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 - 1994 제18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임영태 지음 / 민음사 / 1994년 6월
절판


자신이 부족하다는 자각은 사고의 마비를 가져온다. 어떤 논리가 납득이 안 가거나 이해되지 않을 때, 그 논리의 모순이나 한계를 찾기보다는 자기가 부족하여 그러겠거니, 모든 걸 자신에게로만 화살을 돌린다. 반대로 자기 자신이 제법 독특한 논리나 의미심장한 사유를 전개할 때에는, 자신의 학습이 얕아서 그렇지 이쯤이야 높은 교과를 수료한 이들은 이미 아는 바이겠거니, 스스로의 사유와 논리에 금방 시들해진다. 주체적인 판단이 습관적으로 유보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그건 자격지심은 아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자기 비하감이나 과장된 피해 의식이 아니라, 자신의 배움이 부족하다는 걸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에서 오는 엉뚱한 굴레인 것이다. 물론 누구나 그렇지는 않다. 특별히 인문적 기질이 강하고 그러면서 자긍심 높은 사람들이 그런 허방다리에 빠지게 되는 것인데, 바로 우리가 그러했다.-33쪽

그 해 여름은 길고 지루했다. 어딘지 귀익은 표현이다. 그 해 겨울은 춥고 어두웠다는, 이런 식의 회상조 어투들. 그 속에는 확실히 축축하고 쓸쓸한 어떤 것이 있다. 어느 정도 감정의 부풀림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여하튼 버티어낸 자들만이 그런 말도 할 수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살아남은 자는 언제나 너무 할 말이 많은 것이다. 꾸역꾸역, 어쨌거나 살아냈으므로. -44쪽

지금에 와서야 우리는 그 이유를 안다. 어리석음이다. 연애란 마치 죽음과 같은 것이어서 경험해 보기 전에는 전혀 알 수가 없는 법이며, 알게 되는 경우란 이미 끝났을 때뿐인 것이다. 죽음과 다른 것이라면, 첫사랑은 그렇게 지나가지만 두번째 기회가 있다는 점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두번째 세번째 연애에서도 어리석음을 범하는지, 그건 첫번째 연애에서 충분히 상처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72쪽

무릎 한번 치고 대문 밖으로 나서니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경우도 있겠지만,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렬히 반성하고 나서도 세상은 여전히 아득할 수가 있다. 어뜩 자기 허물 하나를 집어올렸다지만, 세상이 달라져 보이지 않는데야 그건 멍에로나 남을 뿐이다. 결국 모두가 자기 한계 속에서만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라면 어쨌거나 그때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였다.-87쪽

한 가지 우리가 신선한 경험으로 받아들인 게 있다면 새 동거인이 보여준 인내와 끈기였다. 나중에 거듭 그 논쟁의 시간을 돌아볼수록, 우리의 반론을 받아내는 데에, 우리를 설득시키려는 진지한 노력에, 새 동거인이 보여준 인내와 끈기는 경탄할 만했다. 만약 우리 자신이 언젠가 새 동거인처럼 변모된다면, 그리하여 그 자리의 우리들처럼 완고히 도리질치는 상대를 향하여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면, 그때 새 동거인처럼 인내하고 절제하며 지침없이 자신의 신념을 피력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니 자신이 없었다. 사악한 적들에게 용기를 갖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무지 때문이건 편협 때문이건 나름대로의 소신으로 무장되어 질타해 들어오는 자들과 마주선다는 건 정말 피로한 일일 것이다. 뒤늦게 그러한 점에 생각이 미쳤을 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공연히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201쪽

차츰 세상이 유형지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누군가의 볼모였다. 우리는 무언가 자복해야만 하는 위치에 몰려 있었다. 죄목도 모른 채 어느 날 잠자리에서 체포되어 캄캄한 밀실에 던져진 카프카였다. 심판은 있는데 죄는 없다. 카프카는 죄를 찾아야 했다. 자기의 고통과 수모를 납득하기 위하여 카프카는 스스로 자기 죄를 찾아내어야 했다. 죽을 죄를 지었다고 자인하는 사형수만이 고통 없이 형장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평안해지기 위해 빨리 무언가를 자복해야 하는 것이었다. 분노나 오기 따위는 치워버려야 했다.
그것은 쉽게 되는 것 같았다. 우리의 분노와 오기는 엷어져 갔다. 그러나 내내 걷어버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어처구니없음. 무언가 어처구니없다는 그것. 기꺼이 자복할 마음이 돼 있었음에도 그 어처구니없음만은 끝내 치워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상처가 상처를 부화시켰다.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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