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그랜트는 바람둥이일 수는 있어도 결코 악인은 될 수 없는,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을 때는 있어도 절대로 미워할 수는 없는, 고의라면 상당히 단수 높은, 고의가 아니라면 그저 어떤 면에서 행운이랄 수밖에 없는, 그만의 고유한 이미지로 성공한 케이스들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영화 <어바웃 어 보이>는 더도 덜도 말고 딱 휴 그랜트를 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널널한 삶을 구가하는 백수, 정착하기 두려워하는 연애술사,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음에도 곤란한 문제가 닥칠 때마다 멍한 표정으로 갸웃거리기만 하는 미성숙한 이기주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노, 라고 말하지 못할 것만 같은, 노, 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결국 찜찜한 마음을 못 이기고 다시 돌아와 줄것만 같은 주인공 '윌'이 바로 휴 그랜트가 열연하고 있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은 채 솔로 생활을 즐기고 있는 윌은 사랑하다가도 귀찮지 않은 결말로 쿨하게 헤어질 수 있는 상대를 찾던 중, 혼자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들이 적임자라 생각하고 미혼모 클럽에 가입한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상대와 데이트 약속을 하게 된 윌은 상대가 데이트에 데리고 나온 '마커스(니콜라스 호울트 분)'라는 아이와 만나게 되고 공교롭게도 마커스의 집을 방문했을 때 마커스의 엄마가 자살 시도를 한 현장과 맞닥뜨린다. 그 후로 마커스는 학교가 끝날 때마다 윌의 집을 방문해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 하고, 윌은 학교에서는 왕따에 시달리고 집에서는 자신의 속내를 알아주지 않는 엄마로부터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마커스를 내치지 못한 채 점점 함께 하는 시간 속에 익숙해진다. 윌은 마커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최신 나이키 신발을 사주고, 랩 음악을 들려주는 등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새로 만난 연인, 레이첼(레이첼 웨이즈 분)과 이별하고 상처를 입은 윌은 다른 사람의 인생에 도움이 되어주고, 상대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주는 과정에 대해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윌은 결국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엄마를 도와달라는 마커스의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하고, 다시 예전처럼 고독하지만 안정된 섬으로의 생활로 돌아가려 하지만 진심으로 행복했던 순간은 마커스와 함께 보냈던 시간임을 깨닫고 마커스와 그 동안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간다.
내가 이 영화에서 눈여겨 보았던 것은, 휴 그랜트의 여전히 미워할 수 없는 느끼함이나 '미이라'에서부터 '콘스탄트 가드너'까지 어느 영화에서건 빛을 발하는 레이첼 웨이즈의 스마트함, 마커스로 출연하는 아역배우, 니콜라스 호울트의 발칙함보다도, 영화의 흐름 내내 전혀 이상하거나 어색하게 보이지 않는 다양한 삶의 방식, 가족의 형태였다. 결국 이 영화가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적당히 이기적인 삶을 즐기는 솔로들을 질타하고 가족이란 연대에 동참하는 삶을 부추긴다 하더라도, 영화에서 지향하는 가족의 형태가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 마치 그 이상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 곧 노멀함의 범주를 비껴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라보는 폭력적인 시선을 끊임없이 지양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커스의 엄마는 크리스마스에 헤어진 남편과 남편의 애인, 애인의 어머니까지 초대해서 파티를 열고, 마커스는 친구인 윌을 초대해서 이 모든 사람들이 따듯하고 즐거운 식사를 즐긴다. 레이첼은 마커스를 윌의 아들로 오해했고 윌은 나중에 마커스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은 윌의 아빠라고 말한다. 그 애매모호하고 똑 떨어지지 않는 설명에 대해 레이첼은 결국 한 쪽의 오해와 한 쪽의 거짓말이었다,는 그 이상의 해석을 하지 못하고 윌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학교에서 락 축제가 열리던 날, 조롱과 망신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엄마를 위해 준비한 곡, Killing me softly를 부르는 마커스를 위해 기타를 치며 함께 노래를 불러주는 윌을 보고 활짝 웃음을 보인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피가 아니라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야말로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는 곧 그 사회의 반영이라는 말이 있다. 유전자 감식, 친자 확인에 열을 올리며 위기감을 조성시키곤 하는 우리나라 드라마들을 보면 우리 사회의 시선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가족의 범위에 대해 닫혀 있고 보수적인지 실감하곤 한다. 마커스를 낳지도 않았고 마커스의 엄마와 연인 사이도 아니지만 자신이 마커스의 아빠라고 말하는 윌의 입장은 옳다. 언제나 쿨한 인생을 지향하며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 윌이었지만, 친아들이 아니어도 기꺼이 아빠가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선택이야말로 진정으로 쿨한 인생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