자랑 새로 시작했다. 영문학을 전공했던 그녀는 부모가 돈을 쥐어주며 어학연수를 다녀오라고 해도 시큰둥한 채 풀XX 다이어트에만 매진하더니 농약을 뿌린 잡초처럼 누렇게 말라갔다. 남자들은 밥을 안 먹어 항상 기운이 없는 그녀의 창백함에 반하고 말없이 새초롬한 그녀의 신비주의에 뻑이 갔다.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살림이나 해가며 사는 현모양처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방은 사놓고 안 입는 옷들로 먼지 구덩이가 된지 오래다. S는 아마 결혼을 해서도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녀는 힘들이지 않고도 남자를 조종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고 그것만을 몸소 실천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재미있고 성격 화끈하기로 유명했던 H는 정체 불명의 한 남자와 속도위반을 내지르며 쥐하고 새만 불러다가 결혼식을 치뤘다. 선생님 앞에서 시험지를 박박 찢어버리며 한 승질하던 그녀의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가끔 노래방에 가면 나는 김현철이 되고 그녀는 이소라가 되어 그대안의 블루를 함께 부르곤 했다. 함께 있으면 즐겁지 않고 못 배길만큼 그야말로 온몸을 던져 웃겨주던 밝고 착한 그녀였는데. 몇 년 전만해도 할머니로부터 꼭 부잣집 장남한테 시집 가란 소리를 들었다며 깔깔거리던 그녀가 어쨌든 부리나케 결혼을 했고 현재 임신 중이다. 겁나먼 인생, 누가 더 잘 살았다고 하는 건 끝까지 가봐야 아는 거겠지만 아... 그래도 이 밤 왠지 심란한 건 어쩔 수 없다. 

얼마전에 anger management에 대한 글을 썼는데 요즘 나는 뭔가에 잔뜩 화가 나 있는 사람같다. 인생이 내가 예상했던 방향대로 흘러가주질 않는다. 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게 막막하고 힘든건지. 주로 나같은 인간 유형들이 사서 고생하는 스탈이란 말인가. 그냥 생각 없이 남들 가는 방향대로 따라가줘야 하는걸까. 모순과 위선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세상 안에서 어떻게 아무 생각 없이 시류에 심신을 맡긴 채 평화롭게 살 수가 있는거냐고. 다들 생각이 있긴 있는데 그냥 대충 모른 척 하고 사는건가. 사람들 꿈은 여러갠데 왜 하나로 보일까. 왜 젊은 사람들은 하루 빨리 늙어버리지 않으면 사는 게 점점 힘들어지는 걸까. 나란 사람, 뭔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 하에 손익을 따져 결정할 수 있을까. 왜 젊고 뜨겁고 물불을 가리지 않던 그들이 그렇게 김 빠진 맥주처럼 변해버리고, 누구보다 대접 받을  자격이 있고 성품이 훌륭한 그들이 고생을 자처하게 되는 것일까. 요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이 청춘의 시기가 다 해야, 실수로든 고의로든 뭔가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지긋지긋한 깨달음, 지나고 나면 아무런 소용도 없을 깨달음 하나가 삐죽이 얼굴을 내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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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1-22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함. 나도 그런 얼라들 좋아라하는데, 아무 것도, 목표의식도 없이, 그냥 하라는대로 공부만 하는 범생이(그때의 나)보다야 자기주체성있는 그런 얼라들. 자기가 원하는게 뭔지 확실하게 아는 얼라들. 홧팅.

깐따삐야 2006-01-23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는 자의식이 있는 인간덜은 고생을 바가지로 하는 시스템으로 점점 굳혀져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구만 없지 고문인 셈이죠. 짱나요. 증말.

blowup 2006-01-24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싹수가 분명한 녀석들이 이쁘죠. 아주 오래 전 교생 실습을 나갔던 적이 있는데, 그때 알아버렸어요. 내가 어떤 녀석들을 편애할지.

깐따삐야 2006-01-24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大공감이에요.
 

