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매며

  - 장 석 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뜨겁고 끈적한 여름. 어디선가 서걱이는 눈 냄새가 나는 듯 했던, 충분한 여백마다 쓸쓸함이 배어있던 이 영화를 다시 보고싶었다. 잎이 무성한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서 정원(한석규 분)과 다림(심은하 분)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스크림을 먹던 장면, 서로의 어깨가 비에 다 젖는 줄도 모르고 가까이 몸을 붙이지 못한 채 쑥스러운 폼으로 우산을 나눠쓰고 걷던 모습, 놀이공원에서 다림이 내미는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양손에 받아들고는 멋쩍은 듯한 미소를 짓던 정원, 불이 켜지지 않는 초원사진관에 돌을 던지며 정원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던 다림. 활자로 된 기록물과는 달리 영화는 그렇듯 띄엄띄엄, 대사도 없는 몇 장의 이미지들로 기억 속에 남곤 한다.

혼자 동네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정원은 곧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시한부 인생이다. 첫사랑을 떠나보낸 후 결혼도 하지 않고 삶의 많은 부분을 체념한 채 보내고 있는 정원의 일상은 그다지 새로울 일도 없고 즐거울 일도 없다. 그런 정원 앞에 어느 날 주차단속요원인 다림이 나타나고 두 사람은 점점 사진사와 손님이라는 밋밋한 관계를 벗어나 서로에게 친절을 넘어선 호감을 갖게 된다.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며 피곤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다림은 자신을 바라보며 사람 좋은 웃음을 한가득 웃어주고 어떤 말을 해도 담담히 받아주는 정원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정원 또한 솔직과 내숭의 경계를 넘나들며 종종 깜찍한 말을 건네오며 자신의 잔잔한 일상 속으로 파고드는 다림이 신선하고 사랑스럽다. 그러나 정원이 입원한 사이, 다림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게 되고 다림은 문이 열리지 않는 사진관을 바라보며 정원에 대한 호감이 그리움으로, 그리움이 원망으로, 원망이 다시 그리움으로 바뀌는 과정을 겪게 된다. 마지막 정리를 위해 사진관에 들른 정원은 다림의 편지를 보게 되고 다림이 새롭게 일하게 된 구역의 커피숍에서 다림을 바라보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으로서 이제 갓 피어오르듯 싱싱하고 건강한 그녀에게 다가갈 수는 없다. 계절은 바뀌어 겨울이 오고 다시 사진관을 찾은 다림, 사진관 진열대에서 자신의 사진을 발견하곤 정원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모른 채, 활짝 미소 짓는다.

처음에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제 우리나라에서 더 이상의 멜로 영화는 나오기 어렵지 않을까, 싶을만큼 좋았더랬다. 같은 감독의 작품이었지만 이후 <봄날은 간다>에서도 이만큼의 진한 여운을 느끼진 못했고 한창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외출>은 배용준과 손예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너무나 주관적이고도 편협한 이유로 영화를 보지 않았다. 기대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미 허진호 감독은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최고 정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제는 내려오는 것 뿐인가, 하는 주제넘은 생각까지 했더랬다. 그만큼 이 영화는 내게 최고였다. 세심하고도 강한 내면을 수수한 듯 편안한 웃음으로 감추고 있는 정원과 새카만 생머리를 쓸어올리며 귀엽고 새침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다림 또한 내가 만난 멜로의 주인공들 중에는 단연 최고였다. 정원이 한석규가 아닌 다른 남자배우였다면, 다림이 심은하가 아닌 다른 여배우였다면, 을 상상할 수 없을만큼 적재적소의 캐스팅이었다고 밖에는, 혹은 배우가 가진 이미지를 제대로 끌어내어 활용할 줄 아는 감독의 타고난 감각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길이 없다. 이제 심은하는 결혼과 동시에 배우 생활을 접었고 한석규는 근래 들어 새롭게 연기변신을 시도하고 있지만 앞으로의 향방과는 무관하게 그들의 가장 아름다웠던 청춘은 <8월의 크리스마스>, 이 영화 속에서가 아닌가 싶다. 

날씨 탓인지, 세월 탓인지는 몰라도 요즘은 '삼가는 사랑'에 대해서 이것이야말로 진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머릿수만큼이나 다양한 게 사랑의 정의이며 방식인데다 특정한 하나를 두고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일 또한 무용한 일이겠지만 역시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진짜야말로 진짜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예전에는 산을 끝까지 오르든, 바로 하산을 준비해야 하든, 나는 저 산을 좋아해, 라고 외쳐야만 다인 줄 알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으면 입 밖으로 사랑의 언어들이 폭발하기 시작했고 그 순간 자존심이라든가, 상대에 대한 배려 따윈 안중에 없었다. 가슴이 시켜서 그랬다, 는 말처럼 솔직한 듯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을까. 물론 그처럼 무모하고도 이기적인 과정을 겪어내며 엇비슷한 상처와 후회를 반복하고 나야만 비로서 성숙해지는 게 인간이라지만. 너를 정말 내것으로 만들고 싶다, 라는 불가능한 소유욕에서 파생하는 줄다리기가 아니라 너를 위한 끊임없는 배려로서의 조심성, 그것이야말로 진짜 사랑의 속성은 아닐까. 내가 완력과 재치로 사랑을 쟁취하고는 막상 스칼렛이 곁에 있어달라고 할 때 냉정하게 등을 보이는 레트 버틀러보다 스칼렛을 사랑했음에도 그 마음을 숨긴 채 끝까지 부인과의 의리를 지켜낸 에슐리 윌크스에게 찬사를 보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6-08-10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림이 정원의 사진관 유리창을 돌로 박살내는 장면이 생각나네요..^^
극중 인물들이 눈물 질질 짜고 슬퍼하는 것보다 더 절절한 이별이 아니였나
생각되어집니다..^^

깐따삐야 2006-08-10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허진호 감독은 절제의 미학에 능통하지요. 스스로 오버하지 않는 대신 관객으로 하여금 오버 해석을 이끌어내게 하는. 어서 이 영화처럼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서 보여주면 좋겠어요. ^^

비연 2006-08-11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환,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립니다.
우리나라 영화 중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 중 하나라는 생각.

깐따삐야 2006-08-11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반갑습니다. 참 좋은 영화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