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딩 싱어의 아담 샌들러와 잭 니콜슨이 주연으로 나왔던 '성질 죽이기(Anger Management)'란 영화가 있었다. 같이 보았던 사람과 계속 킬킬대며 재미있게 본 코믹 영화였다. 어리버리한 양과 교활한 늑대처럼 보이던 두 사람. 과연 사람의 분노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전문가와 프로그램이 있어 도움을 받는다면 멋진 사람으로 거듭나고 삶도 더 행복해질까?

내 친구 H는 약 일 년 동안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좀 고집이 있긴 해도 온순하고 너그러운데다 겉으로 보기에 보통 사람과 하등 다를 바가 없기에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 놀랐다. 요즘 아무리 정신과 진료가 일반화 되어가고 있다고는 해도 어쨌든 일 년 동안이나 꾸준히 정신과에 드나들었다는 건 흔히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에 속으로 삭이던 것이 한 번에 폭발하면 주체할 수 없기에, 한 마디로 꼭지가 홱 돌아가 버리기에 그런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진료 과정은 어떠했냐는 나의 질문에 H는  "의사도 삽질하고 앉았드라구."라고 말하며 싱겁게 웃어버렸다. H는 원체 그런 사람이긴 하다. 분명히 화를 낼 상황인데도 꿈쩍도 않고 침묵한다. 화를 낼 줄 몰라서라기 보다는 화를 내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판단이 앞서는 것이다. 사실 대개의 사람들도 알고 있다. 화를 내어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그래도 소용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일단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순간 몰려드는 분노의 에너지로 온몸이 뜨끈뜨끈해지다 보면 소리를 지르거나 거친 몸짓부터 앞서기 마련이다. 그런데 H는 "이미 머리가 돌처럼 굳어버린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아."라고 체념한 다음 어떠한 반격도 가하지 않는다. 남들은 그런 그에게 의젓하고 참을성이 많다고, 흔들림 없고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말할테지만 H는 혼자 외롭게 일 년 동안 정신과에 드나들며 의사가 삽질하는 소리에 의지했던 것이다. 어느 날 밤 모두가 잠든 사이 머리 꼭지가 홱 돌아버려서 말이다. 프로이드가 짚어낸 것처럼 내가 아는 그는 H란 사람 전체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걸까. 아무튼 나는 H가 이런 고백을 해온 이후로 그의 입 밖으로 간간히 삐져 나오는 썅, 이란 소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고 귀가 찢어질만큼 사운드가 요란한 음악을 함께 들을 때면 H의 눈빛을 자세히 한 번 들여다보고 싶기도 했다. 너한테도 작은 구멍 쯤 하나 있으련만.

H와는 달리 나는 화가 나면 그 분노를 다 소진할 때까지 난리를 치는 타입이다. 작고 사소한 것 쯤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는 그와는 달리 나는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나를 열받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대충 넘어가질 못하는 성격이다. 그다지 대범하지 못하기에 나에게 그냥 지나쳐도 좋을 사소한 것이란 없다. 이 세상엔 왜 그렇게 화가 나는 일이 많은건지. 계획이 변경되어서 두 번 결재를 받아야 할 일이 생겨도 화가 나고 나는 열심히 수업하는데 아이들이 떠들고 있어도 화가 나고 된장찌개에 들어있는 두부가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도 화가 나고 운동화끈의 남는 길이가 차이가 나도 화가 나고 뽑아든 번호표가 너무 뒷번호여도 화가 난다. 엄마는 이런 날 보시고 항상 "아직 수양이 덜 됐다"고 말씀하신다. 확실히 그렇다. 내 신경선은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더 짧은 건지 어떤 상황에서든 남들보다 더 빠르게 흥분하고 빠르게 분노하고 빠르게 식어버린다. 가끔 사람이라도 몇 잡을듯 방방 뛰며 난리를 치다가도 한 오 분 쯤 지나면 다시 생글거리며 평소 모습으로 돌아오는 나를 보면 나 스스로 봐도 미친 게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된다. 스스로는 이런 자신을 가리켜 "뒤끝도 없고 얼마나 좋아" 억지로 합리화를 시켜보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은 편안히 배겨내질 못하는 것이다. 사랑니 진료 때문에 대학 병원에 드나들고 있는 요즘 치과 옆 복도에 있는 신경정신과 진료실만 보면 눈을 떼지 못하는 것도 다 이러한 나름의 이유에서다. 너무 오래 참았다 한꺼번에 터뜨리는 H나 너무 참지를 못해서 인생 자체가 소방훈련 같은 나나 다들 문제성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면 항상 너무 많은 기대가 너무 많은 분노를 불러오는 지도 모른다. 사람들에 대해 일찌감치 체념 모드로 전환한 채 일견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H도 누군가 말하지 않아도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 아무런 기대가 없다면 무엇인가가 속에서 곪아터지고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어른의 언어만 사용하고 있을 뿐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거슬리는 것을 보았을 때 흥분하고 분노하는 나도 나를 알아 달라고, 이해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간단히 너와 나는 다르다, 고 넘겨 버리는 사람에 비해 우리는 지나치리만큼 인간들에게 의지하고 매달리고 있다. 화를 통제하기보다는 대개의 상황에서 화 자체가 어느 수위 이상까지 넘치지 않는 사람들은 그만큼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셈이다. 사실 H나 나보다 훨씬 더 강하고 고집 있는 사람들일지도.

새해에 들어와서도 나는 몇 차례나 화를 냈다. 화를 내놓고 별것도 아닌데 그냥 가볍게 농담으로 넘길걸 하는 후회를 여러번 했다. 가끔 그럴 때도 있는데 컨디션이 안좋거나 기분이 다운되어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곧잘 흥분하곤 한다. 케릭터 중에 얼굴이 주전자인 깡통로봇이 있다. 나는 그 로봇을 보면 나를 보는 것 같다. 입구로 김을 뿡뿡 뿜어가며 자기 표현을 한다. 나는 곧 주전자다. 흐흐. 어쨌든 올해는 새로운 계획 하나를 세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화내지 않을 것. 아이들에게도 엄격한 모습을 보이되 절대 먼저 흥분하지 말 것. 화를 내서 해결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게 있었다면 나는 지금쯤 최고의 해결사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과연 잘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몸 속에서 마그네슘이 빠져 나가는 스트레스로 또 다시 병원에 드나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그렇고 웃는 얼굴이 가장 예쁘다.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자. 사람들은 다들 조금씩 부족하고 다들 조금씩 힘들고 다들 조금씩 바쁘다.  

어이, 거기. 정말 정신과 진료 받고 싶지 않음 잘하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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