웨딩 싱어의 아담 샌들러와 잭 니콜슨이 주연으로 나왔던 '성질 죽이기(Anger Management)'란 영화가 있었다. 같이 보았던 사람과 계속 킬킬대며 재미있게 본 코믹 영화였다. 어리버리한 양과 교활한 늑대처럼 보이던 두 사람. 과연 사람의 분노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전문가와 프로그램이 있어 도움을 받는다면 멋진 사람으로 거듭나고 삶도 더 행복해질까?

내 친구 H는 약 일 년 동안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좀 고집이 있긴 해도 온순하고 너그러운데다 겉으로 보기에 보통 사람과 하등 다를 바가 없기에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 놀랐다. 요즘 아무리 정신과 진료가 일반화 되어가고 있다고는 해도 어쨌든 일 년 동안이나 꾸준히 정신과에 드나들었다는 건 흔히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에 속으로 삭이던 것이 한 번에 폭발하면 주체할 수 없기에, 한 마디로 꼭지가 홱 돌아가 버리기에 그런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진료 과정은 어떠했냐는 나의 질문에 H는  "의사도 삽질하고 앉았드라구."라고 말하며 싱겁게 웃어버렸다. H는 원체 그런 사람이긴 하다. 분명히 화를 낼 상황인데도 꿈쩍도 않고 침묵한다. 화를 낼 줄 몰라서라기 보다는 화를 내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판단이 앞서는 것이다. 사실 대개의 사람들도 알고 있다. 화를 내어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그래도 소용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일단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순간 몰려드는 분노의 에너지로 온몸이 뜨끈뜨끈해지다 보면 소리를 지르거나 거친 몸짓부터 앞서기 마련이다. 그런데 H는 "이미 머리가 돌처럼 굳어버린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아."라고 체념한 다음 어떠한 반격도 가하지 않는다. 남들은 그런 그에게 의젓하고 참을성이 많다고, 흔들림 없고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말할테지만 H는 혼자 외롭게 일 년 동안 정신과에 드나들며 의사가 삽질하는 소리에 의지했던 것이다. 어느 날 밤 모두가 잠든 사이 머리 꼭지가 홱 돌아버려서 말이다. 프로이드가 짚어낸 것처럼 내가 아는 그는 H란 사람 전체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걸까. 아무튼 나는 H가 이런 고백을 해온 이후로 그의 입 밖으로 간간히 삐져 나오는 썅, 이란 소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고 귀가 찢어질만큼 사운드가 요란한 음악을 함께 들을 때면 H의 눈빛을 자세히 한 번 들여다보고 싶기도 했다. 너한테도 작은 구멍 쯤 하나 있으련만.

H와는 달리 나는 화가 나면 그 분노를 다 소진할 때까지 난리를 치는 타입이다. 작고 사소한 것 쯤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는 그와는 달리 나는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나를 열받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대충 넘어가질 못하는 성격이다. 그다지 대범하지 못하기에 나에게 그냥 지나쳐도 좋을 사소한 것이란 없다. 이 세상엔 왜 그렇게 화가 나는 일이 많은건지. 계획이 변경되어서 두 번 결재를 받아야 할 일이 생겨도 화가 나고 나는 열심히 수업하는데 아이들이 떠들고 있어도 화가 나고 된장찌개에 들어있는 두부가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도 화가 나고 운동화끈의 남는 길이가 차이가 나도 화가 나고 뽑아든 번호표가 너무 뒷번호여도 화가 난다. 엄마는 이런 날 보시고 항상 "아직 수양이 덜 됐다"고 말씀하신다. 확실히 그렇다. 내 신경선은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더 짧은 건지 어떤 상황에서든 남들보다 더 빠르게 흥분하고 빠르게 분노하고 빠르게 식어버린다. 가끔 사람이라도 몇 잡을듯 방방 뛰며 난리를 치다가도 한 오 분 쯤 지나면 다시 생글거리며 평소 모습으로 돌아오는 나를 보면 나 스스로 봐도 미친 게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된다. 스스로는 이런 자신을 가리켜 "뒤끝도 없고 얼마나 좋아" 억지로 합리화를 시켜보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은 편안히 배겨내질 못하는 것이다. 사랑니 진료 때문에 대학 병원에 드나들고 있는 요즘 치과 옆 복도에 있는 신경정신과 진료실만 보면 눈을 떼지 못하는 것도 다 이러한 나름의 이유에서다. 너무 오래 참았다 한꺼번에 터뜨리는 H나 너무 참지를 못해서 인생 자체가 소방훈련 같은 나나 다들 문제성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면 항상 너무 많은 기대가 너무 많은 분노를 불러오는 지도 모른다. 사람들에 대해 일찌감치 체념 모드로 전환한 채 일견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H도 누군가 말하지 않아도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 아무런 기대가 없다면 무엇인가가 속에서 곪아터지고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어른의 언어만 사용하고 있을 뿐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거슬리는 것을 보았을 때 흥분하고 분노하는 나도 나를 알아 달라고, 이해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간단히 너와 나는 다르다, 고 넘겨 버리는 사람에 비해 우리는 지나치리만큼 인간들에게 의지하고 매달리고 있다. 화를 통제하기보다는 대개의 상황에서 화 자체가 어느 수위 이상까지 넘치지 않는 사람들은 그만큼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셈이다. 사실 H나 나보다 훨씬 더 강하고 고집 있는 사람들일지도.

