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발레교습소'를 봤다. 2004년작인데 못 보고 지나간 영화였다. 2004년도에 난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을까. 졸업을 하고 발령을 받고 오전에는 출근을 하고 오후에는 퇴근을 하며 지냈던 것 같다. 자주 감기에 걸렸고 가끔 몸살에 시달렸고 교감 선생님과 아이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었던 한 해였다. 눈물 젖은 밥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 했던가. 경험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먹는 일은 참 힘들다. 머리는 띵하니 아프고 입술은 뜨겁게 부어오르고 목구멍은 평소보다 좁아진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기 위해 밥을 밀어넣어야 한다. 무게감이 느껴질만큼 굵다란 눈물방울이 밥 속으로 뚝뚝 떨어지고 입술과 함께 부어오르는 콧 속으로 찌걱대는 콧물. 된장! 2004년에 난 가끔 그 짓을 했다. 싸나이 마인드를 지니고 사는 사람답게 우는 게 창피해서 아무도 안 볼 때 몰래. 겉으로 보기엔 발랄하고 씩씩했지만 내면의 삶은 신파 그 자체였다.
2004년.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대개 남자친구와 같이 보았을 것이고 남자친구는 미묘하게 감정의 결을 건드리는 영화를 함께 보길 원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건 나도 그랬다. 이 영화는 코메디도 아니고 액션도 아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보고 싶은 영화 목록에서 제외당했다. 사실 나는 이런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고 있지만 말이다. 앞으로 나는 이런 영화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과 사귀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 나 흔들렸어. 그래, 나 눈물도 난다. 그래, 나 지금은 웃기 싫고 진지하고 싶거든. 그래도 뻘쭘하지 않을 사람. 그러나 오늘은 2004년도에 대한 이야기나 발레교습소란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청춘에 대해 끄적이고 싶었다. 내 주변의 청춘들. 아름답지만 가엾은 그대들. 그리고 이제 점점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진 채 아둥바둥 돈 좋아, 명예 좋아, 하면서 살고 있는 청춘 언저리의 아무개들.
친척 동생인 Y는 이번에 수능을 쳤다. 내가 학부생 때 부모들마저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린 그녀를 반 년 정도 가르쳤었다. 난 좀 이상한 게 그런 종류의 얼라들이 참 좋다. 마구 끌려버린다. 부모 말 드럽게 안 듣고 자기 세계가 너무 뚜렷해서 난 아무하고도 말이 통하지 않아, 라는 식의 시니컬한 표정을 하고 있는 얼라들 말이다. 가까운 거리에서 본 Y는 재미있는 아이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포청천 눈썹에 안경을 벗고 대충 보면 언뜻 신민아처럼 보이기도 하는 집안의 왕싸가지였던 그녀. 공부를 봐주러 가면 비스켓을 아삭아삭 씹으며 학교의 이상한 쌤들을 비판하고 그녀만큼이나 별나 보이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쏟아내다가 고작 두 문제 풀고 오늘 공부는 그만~ 하고 외치던. 그리고는 "언니는 나중에 분명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하고 말거야, 순진해 가지고는~" 이 따위 언사를 과감하게 내뱉던. 나는 그런 그녀가 귀여웠고 당차고 똑똑한만큼 제 앞가림은 하고 살테니 크게 걱정하지 마시라고 부모를 안심시켰다. 그랬던 그녀도 대학 입시 앞에서는 예민해졌다. 수능 100일전에 불안하다는 메시지를 송신해왔던 그녀가 요즘은 제 방에 꽁꽁 틀어박혀 두문불출이란다. 그 소식을 듣고 난 또 우리나라가 싫어졌다. 정말 비호감이야. 귀여운 그녀를 우울하게 하다니. 썩을, 망할, 오 쉣!
(감정 자제하고 이어서 쓰자......)
