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추울까봐 장갑까지 끼고 나섰는데 절기는 못 속인다더니 몰라보게 포근해졌다. 하기는, 계절이 무색하리만치 따듯한 겨울이었다. 어제 만났던 택시기사 아저씨는 겨울이 따듯하고 날이 좋으면 벌이는 시원찮다며 쓸쓸히 웃었다. 올 겨울엔 눈이 많이 안 와서 운전하시기는 덜 힘드시겠느니 어쩌느니 철딱서니 같은 소리를 내뱉은 다음이었다. 내 손에는 추어탕과 생선국수를 끓일 미꾸라지와 여름에 먹을 묵은지를 담글 배추들이 들려 있었다. 입으로 들입다 먹을 줄만 알았지 뱉어대는 말 하고는.
집 부근에 야트막한 산이 하나 있다. 그다지 높지 않으니 그냥 뒷산이라고 불러야 하나. 산은 산이고 등산로도 있으니 이름이 있긴 있을텐데 별로 신경쓰지 않고 습관적으로 오르기만 한다. 코끝이 시원해지면서 머리가 맑아지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 좋아서 한 시간 코스 정도 되는 그 길을 매일 오가고 있다. 시간을 정하지 않고 대중없이 오르는데 마주치는 연령층이 참 다양도 하다. 잘 깎은 지팡이를 쥔 채 찬찬히 숨을 고르는 노인, 배둘레햄을 염려하는 듯한 중년 부부, 날씬한 트레이닝복을 갖춰 입은 젊은 부부, 할아버지 손을 붙잡고 칭얼대며 한 걸음씩 떼고 있는 분홍색 꼬마... 오늘은 우연히 곁을 스치는 부자의 대화 한 토막을 듣게 되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아들의 자태가 그다지 신통해 보이진 않았더랬다.
"너는 그 동안 집안 사정을 잘 몰라서 돈 걱정 같은 건 안했지만... 이제는..."
호리호리한 아들에 비해 듬직하고 훤칠한 체격의 아버지였다. 뒷짐을 진 채 산을 내려오며 아버지는 차분차분 아들을 타이르고 있었다. 호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 아무 말이 없던 아들은 아버지를 어느 만큼 이해하고 있었을까. 아직은 굽어지지 않은 단단한 어깨를 가진 아버지가 돈 걱정은 말고... 라는 말 대신 위와 같은 말을 꺼내기가 사실은 훨씬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머잖아 이해하게 될지, 나중에 아버지가 되고나서야 뒤늦게 깨달을런지. 나도 가끔 아이들에게 백기를 들 때가 있다. 자존심이 상하고 미안한 마음이 앞서고 혹은 습관이 될까봐 몇 번을 그냥 삼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힘줄도, 핏줄도 사라진 인간의 얼굴을 홀딱 드러낼 때가 있다. 망연히 기대어 보는 측은지심.
데친 봄동을 된장에 버무려 끓인 추어탕은 먹어본 것들 중에 단연 으뜸이었다. 달착지근한 봄동 맛과 고소한 추어의 맛이 어우러져 묵은 씨래기를 넣고 끓인 추어탕보다 훨씬 더 깔끔하고 담백했다. 얕은 감기에 걸려 며칠을 기분이 애매했는데 이제야 똘망거리며 기운이 좀 나는 것 같다. 봄이 오면 한 번 쯤 심한 감기를 앓거나 우울증 비스무레한 것이라도 꼭 겪고 넘어가는 나는 미리 수양과 함께 보신도 겸해야 한다. 그래도 예년보다 따듯했기 때문인지 겨울에서 봄으로 열리는 이 시기가 전처럼 당황실색하진 않다. 겨울답지 않은 기후 때문에 벌이가 좋지 않았던 택시 기사 아저씨나 아버지의 타이름에 아마 잠시라도 가슴이 먹먹했을 그 아이를 떠올리면 입춘이 너무 이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짠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