새해에 들어와서도 나는 몇 차례나 화를 냈다. 화를 내놓고 별것도 아닌데 그냥 가볍게 농담으로 넘길걸 하는 후회를 여러번 했다. 가끔 그럴 때도 있는데 컨디션이 안좋거나 기분이 다운되어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곧잘 흥분하곤 한다. 케릭터 중에 얼굴이 주전자인 깡통로봇이 있다. 나는 그 로봇을 보면 나를 보는 것 같다. 입구로 김을 뿡뿡 뿜어가며 자기 표현을 한다. 나는 곧 주전자다. 흐흐. 어쨌든 올해는 새로운 계획 하나를 세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화내지 않을 것. 아이들에게도 엄격한 모습을 보이되 절대 먼저 흥분하지 말 것. 화를 내서 해결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게 있었다면 나는 지금쯤 최고의 해결사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과연 잘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몸 속에서 마그네슘이 빠져 나가는 스트레스로 또 다시 병원에 드나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그렇고 웃는 얼굴이 가장 예쁘다.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자. 사람들은 다들 조금씩 부족하고 다들 조금씩 힘들고 다들 조금씩 바쁘다.  

어이, 거기. 정말 정신과 진료 받고 싶지 않음 잘하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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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반가운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낯선 번호가 떠서 궁금해 하며 받아보니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 K였다. 2년 전에 그녀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서울의 지하철역에 있었다. 낯선 도시에 와서 7년 전에 헤어졌던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는다는 것이 하도 반갑고도 얼떨떨해서 그 날의 통화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내 메모리에 고스란히 저장되었다. 그 때도 겨울이었는데 그 겨울 이후로 오늘이 처음인 셈이다.

이제 근무 중에 회사 전화를 마음대로 써도 좋고 메신저를 켜놓고 일해도 터치 하는 일이 없고 주말에는 당근 쉬어주어야 할만큼 그녀의 위치는 좋아져 있었다. 물론 이만큼 자리를 잡기까지 주말도 없이 3교대로 일을 하는 등 그녀에게도 힘든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진득한 성품답게 한 회사에 오래 성실히 머무른 덕분에 이제는 능력도 인정 받고 여유를 찾은 것 같았다. 착한 그녀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에 진심으로 기뻤다.

구슬같은 눈에 웃을 때마다 귀엽게 보조개가 패이던 그녀는 남자 아이들 서넛은 너끈히 때려 눕힐만큼 체격 조건이 좋다는 점, 선생님이 판서하신 내용을 가장 빨리 옮겨 쓰고 동글동글한 글씨체가 비슷하다는 점, 맛있는 음식 앞에선 식구도 몰라볼 정도로 사족을 못 쓴다는 점 등에서 나와 확실히 통하는 면이 있어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우리는 운동회 때만 되면 짧은 하얀색 반바지를 입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함께 고민했고 남자 아이와 싸움이 붙으면 서로 편을 들어주다가 놀이터같은 곳에서 급작스런 기습을 당할 때도 있었다.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본래 성품이 착하고 여리던 그녀는 전적으로 나와 어울리게 되면서 남자 아이들의 공격 대상이 된 것 뿐이었기에 솔직히 미안했다. 가끔 학교와 집이 가까웠던 그녀의 집에 놀러가면 어머니께서 강된장을 만들어 주셔서 밥을 먹곤 했는데 정말이지 K네 집 장맛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잊을만큼 맛이 기가 막혔다. 나는 그녀로부터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을 전수받아 들었고 그녀는 나로부터 읽을만한 책들을 빌려가거나 소개받곤 했다. 그리고 방학이 되면 예쁜 편지지 세트를 사거나 혹은 맨 종이에 직접 그림을 그려가며 부지런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지금도 잘 뒤져보면 편지 몇 통 쯤은 나올법하다.