얼마전에 만난 후배 W는 한 마디로 골때리는 녀석이었다. 복학을 했던 나와 첫대면을 한 녀석은 시력이 안좋은 건지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내가 무슨 말만 하면 허옇게 야려보길 즐겼다. 저보다 백만스물두배는 잘난 현존 작가들의 작품을 싸그리 무시했으며 선배는 어떻게 그토록 뻔한 생각밖에 못하냐고 나의 걸출한 사고력을 단번에 짓밟곤 했다. 아무도 못 알아듣는 시를 써와가지고는 그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선배들을 답답해하며 천재인 척 하는 것도 심히 못마땅했다. 후배 품귀 현상을 겪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서 어떻게든 승질을 참아보려 했으나 그다지 오래 참는 것에 익숙치 않은 나는 번번히 볼썽사납게 폭발하기 일쑤였고 녀석은 뭐든지 익숙해지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나의 지랄을 의연하게 패스, 하고 있었다. 참으로 짜증나는 것은 역시 변태스러운 나의 취향 탓에 매일 싸가지를 집에다 쑤셔박고 오는 녀석을 속으로 많이 귀여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유 있는 반항은 신선했고 손해를 보더라도 미움을 받더라도 할 말은 하고야 말겠다는 고집이 앞만 보고 달리느라 밍숭맹숭해진 선배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아무튼 싸우면서 정든다는 말이 맞는 건지 졸업하고나서 학부 시절의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일이 뜸해지던 동안에도 녀석과는 용케도 꾸준히 연락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에 그 녀석을 만났다. 무사히 공근 생활을 마치고 복학을 했던 W는 여드름이 많이 가라앉고 그 사이 키도 자란 것 같았다. 므하핫. 얼라들의 성장을 보는 기쁨이 이런 것인지. 나한테 선생티가 좔좔 흐른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선뜻 악수하자고 손을 내미는 녀석은 이제 더 이상 그까짓 얼라가 아니었다.
우리가 간 술집 이름은 '체 게바라'였다. 가게 유리창에는 깜찍한 엽서로 화한 체 게바라가 인물 자랑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체 게바라 평전'을 읽었고 둘 다 그저 그랬다고 말하며 함께 웃었다. W는 요즘 취업이 어려워서인지 이제 교수들도 학점 가지고 횡포를 부리는 일이 줄어들었다면서 처음으로 4.0을 넘겼다고 말했다. 요즘은 다들 너무나 열심히 해서 그 학점으로도 장학금을 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방학 중에도 지인들을 모아 독서 클럽을 운영 중인데 마치 교수가 되어 지루한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 것처럼 모임 때마다 매번 혼자서만 열을 내는 것 같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W가 공들여 서평한다. 나머지 학생들은 듣는다. W가 묻는다. 아무개씨, 의견은 어떻습니까? 아무개 대답한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아무개에게 묻는다. 어떻게 읽으셨어요? 다른 아무개 대답한다. 어제 영어 학원 갔다 오느라 책을 못 읽었어요... 클클. 그래도 다들 모임에는 나온단다. 나 대신 누가 심각한 책 한 권을 열심히 읽어주고 요약, 정리, 서평까지 해주니 일단 출석해서 흡수할 건 흡수하자는 얘기다. 하도 사는 게 살벌하니 요즘 얼라들은 학부 때부터 참 겁나게 영악스럽다. 선배같은 사람 하나만 있어도 정말 재미날 거에요... 옹, 네가 드뎌 나란 사람이 내뿜는 독창적 에너지의 희소성에 대해 그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구나! 흐흐. 똑똑한 애들은 많아졌는데 너같은 미친놈들이 음써. 미친놈들이 있어줘야 대학이 대학스러운 건데.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마지막으로 건네고 온 충고는 앞으로를 대비해서 영어 공부를 좀 해두라는 것이었다. 또 선생 티 낸다고 할까봐 네눔이 좋아하는 레이먼드 카버 단편선을 원서로 읽어보고 싶지 않냐고 귀가 솔깃하게 꼬득였다. 시큰둥하고 자신없어 하던 표정에 잠시 뻐꾸기가 날았다. 어쨌거나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라. 그게 젤루 좋아. 대충 살고 있는 주제에 이런 시건방진 충고를 날리고 왔다. 옛날 같았음 나를 향해 지랄 마시라는 냉소를 날렸을 법한 녀석이 이런 충고를 해주는 사람은 선배밖에 없었다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뭐가 녀석의 오만을 꺾어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부드러워진 W의 눈빛에 잠시 속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W와 연루된 모든 사회적 조건과 상황들에 대하여 쌍시옷을 뱉었다. 세상을 다 엎어버린 다음 물 말아 먹고 싶었다.
