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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바쁜 일상을 꾸려가다 보면 불현듯 이게 아닌데, 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간헐적으로 피어오르는 무료함이나 우울함과는 다른, 좀더 근본적인 낙담 내지 환멸같은 것.
이후 한동안은 온 심신이 물먹은 스펀지처럼 축축하고 무거운 상태로 지속된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보고 싶었던 곳에 가보며 실컷 마음의 호사를 누린다 해도, 그것들로 인해 잠시잠깐 까슬까슬하고 말랑말랑한 심신 상태를 되찾는다 해도, 언젠가 또 다시 엄습해 올 그 느낌에 대해서 마음을 놓지 못하곤 한다.
<키리쿠, 키리쿠>라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갓 열살을 넘긴 외사촌 동생은 우리도 저렇게 살면 참 좋겠지? 라고 물어왔다.
주인공 키리쿠는 아프리카 소수 부족의 어린이다.
키리쿠네 마을 사람들은 손수 파종을 해서 먹거리를 마련하고, 흙을 빚어 만든 그릇을 읍내에 내다팔아 돈을 버는 등, 육체노동을 통한 단순하고 원시적인 삶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집에는 문이 없으며 한 집의 아기를 이 사람이 돌보아 주기도 하고 저 사람이 돌보아 주기도 한다.
그들은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나면 기쁨과 감사의 의미로 모닥불을 피워놓고 춤을 추며 축제를 연다.
<월든>을 다시 읽으며 마치 고갱의 움직이는 그림을 보는 것처럼 화면 가득히 열기와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던 <키리쿠, 키리쿠>를 떠올렸고 어쩌면 내가 원하고 있는 삶도 이런 것이 아니었느냐, 고 조심스럽게 반문해 보는 것이다.
학부시절에 강독했던 <월든>은 <더블린 사람들>이나 <폭풍의 언덕>등 그 시절 청춘의 낮밤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던 다른 책들과 더불어 졸업과 동시에 내 시야에서 멀어져 버렸다.
시험은 코앞인데 굳이 캠퍼스 근처의 산을 오르게 하셨던 어떤 교수님은, 늘상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다보니 급격한 체력저하를 겪으며 헥헥거리고 있던 우리에게 던킨도너츠를 쥐어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아... 여러분, 산에 오르면서 무얼 보았나요?"
나야 물론 입가에 허연 설탕가루를 묻힌 채 교수님 시선을 피하기에 바빴고 눈만 껌뻑이며 묵묵부답이긴 다른 학우들도 매한가지였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교수님은 허둥거리며 내려가는 우리를 멈춰서게 하신 다음 다양한 나무 이름을 알려주셨고 산을 오르는 목적 그 자체보다 과정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교수님다운 말씀을 해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에 와서는 나무 이름은 물론이고 올랐던 산 이름조차 가물가물하고 기억나는 것은 오로지 유인물, 이라는 교수님 별명과 교수님이 우리에게 던졌던 저 질문 뿐이지만, 대놓고 지루해하던 수강생들의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월든>의 문장에 심취해서 창 밖으로 아련한 눈빛을 보내시던 교수님은 분명 이 책을 사랑하셨고 우리를 지도하느라 참 외로우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졸업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 다시 만난 <월든>은 나로 하여금 Simplicity, simplicity, simplicity! 라는 책 속의 외침을 상기시키며 나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2년간 자연과 더불어 동고동락하는 삶을 몸소 보여준 소로우는 누구든 한 번쯤 꿈꾸게 되는 무소유의 삶을 직접 실천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기록을 아름다운 한 권의 책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두 번 훌륭하다.
당대의 엘리트였다는 조건이 그가 선택한 소박한 삶을 더욱 미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한 점이 없지 않지만, 혹자는 언제고 다시 사회로 편입하면 어떤 좋은 자리든 주어질만한 상황이 아니었냐며 비판할 때도 있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당장 코앞에 주어진 부와 명예, 세속적 성공을 포기하고 숲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어떤 것에 대해 말하고 쓰는 일에 비하면 어떤 것을 직접 사는 일은 훨씬 더 어렵고도 모험을 요하는 일이다.
물질과 자본으로 움직이는 현대에도 <월든>이나 헬렌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과 같은 책이 주목받는 것을 보면, 대개 사람들의 진심 속에는 이 갑갑하고 기계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맨손과 맨발이 허용되는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욕구가 내재해 있는가 보다.
나 역시 내 뿌리가 농촌에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란 게 본래 그런 것인지, 밭이랑에 한가득 캐서 모으던 감자라든가, 고추 모종에 주전자로 물을 주던 풍경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누군가를 속이는 일이 될까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봐, 노심초사하는 일 없이 내가 흘린 땀방울만큼 먹거리를 얻고 흘린 땀에 비해 수확량이 적더라도 쓰임새를 줄이면 그만이라고 일갈하며 다음해를 기약하는, 정직하고 엄격한 삶 속에 나를 내맡기고 싶을 때가 있다.
실상 가진 것도 별로 없으면서 그만큼의 가진 것도 버리기가 아깝고도 두려워서 늘 공상만으로 그치는 일이 허다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모른다.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발 벗고 동조해주고 이해해준다면 정말 일을 저질러 버릴지도.
논리나 이성보다는 여전히 직관과 감성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나이기에 전혀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다.
어쩌면 나란 인간은 그때부터 비로소 신나게 살지도 모른다.
<월든>. 오로지 축적하는 데에만 몰두해 있는 현대인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