물론 우리 사이가 늘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언제였더라, 아무튼 나는 내 짝궁 J를 몹시 미워했더랬다. 다른 남자 아이들처럼 나를 심하게 괴롭히는 것도 아니었고 대개는 조용한 편이었던 그 애를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참 이래저래 싸가지가 없던 나는 담임 선생님께 자리 교체를 요구했고 다행히 반 아이들도 찬성을 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조성되어 드디어 자리를 바꾸게 되었다. J 이후에 누구와 짝이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나는 그냥 J만 아니면 된다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연히 J와 짝이 된 K. 언제부터인가 이들의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둘이 뭐가 그렇게 즐거울까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재수 없는 J와 단짝 K가 친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도 싫었다. 이 세상에 둘도 없을만큼 유치했던 나는 아예 대놓고 두 사람으로부터 쌀쌀맞게 멀어져갔다. 오냐, 그래. 잘 먹고 잘 살어랏. 하지만 K는 나를 어려워 하면서도 변함없는 친절로 대해 주었고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우리 둘은 예전처럼 꽤 잘 지냈다. 변덕스럽고 예민하던 나를 그녀는 항상 귀여운 보조개 띤 웃음으로 반겨주곤 했다.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점점 더 욕심꾸러기가 되어가던 나와 왠일인지 자꾸 시니컬해지던 그녀는 다소 멀어진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를 반겼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서로 다른 진로를 택한 우리는 각각 다른 도시로 떠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는 편이었다. 무엇 하나 그냥 넘길 줄을 몰랐다. 지금은 무엇 하나 똑부러지게 걸고 넘어가는 일이 없으면서 그 때는 왜 그렇게 똑똑 부러졌는지. 아무튼 그래서 그런지 먼저 연락을 해오는 친구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부터 앞선다. 마음이 좋은 친구들은 잊었을지 모르지만 상처주는 말을 했던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말들이 많다. 어린 아이들끼리 잘못을 했으면 얼마나 했을 거라고 거기다 대고 그런 심한 말을 쏟아부었는지, 상상만 해도 나 자신이 참 싫어진다. 그런데도 나의 착한 친구들은 나를 좋은 모습으로만 기억해준다. 그 때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다 보면 나는 저절로 얼굴이 빨개지는 에피소드가 숱한데 친구들은 그런 것은 다 빼고 나도 잘 기억해내지 못하는 나의 멋진 모습들만  기억했다가 알려주곤 한다. 늘 내 이름 석자만 대면 치를 떨던 남자 녀석들조차 말이다. 참 민망하고 미안하고 고맙고 그렇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대화에 어색함이나 막힘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철없던 시절을 함께 공유한 어릴적 친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참 오랜만에 한껏 들뜬 목소리로 누군가와 신나는 대화를 해 본 것 같다. 조만간 가까운 곳에서 K를 한 번 보기로 했다. 지금 공근이라는 남동생도 같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짝달막한 몸집에 머리카락이니 눈썹이니 숯검댕만큼 새카맣던 녀석이 이젠 신장 180에 가까운 어른 남자가 되었다니 어찌 궁금하지 않을쏘냐. 연년생인 누나한테 혼나고서 참 잘도 울더니만. 울고 나서는 꼭 자기 누나를 때리고 그러다가 엄마한테 다시 혼나고. 그 귀엽던 얼라가 누나가 늦게 들어오면 마치 오빠처럼 깐깐히 구는 어른이 되었다니 우리를 지나쳐 간 세월이 새삼 놀랍다.

