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시작 즈음해서 공교롭게도 경상남도 쪽을 두 차례나 다녀왔다. 한 번은 교사 동호회에서 남해군 일대를 여행했고 그 다음은 교직원 공동연수로 진주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짭조름한 바닷내음을 맡으며 아나고와 회를 실컷 먹고 온 넉넉한 나들이였다. 고교 시절에 한국지리를 배울 때는 당최 물리적으로는 파악이 되지 않은 채 그 땅에서 나는 광물이나 특산작물을 기억하고 지형에 따른 기후와 토질의 차이까지 비교 암기해야 하는 곤욕이 따랐기에, 지리라면 된통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이처럼 실제로 움직이며 보고 듣고 걷고 먹으니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한반도의 지형과 특색이 눈앞에 환하게 드러나는 느낌이다. 경상도는 나에겐 미지의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학창시절 수학여행 때 잠시 훑고 오긴 했지만 그야말로 훑었을 뿐, 멋쩍은 표정의 단체사진 배경에서나 내가 이런 곳에도 가긴 갔었구나,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대개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 시절의 기억은 추억으로 저장되기 마련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의 수학여행은 빈 괄호처럼 허하고 막막하다. 어쨌든 방학이 다 가기 전에 한 차례 더 국내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장마가 지나고 날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지만 여름은 원래가 더운 법. 떠날 것이다.
운동을 시작했다. 동네에 있는 헬스장에 찾아가 일단 등록부터 해놓고 보니 안 나갈 수가 없다. 돈이 아까워서라기 보다는 이제 하루 한 시간 유산소 운동을 하지 않으면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하고 조마조마하다. 고작 며칠 했다고 운동에 중독이 되었을까마는, 땀을 쫘악 흘리고 난 후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난 다음의 상쾌함에 도취되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평소보다 조금만 무리하면 늘상 찌뿌드드했던 몸도 살짝 가벼워진 느낌이다. 물론 아직까지 몸무게의 변화는 거의 없는데다 가끔 헬스장 아래로 내다뵈는 낭창낭창한 내 또래 아가씨들을 보면 런닝머신 위에서 육수를 흘리며 쿵쾅거리고 있는 내 자신이 참 아니올시다, 라는 느낌도 들지만 뭐, 나는 나인 것이고 내 건강을 위해서 열심히 운동하면 되는 것이다. 시작이 어려웠지, 일단 시작하고 보니 진작에 왜 운동을 안했을까 싶다. 앞으로 꾸준히 해야겠다.
이 동네에서 약 2년 반을 살았는데 조만간 이사를 갈 것 같다. 근처에 명산과 국립공원이 있는 청정마을이었는데 이제 좀더 사람들로 북적이는 근방의 도시로 가서 살게 되었다. 내가 처음 발령을 받고나서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런저런 희비가 엇갈리고 별에별 시행착오를 겪었던 곳인만큼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무엇이든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는 느긋한 인간성과 아이들의 순진하고 솔직한 눈매 또한 그럴 것이다. 사는 곳은 조금 멀어지지만 아직은 이 곳의 학교에 몸담고 있으니 영영 떠나는 것은 아닐진데, 그래도 왠일인지 마음이 헛헛하고 쓸쓸해오는 것은 감정의 오버라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언제든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법, 도시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다른 좋은 것을 선사할 것이다. 아마도 좀더 긴장되고 역동적인 그런 삶.
얼마전 학교로 배달되어 온 백송이 장미를 받으신 동료 여선생님 한 분이 결혼 날짜를 잡으셨다. 만난지 백일째, 지켜보는 사람들 편에선 너무 성급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이것도 너무 늦은 거라구, 라는 말이 나올성 싶은 깨소금 쏟아지는 인연. 이제 새학기가 시작되면 머잖아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란다. 쌍춘년이라 그런가, 올해 상반기엔 결혼식을 참 여러 군데 다녔더랬다. 그런데 하필이면 우리 학교 여인네들은 어찌 된 것인지 나보다 나이도 어린데(하긴,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두 분이나 결혼을 했고, 하게 되었다. 요즘 세태로 보면 이르다 싶은 나이인데도 만났다던 게 엊그제인 것 같은데 결혼한다는 게 오늘이 되버리곤 한다. 서로 얼마나 좋았으면! 그리고는 당사자를 마구 띄워주고 축하해주는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뜬금없이 화살이 나에게 꽂힌다. 그런데 김샘은? 김샘도 결혼해야지. 남자 없어? 슬슬 찾아봐야지 않겠어. 요즘 애들 말로 대략난감이다. 난 어떤 상대를 좋아할 때도 결혼, 이라는 말 앞에선 확 쪼그라들곤 했었다. 진짜 인연을 못 만나서 그렇다고, 진짜 인연을 만나면 작은 키도 커 보이고 작은 눈도 커 보인다는 말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과 결혼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과 실제로 결혼을 해서 결혼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많이 다르지 않을까. 사랑할 준비는 되어 있어도 결혼할 준비는 아직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율배반일까. 행여나 내게 어떤 희망 내지 기대감을 품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을까. 물론 나는 연애지상주의자나 독신주의자는 아니다. 아예 어떤 ~주의라는 것 자체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저 지금은 결혼에 대해서 막연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을 뿐. 다른 사람들 사는 것을 보면 참 좋아 보일 때도 많은데, 좋아 보여도 두려운 건 두렵다.
방학이라서 책을 한꺼번에 여러 권 주문했다. 장르별로 다양한 책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역시 책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점. 재미 이외의 매력으로 독자의 시선과 집중력을 모으는 책은 정말이지 드물다. 두툼한 성경이나 국어사전조차 호기심과 흥미를 끄는 부분은 빠르게 찾고 술술 읽게 마련이다. 언젠가 파워인터뷰란 프로그램에서 영화감독 박찬욱이 류승완, 류승범 형제를 가리켜 진지함과 유쾌함을 동시에 지닌 보기드문 청년들이라고 극찬한 바가 있는데, 좋은 책을 대하는 내 느낌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좋은 책은 진지함과 유쾌함을 동시에 아우르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 두 가지가 한 권의 책 속에 보이지 않게 녹아들어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교합과 길항을 함께 하는 책. 이를테면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이왕주의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라는 책과 같은. 지루한 여름, 그런 책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