내숭의 여왕이었던 S가 이것저것 다 내놓아도 무엇 하나 빠질 것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대학 다니던 동안 밥 얻어 먹고 옷 얻어 입고 차 얻어 타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그보다 더 학벌도 좋고 여러모로 조건 좋은 남자랑 새로 시작했다. 영문학을 전공했던 그녀는 부모가 돈을 쥐어주며 어학연수를 다녀오라고 해도 시큰둥한 채 풀XX 다이어트에만 매진하더니 농약을 뿌린 잡초처럼 누렇게 말라갔다. 남자들은 밥을 안 먹어 항상 기운이 없는 그녀의 창백함에 반하고 말없이 새초롬한 그녀의 신비주의에 뻑이 갔다.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살림이나 해가며 사는 현모양처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방은 사놓고 안 입는 옷들로 먼지 구덩이가 된지 오래다. S는 아마 결혼을 해서도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녀는 힘들이지 않고도 남자를 조종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고 그것만을 몸소 실천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재미있고 성격 화끈하기로 유명했던 H는 정체 불명의 한 남자와 속도위반을 내지르며 쥐하고 새만 불러다가 결혼식을 치뤘다. 선생님 앞에서 시험지를 박박 찢어버리며 한 승질하던 그녀의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가끔 노래방에 가면 나는 김현철이 되고 그녀는 이소라가 되어 그대안의 블루를 함께 부르곤 했다. 함께 있으면 즐겁지 않고 못 배길만큼 그야말로 온몸을 던져 웃겨주던 밝고 착한 그녀였는데. 몇 년 전만해도 할머니로부터 꼭 부잣집 장남한테 시집 가란 소리를 들었다며 깔깔거리던 그녀가 어쨌든 부리나케 결혼을 했고 현재 임신 중이다. 겁나먼 인생, 누가 더 잘 살았다고 하는 건 끝까지 가봐야 아는 거겠지만 아... 그래도 이 밤 왠지 심란한 건 어쩔 수 없다.
얼마전에 anger management에 대한 글을 썼는데 요즘 나는 뭔가에 잔뜩 화가 나 있는 사람같다. 인생이 내가 예상했던 방향대로 흘러가주질 않는다. 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게 막막하고 힘든건지. 주로 나같은 인간 유형들이 사서 고생하는 스탈이란 말인가. 그냥 생각 없이 남들 가는 방향대로 따라가줘야 하는걸까. 모순과 위선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세상 안에서 어떻게 아무 생각 없이 시류에 심신을 맡긴 채 평화롭게 살 수가 있는거냐고. 다들 생각이 있긴 있는데 그냥 대충 모른 척 하고 사는건가. 사람들 꿈은 여러갠데 왜 하나로 보일까. 왜 젊은 사람들은 하루 빨리 늙어버리지 않으면 사는 게 점점 힘들어지는 걸까. 나란 사람, 뭔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 하에 손익을 따져 결정할 수 있을까. 왜 젊고 뜨겁고 물불을 가리지 않던 그들이 그렇게 김 빠진 맥주처럼 변해버리고, 누구보다 대접 받을 자격이 있고 성품이 훌륭한 그들이 고생을 자처하게 되는 것일까. 요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이 청춘의 시기가 다 해야, 실수로든 고의로든 뭔가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지긋지긋한 깨달음, 지나고 나면 아무런 소용도 없을 깨달음 하나가 삐죽이 얼굴을 내밀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