벌써 결혼을 한 친구들은 어째 만나는 일이 쉽지가 않다. 아직 미혼으로 남아 있는 우리들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지 모르겠다. 머하느라 이렇게 나이만 잔뜩 먹었는지. 더 나이 먹고 아이까지 생기기 전에 그리운 친구들을 만나야겠다. 친구들을 보면 내가 정말 내가 될 것 같다. 아무도 아닌 바로 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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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열할 곳이 마땅치 않아 안방 구석 자리에 박스 채 모셔둔 책들이 있었다. 이번에 동네 과일가게 주인 부부에게 텔레비전을 주면서 텔레비전이 짓누르고 있었던 박스 두 개가 몸체를 드러냈다. 2년 전에 이 곳으로 발령을 받아 이사온 뒤로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박스였다. 몇 개 안되는 책꽂이와 책장들은 포화 상태인데다가 박스 안에 들어있는 책들의 종류도 대개는 다시 꺼내보기 싫은 전공책들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늘 그 박스를 개봉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갑자기 열어보고 싶은 마음에 이끌려서.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박스 두 개에는 역시 대학 때 보던 전공 도서와 이런저런 자료를 모아둔 바인더들로 가득했다. 세상에 내가 이런 어려운 책들을 봤단 말야. 깨알같은 영문으로 빼곡히 채워진 페이지마다 내가 공부한 흔적이 여기저기 발견되었다. 바인더에는 시험에 관한 자료부터 전공과 관련된 신문기사 스크랩까지 꼼꼼하고도 착실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세상에 내가 이렇게 성실했단 말야. 그야말로 놀랄 노자였다. 좀 심각해 보이는 책을 한 권 골라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문제를 한 번 풀어봤다. 맞힌 걸로 표시되어 있는데 나는 내가 왜 그 문제를 맞혔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쩐 일인지 그 단어가 알듯말듯 영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갑자기 가슴이 갑갑했다. 세상에 내가 이렇게 멍청해졌단 말야...

사회에 나온 후로는 공부와는 꾸준히 담을 쌓아온 것 같다. 그래도 하던 장단은 있어서 가끔 신문 쪼가리도 좀 읽어주고 원서로 나온 어린이용 도서도 찾아보곤 했지만 무언가 절실함이 부족해서일까. 예전에는 단어 하나의 뜻이라도 모르고 지나치면 영 찝찝해서 자다가 일어나서도 사전을 찾아보곤 했는데 요즘은 모르는 단어는 술렁술렁 패스, 한 다음 대충 글의 요지만 파악하고 만다. 혹시 입이 굳을까봐 거울을 보고 미친년처럼 중얼거리던 현상도 사라진지 오래다. 우리말로 내 생각을 표현하기도 귀찮은데 다른 나라 말로 내 의견을 얘기하라니 귀찮아. 된장.

내 인생에 언젠가 밤을 하얗게 새우면서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는다. 숱한 분량의 번역과 레포트 과제를 하느라 항상 머리와 눈과 손가락이 피로에 절어 있던 당시에는 늘상 피로가 몸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러한 빠듯함 속에는 오묘한 행복같은 것이 있었다. 학교 생활에 지치다 보면 한 며칠만 먹고 자고 뒹굴고 해가면서 푹 쉬어봤음 좋겠다, 라고 생각이 들지만 하루 정도 놀고 나면 다시금 빡빡한 일상이 그리워지곤 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발견하고 깨닫는 앎의 즐거움과 반드시 어느 경지에 오르고야 말겠다는 성취욕이 심신을 충만하게 해서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고 잠을 자지 않아도 졸립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곤 했다. 꿈 앞에 서면 왠지 두려웠고 언제나 나보다 백 배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 앞에서 기가 죽었지만 나름대로 긴장의 끊을 놓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던 참 열심히 살았던 그 때 그 시절이다.

요 근래에 친구가 오랫동안 준비해 오던 시험에서 낙방했다. 내가 사회에 먼저 나오게 된 이후로는 연락을 자주 못하며 지냈지만 언제나 마음으로 응원을 보냈던 친구다. 다소 건조하다 싶은 성품에 우아하고 도도한 매력이 있던 그녀는 전혀 상반되는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뭔가 아찔하게 통하는 면이 있었다. 학교 벤치에서, 도서관 계단에서, 카페테리아에서, 팥빙수 집에서, 우리의 수다는 언제나 Never-ending story였다. 김영하의 소설들을 좋아하고 자줏빛 띄는 붉은색을 잘 소화해내던 그녀. 나란히 서면 나의 아름다운 누나 같았던 그녀가 앞으로 일 년을 더 고생하게 생겼다. 시험에 합격해서 겨울에 만나자는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되었지만 총명하고 속이 깊은 그녀이니 언젠가는 잘 되리라 믿는다. 시험이란 그런 것 같다. 실력도 중요하고 노력도 중요하지만 운도 무시할 수는 없다. 운 자체가 시험의 당락에 엄청난 변수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느만치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부디 그녀의 노력에 좋은 기운이 보태어지길 빈다.

방학이 되고나서 더더욱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나지만 그 친구를 생각해도 그렇고 오래된 책들을 들춰봐도 그렇고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한다고 요즘 너무 퍼져 지낸다. 마치 내 인생의 목표는 여기까지인 것처럼. 물론 요즘 건강 상의 이유로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지만 어제 세상의 이런 일이, 라는 프로그램을 보니 온몸이 굳어가는 병에 걸려 누운 채로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는 아저씨를 보니 나는 건강해도 너무 건강한 편이었다. 휠체어 한 번 타 보는 게 소원이라니 두 발로 걸어다니면서 인생이 이렇다, 저렇다 불평하는 자들은 싹 다 고개 숙여야 할 형편이었다. 나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요즘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구절이 자꾸 마음에 맴돈다. 언제나 많은 것들을 찾아 헤매도 결국 귀결점으로 택하는 것은 늘 그 말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고 그 안에서 할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는 것. 하루하루 내 앞에 배당받은 과제물과 시험 공부로 하루 24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랐던, 피곤했지만 매일매일의 성취감에 뿌듯했던 그 순간이야말로 내가 가장 싱싱하게 살아 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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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볼에 눈깔사탕이라도 물고 있는 것 같다.

쟁쟁거리며 돌아가던 기계음 소리는 분명 공포스러웠지만 수술 내내 간호사와 재미있는 영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긴장을 풀어주시던 센스 있는 의사샘 덕분에 모든 것이 예상보다 빨리 끝난 것 같았다.

어젯밤의 고통 이후 오늘은 그래도 살만해졌다.

볼따구가 좀 부었을 뿐 말도 다 하고 밥도 다 먹고, 어쨌든 뽑고 나니 후련하다.

사랑니가 회복되면 충치 치료도 해가며 평소에 치아 관리에 신경 좀 써야겠다.

병원은 모니모니해도 치과 병원이 가장 무서우니까 미리미리 신경 써서 될 수 있으면 안 가는 방향으로 노력해야한다.

생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참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생살을 뚫고 나와서 생으로 뽑아야 하는 사랑니를 비롯해서 생으로 헤어져야 하는 생이별까지.

무엇이든지 이미 썩을대로 썩어서 자리에서 이탈해 들썩거리는 것을 제거하는 것은 참 쉽다.

하지만 여전히 딴딴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을 도구와 힘을 이용해, 한 마디로 무력을 이용해 제거하는 것은 참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살면서 이런 일이 많지 않았으면 하고 바래본다. 고통은 지나가는 거라지만. 그래도.

2월 초순에 아이들과 함께 일본 여행을 갈 것 같다.

오늘 여권을 신청했다.

사랑니 때문에 제주도도 못 가고 아쉬웠는데 방학이 끝날 무렵 아이들 덕분에 호사하게 생겼다.

붓기가 가라앉고 몸이 회복되는 대로 못 만났던 사람들도 만나고 좀 활기차게 살아야겠다.

이제 제발 여기저기 그만 아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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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1-11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에 사랑니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꽤 있네요. 흠.

깐따삐야 2006-01-11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대로 올라오면 상관 없는데 일단 이눔의 사랑니가 드러눕기 시작하면 진짜 고생인거죠.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